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Russian roulette I (7/8)

Russian roulette I

“...인간이, 인간 남자가 아이를 갖는다는 게.”

영원처럼 저를 바라보던 차민의 입이 느릿느릿 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짧은 망설임과 침묵에 소리가 고여 있는 것 같았다. 바싹 마른 잎사귀가 부서질 때의 파열음 같은, 날카롭고 허무한 그런 소리가.

“아직은...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라고 했잖아.”

당장이라도 꺼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목소리로, 차민이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고도 했고.”

이렇게 보니 차민은 제법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것 같았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맹약에 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서 보니 자기 나름대로 덫에 걸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말을 해보려 최대한 조심하는 듯했다.

“그냥 계속... 섹스나 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그랬지.”

“그렇게 해도 가능성은 확신할 수 없는 거라고 했고.”

“그래. 어쩔 수 없어. 인간은,”

“변수가 많은 존재니까.”

루카스는 문득 L&C의 회의실에서 그와 재회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뉴욕의 날씨가 원래 변덕스럽긴 했지만 약속 시간이 다가오니 저조차 눈을 뜨고 있기 어려울 정도로 눈이 부셨고, 그림자조차 지지 않는 광활한 빛을 등지고서 세월을 비껴간 것 같은 새초롬한 얼굴을 한 한차민이 사무적인 인사를 건넸다.

충격과 회한이 뒤섞여 있던 복잡한 시선. 몰아붙이는 저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던 어중간한 그 태도…. 분명 그때도 맹약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거겠지.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저에게 노아의 일에 대해, 카터가 벌인 비열한 짓거리에 대해 묻고 답할 시간이 있었다. 일부러 살살 차민의 신경을 긁고 못된 짓만 골라서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무 말 못 했던 것도... 역시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던 걸까. 아니, 분명 그렇겠지.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를 더듬던 루카스는 돌연 불편한 표정으로 자신의 명치 아래를 꾹꾹 눌렀다. 심장 바로 아래가 이상하게 따끔거렸다. 뾰족한 바늘로 안을 콕콕 쑤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루카스.”

“······.”

“나는..., 이제 더는 나 자신이 죽고 사는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그런 걸로 널 협박하거나 짜증나게 할 마음은 조금도 없어. 나는 그저.….”

동공의 초점이 훅 나가버린 것 같은 모습으로 차민이 중얼거렸다. 불어오는 바람을 더는 견디지 못한 촛불 같기도 했고, 검게 그을린 형태만 남은 심지 같기도 했다. 언제나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아 몰랐는데 어느새 한차민은 한참이나 작아져 원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니다. 어차피 이런 말을 해봤자 너는 모르겠지.”

“잘만 입 여는 걸 보니 맹약에 걸리는 주제도 아닌 모양인데, 왜 변죽만 울리고 말아?”

“인간은 ‘비스트’를 이해할 수 없다며.”

“그걸 왜 인간인 네가 결정하는데? ‘비스트’인 내가 들어봐야 판단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괜히 심술이 나기도 하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 영 거슬려서 못난 말이 자꾸만 툭툭 튀어나왔다. 실컷 꼬투리를 잡고 나니 조금 민망해져서, 루카스는 괜히 노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주제를 돌리고 싶기도 했고, 허옇게 질린 채 아이만 바라보는 차민의 낯이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제 손바닥에서 터져 나온 따뜻한 빛의 구가 재가 되어버린 작은 손과 발을 감쌌다. 여기저기 흩날리던 검은 덩어리들이 빛에 이끌려 모여들기 시작했다. 춤을 추듯 너울거리던 잿더미들은 다행스럽게도 예전과 같은 형태를 그리며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군데군데 돌처럼 굳어버린 부분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루카스는 제 힘으로도 지워지지 않은 얼룩 같은 검은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기에 카터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건가.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희망적이긴 했다. 몸 전체의 면적에 비교하면 그리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부위도 심장이나 얼굴도 아니었다. 제 힘을 잡아먹고 몸집을 키워볼까, 하던 상황이 이 정도에 불과하다면.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를테면 제 피를 채워준다거나.

“...저, 루카스. 부탁이 있어.”

“말해.”

“미안하지만 앞으로는 내가 부르면... 그냥 바로 와주면 안 될까.”

노아의 다른 곳을 훑어보던 루카스의 고개가 삐딱하게 들렸다.

“뭐? 나더러 아무 때나 네가 부르면 달려오라는 소리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차민은 옷 끝을 구기며 한참이나 말을 망설였다. 루카스가 성질을 이기다 못해 뒤에 산처럼 쌓여 있던 쇼핑백을 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예전에... 네가 내 몸 안에 이상한 걸 심어뒀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가장 내가 느끼는 곳에 닿아서... 그래서... 네 기준에 맞게, 흥분해야 너를 부를 수 있었잖아.”

... 아. 그랬었지.

루카스는 조금 당황해서 손등으로 입가를 쓸었다. 차민은 아마도, 제가 전화를 받지 않은 게 그 이유 때문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영구적인 장치가 아닌데. 몇 번 사용하고 나면 자연스레 사라져버린다. 아마 지금쯤이면 차민의 몸 안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던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물론 애초부터 나 좋으라고, 내 편의 봐주려고 심은 장치가 아닌 거 알아.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리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니까....”

“······.”

“노아의 몸이 이 지경만 아니게 된다면, 그때는 네가 하라는 거... 정말 뭐든지 다 할게.”

차민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편하게, 쉽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분명 애원이었다.

사무실이든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에서 다릴 벌릴 거고 이후론 내 몸에 뭘 넣든, 뭘 달아도 상관없노라고. 이전처럼 건방지게 조건 같은 걸 달지 않고 순순히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그러니....

“노아가 이상해지면, 바로 널 부를 수 있게 해줘.”

“...좋아.”

그제야 한숨 놓은 듯, 차민의 어깨가 크게 내려앉았다.

“어차피 카터의 일도 걸려 있으니까.”

어려울 것도 없었다. 깜빡 잊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숙원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글쎄, 그때는 유독 그런 방식으로 까칠하게 굴고 싶었다. 순순히 끌고 올 수도 있었는데 괜히 넘나드는 시공간의 뒤틀림 속에 그를 고스란히 노출시킨다거나, 굴욕적인 말들과 요구로 기어이 저를 째려보던 고개가 꺾이게 만든다거나....

