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김현오, 스물네 살, 이상한 여름-2화 (4/13)

허전하기 그지없던 내 연락처에 김찬이라는 이름이 추가되었다. 답장을 따로 하지는 않았다.

나는 내 나름의 생활 원칙이 있었다. 오 년간 치밀하게 짜 온 것이다. 타인과 깊은 관계 맺기를 피하고, 동떨어져 살아왔다. 그래야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니까. 비교하지 않으면 내 불행이 큰지 작은지 알 수 없으니까.

원칙이 흔들릴까 봐 불안하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김찬이네 집에 가 보기 전에는 단칸방에서 탈출하여 고깃집에서 자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런데 갑자기 김찬이의 럭셔리 오피스텔이라는 새로운 선택지가 끼어든 거다. 우월한 비교 대상이 생기자 고깃집에 대한 만족감은 대폭 하락했다. 의자는 좁고 공기는 텁텁하다. 일어나면 어깨나 허리가 뻐근하지 않을까. 물론 내 단칸방보다야 낫지만, 김찬이네는 훨씬 시원하고 뽀송뽀송했는데…. 엄청 넓던데….

자연스레 생각의 말미가 모두 김찬이로 향한다. 좋지 않은 징조다.

나는 몸을 옆으로 돌리며 눈을 꾹 감았다. 동창이 아니었던 것처럼 괴상한 연극을 하며 한 달간 친구가 되어 보기로 했지만, 김찬이와 친밀해질 생각은 없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접점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그러면 괜찮겠지? 인스턴트 관계에 영영 머무를 작정이다. 이번에야말로 김찬이에게 약해지지 않겠다. 진심이다.

***

다음 날 아침. 예상대로 왼쪽 어깨가 결렸다. 낯선 자리에서 긴장한 채 잠든 탓이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현오야.”

“부르지 마.”

나는 있는 힘껏 툴툴대며 김찬이에게 답했다. 가게 마감 후 바닥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한참 동안 가게에 나오지 않던 김찬이가 복귀했다. 어제만 해도 죽으려 하더니. 금세 말짱해졌다. 일주일 가까이 앓았다면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사장님은 김찬이를 상당히 반겼다. 야채 죽 감사하다며 양손에 선물 꾸러미까지 들고 왔으니. 나라도 예뻐할 것이다. 우선 김찬이는 생김새부터가 상당히 호감형이다. 김찬이와 말 한마디 섞어 본 적 없는 윤아까지 그를 반가워했다. 역시. 김찬이에게는 사람을 홀리게 하는 뭔가가 있다니까. 초능력 같은 거.

단골손님에서 사장님의 아끼는 지인으로 승격한 김찬이는 가게 한구석에서 내내 죽치고 있었다.

“너 안 가냐? 영업 끝났어.”

“너랑 얘기 좀 하려구.”

“싫은데.”

“응. 그럼 어쩔 수 없구.”

김찬이가 입을 다물고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저러니까 더 기분이 이상했다. 대걸레질에 더욱 힘을 실었다. 빡빡 바닥을 문지를 때 사장님이 주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현오야. 너 어깨 결린 건 좀 어때. 파스 하나 더 줘?”

가만히 있던 김찬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걱정 가득한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아, 괜찮아요.”

거짓말했다.

“오늘도 가게에서 잘 수 있겠어? 의자가 좁지?”

가게 의자는 내가 누우면 가로 폭이 조금 부족하다. 몸을 움츠리고 잘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네. 조금. 이불 가져와서 자도 돼요?”

“상관은 없는데. 아까 들어 보니까 찬이 집에 방이 남는다며. 거기서 지내지?”

나는 곁눈질로 김찬이를 노려보았다. 그건 또 언제 얘기한 거지. 김찬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얼굴로 웃었다.

“아뇨. 가게에서 지낼래요.”

내가 딱 잘라 말했다. 그때 김찬이가 대화에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오늘만 우리 집에서 지내.”

“싫어. 내가 왜?”

“어깨 아프다며. 우리 집이 더 편할 거야.”

사장님도 냉큼 김찬이에게 맞장구를 치셨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이런 친구가 세상에 어디 있어. 현오는 좋겠네.”

“아니. 사장님까지 왜 이러세요.”

내 얼굴은 급격하게 구겨졌다.

“어깨가 빨리 나아야 일도 더 잘하지!”

환장할 노릇이다. 사장님은 비겁하셨다. 일을 이유로 드시다니. 이러면 내가 거절하기가 어려워진단 말이다. 김찬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초롱초롱하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김찬이와의 접점을 최소화하려던 나의 계획은 난관에 봉착했다. 결국 나는 으름장을 놓듯이 김찬이에게 말했다.

