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sian roulette Ⅱ
대니얼은 대관절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을... 여태 모르셨어요?”
“…네.”
“그걸 왜..., 아. 하긴.”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마구 쏟아내려던 대니얼은, 뒤늦게야 퍼뜩 떠오른 것이 있는지 자기 혼자만 납득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셨다고 한들 소용이 없긴 했겠군요.”
“왜요?”
“한 변호사님은 인간이니까요. 야수들처럼 냅다 피를 쏟았다가는 큰일이 날 테니, 딱히 소용이 없는 방법이죠. 모르셨던 것도 당연합니다. 가뜩이나 답답하셨을 텐데,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잠깐만요. 지금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요람’은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네? 아아, 그렇죠.”
“그런데 부체든 모체든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서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그러니까... ‘요람’은 성체의 야수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필요한 장치입니다. 이건 아시겠죠?”
“네.”
“노아는 ‘요람’ 안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어요. 그리고 이 ‘요람’을 만드는 건 ‘비스트’만이 가능한 일이고요.”
피로 빚은 보석으로 튼튼한 그릇을 만들면, 그 생명력이 끊기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운을 불어 넣어야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자면 이론상으로는 인간인 자신이 ‘요람’을 만들순 없어도 ‘요람’ 속에 있는 노아에게 생명력을 나누어 줄 수는 있다는 결론까지는 도출하지 못했다.
“인간은 한계가 명백하니, 애초에 대표님이든 누구든 한 변호사님께는 부탁할 생각도 안 했을 겁니다. 아, 한 변호사님을 낮춰서 말하는 게 아니고...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
“으음. 만약 지금 노아가 야수의 ‘요람’ 안에 있는 신세가 아니었다면... 제가 제 피를 나눠 주는 것도 가능했겠네요?”
“아마도요. 그렇지만 딱히 권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죠. 변수가 워낙 많으니까요.”
차민은 생각에 잠겨 혀로 볼 안을 쓸다가 이내 허무한 웃음을 터트렸다. 변수가 많은 인간…. 참 지겹게도 따라붙는 꼬리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터에게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매달리기 전에 노아에게 제 핏방울이라도 흘려볼 걸 그랬다. 어차피 루카스가 대니얼을 비롯한 사람들을 잔뜩 붙여두었다고 했으니, 혹시 제가 과다 출혈로 죽었더라도 무사히 노아를 발견했을 것이다. 이렇게 묵은 오해가 쌓이기 전이라면 조금은 너그러이 혼자가 된 아이를 품어줬을지도 모를 일이고….
“뭐, 상황이 복잡하기는 하죠. 그렇지만 대표님이 괜히 우드가의 수장이 아니라서요. 잘 해결될 겁니다.”
차민은 무어라 바쁘게 늘어놓기 시작한 대니얼에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바닥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한 변호사님은 시도해보셔도 소용없을 겁니다.”
“뭐를요?”
“대표님 대신 노아에게 기운 나눠 주는 거요.”
“누, 누가 뭐래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괜히 뜨끔해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반쯤은 장난기를 머금은 채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니얼은 매우 진중한 얼굴로 차민을 응시해왔다.
“한 변호사님의 모든 생명력을 탈탈 털어 넣어도 노아에게는 기별도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재수 없으면 한 변호사님만 죽어 나가고 끝날 수 있어요.”
“저는….”
“한 변호사님이 안 계시게 되면, 대표님이 노아에게 과연 신경을 쓰실까요? 이제 겨우 ‘요람’에 든 힘도 없는 어린 야수, 빨리 신경 끄고 처분하는 게 이득일 거라 여기실 게 뻔합니다.”
차민은 그제야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허튼 생각은 마세요.”
하긴. 노아만 홀로 남게 된다면.... 애물단지라며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긴 하겠다. 그래도 제가 사라지고 나면 원하지도 않던 ‘반려’의 구속을 벗게 되어 홀가분해할 수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저와 자동으로 연결이 되는 감각을 끔찍하게 여기는 것 같았으니.
“…대니얼, 궁금한 게 있는데.”
“네.”
“혹시 나에게서 느껴져요? 루카스의 흔적이?”
“어어, 으음….”
대니얼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린우드 다니던 시절에는 그 흔적이라는 게 굉장히 희미하다고 했거든요. 오히려 날이 갈수록 식별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고도 했고.”
“흐흠, 죄송합니다. 음, 그건 제 생각이지만 카터가 손을 써서 그랬던 것 아닐까요.”
여기서 그 이름이 또 왜 나와? 뚱하게 묻고 싶었지만 굳게 닫힌 입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저주.
“어디까지 어떻게 설명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카터는 노아가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 변호사님의 아버님과 짜고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약을 몰래 만들었다고 했죠. 실제로 카터의 피를 검사를 했을 때도 모두가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만들어내기까지 했어요. 그런 것까지 가능했던 놈인데, 한 변호사님께 흔적이 옅어지도록 손을 쓰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아버님을 통해 인체엔 무해한 약을 공급했다거나.”
목석처럼 굳어버린 차민을 보고서 맹약의 여파임을 깨달은 대니얼이 딱히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진짜 목적이 뭐였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대표님께 혼란을 주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인간이야 당연히 ‘반려’의 흔적에 대해 알 수 없을 테고. 그 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비스트들뿐이잖아요. 자기 ‘반려’를 인지하지 못한 ‘비스트’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지는지... 한 변호사님은 모르실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비 없는 권속 혹은 소멸이 내정된 카터는, 루카스의 불행을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들었다.
“그렇다면 생각보다 훨씬 이전부터 여러 가지 방법을 준비해왔을지도 모를 일이죠.”
저에게만 짙게 머무르지 않는 흔적이..., 루카스가 자신을 ‘반려’라고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는 건가.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면....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꼬이기 시작했던 걸까. 루카스와, 저의 관계는.
“그리고 제가 그 당시 그린우드에 다니지를 않아 뭐라고 정확히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만….”
대니얼이 민망하다는 듯 코를 훔치며 고개를 떨구었다. 어쩐지 차민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지금 한 변호사님에게서 느껴지는 대표님의 흔적은... 쎄요, 저니까 멀쩡하게 버티고 서 있는 거지... 솔직히 무시무시할 정도입니다.”
*
최근 의뢰인의 뒷배를 믿고 근태가 심히 불량했던 탓에 일감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짐을 싸들고 퇴근을 하긴 했는데... 거실에 둥실둥실 떠 있는 ‘요람’ 속 노아를 보면서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색색으로 변하는 보석이 신기해서 한참 동안 눈으로 그 결을 그려보다가, 얼른 읽고 맞는 법안을 찾아야 한다는 초조함에 빠르게 도리질을 치고 자세를 다잡아보고.... 그렇게 차민은 랩탑과 ‘요람’을 번갈아 가며 들여다보다 꾸벅꾸벅 졸아버렸다.
그러다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쌓여 있던 쇼핑백들이 전부 깔끔하게 치워진 거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꿈인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멀끔해진 거실을 바라보던 차민은 이내 까무룩 다시 잠이 들어버렸고..., 한참 후 다시 눈을 떴을 땐 저를 등지고 선 루카스의 모습이 보였다. 꿈인 줄 알았는데 거실은 확실히 깨끗해져 있었다. 사람을 쓴 것인지, ‘비스트’를 동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어나도 될까. 계속 자는 척을 할까. 망설이던 차민은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지금 ‘비스트’의 기운을 불어 넣는 중인 것 같은데, 노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그리고…, 루카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계속 이렇게... 해주면 알아서 정리될 거라며.”
“…그래.”
루카스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차민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였다. 일어난 것을 눈치채고 있었는지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냈는데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에게는 도끼눈을 뜨고서 절대 사과할 일이 없을 거라고 했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연습 중이긴 했다. 그때야 비틀린 마음에 울컥 화가 나고, 억울하기도 해서 일부러 루카스의 속이 뒤틀릴 말만 골라서 하기는 했지만. 부모님의 일도 그렇고, 그간 몰랐던 일들로 그를 미워하고 매도했던 부분만큼은 확실히 사과를 하고 싶었다.
물론 루카스 또한 조금도 제 상황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그래서 여전히 자신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누구의 마음이 더 크게 다쳤는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싶었다. 이건 소송도 아니고 재판도 아니었다. 몇 번을 터놓고 말을 나눈들 둘 다 이해하고 만족할 수 있는 결론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뭉뚱그려 미안하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그 뒤의 이야기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는 것을 보니, 맹약의 범위에 걸치지 않는 확실한 전체를 달았을 때 좀 더 수월하게 말을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노아 때문에 당분간은 싫어도 계속 마주치게 될 테니, 언제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멀뚱멀뚱 몇 걸음 물러서 있던 자신을 향해, 별안간 루카스가 무언가를 휙 내던졌다.
“먹어. 내가 억지로 붙들고 목구멍으로 쑤셔 넣는 게 싫다면.”
“...이게 뭔데?”
“이미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었나? 너에게서 아이를 더 봐야 한다고.”
“뭐? 그럴 필요 없다고 했잖아.”
“노아의 일로는 그렇지.”
루카스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아름답고, 또 불길한.
“나는 수장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내 권속은 많을수록 좋아. 아이만큼 강력한 지지 기반도 없겠지.”
“루카스.”
“죽기 전까지는 싫어도 네가 내 ‘반려’인데. 그러면 최소한의 의무는 다해줘야지. 안 그래?”