정말 못 견디게 싫었더라면 말 한 마디로 차민을 진창으로 처박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나 공을 들여 그를 울게 만들고 싶었다. 꼭 재회한 연인이 괜히 상대방을 시험하고 괴롭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데, 뭐 하나만 묻자.”

노아의 곁에 무릎을 끓고 앉아 있던 차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카스는, 이제야 문득 생각이 나는 것이 있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물론 이것조차 맹약에 얽혀 있는 거라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뭔데?”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 말이야.”

실은 그렇게까지 궁금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 차민과 좋았던 시기에도 그를 제외한 다른 인간들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그의 부모님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 아예 관심을 끄고 살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자꾸만 허튼 생각을 해서 그런지 명치 아래가 자꾸만 싸르르 쓸리고 따끔거려서.... 확실히 자신의 주위를 좀 환기시킬 필요가 있는 듯해, 이참에 오래 묻어두었던 의문이나 해소해보기로 했다.

“나에게서 받아 간 돈도 적지 않았잖아. 그런데 왜 너는....”

“.....뭐?”

대수롭지 않게 꺼낸 말이었는데, 차민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멍멍한 눈을 하고 저를 바라보았다.

“뭐...가, 라니. 너의 아빠와 엄마 얘기잖아.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부모님이... 너를 따로 만난 적이 있다고?”

“어.”

“돈도… 받았다고? 언제?”

루카스는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연락했던 횟수를 떠올려 봤다.

“음, 제법 자주?”

“어, 언제?”

“이런저런 일들 생기기 이전에? 너희 아버지가 이것저것 손댄 게 워낙 많았잖아.”

저에게서 종적을 감춘 이후로, 차민은 차례로 부모를 잃었다고 들었다. 노아와 홍콩에서 머무르느라 떨어져서 지냈던 터라 자주 만났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족에게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는 차민의 성격상 많이 힘들긴 했을 터이다.

어쨌든 그들의 마지막 생활이 썩 괜찮았던 건 아니었다. 서류상에는 카터에게서 이것저것 잔뜩 받았다고 되어 있긴 했는데 대니얼의 보고에 따르면 그렇게까지 여유가 있던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고 했다. 의료보험이 그나마 잘 보장되어 있는 한국이 아니었더라면 그만큼이나 버티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그 당시에도 딱히 카터가 명의를 도용한 게 아닐까 의심하지 않았던 게, 이전에도 차민의 아버지가 워낙 허튼짓을 많이 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공동 출자랍시고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덥석 사업 자금부터 내어주고. 한인 사회에서 세 좀 불려보겠답시고 크게 계를 만들었다가 사기를 당해 다 뒤집어쓰기도 하고.…

“…왜?”

“왜 냐니?”

“왜, 돈을...너에게, 아니, 네가....”

“나에겐 얼마 되지도 않는 금액인데 자칫하다간 네가 장학재단에서 잘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연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당황한 기색이 뚜렷해서..., 루카스 또한 미간을 좁히며 차민에게 되물었다.

“설마 왜 내가 너희 아버지를 도와줬냐고 묻는 거야? 연구소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대출 상품을 모조리 긁어갔잖아. 제법 위험 수위여서 인사팀에서 말이 나오는 수준이었는데.”

그래서 매번 저를 찾다 못해... 카터에게까지 빌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라고?”

그런데 차민은 모든 이야기를 생전 처음 듣는다는 듯, 입술을 파르르 떨며 저에게 되물었다.

“아버지가... 뭘 어떻게 했다고?”

“한차민.”

“아니, 나는... 그런 이야기, 처음....”

한쪽 무릎을 꿇고서 노아를 붙들고 있던 한차민이 입을 틀어막으며 주저앉아버렸다. 뭐지. 지금 쇼하는 건가? 팔짱을 끼고서 한 걸음 물러선 채로 황망해하는 그를 지켜보던 루카스는... 핏기가 가신 입술을 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하는 차민을 보고 나서야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한차민?”

이봐. 야. 온갖 호칭으로 차민을 불러보았지만 넋이 나간 그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질 않았다.

“너 갑자기 왜 이러는데.”

차민은 그저 바싹 마른 입술을 미미하게 달싹이고 말 뿐이었다. 그래도 입이 움직이긴 하는 걸 보면 아버지의 돈 문제는 카터와의 맹약과 관계가 없는 이야기 같은데.

“나 지금 마지막으로 부르는 거야.”

“······.”

“한차민.”

인내심이 닳아가는 저의 목소리에 드디어 차민의 고개가 들렸다. 텅 빈 것 같은 눈동자는 허무보다 들끓는 심연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은 감정이 넘치기 직전인, 그런 쓸쓸한 공허함.

“몰랐..., 어. 전혀....”

간신히 차민의 입이 열렸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목소리가 아니라 거의 꺼지는 숨결에 가까웠다. 그것도 아주 미미하고 형편없는.

“처음 들어, 들었어....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여태 상상도 못 했다고. 띄엄띄엄 말을 이어가는 그의 목소리는..., 그래. 비통하게 들렸다.

루카스 또한 할 말을 잃고서 괜히 구둣발로 바닥을 툭툭 걷어차기만 했다. 인간이 이런 표정을 짓고, 이렇게 넋을 잃었을 때를 뭐라고 표현하는 건지 배우지 못했다. 방금 전의 차민에게서 무릎이 꺾인다는 말을 간신히 떠올리긴 했는데, 그보다 더한 실의에 빠진 상태는 어떻게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소파의 등받이에 걸터앉자, 울기 직전인 눈동자가 쪼르르 저의 행적을 좇았다. 괜히 민망해진 루카스는 검지로 콧등을 쓸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마... 처음 너희 집에 들른 이후였던 것 같아.”

*

자선행사는 거의 매주 열리다시피 했지만, 이번에는 그래도 플린 미디어의 모든 계열사가 총출동한 탓에 제법 규모가 컸다. 말이 자선행사일 뿐, 세금을 털고 정당한 로비를 구축하기 위한 사교의 장이나 다름없었다.

