소설리스트

온실낙원 1권-0. Intro (1/8)

온실낙원 1권

0. Intro

발목을 묶고 있던 가죽끈이 드디어 잘렸다. 강진하는 무릎에 힘을 주고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웅크리고 있느라 등과 겨드랑이가 진땀으로 끈적끈적했다. 하지만 주저할 여유는 없었다.

머리부터 턱까지 깊숙이 눌러 씌운 천 때문에 앞이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방의 구조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중앙 오른쪽 대리석 테이블. 세탁한 지 한 달도 안 된 갈색 가죽 소파. 반대편 아래는 와인 잔과 상패를 넣어두는 찬장. 그 뒤로는 프란시스코 고야 모작이 걸려 있을 터였다.

방 안에 문은 세 개였다. 하나, 드레스 룸과 욕실로 이어지는 통로. 발로 디디면 차가운 대리석이 느껴진다. 둘, 지하 베란다실. 문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 데다 열쇠로 열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헷갈리지 않는다. 마지막, 복도로 이어지는 방문.

등 뒤로 묶인 손을 벽에 짚고 천천히 움직였다. 발에 정체 모를 장식품이 걸려 휘청거릴 때마다 괘종시계의 추처럼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피아노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라크리모사, 모차르트 장송곡.

음울한 죽음의 예찬가는 마치 저주를 퍼붓는 것만 같았다. 소용없어. 너는 여기서 천천히 죽어가는 거야. 깔깔거리며 웃는 환청이 귀에 가까이 속삭였다. 넌 죽었어. 아무도 네가 여기 있는 걸 모를걸.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강진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저런 미친 소리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문에 등을 기댄 채 문고리를 달칵달칵 급하게 돌렸다. 다행히 특별한 잠금장치가 없는 문은 쉽게 활짝 열렸다. 급하게 나서던 강진하의 걸음이 순간 꼬였다.

“아윽…!”

바닥에 고꾸라지면서 부딪친 턱과 무릎이 욱신거렸다. 접질린 건지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쓰라린 고통에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그러나 울 여유도 없었다. 지금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저 노래가 끝나기 전에 나가야만 했다.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오늘을 위해서 여태 얼마나 참았는지 모른다. 일주일? 열흘? 어쩌면 한 달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강진하는 성재현의 주의가 완만해지고 부드러워지기만을 기다렸다. 숨죽여 기다린 끝에 겨우 얻어낸, 무방비한 찰나였다.

발이 닿는 대로 비틀거리며 달렸다. 복도가 왜 이렇게 긴 건지 모르겠다. 끝도 없는 일직선 미로를 쉼 없이 달리는 듯했다. 부자유스러운 두 팔 때문에 중심을 잡기도 버겁다. 힘이 풀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철창처럼 미끈한 울타리가 몸에 닿았다.

계단 난간. 지상으로 이어진 탈출구는 여기 하나뿐이었다. 여기만 올라가면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거실에서 오른쪽으로 직진하면 부엌이 있다. 그곳에는 별별 공구가 다 있었다. 여차하면 식칼이라도 꺼내서, 팔에 묶인 가죽끈을 잘라내자. 그런 다음 이곳을 빠져나가는 거다. 현관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다음은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었다.

어디로든, 여기에서 달아날 수 있다.

이를 악문 강진하는 굼벵이처럼 엎드려 계단을 기어올랐다. 비틀린 손목이 시큰시큰했다. 가죽에 쓸려 피부가 벗겨진 게 틀림없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끝이 가까웠다. 고지가 눈앞이었다. 피아노 연주는 여전히 부드러운 선율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올라가면.

“여기서 뭐 해요?”

그 순간, 강진하는 고장 난 기계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나긋나긋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 등 뒤에서 들리는 게 아니다. 정면. 고개를 들면 시선이 닿을지도 모르는 높은 곳, 계단 바로 위.

“아악!”