대신 빚을 갚겠다며. 비틀린 입술이 잔인한 말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차민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될까 싶은 작고 투명한 병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쉬운 일은 아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인간이 ‘비스트’의 아이를 갖는다는 게.”
“맞아.”
“그럼 이건 뭔데?”
“확실하지 않은 추측.”
원래 맹독은 색도 없고 향도 없다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수상한 약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단히 밀봉된 병 속 액체는 물이라도 담은 것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네 아버지가 제출했던 연구기록과 진술서를 토대로 만들어본 실험작이지.”
그래서 확신은 할 수 없어, 하며 루카스가 덤덤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차민은 제가 노아를 가졌을 때를 떠올려보았다. 순수한 인간과는 확실히 달라서 배 속에 품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어영부영 홍콩으로 건너가 수술을 통해 노아를 낳았다. 아니, 낳았다고 할 수 있나? 배를 가르고 끄집어냈으니까.
사실 차민은 당시의 기억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울고, 토하고, 기절했다가 다시 울고, 그러다 얕은 잠이 드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이젠 수술을 하지 않으면 둘 다 위험하다기에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타닥이는 수상한 향초의 심지를 바라보다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니 이미 몇 주가 지나 있었다. 거의 닳아 없어질 것처럼 마른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고... 옆에 놓인 조그만 침대가 보였다. 노아는-당시엔 이름이 없었지만- 투명한 알 같은 것에 둘러싸여 있다가 어제 처음으로 눈을 떴다고 했다.
카터가 소개해준 의사는 용과 뱀파이어의 혼혈이라고 했다. 그는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노아가 깨고 나온 알의 파편을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딱 봐도 어려운 사정에 처한 것 같으니, 다른 대가는 필요 없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 알의 껍데기가 ‘비스트’의 세상에서 제법 값어치가 될 수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그때야 깨달았다. 하긴, 인간과의 혼혈인 아이의 부산물이니 희귀하기도 할 것이고 어쨌든 루카스의 피가 흐르는 야수였으니.
선심을 쓰는 척 보물을 날로 먹으려 드는 의사의 속내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으나, 차민은 ‘비스트’와 관련된 것에 조금도 미련이 없었으므로 마음대로 하라며 지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안아보지 그래? 내가 이런저런 일 제법 많이 겪어 봤는데도 그중에서도 이 애는 제법 특별한 편이야. 생긴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분위기 안 좋은 걸 아는지 이렇게 얌전하게 굴 수가 없어.’
차민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싸구려 원목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밑에 깐 담요인지 시트인지는 새것 같았지만, 아기용 침대의 난간은 낡고 닳아서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제가 깨어난 것을 알았는지, 아기 침대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금은 피곤해서... 조금 더 자고 싶어요.’
기대에 찬 그 작은 움직임이 덜컥 겁이 나서, 차민은 반대로 등을 돌린 채 다시 잠이 든 척 해버렸다. 신이 나서 파닥거리던 아주 조그만 몸짓은 저의 우울한 기색을 읽었는지 금세 뚝 멈춰버렸다.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배를 내리친 적도 있었고, 어떤 날은 또 짠하고 미안해서 눈물만 떨구던 때도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상태가 바뀌었지만 그중 이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마음껏 아이를 사랑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자취를 감춘 루카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우드가에서 가장 뛰어난 재목이라고 했으니, 억지 밀약에 봉인된 제 숨은 이야기도 단박에 눈치채주리라 믿었다. 그렇지만 그가 긴 여행을 마치고 본가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왔음에도, 여전히 저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닿지 않았다.
“종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야수들은 대체로 아이를 낳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데... 인간과의 아이는 어떨지 모르겠네.”
그리고 둘을 둘러싼 해묵은 이야기들이 거의 파헤쳐진 지금도, 상황은 딱히 달라지지 않아서.
“...인간과의 혼혈은 약해서 쓸모가 없다며.”
“그렇다고 한들 일을 할 곳이 없는 건 아니니까. 이번에 플린 쪽을 싹 다 밀어내고 나면 공석이 많이 생길 테니... 하다못해 중간책으로라도 써먹을 수 있겠지.”
루카스의 손에서 눈이 멀 것 같은 빛줄기가 터져 나오더니, 이내 잠잠하게 사그라들었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차민은 슬금슬금 루카스의 눈치를 보며 ‘요람’ 가까이로 다가갔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보석의 크기가 커진 것도 같았다. 다행이었다. 어쨌든 노아는 그에게서 제가 줄 수 없는 것들을 받으며, 어제보다 오늘 더 건강해지고 있었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견고한 보석이 저에게는 조금도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거였다. 루카스야 전지전능하니 무리 없이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았지만, 차민은 평범한 인간이었으므로 안쪽을 투시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없었다.
노아가 잘 자고 있는지 궁금했다. 시커멓게 가루가 되어 부서졌던 몸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도 궁금했고....
“뭐 하고 있어?”
루카스가 어제처럼 짧게 손을 털었다. 검게 그을린 불씨가 타닥이다 사라지고, 하얀 손에는 이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마시라니까.”
그가 손을 썼는지 코르크 마개가 팡, 하고 저절로 열렸다. 꼭 샴페인이라도 딴 것처럼 경쾌하고 맑은 소리였다. 차민은 투명한 액체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아주 조금이지만 병 안에서 농익은 오렌지 향이 솔솔 피어오르는 것도 같았다.
*
“흐, 아, 아, 그...만, 아...!”
안을 문지르고 찌를 때마다 찌걱이는 소리가 커지는 것을 보니, 마침내 루카스도 사정을 한 모양이었다. 모조리 정액을 털어 넣겠다는 듯 몇 번이나 허릿짓을 하고서야, 그가 자신의 쪽으로 당기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미안하지만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만 버텨야 할 것 같은데.”
섣불리 치유하려 들었다간 혹시 들어섰을지도 모르는 아이까지 휘발되어버릴지 모른다며, 루카스가 차민의 몸을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찢어진 곳도 없고, 피도 안 났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태가 멀쩡하다는 건 아니었다. 차민은 몇 번이나 몸을 일으키려다 결국 포기한 채로 밭은 숨만 씨근덕거렸다. 그래도 중간까지는 뒤가 벌어진 것 같은 느낌이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배꼽 아래로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매번 이런 식이면..., 나 회사 잘려.”
이 꼴로 당연히 출근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건 인간의 의지 같은 것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잖아? 물론 네가 플린 쪽에 화려하게 불을 질러놓긴 했지만, 그 역시 네 말대로 내 돈이 알아서 해결해줄 것 같고.”
“그렇지만,”
“당분간 재택근무 하겠다고 대니얼이 알아서 잘 말해놨을 거야. 파파라치가 극성이라는 핑계를 댈 참이니 로펌 측에서도 무리 없이 승낙할 테고.”
“뭐? 알고... 있었어?”
“뭐를, 사진 찍힌 거?”
그럼 설마 몰랐겠냐며 루카스가 코웃음을 쳤다.
“먼저 연락받았어. 좀 더 정확히는, 사진 찍힐 때부터 대충 알고는 있었고.”
“눈치챘는데도... 내버려뒀다고?”
“아직은 통제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인간들 사회에선 그런 이슈가 오히려 화제가 되기도 하니까.”
그리고 너에게도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닐 텐데, 하며 루카스가 몸을 일으켰다.
“품 안 들이고 몸값 높인 셈이잖아.”
난잡했던 섹스의 흔적은 말끔히 지운 모습이었다. 애초에 옷은 벗지 않기도 했고 바지 지퍼만 내리고 있었으니.
“...미안한데 창문 좀 열어줘, 토할 것 같아.”
“벌써 입덧을 할 리는 없을 테고.”
“네 향이 너무 짙어서... 숨이 막혀서 그래.”
루카스는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뜰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건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했으니까.
“네가 인간이라 확실히 재미있는 현상이 많이 보이기는 해. 분명 예전과는 달라진 것 같은데 ‘반려’의 흔적은 느껴지질 않으니 최근 들어 괜히 달라붙으려 용쓰는 것들이 생기더군.”
“네가, 달라졌다고?”
“본능적으로 느끼는 거겠지. 이전까지는 아무도 상대 안 해주는 것 같더니, 요즘은 그래도 누군가에게 곁을 내줄 여유가 있기는 한가 보다, 그렇게.”
루카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노래라도 부르듯 흥얼거리는 속삭임이었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돌변한 인간들과 야수들의 작태를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차민은 손등으로 코와 입가를 가린 채 가만히 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래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과실 향은 도통 사라지질 않았다.
“...네가 누구랑 뭘 하고 다니는지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노아에 대한 정리는 확실히 해줘. 네 말대로… 인간들 사회에 편입시켜 살게 할 거라면.”
“그거야말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쓸 것 없고.”
셔츠의 소매와 깃을 정돈한 루카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바닥에 나뒹구는 코트가 생명체라도 되는 듯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그의 팔에 감겼다.
“너는, 내가 주는 것만 잘 받아먹으면서 아이가 생기길 기도하고 있어. 정말로 노아를 위한다면.”
펄럭이며 코트를 걸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이내 루카스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차민은 멀끔하게 그를 도려낸 것 같은 빈자리를 바라보다, 땀과 체액으로 엉망이 된 제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을 쾅쾅 두드리는 오렌지 향은 점점 짙어져 갈 뿐이었다.