루카스는 침울한 얼굴로 커튼 뒤, 테라스에 숨어 있었다. 시간이 아까웠다. 한차민이 보고 싶었다. 둘이 함께 있으면 꽉 들어차는 것 같은 그의 작은 방에서 한참을 시시덕거리다, 따끈따끈한 몸을 꼭 끌어안고 잠들고 싶었다.

그렇지만 대외적인 나이에 어울리는 행동을 해줘야 계속해서 인간들의 세상에서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 이곳에서 그 어떤 마법보다 대단한 위력을 가진 재화를 잡음 없이 물려받으려면 귀찮아도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기 마련이었다. 오늘의 자선행사처럼.

“하…. 미치겠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고리타분할 일인가.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 오늘 행사가 열린 곳도 브루클린 하이츠여서 더더욱 차민의 생각이 났다. 저는 빌어먹을 오렌지 주스 때문에 기억이 희미했지만 어쨌든 그와 처음 만나 엉겁결에 몸을 섞게 된 곳도 브루클린 하이츠였으니까. 첫 데이트도 브루클린이었고.

“흠....”

루카스는 리노베이션을 막 끝내 마감재가 반짝반짝한 발코니에 턱을 괸 채로, 고만고만한 동네의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요즘 가장 흥미를 가지고 관찰 중인 것은 부동산에 대한 인간들의 집착이었다. 처음에는 레고블록을 수집하듯 차곡차곡 건물을 쌓아가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조그마한 것들이 인간들에게 어찌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고작 집 한 채, 빌딩 하나를 가지고서 신경전이 대단했다.

당장 이 동네만 하더라도 그랬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브루클린이 아니라 브루클린 하이츠에 살고 있다고 강조해서 말했다. 반대로 트라이베카에 사는 사람들은 뉴욕이나 맨해튼이 아니라 트라이베카에 산다고 힘을 주어 소개 했고, 햄튼의 주민들은 그런 그들에게 소유한 헬기조차 없이 그 좁은 동네에서 어떻게 사느냐며 은근한 멸시를 보냈다. 여기에 핍스에비뉴에 사는 사람이 요즘 햄튼은 너무 고리타분하지 않느냐고 고개를 저으면 완벽한 촌극이 완성됐다. 어떤 사교행사를 나가도 대화의 흐름은 항상 이런 식으로 흘러가곤 했다.

“잠깐 다녀올까....”

루카스는 턱을 괴고 있던 제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공간을 다루는 개념이 점점 완벽해져서 자신이 붙던 참이었다. 근거리가 아니어도 제법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 터라, 기왕 사람들 눈을 피해 숨었으니 이 틈에 잠시 차민을 보고 올까 싶었다.

“흐, 흐음.”

침대에 엎드린 채 펜 끝을 물고서 발을 까딱이는 어린 연인을 떠올리자 가슴 안쪽이 뻐근하게 부푸는 기분이었다. 아마 제가 공중에 둥둥 떠서 창을 두드리면 기겁을 하며 침대에서 쿵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허겁지겁 창문을 열다가 편안하게 쉬고 있던 제 모습이 민망한 듯 서둘러 안경을 벗고 머리를 쓸어 올리겠지.

“저, 루카스… 군?”

한참 말랑말랑한 차민의 몸과 어벙한 행동거지를 떠올리던 루카스는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엔 저를 루카스라고 친근하게 부를 이도 없을뿐더러, 막 차민을 보고 오려 몸을 움직이려던 참에 방해꾼이 나타나자 기분이 언짢았다.

“음,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아아.”

무어라 쏘아붙일 준비를 하던 루카스는 어색하게 굳은 표정을 풀었다.

아아.... 아마도 제 기억이 맞다면, 어색한 슈트 차림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는 이 중년의 남자는... 한차민의 아버지일 것이다.

“차민이 아빠입니다. 또 우드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고....”

“아,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의 부친이니 먼저 악수를 청해주길 기다렸지만, 뻘쭘하게 자기소개를 마친 그는 멀거니 저를 응시할 뿐이었다.

“아, 이런….”

보다 못한 루카스가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자, 차민의 부친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바지춤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았다. 마주 악수를 하는 마른 손이 조금 떠는 것도 같았다.

“아무래도 이런 문화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아서요. 실례 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이렇게 큰 행사에 초대받은 건 처음이라 더 어색하고 그러네요.”

음.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개 연구원이 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으로 아는데. 의아함에 눈썹을 구부리자, 차민과는 썩 닮지 않은 그가 먼저 눈치를 채고서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 제가 맡은 실험실을 배경으로 POR, 그러니까 플린이 소유한 제작사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방영 후 반응이 제법 좋았습니다. 그래서 초대를 받았는데... 팀장님이 혼자 가기는 싫다고 하셔서 전원 같이 오게 됐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우드 연구소라서 가능했던 일 같다며, 차민의 부친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차민과 가까워지고서 연구소 직원들의 프로필을 열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사진을 봤을 때는 제법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으음.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 같은데, 확실히 실물은 느낌이 좀 다른 것 같았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차민과 닮지 않은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한 가족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얼굴을 이루는 구성은 비슷하긴 하다만.... 인상이 너무나 달라서 그런 것일까?

“사실 그날 많이 놀랐습니다. 저희 애와 친구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터라....”

“한차민이 집에선 제 얘기를 안 하던가요?”

“어, 음...,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 겁니다. 워낙 이것저것 살갑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성격도 아니고…. 아무래도 차민이나 저나 루카스 군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다 보니까....”

“이상하네.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의문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이곳엔 기반도 없던 사람을, 그것도 동양인을 모시고 와서 채용을 했을 정도라면 순전히 그의 능력이 잘난 탓일 테다. 차민이 받고 있는 해택도 부정한 방법을 써서 얻은 것이 아니라 연구소에 재직 중인 우수한 직원들에게 주어지는 복지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까지 스스로를 낮추는 걸까.

“누가 들으면 제가 일부러 그 자리에 꽂아준 줄 알겠어요.”

“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자신감을 가지세요. 미국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동양인을 연구원으로 데려오는 경우는 흔치 않아요. 한차민도 교내에서 우수한 학생이고요.”

“차민이가요?”

괜히 부모가 아닌지, 차민의 칭찬이 나오자마자 어색했던 그의 얼굴이 조금은 환해지는 것 같았다.