발로 걷어차인 몸이 계단 아래로 추락했다. 데굴데굴 구른 몸은 바닥에 도착하고서야 간신히 멈췄다. 강진하는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머리가 울리고 먹은 것도 없는 빈속은 입덧이라도 하듯 메스꺼웠다.

또각또각, 계단을 우아한 걸음걸이로 내려온 남자가 어느새 강진하 앞에 섰다. 머리에 씌어있던 천이 벗겨진다. 순식간에 빛이 시야에 스며들었다.

“뭐 하냐고 물었잖아요.”

눈만 아래로 내린 남자가 물었다. 강진하는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키가 아주 컸고, 건장했다. 강진하가 똑바로 일어선다고 해도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빛을 등진 얼굴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늘진 얼굴조차 냉랭한 우아함을 자아냈다. 한때 강진하는 남자의 아름다움이 어린이 성경에 그려진 천사 같노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화, 화장실에….”

“화장실?”

“아, 아니요! 그냥 답답해서, 더워서.”

“더워서 산책 가고 싶었구나.”

되물을 때마다 목적지는 바뀌었고, 남자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상냥했다. 강진하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숨을 꿀꺽 삼켰다. ‘산책’은 저녁 중에 나갔었다. 목에 줄을 채우고 반경 1m도 되지 않는 간격을 유지하며 스프링클러가 도는 잔디밭을 지났다. 그때 쓸리고 젖은 무릎은 아직도 풀물이 지워지지 않았다. 산책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방 안의 습도와 온도가 항상 알맞게 유지되도록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그러니 덥다는 말은 어설픈 변명이었다. 정해진 대답만 유도하는 질문이었다. 늘 그런 식이었다. 선택권은 한 번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카펫을 짚은 손을 힘껏 쥐었다. 하지만 몸이 떨리는 게 멎질 않는다. 떨지 마, 떨지 말라고. 남자는 강진하가 두려워하는 걸 좋아했다. 희고 단정한 얼굴이 공포심으로 창백하게 질리는 걸 보며 희열하곤 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시선을 외면했다. 너무 그를 도발하지 않는 선에서, 명백한 거부이자 부정이었다. 반듯하게 서 있던 남자가 눈썹을 팔자로 모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비가 와서 못 나가요.”

“비…?”

우르릉, 천둥소리가 그제야 희미하게 저 위에서 들렸다. 하얗게 부서지는 빛의 파편에 남자가 번쩍 빛났다가 잔잔한 어둠으로 물든다. 비가 오는 줄도 몰랐다.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선 빗소리는커녕 피아노곡만 간신히 들렸다. 잠시만, 왜 피아노곡이 평소보다 희미하게나마 잘 들렸던 걸까. 방음 때문에 문이 닫혀있으면 결코 들리지 않았는데.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했어요. 아쉽지만 산책은 내일 저녁에 할까요?”

“아.”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요. 응?”

“…….”

“아니면, 계속 옆에 있어 달라고 보채는 건가?”

그런 의도가 아니란 건 남자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남자는 강진하의 행동을 얼마든지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포장했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쉬이 지나갈 일이지만 강진하는 차마 순종할 수 없었다. 보챈다는 그 말의 후환이 두려웠다. 속눈썹에 엉겨 붙은 눈물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남자가 몸을 숙여 강진하의 뺨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무척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눈길. 지금 같은 상황에 보일 수 없는 태도는 지극히 여유만만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구나.

어쩌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조차 일부러 의도했던 일이었을까. 도망갈 걸 눈치채고 느긋하게 지켜볼 생각으로. 아득바득 발버둥 치며 애쓰는 모습마저 저 남자에게는 고작 술래잡기 같은 놀이에 불과했다. 강진하는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웅크린 등을 펴고 남자를 똑바로 노려봤다.

“씨발, 놔, 놓으라고! 저리 꺼져!”

강진하는 고개를 도리질 치고 씩씩거리며 온몸으로 그를 거부했다. 고여있던 눈물이 줄줄 쏟아져 카펫에 방울방울 맺혔다. 눈이 부옇게 흐려졌지만 한 번도 깜빡거리지 않고 그대로 남자를 노려보기만 했다. 절박한 분노이자 거부였다. 마주 보던 남자가 눈썹을 모았다. 서운하고 야속하다는 얼굴에 강진하가 또 한 번 쏘아붙였다.