“…오늘만. 진짜 오늘만이다.”

“응.”

김찬이가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주변에서 하얀 플래시가 팡팡 터지는 것만 같았다. 눈이 부시다.

“현오야. 청소 다 할 때까지 기다릴게.”

김찬이는 신이 나서 방긋거렸고, 내 얼굴 근육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마감 정리를 다 하고서 가게를 나섰다. 무려 김찬이와 함께. 오피스텔까지는 십오 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나는 경계하듯이 김찬이의 한 발자국 뒤에서 걸었다.

김찬이는 굳이 내 옆으로 오려 하지 않았다. 느리게 걸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걸 뿐이었다. 나는 김찬이의 동그란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덥다. 아이스크림 사서 갈래?”

“그러든가.”

“오피스텔 1층에 편의점 있어. 거기서 사 가자.”

“네 맘대로 해.”

“보통 몇 시에 자?”

“알아서 뭐 하게.”

나는 과할 정도로 툴툴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짜증 날 법도 할 텐데 김찬이는 여전히 밝은 기색이었다.

“현오 네가 침대에서 자.”

“내가 왜 네 침대에서 자냐? 싫어.”

“어깨 아프다며. 아, 우리 집에 찜질 팩 있어. 그걸로 근육 풀자.”

“그건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소파에서 잘 거거든.”

“소파는 절대 안 돼. 네가 손님이잖아. 음. 작은방에 이불 깔아 줄 테니 거기서 잘래? 그건 괜찮겠어?”

“…그래.”

“좋아. 그리고 몇 시쯤 자고 일어나는지 알려 주면 안 될까? 부탁이야.”

“…아침에 자서 점심 넘어서 깨.”

“그렇구나. 내가 더 일찍 일어나겠네.”

“뭐… 너 내일 어디 나가야 하는 거야? 그럼 일찍 깨워.”

“아냐. 신경 쓰지 마. 나갈 일 없어.”

김찬이의 말투는 절대로 거칠어지는 법이 없었다. 내가 뭐라 하든 한결같이 나긋하고 부드러웠다. 듣다 보면 점차 혼자 열 내는 내가 우스워졌다. 대화가 오갈수록 김찬이의 부드러움이 옮았다. 나도 모르게 말투가 물러지고 있었다. 굳어 있던 얼굴에서 스르륵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정신 차려. 번뜩 위기감이 들었다. 편의점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때까지, 나는 의식적으로 말을 줄였다. 김찬이가 나를 돌아보며 아이스크림 통을 흔들었다.

“현오도 이거 좋아하는구나. 나도 좋아하는데.”

왠지 인정하기 싫어서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먹고 싶어도 자주 못 사 먹는다. 그 돈으로 생필품을 사지. 월급에서 월세랑 관리비 내고, 영진이한테 몇십만 원 보내면 남는 건 삼사십만 원 안팎이다. 단칸방에서 탈출하려면 그걸 또 쪼개어 저축도 해야 한다.

당연히 한 달 생활비로는 빠듯하다. 좋아하지만 없어져도 죽지는 않을 것들을 내 인생에서 하나둘씩 내쳤다. 예전에는 당연히 내 일상에 존재했던 것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서점에서 책을 사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내 단칸방에는 책장이 없다. 가난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얄팍하게 만든다.

엘리베이터 벽에 어렴풋이 비치는 김찬이의 형상을 바라보았다. 이제 김찬이는 나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오 년 동안 서로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갔던 모양이다.

“들어와.”

김찬이가 오피스텔 현관 앞에서 나에게 손짓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김찬이의 얼굴에 맑은 미소가 번졌다.

집은 어제 왔을 때보다 훨씬 정돈된 모습이었다.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아 아이스크림 통을 개봉했다. 나는 스푼을 오른손에 들었다.

“김찬이. 근데 너 배 아픈 건 어쩌고. 이거 먹어도 돼?”

“거의 나았어.”

“어제는 꾀병이었냐? 죽으려고 하던데.”

“꾀병은 아니구. 원래 내가 엄청 앓다가도 금방 나아.”

나는 의심스럽게 김찬이를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아이스크림이 반 정도 남았을 때 나는 이상한 걸 느꼈다. 나 혼자 먹고 있는 것 같았다. 김찬이는 한두 스푼 먹었나?

“너 왜 안 먹어?”

“먹고 있어.”