“하긴. 팔불출 같은 자랑이지만 차민이가 워낙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성격이긴 합니다.”

뭐지? 이렇게 보니까 차민과 닮은 것도 같고. 그의 부친은 전반적으로 유약하고 우울한 느낌이 강했는데, 밝은 표정을 짓자 아주 약간은 아들과 비슷한 느낌이 되는 것도 같았다.

“뭐... 한차민과는 잘 지내고 있으니까,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아이고, 아닙니다. 말씀 주신대로 제가 잘해야죠.”

“그래도 이 동네에선 교회보다 제가 더 쓸모가 있을 것 같은데요.”

“하, 하하.….”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요즘 따라 차민이 부모님 덕에 교회에 끌려가게 생겼다며 울상을 짓던 참이었다. 원래는 부모님도 종교에 관심이 없었는데, 어쨌든 미국 내 한인 사회에서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고 살아가려면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아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다고.

“빈말 아니니까 편하게 연락 주세요.”

이미 몰아치는 에세이에 차민을 빼앗기고 있는 참이었다. 데이트하기 딱 좋은 주말 오전까지 다른 신에게 내어줄 순 없었다.

저번에 차민이 했던 말에 의하면, 커뮤니티 내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면 얻는 이득이라고 해봐야 싸고 좋은 병원을 소개받거나 괜찮은 물건을 사고파는 일 정도인 것 같았다.

루카스는 기꺼이 사용인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그 정도가 뭐 어려운 일이라고. 자신과 연락할 것도 없이 우드가에서 부리는 사람들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확히 일주일 후, 비서가 곤란한 얼굴로 루카스를 찾아왔다. 갑자기 전화를 걸어선 10만 달러 정도의 도움을 요청하는 인간이 있다고, 그런데 그 사람이 한차민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있다고.

“어떻게 할까요?”

비서가 눈치를 보면서 슬쩍 물어왔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한차민의 이름을 입에 올렸는데, 무시할 수 있을 리가. 딱히 그를 감추지는 않았지만 대놓고 여기저기 내놓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서 그 핑계를 대는 걸까.

뭐, 허튼 수작이나 부리려는 거면 이참에 좋은 본보기를 만들어주면 될 터였다. 말없이 손을 내밀자 비서가 메모를 건네주었다. 루카스는 무감한 시선으로 낯선 번호를 응시하다, 핸드폰을 공중으로 붕 띄웠다. 곧 종이에 쓰인 번호가 저절로 꾹꾹 눌리더니, 이내 익숙한 신호음이 들렸다.

-여, 여보세요?

두어 번은 울렸으려나? 내도록 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기다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누구시죠?”

- 아… 예. 안녕하십니까.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 귀찮은 듯 꾹 감겨 있던 루카스의 눈이 그제야 가늘게 뜨였다. 긴장으로 말을 더듬는 말투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 그... 차민이 아빠 되는 사람입니다.

“아....”

팔걸이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탁 풀렸다. 적어도 허튼 놈들이 한차민을 팔아먹거나, 그를 해코지하겠다며 협박이나 하려던 건 아니니 다행이었다.

뭐,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를 찾는 전화가 다소 난데없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10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했었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차민의 부친이 저에게까지 금전적 도움을 요청하게 된 흐름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런 말을 하기 좀 그렇지만, 인간이 그런 부탁을 하기에 제가 쉬운 상대는 아닌 것으로 아는데.

“말씀하세요.”

눈짓으로 부리는 사람을 내보내면서 이유를 묻자, 차민의 부친이 대단한 각오라도 하는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 지난번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달라고 하셨는데.… 물론 그 말을 기억하고서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드린 건 아닙니다. 우연히 일이 좀 겹쳐서..., 방금 전까지도 제가 여기 저기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서두가 길었으나 어쨌든 돈을 빌려달라는 말이 맞기는 했다. 잘 아는 사람들과 새로 지을 예정이라던 레지던스에 투자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법이 까다로웠고,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고….

- 휴. 미국 은행이 이렇게 엄격하다는 걸 몰랐습니다. 한국은 안정적인 직업이 있고, 신용도가 크게 나쁘지 않으면 해주긴 해주거든요. 대출 사유를 묻기에 투자나 펀드 같은 걸 말했더니 그쪽 방면으로 경험도 없으면서 이렇게 큰 액수는 빌려줄 수 없다고 딱 자르더군요.

“차라리 연구소 내의 보증 프로그램을 알아보시지 그랬어요.”

- 아… 그런 게 있나요?

“아마 지정된 은행과 지점이 있는 것으로 알지만... 이율도 나쁘지 않고 한도도 적지 않아서 직원들이 자주 이용하는 것으로 압니다.”

우드가가 소유하고 있는 기업들의 좋은 인재들이 절대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자녀들의 그린우드의 입학 허가였고.

-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렇지만 신청하고 허가가 나는데 시일이 조금 걸릴 수도 있으니 정 급하시다면 도와드릴 순 있습니다.”

- 아….

가진 게 많은 것과 생판 남에게 호구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하물며 한 종을 책임지는 수장급도 아니고, 한낱 인간의 사정을 봐줄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진 빚이, 아들의 평범한 삶에 영향을 주지 않을 리가 없다. 루카스가 지금 관대한 처사를 베푸는 이유는 오직 그거 하나 때문이었다.

- 실은, 지금 메워야 하는 것이 차민이 몫의 돈입니다.

어디로 송금하면 되는지 묻고 끊으려던 루카스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 돈이 한차민의 것이라고요?”

- 네. 차민이 대학 보낼 때 쓰려고 모아놓은 돈이었어요. 동양인은 장학금 받기가 힘들고... 다른 주로 가면 액수가 배로 불어난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재테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루카스는 혀로 볼 안을 굴리다, 침음하며 이마를 짚었다. 제가 영원을 산대도 인간들의 심리를 완벽히 이해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아니. 그렇게나 자식을 아낀다면서, 어떻게 그 학비나 생활비에 손을 댈 생각을 하지? 뚜렷한 목적이 있는 돈을, 자기 딴엔 큰 액수를 투자처에 대해 잘 알아보지도 않고 멋대로 써버린 것도 놀랍고, 심지어 집사람에게도 비밀로 하고 투자했다면서 멋쩍게 웃는 것 또한 경악스러웠다.