*
꼬박 일주일 동안 루카스와 뒹굴었다. 일주일...보다 조금 더 오래인 것 같기도 하고. 과연 이걸 섹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깨어 있는 동안은 내내 그의 것을 받아내야 했다. 처음에는 저에게서 몸을 빼낸 채로 돌아서는 루카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까무룩 잠이 들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마저도 기억이 희미했다. 갖가지 체위로 몸을 섞고 교성을 지르다 정신을 잃고... 그러다 아래를 헤집는 기분이 들어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고 나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흉포한 성기에 뒤를 꿰뚫려 흔들리고 있는 제 몸이 보였다.
필름이 툭툭 끊기듯 기억의 파편이 부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분명 루카스에게 구멍을 빨리면서 빌고 있었는데, 모로 길게 누운 채로 다릴 벌리고서 엉덩이를 흔들기도 했고, 또 간신히 눈을 뜨면 어느새 입안을 가득 채운 그의 좆 때문에 컥컥 마른기침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나마 전부 밀어 넣지 않고 일부만 머금는 것으로도 만족하는 듯하니 고마워해야 하나.
쉬는 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액으로 온통 축축해진 몸을 하고서, 그의 가슴에 무기력하게 등을 기댄 채 건네주는 무언가를 받아먹기도 했다. 그게 뭐였을까. 떠오르는 것이라곤 달고, 짭조름하고, 부드러운.... 갖가지 맛과 촉감 정도였다.
‘비스트’들이 기력을 충전하는 특수한 식품이라도 되는 것일까? 하여튼 효과는 확실히 있어서, 그 직후에는 기운도 나고 정신도 제법 또렷해졌다. 물론 공짜로 먹여준 게 아니었다는 듯 배로 물고 늘어지는 루카스 탓에 다시 기절하듯 잠이 들곤 했지만.
어쨌든 저와 질리도록 뒹굴면서도 노아에게 착실히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는 있는지, 이따금 근황을 들려주기도 했다. ‘요람’ 안에서 카터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 완전히 유리가 된 듯하기는 한데,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생각 중이라고. ‘요람’을 부수고 다시 만드는 거야 일이랄 것도 없지만, 노아가 그 충격을 견딜 수 있을지는 섣불리 자신할 수 없어서 고민이라고 했다.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게 있는데?’
‘가장 쉬운 건 지금의 육신을 버리고 새 육신을 얻는다거나.’
‘...찬성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상상부터가 좀 어려운데. 새 육신이라니?’
‘네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인간의 피가 섞인 노아의 몸이 이 행위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문제라는 거지.’
차민은 그나마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헤아려보다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발을 딛고 땅에 서 본 기억이 까마득해서,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크게 넘어질 뻔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번에는 아래를 깨끗하게 닦아주고 갔다는 거였다. 아니었으면 머금고 있던 정액을 주르륵 흘렸을지도.
나름의 규칙이 있는지 어떤 날은 뒤를 살펴보다 손도 대지 못하게 하고서 쌩하니 가버리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말없이 씻겨주기도 했다. 이것도 아이를 갖게 하려는 나름의 계획인가.... 아아, 관두자. 거기까지 생각하다간 과부하로 뇌가 펑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으음.....”
옅게 바디워시 향이 나는 것도 같았는데. 루카스의 흔적이 너무 강해서 좀처럼 식별이 어려웠다. 킁킁거리며 제 몸 이곳저곳의 냄새를 맡아보던 차민은 결국 포기하고서 침실과 연결된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정말로 잘 모르겠다. 내내 그 진득한 향에 휘감겨 시간을 보내서, 정말로 유효한 흔적이 남아 있는지 아니면 저 좋을 대로 느끼고 있는 환각인지....
차민은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이끌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뜨뜻한 물에 잠겨 있으면 조금이나마 불편한 기색이 가실까 싶었는데, 어째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격통이 점점 거세지는 기분이었다.
괜히 몸을 움직였나.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는 것만으로도 피부에 찌릿찌릿 전기가 올랐다.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겨 간신히 속옷을 찾아 입는데, 그 단순한 동작이 그렇게도 어려웠다. 몸에 루카스의 정액이나 이불이 아닌 무언가가 닿는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자꾸만 손이 헛돌았다.
편한 실내복까지 주워 입고서 마저 엉성한 걸음을 떼자, 부엌 쪽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 오렌지 향을 뚫고서 바닐라 베이스의 달콤한 내음이 흘러들어왔다.
“루카… 스?”
“앗, 일어나셨어요?”
“아아.….”
...대니얼이었다. 차민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실망스러운 탄식이 툭, 튀어나와버렸다. 뭘 기대하고서. 루카스였더라면 지금 이렇게 서 있지도 못했을 거다. 정신을 차린 걸 알자마자 달려들어 저를 범했을 테니까.
“대표님은 오늘 잠시 자리를 비우셨어요.”
그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노아의 일을 다시금 확인하기 위해 이쪽 방면으로 저명한 의사를 만날 예정이라고 했고, 플린 쪽과도 정식으로 대면해 말을 나눌 참이라고도 했다.
“결국 저는 그다지 필요가 없었네요, 이 일에.”
“그렇지도 않습니다. 한 변호사님 덕분에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는걸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해본 적도 없는 이혼소송 같은 걸 맡으라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긴. 뻔히 보이는 함정인데도, 섶을 지고 불길 속으로 뛰어든 게 한두 번이 아니긴 했지.
“…그래도 잘리진 않겠죠?”
대니얼이 빤히 저를 바라보았다. 뻔뻔하다며 힐난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제 말이 매우 의외이긴 한 모양이었다.
“...어, 저는 한 변호사님께서 당연히 그만두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만....”
“설마요. 나가라고 할 때까지는 붙어 있을 겁니다.”
염치가 없는 소리라는 걸 알지만 자존심 따질 때가 아니잖아요, 하는 말에 대니얼의 표정이 더더욱 묘해졌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생각하신다면 한 변호사님께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굽히시면 어떨까요.”
“뭐를요?”
“대표님께요. 노아를 위해서라도요.”
“하하, 글쎄요.”
“진심입니다. 정말 한 변호사님이 밉고 싫어서 괴롭힐 목적이었으면 이렇게까지 하시지도 않았을 겁니다.”
당장 이 집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으냐며 대니얼이 높은 천고를 올려다보았다.
“대표님께서 언제부터 여길 구해서 관리하고 있었는지 들으시면, 아마 변호사님 깜짝 놀라실 걸요.”
차민은 부엌에 난 창 너머로 펼쳐진 나붓한 구름과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쨍한 하늘을, 굵직굵직한 마천루를 바라보았다. 아마 대니얼보다 제가 더 잘 알 것이다. 그린우드를 졸업 하고나면 우리 어디서 살까, 루카스와 그런 의미 없는 이야기나 주고받을 때 여기였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 있었으니까. 지금보다 더한 촌뜨기라 아는 게 없어서, 맨해튼에서 가장 비싸고 좋다던 동네의, 가장 유명했던 이 맨션으로.
“...카터가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내가 인간이라 다행이라고.”
차민은 모르는 척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예? 그건 또 무슨 개소리래요?”
그 당시엔 차민도 카터의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 강한 동족에게 밀려 패배가 예정된 자의 발악 같은 거라고 여길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말마따나 제가 인간이었던 까닭에, 카터가 최후의 발악처럼 내던진 조그만 황금 사과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저를 포함한 가족 모두에게 채운, 돈으로 만든 그 족쇄 탓에 루카스와의 지난한 갈등이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었으니.
“루카스와 제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날은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거겠죠.”
노력 같은 걸 해보기에 차민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고, 루카스가 가진 권능은 너무도 찬란해서 시야의 아래가 보일 틈이 없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
“어으, 윽, 자, 잘못….”
바닥에 누워 꿈틀거리던 의사는 제 시야에 들어오는 검은 구두굽에 발작을 하며 몸을 뒤틀었다.
“어디 있어, 남은 조각은.”
“어, 없습니다, 저, 정말로....”
“거짓말.”
그와 동시에 의사의 몸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기괴한 모양으로 이리저리 뒤틀렸다. 몸의 모든 구멍에서 검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으나, 루카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몇 번이고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이봐. 속일 걸 속여야지. 당신이 몰래 팔아치운 그 조각들에 누구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을 텐데.”
흉한 몰골로 몇 번을 더 발작하던 의사가 어느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그제야 루카스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응시하며 기운을 끌어내자, 낡은 서랍이 툭 열리더니 손바닥보다 작은 조각보가 둥실둥실 떠올랐다.
원래대로라면 분풀이나 조금 하고 가져갈 속셈이었는데, 이 능구렁이 같은 의사 놈이 조각에 손을 써두었다는 걸 알게 됐다. 맹약만큼 어려운 계약은 아니었으나 루카스에겐 시간이 없었고, 원래의 주인에게서 양도를 받는 것만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의사 놈이 자발적으로 저에게 건네주어야 걸려 있던 계약이 깨지게 되는 것이다.
조각은 쉽게 말하자면 인간의 태반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야수의 아이들이 껍데기를 깨고 울음을 터트릴 때 얇고 단단한 막이 조각조각 부서지는지라 다들 임의대로 그렇게 부르곤 했다.
카터의 조각을 옮겨 담을 새 그릇을 고심하던 도중, 그 빌어먹을 연구소에서 우물쭈물하며 확인해 주십사 하는 게 있다고 연락을 해왔다. 중국의 암시장에서 건너온 것인데, 우드가의 기운이 느껴지는 조각의 일부가 굉장한 명약이라는 소개와 함께 거래되고 있다면서 말이다.