“쥐똥만큼 먹잖아. 배 계속 아파?”

“아니.”

김찬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원래 먹는 속도가 느려서 그래. 나 신경 쓰지 말고 먹어.”

“그럼 내가 다 먹게 되잖아.”

“다 먹어도 돼.”

“그건 싫어. 이거 네가 샀잖아. 근데 왜 나만 먹어?”

“현오는 남한테 빚지는 걸 진짜 싫어하네.”

“사돈 남 말 하네.”

하하. 김찬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맑고 경쾌한 소리였다.

“그냥 다이어트 하다 보니까 느리게 먹는 게 습관 돼서 그래. 진짜 신경 쓰지 마.”

“근데 왜 아직도 살을 빼?”

김찬이가 또 한 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기 그지없는 표정이었으나, 눈가 근처가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얜 곤란하면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음. 정확히 말하면 살을… 빼고 있는 건 아니고. 지금은 유지하면서 근육을 늘리는 중인 거지.”

“그럼 매일 근육 운동해?”

김찬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나네.”

“하다 보면 재미있어.”

“세상에 다른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웨이트를 재미있다고 하냐.”

“운동할 때는 힘든데, 하고 나면 성취감이 들거든.”

“야. 그러면 너 막 배에 그런 것도 있어?”

나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다 말고 손으로 ‘임금 왕王’을 그렸다.

“글쎄. 누구한테 보여 줄 정도는 아니라서.”

“그럼 있긴 있다는 거네.”

“운동 시작한 지 오래됐으니까.”

“언제부터 운동했는데? 너 고등학교 때는….”

나는 말하다 말고 입을 꽉 다물었다. 아, 실수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손으로 입술을 살짝 때렸다. 너 때문에 과거를 떠올리기 싫다며 난리를 쳐 놓고 내가 먼저 그 화제를 꺼내 버렸다. 무심코 한 짓이었다.

“현오야.”

나는 느리게 다시 얼굴을 들어 김찬이를 바라보았다. 김찬이는 아주 태연한 표정이었다. 아무런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이.

“갈아입을 옷 있어?”

그러고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 아니. 가게에서 잤다가 점심에 집 가서 갈아입으려고 했지.”

“그럼 오늘도 내 옷 빌려줄게.”

“팬티는 어떡하지.”

“아까 아이스크림 사면서 하나 샀어. 왠지 안 가져왔을 것 같아서.”

우리는 다시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이스크림을 계속 퍼먹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평온한 한때였다. 하지만 나는 긴장을 놓지 못했다. 어느 정도 경계심을 갖는 게 좋을 것이다. 방심하다가 방금도 실수했다. 게다가 김찬이는 나를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너무 풀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바짝 정신 차리고 있자. 제발.

김찬이가 말했다.

“다 먹었네. 현오 네가 먼저 씻어.”

“너는?”

“나 어차피 운동 조금 하다가 잘 거라서.”

“오늘은 운동 안 했어?”

“아니. 오전에 하긴 했는데.”

“그런데 운동을 또 해?”

“아까 밥 먹었으니까 해야지.”

“오늘은 별로 먹지도 않았잖아.”

김찬이는 평소에 고기를 2인분씩 시켰지만, 오늘은 달랐다. 사장님과 둘이서 뭔가 쑥덕대더니 냉면 한 그릇만 먹고 말았다. 요즘 들어 알게 된 김찬이의 식습관으로 볼 때, 고기 2인분씩 시켰던 건 굉장히 무리한 주문이었다. 1인분으로 마감 때까지 자리 차지하기엔 민망해서 그랬나 보다.

“그래도 운동 쉬면 금방 퍼져서 안 돼.”

“독하다, 독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느릿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데 여전히 김찬이가 거실에서 복근 운동 중이었다.

나는 괜히 내 배를 손으로 더듬거려 보았다. 예전에는 배가 나름대로 탄탄했다. 애들이랑 축구나 농구 하는 걸 좋아했다. 언제부터 운동이 싫어졌더라. 지금은 근육이 싹 빠졌다. 마르기만 할 뿐, 피부에 탄력이 없었다.

“아, 현오야. 다 씻었어?”

운동에 열중하던 김찬이가 뒤늦게 나를 발견했다. 후우. 깊게 심호흡하며 김찬이가 매트에서 일어났다.

“작은방에 이불 깔아 놨어. 근데 아직 잘 때 아니랬지? TV 볼래? 아니면 노트북 빌려줄까?”

“됐어. 누워서 폰이나 하지, 뭐. 와이파이 비번이나 알려 줘.”