- 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네.”

- 이 이야기, 차민이에게는 비밀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뭐? 루카스는 어깨와 귀 사이에 괴고 있던 핸드폰을 빼어 내며, 멀뜽히 액정을 바라보았다. 지금 장난하나? 설마 한차민한테 미주알고주알 죄다 일러바치리라고 생각한 건가?

이 아저씨가 저를 뭘로 보는지 모르겠다. 네 아버지가 널 위해 모아뒀다던 그 돈,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상한 곳에 다 써버렸다고? 이건 인간뿐 아니라 ‘비스트’들의 사회에서도 경우가 없는 행동이었다.

- 그 애 성격상, 이런 일을 알고 나면 루카스 군과 어울리기 부담스러워할 게 뻔합니다. 못난 저 때문에 친구들끼리 의까지 상하면 제가 차민이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아서....

“하아....”

제가 그렇게 입이 가볍지는 않다며 슬쩍 짜증을 내려던 루카스는,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또 얼이 빠져서 허허, 웃기만 했다.

본인이 잘못해서, 루카스 자신의 기준으로는 마뜩찮은 방식으로 대강 일을 봉합해놓고서는, 그 못난 감정의 찌꺼기들을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과 자기 자식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말이야 그럴싸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위로하기 급급한 못난 모습에 구역질이 났다.

차라리 남자가 흉악범이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애초부터 핀트가 나가버린 악의로 똘똘 뭉친 놈들의 심리를 이해할 이유가, 알아줄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끝까지 제 의도는 선했다고 굳게 믿는 차민의 부친을 보고 있자니... 얼이 툭 빠지는 기분이었다. 가장 아끼는 혈육의 인생을 수렁으로 밀어 넣을 뻔하고서도, 저는 열심히 했는데 잘 안 됐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딱하게 여기고 있다니.

대놓고 원망할 수도 없게 겹겹이 가면을 두른 낯선 형태의 악의가 구역질이 났다. 저런 사람 밑에서 자라는 동안 알게 모르게 마음이 다쳤을 차민을 생각하니 조금 울적해지기도 했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휴대폰을 바닥으로 내던지면서, 루카스는 창문 밖으로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에 시선을 주었다. 지난번에 차민이 방문했던 이후로 한송이도 죽이지 않고 살뜰히 돌보는 중이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훈풍을 꾸며내느라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긴 했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었다.

언젠가 온 세상에 사시사철 장미를 피워도 끄떡도 없는 때가 오겠지. 그때쯤이면 차민을 데리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저런 아버지 밑을 떠나,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좋은 곳으로.

잠시 정원을 내려다보던 루카스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둘렀다. 비서진에게 송금을 부탁하는 허공 위의 메시지가 몇 번 깜빡이다, 이내 수신인을 찾아 사라져버렸다. 금빛 가루가 잘게 부순 별사탕처럼 제 발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이후로도 남자의 조심스러운 연락은 계속되었다. 차민이 모든 의지로 저를 거부하고 종적을 감추고서도, 몇 번이고.

*

“네가 말하는 부모님이 너무 낯설어서... 이상해.”

차민이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간신히 울음을 참는 듯한 모양새였다. 나한테는, 전혀, 몰랐는데. 그 비슷한 말만 내도록 반복하면서.

루카스는 차가운 바닥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는 노아와, 온통 진이 빠진 얼굴로 그 곁에 주저앉아 있는 차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아무것도 몰랐다는 차민의 말이 전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만약 거짓이 아니라면. 어쩌면 저와 차민 사이에 서로가 몰랐던 일들이 많이 있었던 게 아닐까. 카터의 계략으로든, 운이 좋지 않았든. 의도치 않게 꼬여버린 일들이 겹겹이 쌓인 것은 아니었을까.

일순 세상의 축이 크게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루카스는 고개를 짧게 내저으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묵직하고 아린 감정의 덩어리가 발끝부터 스멀스멀 치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끝 간 데 없던 지난했던 원망과 미움이, 슬픔이 어쩐지 방향부터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네가 홍콩에 숨은 이후로도 한국에서 몇 번이나 연락을 받았어. 내가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것도 의아했어. 연구소에선 잘렸지만 우드가와 카터가 적지 않은 돈을 지원 해줬거든. 인간들의 기준으로.”

“카터?”

“그래, 카터.”

그래서일까. 살면서 다시는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던, 목숨 같았던 ‘반려’를 그만 놓아버려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던 그 일이, 해묵은 물음이... 절로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그간 루카스가 품었던 가장 자비로운 시나리오는 아무것도 몰랐던 차민이 부모의 욕심에 휘둘려 저를 배신했다는 것 정도였다. 어떠한 변명도 않음으로써 최악의 상상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렸던 건 한차민 본인이었지만.

“...처음부터 내가 아니라, 카터를 노리고서 그 약을 만들어서 널 임신시킨 거라고 했잖아. 너희 아버지는.”

“…하.”

하, 하하....

연극의 지문 같은 과장된 공명음이 넓은 거실을 울렸다. 차민은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로, 기계처럼 입만 벌리며 웃었다.

공허하고 시린 웃음이었다.

그 속 터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진부한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상태를 가리켜 왜 굳이 다른 말이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그 연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공허하고, 시린. 그 말 외에는 지금 한차민의 쓸쓸한 얼굴을 묘사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으므로.

“그래? 아버지가, 카터가… 그렇게 말을 했어?”

“그래.”

“아아. 루카스, 너는... 그걸,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당연히 그 새끼의 말은 믿지 않았지. 하지만 검사 결과가 나왔을 땐 싫어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어.”

“검사?”

“카터에게서 연구원이 말한 약의 성분이 검출됐으니까. 집안 늙은이들도 결과물을 보고 동의했고. 카터 그 새끼가 아무리 비열한 술수에 능하다고 한들, 우드의 명예에 비루한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늙은이들 전부를 꼬드길 순 없어. 원로들이야말로 ‘비스트’의 순수한 핏줄에, 타고난 강함에 목숨을 걸고 있는데 반편이인 카터가 꼬드긴다고 넘어갈 턱이 없지.”