최근 태어난 우드가의 핏줄이라고 해봐야 노아뿐이었다. 그 즉시 사람을 풀어 추적해보니 홍콩에 살고 있다는 수상쩍은 의사 놈 하나가 걸려 나왔다. 값비싼 것을 받고 합법적인 치료를 받을 수 없는 ‘비스트’와 인간들의 뒤치다꺼리를 도맡는다는 놈. 여기까지만 들어도 견적이 나왔다. 아마 눈치를 보다가 이쯤 시간이 흘렀으면 괜찮겠지, 하고 슬쩍 팔아치우려던 모양이었다.
“다른 ‘비스트’도 아니고 우드가의 소유물을 멋대로 처분해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나?”
의사는 짓밟힌 벌레처럼 꿈틀거릴 뿐이었다. 조각이 아주 일부만 남아 있더라도 노아의 ‘요람’에서 불순물을 흘려 담을 수 있었을 텐데, 이 정도면 한차민을 감시할 용도의 크리처 같은 것까지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듯했다.
“...잠깐만, 이 조각에선 다른 기운이 느껴지는데. 뭐지?”
“...사가려던... 용이, 쿨럭..., 아이를, 갖고 싶어... 해서....”
“아아.”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루카스는 손을 휘둘러 자신의 이공간 안으로 조각들을 이동시켰다.
용들은 자손 보기가 어려워서인지 승계와 관련된 일이면 무슨 짓이든 다 하려 들기는 했다. 그래도 이 일까지 모르는 척 넘어가줄 순 없는 노릇이겠지. 반편이일지라도 제 핏줄을 이은 아이의 조각이었다. 아마 우드가의, 그것도 수장의 핏줄을 받은 조각이라고 하니 더더욱 눈에 불을 켜고서 구하려고 드는 것일 테지만. 뭐, 이거야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하는 일은 아니니까.
“...이봐.”
그대로 허공 속으로 신형을 날려 사라지려던 루카스는,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있어 의사의 어깨를 툭툭 찼다.
“노..., 아니. 이 조각의 주인인 아이를, 네가 직접 꺼냈나?”
잠시 망설이던 의사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지경인 몸을 하고서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꼴을 보아하니, 혹시라도 그 일을 빌미로 뭔가를 뜯어낼 수 있을까 기대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땠지?”
“무엇을…, 그러니까 뭐가 어떻...냐고 하시는... 건지....”
“네놈이 어떻게 아이를 꺼냈고, 또 당시의 정황은 어땠는지. 뭐 그런 것들 말이야.”
“다른 수술과 다를 바 없었, 큭, 없었습니다. 아이는 마취 후 배를 갈라서..., 쿨럭, 꺼냈고... 다른 장난질은 절대 안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수술이 실패한다면 자신의 명성 또한 떨어질 테니, 그런 상황에서까지 이상한 짓을 하진 않는다며 의사가 거듭 강조했다. 다 죽어가는 것 같은 그의 목소리가 거슬려, 루카스가 작게 손을 튕겼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작은 병이 나타났다. 뚜껑이 돌돌 열리고, 황금빛 액체가 스스로 쪼르륵 기어 나와 의사의 입안으로 흘러들어갔다.
“푸허..., 허억, 가, 감사합니다.”
뭔지는 몰라도 제가 먹은 것이 귀한 물건임을 알아본 의사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거듭 인사를 올렸다.
“감사한 것 알겠거든 이제 제대로 말해봐.”
“그럼...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기분이 상하시더라도....”
“네놈에겐 분풀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의사는 꾸물꾸물 몸을 일으키며 코와 입에서 흐른 거무죽죽한 핏물을 닦아냈다.
“음... 일단 상황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뭐, 저를 찾아오는 ‘비스트’고 사람이고 멀쩡한 경우가 거의 없긴 하지만, 그 애... 한차민의 경우는 더했죠. 부모는 차라리 살기 싫다고 애가 발악이라도 하길 바랐습니다. 그런 의지 자체를, 그러니까 살겠다 죽겠다 이런 쪽의 생각은 모조리 멈춰버린 것 같았기 때문에.... 그래서 마취할 때 부담도 컸고요. 째고 꿰매는 건 문제가 아닌데, 혹여나 이 일을 계기로 본인이 눈을 뜨길 거부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죄송한데 물 좀 마셔도 되겠냐고 눈치를 보기에, 루카스는 선반 어딘가에 나뒹구는 생수병을 염력으로 이끌어다 통째로 쏟아부어줬다. 혹시라도 마실 걸 가지러 가겠다는 핑계를 대고서 허튼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그럼 혹시 그 당시에 카터의 부탁이 따로 있었나?”
“부탁이라고 하심은....”
“특수한 약물, 이를테면 자기 피를 넣어달라고 했다거나.….”
“아뇨, 가뜩이나 인간과의 혼혈이라 난이도가 높은 수술인데 그랬다간 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고개를 내젓던 의사가 아, 하고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까 한차민과 그 부모에게서 계약서를 받아 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를 후원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이것저것 단서를 달더군요. 의아하긴 했습니다. 대충 듣기로도 카터가 내민 조건들은... 저도 좀 걱정스러울 정도로 가혹해서. 이럴 바엔 수장께....”
“수장이라고 부르는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냥 대표라고 해.”
“어, 네..., 죄송합니다. 이럴 바엔 대표님이나 우드 쪽 원로들을 만나서 상의를 해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몇 번이고 대표님을 찾아갔지만 전부 거절당했다고 했습니다. 으음. 지금 생각해보니 카터가 일부러 훼방을 놓았을 수도 있겠네요.”
“날 찾아왔다고?”
“네, 잊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던지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니?”
“누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 건 처음 봐서요.”
그것도 스물 조금 넘은 어린애였으니까, 하며 의사가 턱을 긁었다.
한차민은 수술을 마치고도 몇 주 후에나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앙상하게 말라서, 제 배를 한 번 들여다보다가, 죽은 듯이 잠에 빠졌다가…. 몇 번을 그러다가 길게 울었다고 했다.
“한차민 그 애도 이젠 대표님과 잘 지내는 모양이지요? 카터 그놈이 이간질을 잘하긴 했어요. 처음부터 자기가 다 꾸며놓고서는, 그 인간들과 합심해서 일을 계획한 것처럼 떠벌리고 다녔잖습니까.”
그런 사정까지 소문이 퍼졌나. 아아, 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 의사는 바로 곁에서 많은 것을 지켜보았을 테니 조금 더 아는 부분이 많을지도 모르겠구나.
루카스는 잠시 놈의 입을 봉해버릴까 고민했다. 최고의 입단속은 역시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긴 한데.… 음. 그래도 노아의 일이 전부 해결되지는 않았으니 그때까진 살려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지금 차민에게 다시 아이를 갖게 하려고 온갖 공을 들이고 있었으니. 경험이 있는 놈이 아무래도 안전하겠지.
그렇게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 한차민이 임신한 약이나, 그런 것들. 다 그놈이 꾸민 거잖아요. 한차민의 부모에겐 몹쓸 맹약에 저주까지 걸려 있던데.”
의사 놈의 입에서 가볍게 넘겨듣기 힘든 이야기가 튀어 나왔다.
“맹약?”
“네? 네.”
“한차민이 아니라, 부모 쪽에?”
“어... 모르셨습니까?”
“…저주는 또 무슨 말이지?”
“아비와 어미 두 쪽 모두 인어의 구슬이 심장에 박혀 있었습니다. 혹시 몰라서 부모들의 피로 수혈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불순물이 너무 많아서 포기했거든요. 인어의 구슬부터 온갖 저주가 심어져 있었으니 그들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인어의 구슬을 삼킨 사람은 자신의 의지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아주 오래전, 이를 이용해 몇몇 종들이 인간들에게 신탁을 내린답시고 써먹은 이후로 철저하게 유통이 금지된 물건이었다. 까마득한 옛날에 자취를 감춘 것이라 루카스도 존재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게 카터의 손에 있었고... 심지어 그걸 차민의 부모님에게 써먹기까지 했다고?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인어의 구슬이라니.”
“저도 그 물건이 진짜일 거라는 확신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어의 구슬과 유사한 효과를 보였던 건 맞습니다. 카터가 저에게 직접 확인시켜주기까지 했으니까요.”
이쯤 되면 그 물건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빌어먹을 물건을 카터가 재현해냈고, 차민의 부모님에게도 멋대로 사용했다는 게... 큰 문제겠지.
“맹약에 대해서는 카터가 말해줬습니다. 한차민과 임신한 아이에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카터가 조종하는 대로 말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았더군요.”
음. 루카스는 크게 목울대를 일렁이며 고개를 돌렸다. 침이 넘어가고 맥박이 뛰는 소리가 천둥이라도 치는 것처럼 크게 귓가에 울렸다.
미국으로 건너오기 이전까지 차민의 아버지가 자잘하게 사고를 쳤던 것을 알고 있었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이 있었고. 그래서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렇게까지 공을 들여 파헤쳐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술수와 장난들이 사실과 교묘하게 맞물리니, 루카스 또한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가족이 벌인 일을 뒤늦게서야 알고서 멍하니 저를 바라보던 차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뺨을 따라 흐르지도 못하고 툭툭 침대 위로 떨어지던 굵은 눈물도.
루카스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쥐어짜기 시작한 의사의 발치를, 피로 흥건한 바닥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것이 심장을, 명치 아래를 푹푹 찌르는 것처럼 아프고, 아렸다.