“알겠어.”

“넌 언제 자는데.”

“나 운동 조금만 더 하다가 씻고 바로 자려구.”

“더 한다고? 미쳤네….”

내가 경악하자 김찬이가 웃으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샌님처럼 생겨서는 운동에 미친놈이었다니. 두툼한 체격이 아니라 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온몸이 근육으로 짜여 있는 듯했다.

김찬이는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려 주려 내 쪽으로 붙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김찬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발자국 물러났다.

“미안. 땀 냄새 나지.”

“아니, 안 나는데.”

“안 날 리가.”

진심이었다. 김찬이에게서 불쾌한 냄새는 맡아 본 적이 없었다. 김찬이는 멀찍이 떨어져서 나에게 비밀번호를 알려 주고는 다시 매트로 돌아갔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게 끝인가? 이대로 그냥 방에 들어가면 되나?

“…그럼 운동 잘 해라.”

“응. 현오야, 잘 자. 더우니까 방문 열어 놓고. 그래야 에어컨 바람이 닿을 거야.”

“어.”

나는 후다닥 방에 들어갔다. 서재로 사용되는 곳인 듯했다. 한가운데에 펼쳐 놓은 이불에 앉아서 멍하니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긴장한 게 무색할 정도로 뭐가 없었다. 대화도 담백했고, 김찬이의 행동 또한 그랬다. 정말 평범한 친구 사이 같았다.

머리가 어느 정도 말랐을 때 나는 이불 위에 누웠다. 등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꺼내 보니 찜질 팩이었다. 김찬이가 가져다 놓은 모양이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가 찜질 팩 전원을 켜고 어깨에 가져다 댔다. 뭉쳐 있던 근육이 점차 부드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열어 놓은 방문 너머로는 별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탁, 냉장고 문 여는 소리. 물 따르는 소리. 물 마시고 컵을 내려놓는 소리.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이 정도가 끝이었다. 잠시 후, 거실의 불이 꺼졌다. 김찬이도 자러 들어간 모양이다. 나는 이불 속에서 귀를 쫑긋 세웠다. 혹시나 김찬이가 말을 걸까, 이 방으로 오는 건 아닐까, 했지만. 그런 사건은 없었다.

***

다음 날, 정오가 한참 지나고 나서 눈을 떴다. 몸이 아주 개운했다. 밤새 덥지도 않았고 이불은 푹신했다.

남의 집에서 이렇게 편하게 잘 수 있다니.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몇 번 쓸어내렸다. 지난밤은 지나치게 쾌적했다. 그래서 좋지 않았다. 당장 내일부터 가게에서 어떻게 자나 걱정이었다. 가게에서 자면… 짜증 나겠지. 이래서 내 주제를 넘어서는 행복은 맛볼 필요가 없다. 어차피 다 불행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불을 개고 방 밖으로 나오자 된장찌개 냄새가 났다. 부엌에서 김찬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오야. 일어났어?”

“어. 밥해?”

“점심 먹을 때야. 이리 와서 앉아.”

열심히 요리하는 김찬이의 뒷모습은 아주 멀끔했다.

“잠깐 좀 씻고….”

나는 왠지 민망해져서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보니 역시나 가관이었다. 머리는 까치집이고 눈곱도 잔뜩 꼈다. 세수한 다음 대충 손에 물을 묻혀 머리를 매만지고 나왔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유 없이 초조해져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김찬이가 슬쩍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편하게 잤어?”

“어. 편하더라.”

“몇 시에 나가야 해?”

“바로 가야지. 집 들렀다가 옷도 갈아입고. 알바 시간 얼마 안 남았어.”

“그러네.”

곧 김찬이가 반찬과 찌개를 식탁에 늘어놓았다. 나는 어색하게 김찬이를 바라보았다. 김찬이의 앞에는 밥 대신 닭 가슴살 샐러드가 가득 놓여 있었다.

“너는 밥 안 먹냐.”

“응.”

“왜.”

“이따가 가게 가서 먹을 거야. 아무래도 가게에선 많이 먹게 되니까.”

“그럼 된장찌개는 왜 했어.”

“현오 너 먹으라고 했지.”

김찬이가 채소를 입에 넣어 우물우물 씹으며 대답했다. 김찬이의 하얀 볼이 잔뜩 부풀어 있다. 나는 헛기침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뭐 이런 걸 다.”

고맙다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쉬이 나오지 않았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다. 간을 한다고 해 봤는데.”