불편한 침묵이 고였다. 두 사람을 둘러싼 분위기를 걷어 내 형태로 만든다면 시커멓고 우중충한 연기 같을 게 분명 했다.

“그 맹약이라는 거, 참 편리하네.”

루카스가 툭 던진 말에, 잔잔해지는가 싶었던 수면 위로 다시 큰 파문이 일었다.

“맹약 덕분인지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 것 같으니 말이야.”

벙어리처럼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차민이 쩡하니 얼어 있던 표정을 풀고는 코웃음을 쳤다.

“사과? 내가 너에게? 내가 사과를 왜 해야 하는데?”

“결국은 네 인간 아버지가 좆같이 군 게 가장 큰 원인이었고, 너는 그저 내가 개새끼였다고 원망만 하다가 일이 이 모양으로 흘러간 거 아니었나?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뭘로 들은 거야?”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 그대로 멈추어버렸는지 얕게 솟은 어깨가 조금 떨리는 듯도 같았다. 저런 반응을 보아하니 아직까지는 맹약의 제지를 받는 게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 맞아. 네가 전부 몰랐다고 치자고. 억울할 수도 있어. 그런데 그렇다고 네가 좆같이 구는 바람에 내가 근 10년을 뺑이 쳤던 게 없던 일이 되나? 이 빙빙 꼬인 일의 유일한 실마리라곤 네가 낳은 애새끼 하나뿐이었는데, 그걸 꽁꽁 감춰두고선 카터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잖아.”

방금 내던진 말이, 충격을 받은 차민의 상처를 더 크게 할퀴고 벌어지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래도 채근을 멈출 수 없었다.

끙끙 앓다 못한 차민이 뒤늦게야 아이를 가진 것 같다는 고백을 했을 때, 이미 루카스는 원로들을 통해 모든 설명을 전해들은 뒤였다.

그래서 뒤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계속계속. 제법 오랫동안.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었다고 차민이 설명만 해주었어도, 결국은 풀어졌을 것이다. 차민은 분명 제 ‘반려’였으니, 카터의 아이인지 자신의 아이인지 아리송했더라도 종래엔 받아들이고 품어줬을 것이다. 쉽게 데리고 놀려고 인간인 그를 자신의 영원한 반쪽으로 인정했던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차민에게선 끝까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카터와의 맹약이 자신의 짐작보다 훨씬 이전에 맺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입이 열리지 않는다면. 적어도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빙괴와 협상하러 갔던 그 틈을 타고서 그렇게 쉽게 훌쩍 떠나버려선 안 되는 거였다. 얼마간 가까이서 지내다 보니 차민의 이상함을 깨닫고 맹약에 대한 단서를 금세 찾아내지 않았던가. 만약 그가 떠나지 않았더라면 더 빨리 캐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더라면... 아주 많은 것이 달라졌겠지.

“네가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찾아와서 화풀이라도 했다면, 카터가 아니라 나에게서 피 한 방울이라도 받아 가면 어떨까 고민이라도 해봤다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어. 그런데 넌 그러고 싶지 않았잖아. 네가 품은 오해가 뭐였든 넌 날 찾을 생각도 안 했지, 난 그게 미치도록 화가 나.”

“······.”

“한차민. 왜 아무런 말이 없어?”

이번에야말로 혀가 묶여버린 듯, 차민은 덤덤한 무표정이었다. 빌어먹을 제약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저에 대한 욕? 저주?

“이제 원망할 대상이 사라지니까 어쩔 줄을 모르겠어? 그래도 네가 했던 삽질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고?”

루카스는 조금 전 울컥 치미는 감정을 누르던 차민의 얼굴과, 지금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한 차민의 무표정한 얼굴을 번갈아가며 그려보았다. 비교해볼 심산으로 일부러 모진 말을 쏟아낸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기억해둘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도 몇 번씩이나 이 주제가 언급되면 스스로 입을 꾹 다물 때와, 차민 스스로의 의지가 아닐 때가 계속 오가곤 할 테니까.

“...아버지가 너한테 빌린 금액이, 그래서 총 얼만데?”

한참 후에 입을 뗀 차민은 루카스의 기대와 전혀 다른 화두를 던졌다. 아마 그가 오랜 계약에 묶인 몸이 아니었더라면…. 그걸 몰랐더라면, 어쩌면 이 대목에서 아예 핀트가 나가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왜. 네가 대신 갚기라도 하게?”

“그래.”

당장이라도 땅 밑으로 꺼질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분명 진심이었다.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10만 달러를 부탁한 건 생각이나지만.... 글쎄.”

크고 작은 액수로 몇 번이나 부탁을 했고, 송금이 아니라 현찰로 요구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자... 한차민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사고를 치는 가족에 관한 일은... ‘비스트’인 네가 이해를 못 하는 거야 당연하고…, 사실 인간들도 쉽게 이해하지 못 하거든. 인터넷이나 라디오에 이런 사연이 소개되면 다들 벌떼같이 달려들 거야. 그런 가족과는 차라리 연을 끊으라고.”

차민은 간신히 울음을 참는 것처럼, 반질거리는 눈동자를 하고서 한참 동안 높은 천고를, 반짝이는 샹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근데 신기하지? 듣다 보면 속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한 사연인데... 이런 일이 제법 흔해. 그리고 대부분은, 이런 일을 알게 된다고 한들 단칼에 끊어내지를 못해. 내가 본 숱한 사연들의 결말도, 80퍼센트 정도는 비슷했어.”

“결국은 가족 구성원이 다 같이 수렁으로 말려들어간다고?”

“그래. 당사자에겐 이 끔찍한 불행이 이미 주변엔 셀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나는 일이라, 답답할지 언정 경악할 수준까지는 아니라는 게... 신기하지 않아?”

차민이 하는 말이 이해는 갔지만, 의도를 알기는 어려웠다. 아버지가 사고나 치고 다녔던 걸 모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어쩔 수 없다는 뜻일까. 저 또한 별도리 없이 같이 수렁으로 걸어들어 갔을 뻔한 인간이라고?

“...아버지가 너에게 빚을 졌다는 건... 정말 몰랐어. 알았더라면 절대 손 벌리는 일 없었을 거야.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너는 이것도 진심이 아니라고 여길 것 같지만.”