어쩌면... 모든 일의 시발점은 저의 오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생태를 파악하는 일 따위에 수고를 들이고 싶지 않았던 가장 강한 야수로서의 자만심이. 유례없던 애정을 퍼붓는 스스로에게 취해, 작은 상처를 견딜 수 없어서 얼기설기 얽힌 일들은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았던 교만함이….
부유하던 사고의 끝은 붉게 달아오른 한차민의 얼굴이었다. 이젠 버겁다고 작게 애원할 때마다 네 아버지의 빚을 운운하며 더 세게 허리를 쳐올렸고, 그러면 눈물 젖은 얼굴로 뒤를 조이며 시트 위로 무너졌다. 헐떡이면서 제가 주는 쾌락만 받아 마시기 급급하다가도, 문득 정신을 차리면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멍해지던 그 공허하던 눈.
“…이야기는 그쯤 해두지.”
“아, 예….”
“말이 많은 것을 보아하니 역시 살려두면 안 될 듯 하지만.….”
“예? 그렇지만 해, 해코지는 안 하신다고...!”
“물론 아직 아이의 문제가 남아 있으니 죽이지는 않을 거야.”
뻗은 손가락을 따라 바닥에 고인 검은 핏물이 얇은 실 같은 형태가 되어 길게 자라났다. 루카스의 눈높이까지.
“그러니 나 또한 너에게 피로 제약을 걸도록 하지. 다시는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도록.”
의사 놈은 무어라 외치는 것 같다가, 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제 목을 쥐어뜯기만 했다.
루카스는 무감한 눈으로 의사의 발악을 지켜보았다. 필요한 그릇은 구했으니, 카터의 조각부터 노아에게서 떼어내고.... 차민과 다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았다. 내가..., 크게 잘못 알았던 부분이 있었노라고.
*
꿈을 꾸었다. 드문드문 끊기는 장면들이 전부 슬프기만 해서, 차민은 흥건히 땀에 젖은 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오후에 대니얼이 차려준 밥을 억지로 넘기고, 또 까무룩 잠이 들었다. 새벽인지 이른 저녁인지 알 수 없는 색색의 노을이 옅게 번지고 있었다.
“후....”
차민은 가운의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고작 그것으로 절로 무거운 한숨이 터졌다. 정액 냄새와 진득한 과실 향이 온통 뒤엉켜 골을 징징 울렸다.
루카스는 밤에 들를 예정이라고 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대니얼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론 그랬다. 물론 저보다는 노아가 목적일 것이다. 일정 시간 ‘요람’을 보살펴주고 나면... 늘 그랬던 것처럼 제 뒤를 헤집겠지.
“일어나셨어요?”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로 비적비척 방문을 열었는데, 대니얼이 환하게 웃으며 저를 반겼다. 어떤 꾸러미를 소중히 끌어안고서. 그런데..., 순간 아찔한 느낌이 뒷덜미를 훑고 갔다.
불쾌한.
이질적인.
어딘가 섬뜩해지는. 빼앗겨선 안 될 것을 빼앗긴 듯한.
“...그거, 뭐예요?”
사고의 흐름을 인지하기도 전에 묻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카터의 남은 조각을 옮겨 담을 그릇입니다. 대표님께서 오늘 구해 오셨어요.”
“그릇…이요?”
아아, 하고 대니얼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왜, 홍콩에서 노아를 낳을 때 수술을 맡았던 의사, 기억나시죠?”
심장이 느리게 가라앉았다. 차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더는 이야기를 들어선 안 될 것 같았다. 돌에 묶여 바다 한가운데 던져진 것처럼, 온몸이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때 노아를 낳을 당시 깨졌던 알의 파편입니다. 용의 흔적이 남아서 조금 불쾌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엔 용이 부렸던 술수 덕에 카터 놈을 더더욱 단단하게 가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의 흔적....”
“네. 용이 이걸 이용해서 아이를 가지려고 했나 봐요. 아무리 아이 갖기가 어려워도 그렇지... 이 부분은 대표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겁니다.”
일어나셨으니 저녁 차려드리겠다며 다니엘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차민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테이블에 놓인 꾸러미를 바라보았다.
문득 얼마 전, 루카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파파라치 사진이 찍힌 이후로 저에게 대시하는 이들이 생겼다고. 가볍게 하는 말이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루카스 또한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아직 ‘반려’로 묶인 저에게 부려먹을 수 있는 아이들을 바라는 동시에. 지금 마음에 두고 있는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용에게서도…, 아이를 보려고 했던 모양이다.
하긴. 루카스는 아이를 자신의 밑에 두고 부릴 수족 정도로 여기는 듯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낱 인간에게서 태어난 아이에게 대단히 중요한 임무를 맡길 것 같진 않았다. ‘비스트’들의 세계에 낄 수 없는 약해빠진 전력은 한계가 명확했다. 게다가 인간과의 혼혈은 정해진 매뉴얼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키우기 까다롭기만 하다.
예전처럼 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혼혈인 아이가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는 것도 아니었으니. 저에게서 다른 아이를 보는 건 여러모로 효율성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차민은 루카스가 저를 괴롭게 하려고 하는 소리겠거니, 여겼다. 노아의 상태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으니, 다른 아이라는 예비책을 두고 싶어서 임신을 종용하는 것 같다고. 그랬는데....
“하….”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루카스는 내도록 저를 완전히 지워내고만 어느 날을, 새로운 시작을 손꼽아 기다려왔을 것이다. ‘반려’에 관한 의문이 명확히 풀렸으니, 당연히 적극적으로 다른 ‘비스트’들에게 시선을 돌렸겠지. 어차피 저는 앞으로 백 년도 채 살 수 없는 인간인데.
“변호사님?”
“아, 대니얼.”
“어디 불편하세요?”
“그건 아니고….”
미안한데 좀 더 자고 싶다고, 이만 돌아가도 좋다는 말에 그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적어도 식사를 마치는 것은 보고 가겠다고.
“지금 한 변호사님 낯빛이 얼마나 창백한지 모르시죠? 멀리서 보면 뱀파이어가 자기 동족인 줄 알겠어요.”
“글쎄요. 그건 못 먹어서가 아니라 루카스 때문인 것 같은데요.”
“음, 그…렇지만 대표님도….”
일순 말문이 막힌 대니얼이 딴청을 피우며 프라이팬을 뒤적였다. 프렌치토스트를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고소한 우유 향과 버터 향이 솔솔 피어올랐다. 그렇지만 달콤한 향도 전부 한순간일 뿐이었다. 루카스가 남기고 간 흔적과 알의 파편에 밴 용의 향기가 뒤엉켜 속이 자꾸만 뒤집혔다.
“어차피 루카스가 감시하라고 붙여준 거죠? 괜찮으니까 가보세요. 할 일도 많으실 텐데.”
“에이. 아니에요. 감시는 아니고요, 지금 한 변호사님 몸이.….”
“도망 안 가요. 제가 노아를 두고 어디를 가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L&C가 ‘비스트’들끼리의 분쟁도 잘 처리해줄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아니에요?”
대니얼이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정답이었나 보다.
“그럼 더더욱 할 일이 태산이겠네요. 거기에 저랑 노아의 일도 여기저기서 알아보고 계실 거고.”
“그래도….”
“괜찮으니까 가보세요. 나중에 일어나는 대로 제가 알아서 해 먹을 테니까.”
인간은 ‘비스트’와 달라서 이렇게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큰일 날 거라는 말까지 꺼내자, 그제야 대니얼이 미적미적 쥐고 있던 조리도구들을 내려놓았다.
“대표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조금 더... 한 변호사님께 신경을 써주시면 좋겠다고.”
뻔했다. 저러다 사람 잡겠다, 섹스만 한다고 애가 들어서는 것도 아니니 데리고 나가서 맛있는 것도 먹이고 바람도 쐬고 해라, 저렇게 침대 위에서 잠만 자고 먹는 것도 부실한 상태에서 아이가 생기면 그게 더 큰 문제 아니겠냐.... 뭐 그런 잔소리나 늘어놓겠지. 루카스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테고.
“고마워요.”
말라비틀어진 제 음성에, 대니얼이 무어라 말을 보태고 싶은 듯 입을 벙싯거렸다. 그러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젓고 말았지만.
“하긴. 한창 대표님이 몰아붙이는 와중인데 제가 이 공간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거슬리시긴 하겠죠. 그럼 주무세요. 나중에 식사는 꼭 하시고요.”
“걱정 마세요. 제가 싫다고 해도 루카스가 뭘 먹이긴 할 거예요.”
“하하. 그건 그렇긴 합니다. 그러니까 대표님이 손쓰시기 전에 먼저 움직이세요. 변호사님도 그쪽이 덜 불편하시잖아요.”
그럼 가보겠다며 대니얼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루카스가 매번 그랬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려는 모양이었다.
“멍하니 ‘요람’만 들여다보지 마시고요. 식사 꼭 하기로 하신 겁니다.”
“그래요.”
반쯤 투명해진 대니얼이 차민의 어깨 너머로, 정확히는 ‘요람’이 둥실둥실 떠 있는 곳으로 흘끗 시선을 던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니얼이 저를 홀로 두고 가도 괜찮다고 판단한 건 노아 덕분일 테다. 아이가 잠든 ‘요람’을 두고 감히 제가 허튼짓을 할 수 없으리라는 걸 잘 알 테니까.
대니얼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차민은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부엌에 난 커다란 창으로 발아래, 언젠가 꿈꾸었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서 부푼 마음으로 루카스의 어깨에 기대 더듬더듬 바라던 행복을 속삭이던 때가, 전부 거짓말 같았다.