“넌 내가 지겹지도 않아? 질릴 만큼 섹스하고, 갖고 놀았으면 됐잖아. 이제 제발 좀… 버려.”

강진하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참아 눌렀다. 버려달라는 말이 우습다. 강진하는 차라리 그가 질릴 대로 질리길 바랐다. 그러면 적어도 두 발로 여기서 나갈 수 있을 터였다.

남자는 말이 없었다. 색이라고 할 수 없는 어둠이 두 눈에 드리웠다. 그는 버리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다. 반항하고 저항하는 건 귀여운 재롱으로 볼지라도, 버리라는 말은 함부로 자신이 꺼내선 안 된다.

“몇 번이고 내 좆에 박히면서, 좋아서 펑펑 울었던 게 누구였더라.”

“악!”

남자의 손에 머리채가 잡혔다. 질질 끌려가던 강진하는 그의 팔에 매달렸다. 머리 가죽이 뜯겨져 나갈 것만 같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어그러진 말실수였다. 아무리 그에게 화가 났어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아니다. 처음부터 이곳에 들어와선 안 됐다. 삼성동에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성재현을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원점으로 돌아왔다. 카펫에 우뚝 선 성재현이 그제야 손힘을 풀었다. 널브러진 강진하는 닫히는 문을 바라봤다. 간신히 만들었던 도주로가 차단되었다.

소매를 걷은 성재현이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 재롱만 부려도 아쉬울 판에, 계속 도망칠 생각만 하고.”

“커흑, 헉.”

성재현이 강진하의 목을 붙잡았다. 그대로 기도를 압박하는 손힘에 강진하는 파드득 떨었다. 억센 힘이었지만 숨통을 완전히 누르진 않는다. 그게 더 싫었다. 호흡마저 그의 손에서 조절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목이 졸릴 때마다 바짝바짝 달아오르는 아랫배의 열기도 끔찍하다.

차라리 목을 힘껏 눌러. 죽이란 말이야. 그러면 다 끝날 텐데. 그러나 강진하가 저항하지 않으면 성재현은 도리어 목을 조르지 않는다. 죽일 생각은 한 치도 없다는 듯 부드럽게 목 아래로 손바닥이 내려왔다.

“다리를 못 쓰게 하면 도망칠 생각을 안 하려나.”

종아리 아래를 붙잡은 그가 발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강진하는 눈을 크게 떴다. 몸을 일으키는 그를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자, 잘못, 했어요. 안 할게요. 안 그럴게요. 다신 안 그럴게요.”

다리가 부러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방 안에 얼마나 갇혀있어야 할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운이 나쁘면 영원히 걷지 못 할지도 모른다. 성재현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영원히 이곳에 갇혀 있는다.

그러고 싶진 않았다.

강진하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다 이내 서럽게 울었다. 내려다보는 두 눈이 형형하다. 야만하고 난폭했다. 그러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무척 다정하고 살갑고 우아한, 그림 같은 미소였다. 모순적이고 잔혹한 표정에 강진하는 그의 허리에 매달렸다. 그러나 성재현은 애걸복걸을 듣지도 않았다. 지하창고에서 돌아온 성재현이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야전삽이었다.

근육이 빠져 말랑말랑해진 종아리에 발을 올린 그가 약하게 자근자근 밟았다. 몰려오는 두려움에 속박된 것만 같았다. 강진하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지옥 같은 순간에서 달아나고자 아등바등 바닥을 기어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움직임이 멈췄다. 강진하의 발목을 죽 붙잡아 당긴 성재현이 느긋하게 몸 위에 올라탔다. 그가 손에 든 야전삽으로 발목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기. 오른쪽 발목만 부러트릴 거예요.”

성재현은 눈을 부드럽게 휘며 노래하듯이 말했다.

한동안 산책은 못 나가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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