차민이 손등으로 코끝을 대충 훔쳤다. 끝내 울지는 않았지만, 작게 쿨쩍이는 소리가 났다.

“번거롭겠지만 네 비서에게 부탁해서 오래전 통장 내역이라도 뒤져보면 송금 기록이 나올 테니까. 그걸로 대략적 금액을 추산해보면 될 것 같고.... 이번 소송에서 이기면 내 몫으로 떨어질 돈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아. 거기서 제하고 남은 금액을....”

“한차민, 너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루카스의 인내심도 딱 거기까지였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나 갚는 게, 미안하다는 말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손을 까딱여 바닥에 너부러진 차민을 코앞으로 끌어당겼다. 양 볼을 으스러질 듯 움켜쥐자 이거 놓으라는 듯 거세게 반항했다.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면 아직은 네 의지대로 말을 할 수 있는 상태란 말인데. 그래도 입을 안 여네. 이게 인간의 그 대단한 자존심이야?”

길게 뻗은 눈꼬리가 눈물로 반짝였다. 보통 우는 얼굴은 엉망진창이던데. 한차민은 이럴 때 가장 예쁘고 야한 얼굴이 된다.

“너도 나에게서 사과를 받고 싶은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 네 논리대로라면 나도 돈으로 해결하면 되는 건가?”

“므슨.... 으그...., 느.....”

“노아를 건사할 돈도 없으면서 수임료를 안 받겠다니. 자존심 챙기느라 주제 파악도 못 하는 헛소리는 적당히 해두고.”

루카스의 짧은 인내심은 금방 동이 나버렸다. 한차민은 인간이라는 방패를 내세워 자꾸만 저에게 선을 긋는데, 스스로의 불행에 눈이 멀어 자신의 말은 귀담아 듣는 것 같지도 않는데.... 곧 신이 되어 군림할 우드가의 수장이, 하등한 인간 따위에게 대체 어디까지, 언제까지 기회를 줘야 한단 말인가.

“나랑 자. 화대는 넉넉하게 쳐줄 테니까.”

어차피 노아 살리고 싶으면 아이를 낳아야 하고, 결국은 나랑 몸 섞을 거, 끝내주게 해주면 돈까지 준다는데.... 너에겐 남는 장사 아닌가?

화대라는 말에 차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꼭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당장이라도 꺼지지 않는 게 이상한.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그런.

“루카스!”

우악스럽게 그의 손목을 잡아끌자 제 이름이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루카스, 이거...!”

“시끄러워.”

가슴 안 이곳저곳을 콕콕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이 점점 더 넓게 번지고 있었다. 안에서 누수라도 있는 모양인지, 심장이 거꾸로 뛰는 기분이었다.

이젠 모르겠다. 루카스는 인간들의 평범하고 뻔한 불행을 이해하는데 지쳐버렸다.

그래도 딴에는 노력하겠다고, 완벽할 순 없더라도 조금은 진정으로 받아들여보겠다고 애썼다. 그렇게 내다 버린 시간이 꼬박 10년이었다. 그렇지만 대화의 물꼬가 조금이나마 트인 지금도 달라지는 것이 별로 없지 않은가.

한차민은 제 부모의 부정不正이 까발려져도, 여전히 저를 보고서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혈육이란 이름으로 뒤에서 계속 발목을 잡아왔던 그 인간들을 원망하는 대신, 제 눈을 보며 다 삭아 재가 되어버린 것처럼 굴었다.

그간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고, 나는 까맣게 몰랐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대신 자신의 부모가 몰래 빌려갔던 돈은 전부 갚겠다는 모진 말이나 했다.

있을 법한 흔한 일이라고 하면서도 다시없을 세기의 비극을 겪는 중인 양 구는 것도, 꼬인 실타래처럼 엉망이 된 일에 손도 못 대고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는 회피적인 자세도, 그 어떤 야수들보다 핏줄에 지고 마는 약한 모습도, 자신에게만 이해와 노력을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도.… 제아무리 영원을 산다고 한들, 인간을... 아니, 한차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싶었다.

“루카스! 갑자기 왜 이래, 정말!”

침대 위로 거의 내던져진 차민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봐야 금세 길쭉한 제 몸뚱이로 인해 시야가 전부 차단되어 버렸지만.

“거실 바닥이나 소파에서 엎드리게 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

열린 방 문 너머로 침대가 보이기에 일단 여기로 밀어 넣고 본 건데, 방의 간결한 구성을 보아하니 게스트룸 중 하나인 듯했다.

나쁘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곤 거대한 침대와 클로짓, TV 정도가 전부인 터라 불필요한 생활감도, 한차민이 머문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여기 처박혀서 내내 그의 구멍을 들쑤셔도 쓸데없는 죄책감 같은 게 들지 않을 듯했다.

“쓰러진 애새끼 바로 옆에서 박아댔든, 눈앞에 보이는 쇼핑백들 죄다 불태우고 소파 위에 엎어두고 박아댔든... 둘 중 하나일 뻔했던 걸 겨우 참았으니까.”

연약한 몸을 시트 위로 밀친 채, 머리 옆으로 손을 짚자 한차민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서글픔과 두려움으로 범벅이 된 눈동자 위로 자신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실은 이 집을 아주 오래전에 구해 뒀다고 하면.… 그러면 이 얄미운 인간은 또 어떤 얼굴을 할까.

복수라도 하듯 매번 너를 괴롭힐 방법이나 떠올리다가, 애를 붙들고 갑자기 절박하게 나에게 매달리니 엉겁결에 마음이 둥둥 떠버려서.

옆구리에 뜨끈한 어린애를 끼고, 난데없이 울기 시작한 너를 달래 식당에 들어갔을 때…. 사실 그때도 여전히 네가 미웠지만, 그렇다고 그저 밉기만 한 것은 또 아니어서. 켜켜이 오랜 감정이 쌓인 채로도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도 잠깐 들었다고 하면... 그러면 너는 또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무릎 끓고 잘못했다고 빌기라도 하면....”

“······.”

“그러면... 너, 다 그만둘 거야?”

길었던 맹약의 침묵이 다른 습관에도 영향을 준 것일까. 차민은 고요히 울었다. 울면서, 애원하듯 물었다.