노아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악을 썼던 건 진심이었다. 그렇지만 점점 한계가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좋아했던 사람에게는 갖은 오해를 산 끝에 외면 받았고, 노아를 살려보겠답시고 카터의 온갖 위험한 명령을 수행해 왔지만 정작 저는 진짜 ‘요람’이 뭔지도, 아이가 배를 곯고 있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부모님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저를 속여 왔다.
쿵. 차민은 창문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쿵, 쿵. 불길한 소리가 창을 타고 올라가 높은 천고까지 울렸지만, 미약한 인간의 몸으론 단단한 유리를 깰 수 없었다.
몸의 심지가 다 닳아버린 것 같았다. 이미 마음은 텅 비어, 전부 마모된 지 오래였다. 카터의 조각 때문에 노아의 몸이 시커멓게 바스러졌던 그때, 간신히 버텨오던 차민의 의지 또한 전부 부서져 버린 게 분명했다.
창문을 할퀴고 가는 삭풍이 느껴졌다. 고층이어서 그런 걸까. 위태로운 찬바람의 흔들림이 좀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루카스가 저에게 못되게 구는 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남아 있어서가 아닐까... 하고. 어느 정도 정리된 속내와는 달리, 마주하고 있으면 자신을 아프게 했던 예전 일이 자꾸만 떠올라서 괜히 못되게 구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전부 허튼 생각이었다. 루카스는 애초에 인간도 아닌데. 인간들의 그런 모순적인 심리나 행동 같은 걸 알지 못할 게 뻔한데. 하루도 빠짐없이 깨어 있는 동안은 내내 루카스와 몸을 섞고 있었더니 저도 모르게 그런 착각을 한 모양이다. 어쩌면 덜 비참해지고 싶어서, 그러길 바랐는지도 모르고.
차민은 서서히 창문에서 몸을 떼어냈다. 유리 위로 뿌옇게 남았던 숨결의 흔적이 구겨지듯 쪼글쪼글 사그라들었다. 무감한 시선이 대니얼이 요리하다 만 흔적으로 향했다. 갖가지 조리도구들 사이로 잘 버려진 칼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묶인 목청은 사과의 말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게 하는데. 루카스는 노아의 흔적까지 가져다가 다른 ‘비스트’와의 아이를 가져보려 노력하고 있는 거라면. 그 정도로 저와 ‘반려’로 엮인 것을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럼 나만 사라지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거 아닌가....”
*
“성심으로 보필한 긴 세월을 이런 식으로 팽해버리시면, 그 누가 대표님 밑에서 헌신하려 들겠습니까.”
현재 플린 미디어를 이끄는 꼬장꼬장한 늙은이, 알렉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호소했다. 소송이고 여론전이고, 어차피 시간과 돈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야수는 그 두 가지만큼은 절대로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래도 저희가 얼굴 들고 다닐 수 있는 빌미라도 주셔야지요. 물밑에서라도 말입니다.”
이미 루카스의 뜻이 확고한 이상, 진행 방향을 엎을 수는 없을 테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챙길 수 있는 다른 거라도 챙겨보자는 게 알렉과 몇몇 소유주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오늘 루카스와 독대를 요청한 것도 은밀한 거래의 신호탄을 쏘기 위함이었다. 다른 주주나 직원들의 사정이야 제가 알 바 아니었다.
“내가 오늘 계속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플린이 제법 오래 스피커 역할을 도맡아줬지, 우드가의.”
“그랬지요.”
“얼마나 됐더라?”
“기록에 남아 있는 건 저희 증조부 때부터이지만... 전해 듣기로는 훨씬 이전이라고 하더군요.”
“그래, 그랬지.… 그러면서 다른 ‘비스트’들과도 자연스럽게 안면을 트게 됐고.”
답답할 정도로 굳게 다물렸던 야수의 입이 드디어 열렸지만, 튀어나온 건 기대하던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엉뚱한 소리였다. 루카스는 알렉의 말에 처음부터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카터 그 새끼가 인어의 구슬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얻었을까 고민하던 중이었거든.”
“…예?”
“그런데 말이야. 이전까지는 원래 그 새끼는 내 불행에 평생을 바쳐왔으니까, 돌아버려서 미친 짓거리를 잘도 한다고 여기고 말았는데.… 생각해보니까 카터가 그 많은 정보를 혼자서, 그것도 자기한테 필요한 부분만 효율적으로 찾아낸 게 좀 이상해.”
“대표님… 그게 무슨….”
분명 문이 전부 닫힌 실내인데도 스산한 바람이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아니, 같은 게 아니고 실제로 그랬다. 루카스의 결 좋은 금발이 부드럽게 나풀거리고 있었으니까.
“정보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있고. 야수와 인간 양쪽에 대한 정보가 빠삭하고. 그러면서도 나와 카터에게 동시에 연줄을 대면 이득을 볼 수 있는 종이 대체 뭘까, 누가 있을까 내내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알렉이 주춤주춤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물러섰다.
“대표님, 저는 그런 걸…, 뭘 잘못 알고 오신 것 같은데 그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
“생각해보니 꼭 ‘비스트’일 것도 없이, 여기... 플린에도 해당이 되는 이야기잖아?”
소파의 팔걸이에 가로막힌 몸이 무거운 공포에 짓눌려 볼썽사납게 허덕였다. 알렉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뒤를 보이는 순간 저 아름다운 손에 갈가리 찢겨 죽을 것을 알았다.
그런데....
“...뭐야.”
루카스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는 컥, 하고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곤 방금 느낀 감각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한차민?”
사라져서는 안 될 기척이, 끊겨서는 안 되는 몸 안의 무언가가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
한차민이... 느껴지지 않는다.
노아를 ‘요람’으로 뉜 이후로 단 한 순간도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그 지독한 ‘반려’의 감각이.
“하, 하하….”
어이가 없으니 자꾸만 헛웃음이 터졌다. 루카스는 황망한 얼굴로 가슴께를 툭툭 두드렸다. 그런다고 이렇게 끊긴 흔적이 다시 살아날 리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둘 사이에서 후계까지 본 ‘반려’의 기운이 사라질 수 있는 원인은 두 가지뿐이다. 아이가 죽었거나. 아니면... ‘반려’가 죽었거나.
“.....그게 말이 되냐고.”
당연히 둘 다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만든 ‘요람’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비스트’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한차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건.… 장담하는데 제 ‘요람’이 깨질 확률보다 낮을 거다. 멀쩡해진 노아를 보지도 않고서, 자기 없이 홀로 남은 애가 찬밥 신세만도 못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죽겠다고 설쳐?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대, 대표님….”
간신히 눈만 치켜뜬 알렉이 두꺼비처럼 불룩한 볼을 푸르르 떨며 비굴하게 웃었다. 혹시라도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으려나, 기대에 차서 저를 부르는 늙은 인간의 얼굴이 역겨웠다.
“으윽....! 대표님, 갑자기 왜 그러시는….”
널뛰는 루카스의 감정에 영향이라도 받는 모양인지, 알렉이 못난 얼굴을 구기며 불편함을 호소했다.
기가 막혔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제가 이런 상태가 되었더라도 겁을 먹을 뿐이다. 이렇게까지 저의 변화에 동조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괘씸한 인간들까지 저와 카터를 두고 저울질했다는 게 분명해진 셈이다.
본가에는 덜 늙는, 조금이라도 죽음을 미룰 수 있는…. 그야말로 인간들이 군침을 흘릴만한 것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카터 놈은 그리 값어치가 없는 것들을 대충 주워다가 저들의 손에 들려주고 자기 좋은 대로 굴려 먹었던 모양이다.
“인간들 사정에 무지했던 내가 본의 아니게 그쪽에도 많은 빚을 지고 있었군.”
“대표님! 무슨 오해를 하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급한 불부터 끄고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루카스는 경멸을 숨기지 않은 채로 돌아섰다. 이내 두꺼운 창문이 휴짓조각처럼 찢어지고, 거대한 바람이 태산처럼 밀려와 건물 내부를 휩쓸었다.
“아, 안 돼!”
거칠 것 없는 불길한 바람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쩌렁쩌렁 울렸다. 여기저기 놓인 서류 가방 몇 개와 금고가 나풀나풀 회오리를 그리며 공중으로 떠오르자, 알렉이 사색이 되어 날뛰었다.
루카스는 혀를 차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길게 부서졌던 유리 조각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제 몸을 감싼 빛의 궤적이 막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하늘을 갈랐다.
사무실 내부에서는 여전히 폭풍우 같은 바람이 정신 사납게 휘몰아치고 있었고, 꼼짝없이 갇힌 알렉은 왁왁 비명을 지르며 손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인간들은 다 저 모양이었다. 그 짧은 생을 저렇게까지 추하게 버둥거리다가 가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것이다. 자기들은 아니라고 우겨대지만, 끝에 가선 모두 다 똑같은 소리나 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데다 식상하기까지 했고, 그런 주제에 온갖 변수가 들끓어 섬세한 통제가 필요했다.
벌어진 입에서 얼음장 같은 차가운 숨이 흘러나왔다. 루카스의 신형을 따라 유성우가 쏟아지듯 빛무리가 반짝였다. 발아래에선 그 광경을 감탄하는 멍청한 얼굴들이 한가득하였다. 팩 고개를 돌리는 잘생긴 미간에 못마땅함이 흘러넘쳤다.