된장찌개는 맛있었다. 내 입맛에 딱 맞게 짜고 칼칼했다. 김찬이는 절대로 안 먹을 만한 음식이다. 오로지 나를 위한 음식인 셈이다. 나는 평소보다 더 빠르게 퍼먹었다. 김찬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현오야.”

“왜.”

“근데 나 내일부터 가게에 거의 못 가.”

“애초에 오라고 한 적도 없었거든?”

“으응. 그건 그러네.”

김찬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왜 못 오는 건데.”

“교수님 연구 도와드리기로 했거든.”

“그런 건 대학원생이 하는 거 아니냐?”

“일손이 부족해서.”

“그러냐.”

대화가 잠시 끊겼다. 김찬이는 생채소를 우물우물 잘도 씹어 먹었다. 나는 채소가 싫다. 구우면 좀 입에 댈까. 생은 도저히 싫었다. 쟤가 마시고 있는 다홍빛 주스는 뭐지. 당근과 토마토 등을 함께 갈아 넣은 색깔이었다. 저런 걸 어떻게 먹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김찬이가 구워 준 소시지를 입에 넣었다.

“현오야. 그래서 말인데.”

“뭐.”

“가끔 연락해도 돼?”

“뭐 하러.”

“가게에 안 가면 이제 자주 못 보잖아.”

“난 너 별로 자주 보고 싶은 마음 없는데.”

“…….”

“연락하든 말든 마음대로 해. 근데 답장을 하든 말든 그것도 내 마음이야.”

“응, 알겠어.”

김찬이는 만족한 듯 웃었다. 도대체 뭐에 만족한 건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밥그릇을 다 비웠을 즈음, 김찬이가 또 말을 걸었다.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 여름에는 아예 여기서 지내도 되고.”

“그럴 일 없거든.”

“혹시 불편했어?”

나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너무 편해서 탈이었지. 마음만 같아서는 눈 딱 감고 김찬이의 제안대로 여름 동안 여기서 지내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김찬이의 어깨가 움찔했다.

“편했어.”

김찬이가 내 대답을 듣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다.”

“근데 자주 오다 보면 불편해질 수도 있지.”

“아냐. 괜찮을 거야. 불편해지면 그때부터 안 오면 되지. 한 일주일 정도만 지내 봐.”

“야. 싫다고.”

“아니면 한 이틀만 지내 보고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

노련한 방문 판매 사원 같은 솜씨다. ‘아니, 우선 한번 해 보시고 결정하시라니까요. 며칠만 테스트해 봐, 며칠만. 싫으면 딱 환불해 드릴게.’ 이런 거랑 뭐가 다른가. 나는 눈을 애써 부릅뜨고 말했다.

“김찬이. 너 나 설득하려고 하지 마. 집 계속 비워 두면 곰팡이 나서 안 돼.”

“우리 집에 남는 제습기 있어. 난 여름에 에어컨 계속 트니까 필요가 없거든. 빌려줄까?”

제습기까지? 마음이 흔들린다. 김찬이도 내가 망설인다는 걸 눈치챘을 터였다.

“어차피 이제 별로 마주칠 일도 없어. 나 오전 일찍 일어나서 바로 학교 가야 하거든.”

“그러면 정말 방만 빌려주겠다고?”

“응.”

“왜?”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잖아.”

“그렇다고 공짜로….”

“공짜가 아니지. 내가 현오한테 빚을 갚는 중인 거야.”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솔직히 나한테는 조금도 해가 없는 거래였다. 거절할 이유도 마땅치 않았다. 생활 패턴이 완전히 어긋나니까 서로 얼굴 볼 시간도 거의 없을 테다.

“지내보고 불편하면 나가도 된다니까.”

김찬이가 부드럽게 소곤거린다. 나는 고개를 홱 쳐들어 김찬이를 바라보았다.

“아, 너 진짜.”

김찬이가 눈을 크게 떴다.

“응?”

“…알았어. 며칠만 있어 볼게.”

“와. 고마워.”

김찬이가 방긋 웃으며 기뻐했다. 눈과 입술이 다정한 호선을 그렸다. 불안하다가도 김찬이의 얼굴을 보자 에라 모르겠다 싶어졌다. 뭐, 별일 있겠어.

“고마워, 현오야.”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김찬이가 거듭 감사 인사를 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도대체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빚이라니…. 그다지 대단한 것도 아닌데 김찬이가 호들갑 떠는 거겠지. 김찬이와 엮인 그때가 궁금하면서도, 구태여 파헤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언제나처럼 과거에서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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