루카스는 인간이 싫었다. 원래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누구누구 때문에 이제는 인간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한차민이 사라져도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
티잉, 하고 금속이 떨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날카로운 칼은 테이블을 몇 번 찍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한차민은 멍한 얼굴로 찢어진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요령도 없고 방법도 몰랐던 탓에 너무 깊게 찔러버렸다. 한 박자 늦게 욱신거리는 고통이 느껴졌다. 절절 끓는 것 같은 열감 또한.
샘처럼 피가 솟아나는 제 손바닥을 바라보던 한차민은, 잠시 망설이다가 ‘요람’ 위로 손을 올려보았다. 그렇지만 조심스러웠던 손길이 무색하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됐던 것 같은데....”
루카스는 이렇게 가까이 손을 대지 않아도 알아서 기운을 흡수해가는 것 같았는데. 하긴, 그의 손에서 떨어지는 건 피가 아니라 ‘요람’과 꼭 같은 색의 보석이었지.
“..노아.”
다 갈라진 지친 목소리로 미안하고 고마운 이름을 불러 보았다. 미세하게 남은 낯선 ‘비스트’의 흔적이 여전히 차민의 속을 뒤집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막 정신 들었을 때, 아빠가 노아 안아주지도 않았지?”
잊고 있었던 알의 파편을 보니 희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용케도 제 기척을 느끼고서 꼼질거리다가, 이내 시무룩하게 잦아들던 조그만 몸뚱어리.
“미안해. 아빠 거는 싫어?”
루카스와 용 사이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랬더라면 노아도 훨씬 행복했을 텐데. 우드가의 수장에 용의 핏줄을 이어받았으니 당연히 힘도 셌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천덕꾸러기 취급도 받지 않았을 거고. 벌써 무럭무럭 자라서 말도 잘 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했겠지. 루카스야 돈 걱정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을 테니 먹이고 싶은 것 잔뜩 먹이고, 노아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줬을 것이다.
“노아.”
기운이 없어 뺨을 ‘요람’ 위에 대고 있으니, 쪼개진 결정마다 초라한 제 얼굴이 가득했다. 차민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낯설었다. 고작 며칠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필요로 해줬으면 좋겠어. 노아라도, 아빠를….”
어차피 루카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뒤를 열어 받아주는 것뿐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렇지만 다른 ‘비스트’를..., 저와 같은 인간이 아닌 강하고 아름다운 종을 곁에 둘 거라면. 이제 저는 없어도 되는 거 아닌가.
목적을 잃은, 이유조차 알 수 없는 눈물이 찬란한 보석의 구 위로 느리게 떨어졌다. 그리고..., 그에 감응이라도 한 것처럼 야수의 ‘요람’이 길게 울렸다.
미세한 진동에 놀란 차민이 흘끔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숨조차 쉴 수 없는 압력이 느껴졌다. 가느다란 목이 부러지듯 꺾였다. 언젠가 심술을 부린 루카스가 공간 속에 저를 가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 비슷한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아, 윽.….”
일어서보려고 했지만 내내 혹사당한 탓에 갓 태어난 어린 짐승처럼 다리를 제대로 놀릴 수가 없었다.
루카스의 것과는 전혀 다른, 날것의 붉은 핏물이 ‘요람’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닿자마자 증발해버린 다고 하는 것이 맞을까. 어쨌든 생명력이 닳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차민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을 뜨고 있을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대니얼의 말마따나 저는 인간이었다. 이렇게 피를 쥐어 짜이면서 버티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걸 어떻게 멈추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한차민!”
자꾸만 의식이 가라앉는 가운데 저를 부르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 미친 새끼가, 어떻게 이런 짓을...!”
차가운 손이 볼을 붙들었다. 바깥바람의 특유의 청량한 향이 코끝을 스쳐 갔다. 차민은 최선을 다해 눈을 떠보았다. 이지러진 시야 끝에, 빛을 닮은 아름다운 남자가 서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연유를 따져 묻는 말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속절없이 목을 맸던 지난한 첫사랑이.
“…루카스.”
왜 우리는 이렇게 됐을까.
가슴이 미어지도록 널 좋아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불쌍한 약자로 만들어, 네 말보다는 다른 것에 휘둘렸던 긴 시간. 그렇지만 루카스는 야수들의 정점에 서 있는 불멸의 존재이니, 고작 십여 년 정도의 시간은 빠르게 잊힐 것이다. 이미 마음에 드는 다른 짝도 찾은 것 같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차민은 제 목 어딘가를 동여매고 있던 실이 탁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아.”
생을 걸고 맹세했던 어리석은 맹약이, 이제야 풀리고 있었다.
“루카스…, 미안해.”
“미안한 걸 알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인간의 피 같은 거 필요 없다고 했잖아!”
루카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제 손을 붙들었다. 그렇지만 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요람’ 위에서 몸이 떨어지질 않았다. 당황한 그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느껴질 뿐이었다. 분명 눈을 뜨고 있었지만 이미 새카맣게 멀어버려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미안. 자꾸만 구석에 몰리고 몰리니까... 조금도 다른 걸 둘러볼, 여유가 없었어. 이것도... 다 변명이겠지만.”
“입 안 다물어? 진짜로 기운 다 빨려서 죽고 싶어?”
“미…안해.”
그제야 부산스럽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루카스 또한 깨달은 것 같았다.
“너, 설마....”
거듭되는 저의 미안하다는 말이, 지금 벌인 무모한 일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는 걸.
“어째서..., 안 돼.”
저의 얼굴을 붙드는 손길이 다급했다.
“정말... 미안해, 부모님의 빚은....”
“아냐, 정신 좀 차려봐! 오늘 돌아오면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단 말이야! 오늘, 돌아오면.….”
루카스가 저의 얼굴 위로, 손 위로 무언가를 끼얹는 것 같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신비한 공간에서 보약 같은 것이라도 꺼낸 것일까.
“카터와는, 진심으로 아무런 일도 없었어. 지금 와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겠지만.”
그렇지만 점점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촉감도. 온도도. 냄새도.
“그리고... 노아는..., 정말로 네 아이야, 혹시 나중에라도 검사 같은 거 할 수 있다면.….”
“한차민, 제발....”
최후로 보이는 광경이 아름다운 빛이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름다운 빛무리가 노아의 ‘요람’처럼 따뜻하게 일렁였다.
“루…, 카….”
그래도 루카스. 이것만은 알아줘. 내 생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뿐이었어.
꽃이 시드는 장면을 빠른 속도로 재생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연약한 인간의 육체는 루카스의 눈앞에서 하릴없이 무너지는 중이었다. 심장을 가르는 것 같은 선뜩한 기분이 들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이동했음에도, 한차민의 생명력은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미…안해.”
한차민이 입을 열 때마다 보잘것없는 생기가 한 움큼씩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제발 그 입 좀 다물라고 윽박질러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이 얄밉고 이기적인 인간은 저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간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는 듯이, 쉼 없이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차민의 몸에서 콸콸 쏟아지는 피는 눈이 아플 정도로 붉은 색이었다.
카터와는 아무 일 없었어.
노아는 네 아이야.
너뿐이었어....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맹약의 구속에서 벗어난 한차민은 그 말을 그렇게나 하고 싶었던 것인지, 비로소 후련해진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한차민!”
픽 고꾸라진 한차민은 루카스가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몸을 뒤흔들어도, 눈을 감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흔드는 대로 맥없이 흔들리는 마른 몸은 당장이라도 재가 되어 사라질 것처럼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무게가 훅 줄어버리는 인간의 육신이 의아했다. 그동안 이 몸이 꾸역꾸역 지탱하고 있었던 건 뼈와 살이 아니라 허망한 생 그 자체였었나....
“누가..., 누가 멋대로 죽게 내버려둘 줄 알고.”
루카스는 ‘요람’ 위로 손을 올렸다. 자꾸만 울컥 치미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간이 없었다. 이 와중에도 아이에게 제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중인 한차민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허옇게 질려 있었다. 눈 아래는 검푸르고, 입술은 이미 보랏빛이다. 이미 죽었다고 해도 믿을 만한 상태였다. 그나마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귀한 물건들을 쏟아부은 덕에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거였다.
루카스의 손등 위로 퍼런 힘줄이 불거졌다. 거대한 보석에 손가락을 박아 넣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이후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제 기운을 열심히도 받아먹은 ‘요람’이 이미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난 것처럼 굴고 있었다. 다른 ‘비스트’들의 물건이었더라면 쉽게 허물 수 있었겠지만, 부숴야 하는 것이 자생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자신의 힘이다 보니 루카스도 쉽지 않았다.
“진짜 한차민 죽는 꼴을 보고 나서야 말을 들을래?”
그래도 창조주를 이길 수 없는 노릇인지, 안에 잠들어 있는 노아의 의지가 발현된 것인지... 마지막으로 우그러트리듯 ‘요람’을 움켜쥐자 단단한 구 위로 조금씩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발광하던 빛이 천천히 사그라들더니 이내 쩌적이며 완전히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없이 ‘요람’에 피를 빨리던 차민의 몸이 툭, 깃털처럼 바닥으로 내려앉는 순간, 보석으로 이루어진 구가 완전히 부서지며 사방으로 파편이 날아갔다.
“후....”
불쾌한 통증에 루카스가 미간을 구겼다. 심장에 미약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자신의 기운이 연결된 ‘요람’을 인위적으로 파훼했으니, 조금은 영향이 미치는 모양이었다.
루카스는 불편한 가슴께를 몇 번 누르고는, 죽은 듯 잠이 든 노아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발치에서 미꾸라지처럼 헤엄치던 시커먼 것을 잡아다 알의 파편 안으로 던져 넣었다. 카터의 조각이 잘 유착됐는지 확인해야 했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살아... 있는 거 맞지?”
눈을 뜨지 않는 노아에게 물어봤자 당연히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리 없다. 머뭇거리던 루카스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노아의 코끝에 대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따뜻하고 규직적인 숨결이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요람’ 밖으로 끌려 나온 노아는 다행스럽게도 잘 버티고 있었다. 보통 이렇게 인위적으로 ‘요람’을 부수는 건 안에 든 생명에게서 끝을 볼 때뿐이다. 그만큼 안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아이는 기특하게 견디고 있었다.
“...그래, 한차민이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너까지 죽어버리면 안 될 일이지.”
어쩌면 노아는 내도록 루카스의 기운을 갈구했던 습관이 도움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요람’이 부서지던 순간, 흩어져 버린 자신의 생명력마저 야금야금 먹어치운 것 같으니.
루카스는 바닥에 조심조심 노아를 뉘고, 축 늘어진 한차민의 몸을 안아 들었다. 몇 시간 전까지 저에게 딱 달라붙어 울었던 차민의 뜨거운 체온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갑게 변해 있었다. 루카스는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이공간 안을 크게 휘적거렸다. 분명 여기 어딘가에...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것 같은데..., 아!
“…찾았다.”
루카스는 산더미 같은 물건들 아래 깔려 있던 것의 뾰족한 끝을 쥐고 힘껏 끌어당겼다. 언젠가 빙괴에게서 얻어낸 얼음 조각이 루카스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단 한 번, 시들고 상한 생명을 싱그럽게 되돌릴 수 있다던 묘한 물건. 당연한 말이지만 천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비스트’의 아이를 가진 한차민의 몸이 걱정되어서 십여 년 전에 겨우 한 조각 얻어 온 거였는데….
“...결국 이렇게 네 몸에 쓰게 될 줄은 몰랐어.”
흉하게 갈라져 피가 멎지 않는 차민의 손바닥 위로 얼음 조각을 가져다 대보았다. 희미하게 빛이 일렁였지만, 이미 상태가 좋지 않아서일까. 기대하던 효과만큼은 아니었다.
“...난 정말 인간이 싫어.”
어쩌면 이렇게 끝까지 이기적일 수 있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서 멋대로 죽어버리려고 하다니.
“한차민.”
원망스러운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이미 맥동은 형편없이 약했다. 빙괴의 얼음 조각이 차민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았다. 간신히 피가 멎고, 찢겨 벌어진 피부가 콰득,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오므라들었다. 칼로 그었던 흉터를 따라 손금처럼 얼음길이 났다. 그렇지만 한차민은 눈을 뜰 기미가 없었다. 너무... 늦은 것일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나도 사과할 게 있어. 내가 몰랐어. 아무것도 몰라서, 너에게도 잘못 알려준 것들이 있어. 네가 그렇게 가슴을 치며 울었던 일들. 네 부모님 이야기. 네가 혼자서 노아를 낳고 얼마나 울면서 나를 찾았는지. 그런 이야기들....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됐으니까. 그리고 너에게도 그때의 내 마음, 다시 알려주고 싶으니까.
“그래도 이 말은 듣고 죽어....”
루카스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렸다. 단 한 번도 꺾인 적 없던 강인한 고개가 맥없이 떨구어졌다. 대체 이 인간은 무엇이기에 자신을 이토록 절망하게 만드는 것인가. 대체 뭐라서, 죽음을 모르는 불사의 ‘비스트’를 이렇게까지 진창으로 처박을 수 있단 말인가.
“소용없는 일이야.”
어디에선가 비웃는 듯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가까이에서, 그러나 멀게만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전부 다 안배된 일이라고.”
테이블 위에 놓인 알의 파편이 제 존재를 알리고 싶은지 요란하게 덜그럭거렸다. 축축하게 젖어들었던 루카스의 눈이, 시퍼런 안광을 띠며 번쩍 들렸다.
“오랜만이야, 나의 반쪽짜리 형제여.”
그래…. 카터, 저 새끼를 잊고 있었구나.
“원래 신이 될 ‘비스트’는, 그래, 우드가의 수장은... 여기 머무르는 동안 가장 소중한 것을 잃도록 설계되어 있어. 네 아버지의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어머니, 부모의 부모들... 까마득한 족보를 전부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가 ‘반려’를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지독한 상실을 겪어야만 진정한 신으로 거듭날 수 있는 거라고, 저 위의 군림하는 자들이 결론을 내렸거든.”
카터는 이미 죽었다. 저건 영혼이라고도 할 수 없는 하찮은 사념의 조각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약간의 이지를 가지고서 잘도 입을 나불대고 있었다. ‘요람’ 안에서 약간의 기운을 얻은 데다, 생명의 정수가 깃든 알의 파편으로 옮겨간 탓일까.
“너도 기억이 안 나지? 부체든 모체든... 한쪽은 희미하게 생각이 나도 나머지 한쪽은 없었던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을 텐데.”
루카스는 형형한 눈으로 이미 죽은 카터의 조각을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할까. 이대로 저 알의 파편을, 카터의 새로운 그릇을 부숴버리면. 그는 이번에야말로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의 원흉에게 그렇게 쉽게 안식을 선물해주고 싶지 않았다.
“진정한 신이라....”
“그래. 전능하게 보이는 너의 그 피에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하나는 있었던 거야.”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상실을 짊어지고서, 영원토록 미물들을 돌봐야 하는 숙명이라니!
“너에게도 그 정도 페널티는 있어야 나 같은 천출이 억울하지 않지. 안 그래?”
희미하게 울리는 카터의 목소리에서 희열이 느껴졌다. 이 순간을 오래오래 기다렸다는 듯, 사념체 주제에 약간의 광기마저 내뿜을 정도였다.
“언젠가의 나에게 그 말을 전하고 싶어서 일부러 노아에게 네 피를 먹인 건가? 그렇게 꾸역꾸역 숨만 붙인 채로 있으려고?”
“그런 이유도 있지만. 애새끼가 너무 빨리 죽어버리면 그것도 곤란했으니까.... 잠깐만,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죽도록 후회하는 게 두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네놈을 쉽게 죽여 버렸다는 거야.”
루카스의 손끝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불길한 것이 스멀스멀 자신이 몸을 담은 그릇으로 다가오자, 카터가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네가 나에게 품는 열등감은, 어떻게 해도 날 뛰어넘을 수 없다는 울분은... 그래. 이해할 수 있어. 그렇지만 그게 애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쳐놓은 것에 대한 변명은 되지 못 해.”
파편을 둘러싼 루카스의 시커먼 기운이 서서히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성수를 맞은 사탄처럼, 카터가, 아니 카터의 조각이 담긴 그릇이 파르르 떨렸다. 멀쩡한 몸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사지를 뒤틀며 입에 거품을 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격렬한 움직임이었다.
“앞으로는 내가 덮은 봉인을 깬 ‘인간’만이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다. 그 그릇을 부수는 것도 오직 ‘인간’만 할 수 있어. 그전까지 네 영혼의 일부는, 그 안에 갇힌 채로 내도록 벗어날 수 없어.”
한낱 인간이 루카스의 힘을 물리칠 방법은 그 무엇도 없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은 카터의 조각이 더더욱 힘차게 발광을 했지만, 이미 봉인구에 둘러싸인 탓에 이제는 어떠한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로 그렇게, 영원히 살아. 네가 그토록 바라던 불멸의 삶이잖아?”
달그락거리며 초라한 그릇이 날뛰었다. 저게 사념체만 아니었더라면 펄펄 끓는 물에 처넣었을 텐데. 물리적 고통은 느끼지 못하는 상태일 테니, 이렇게라도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
물론 이런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말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차민과... 또 이미 죽은 그의 부모의 속이 후련해지진 않겠지만. 그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순 없더라도,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루카스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죽은 듯 누워 있는 한차민을 가만히 바라보다, 머뭇거리며 차가워진 가슴 위로 뺨을 대보았다.
아직은 살아 있다. 그저 살아 있기만 했다. 빙괴의 얼음으로는 간신히 숨만 붙일 수 있었던 모양이다.
“...전부 예정된 일이라고?”
고개를 들어 멍하니 높은 천고를, 위쪽의 어딘가를 바라다보던 루카스의 동공이, 이내 결심이라도 한 듯 확 좁아졌다. 팔을 뻗어 노아를 옆구리에 끼고서, 반대편 팔로는 차민을 끌어안았다.
“신이고 나발이고... 다 좆까라고 그래.”
얼마 전 노아에게 야수의 ‘요람’을 지어줄 때처럼, 루카스의 손이 발광하는 빛으로 번쩍였다. 가장 고귀한 피를 머금은 보석의 결정들이 루카스와 차민의 주위로 촘촘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노아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요람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미친 짓이었다. 이런다고 한차민이 멀쩡히 눈을 뜰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한계 이상으로 힘을 방출하자, 벌써 명치 아래가 욱신거리며 뻐근하게 당겨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덕에 제 불멸의 삶이 깨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따위 영원은, 권능은, 단언컨대 한 번도 바란 적 없었다.
“전부 내 손에 쥐여 줄 게 아니면, 다 필요 없으니까 위에 계신다는 분들은 엿이나 드시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