“이렇게 끔찍하게 얽힌 거..., 다 그만두고..., 우리 이제.….”

정말로 그만하자.

헐떡이는 숨과 울음에 먹혀, 차민이 중얼거리는 마지막 문장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참고 또 참다가 폭발했는지 서러워 보이는 눈물은 한계까지 팽팽하게 차오르고서야 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렸다.

루카스는 대답 대신 구부린 검지로 차고 뜨거운 그의 눈물방울을 길게 훑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협상을 하려 드는 한차민이 지긋지긋했다. 아프고 지쳤으니, 이제는 제 마음대로 굴어볼 생각이었다.

*

“아.....”

벌어진 차민의 허벅지가 크게 움찔거렸다. 뜨거운 기름이라도 튄 것처럼 몸을 움찔거릴 때마다, 바싹 일어선 그의 성기가 크게 꺼덕였다. 귀두만이 반질반질하게 젖어 있을 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매끄럽고 아무것도 흘리지 않은 듯 깨끗했다. 박힌 틈으로 줄줄 흐른 정액 때문에 엉망이 된 뒷구멍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아...., 아앗!”

반짝이는 보석들이 차민의 젖꼭지에, 귓불 아래에, 회음에 박혀 있었다. 특히 음낭 바로 아래 박힌 보석은 꼭 진짜 피어싱처럼 보여서, 여길 뚫느라 누구의 앞에서 이렇게 다리를 벌리고 신음을 참았는지 채근하고 싶을 정도로 야했다.

“흐, 아..., 앗!”

도드라진 유두를 잘근잘근 깨물다가 핥아 올리자 겹치고 있던 아랫배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차민의 성기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도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무엇도 사출할 수 없었다.

“루… 카, 흣, 아, 으으….”

“사정하고 싶으면 말해. 방법 알잖아.”

루카스는 차민에게 ‘벨’과 ‘버튼’을 모두 사용한 상태였다. 그것도 제법 아낌없이.

그래서 지금 차민의 몸은 루카스가 명령하지 않는 한 사정할 수 없었고, 지금 가장 느끼는 신체 부위에는 반짝이는 보석들이 달라붙어 존재감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삽입도 쉬웠고, 흥분을 고양시키는 건 더 쉬웠다. 차민은 이따금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히기도 했지만, ‘벨’을 사용한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 싫…, 어, 그만.….”

“이 와중에도 거짓말을 하는 게 신기해.”

“하... 아, 앗!”

허리를 조금만 쳐올려도 젖은 구멍이 루카스의 것을 당겨 물었다.

“정말, 힘...들어, 나, 찢어질..., 것 같, 아....”

“그것도 거짓말이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 또한 ‘벨’을 수십 개 퍼부은 덕이었다.

며칠 전에도 착실히 차민의 뒤를 풀어주긴 했다. 그렇지만 그건... 그래, 섹스라기보다... 이후의 밤을 대비해 연약한 인간의 몸을 미리 달래준 것에 불과했다. ‘벨’ 같은 야수들의 특수한 물건이 아니었더라면 이 좁은 구멍에 지금처럼 거침없는 삽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지금 사용한 도구들 중 무엇이든 하나만 있어도 삽입은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홧김에 있는 대로 다 털어 넣어 성감이 몇 십 배로 늘어났으니…. 고작 인간인 한차민이 쾌락에 절어 버둥거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긴 했다.

“너, 노아한테는 나에게, 하…, 미안하다고 했다면서.”

“웃기는, 흐, 웃기..., 는 소리... 집어치우고.….”

“후…, 한차민. 이제 정말로 지겨워지려고 하니까 밑도 끝도 없이 우겨대는 건 그만 좀 해.”

“으, 응…, 아, 안... 돼, 그만, 아, 아!”

여태 단 한 번도 토정하지 못한 한차민이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가벼운 절정이 온몸을 훑고 가도, 루카스가 허락의 말을 하지 않는 한 사정을 할 수 없다. 시트를 움켜쥔 손은 허옇다 못해 거의 보랏빛으로 질려 있었다.

땀에 잔뜩 절어, 거의 물에 담갔다 꺼낸 수준인 차민의 머리칼을 보며, 루카스는 대충 시간을 헤아려보았다. 음.… 두어 시간은 지났던가. 모르겠다. 일단 그사이 저는 세 번 정도 싸긴 했는데.

“.....!”

내내 경련하듯 벌벌 떨던 차민의 몸이 갑자기 툭, 하고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꾸역꾸역 견디다 못해 기절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야수였다. 그것도 장차 신이 될 예정인 최상종의 야수인지라, 인간의 까라진 육신쯤이야 숨 쉬는 것보다 편하게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흐, 으.....”

다시 억지로 눈이 뜨인 차민은 크게 몸을 들썩였다. 따뜻한 빛이 자신의 몸을 감싸며 재생시켜주는 광경을 보니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몸 여기저기에 박혀 있던 보석들이 죄 요도 끝에 달라붙기 시작하자 끅끅거리는 서러운 울음소리가 조금 더 커지는 것도 같았다.

“...해, 줘.”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는 지친 팔이, 간신히 루카스의 어깨를 쥐었다.

“그만, 사정하게... 해줘.”

제발, 하고 느리게 말할 때 혀끝이 살랑이다 사라지는 모양이 선명했다. 루카스는 핀을 뽑아내듯 엄지와 검지로 터질 듯 부푼 선단을 길게 쓸었다. 차민의 좆을 쥔 채로 위아래로 빠르게 왕복하자, 꾸역꾸역 쌓인 절정이 터진 듯 고개가 뒤로 크게 꺾이다 순식간에 픽 넘어갔다.

“한차민.”

그러면서 어찌나 뒤를 조여 대는지 살짝 아플 정도였다. 인상을 쓰며 그를 불렀지만, 지금 차민은 자신의 몸을 어떻게 통제할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젖은 내벽이 다급하게 루카스의 것을 물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 죽기라도 할 것처럼, 쫀쫀하게 조였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다급한 안쪽의 움직임에 절로 압력이 실리자, 더는 박을 공간도 없을 것 같았던 깊은 곳이 열렸다.

잔뜩 젖혀진 턱 끝이 부들부들 떨리는가 싶더니, 벌어진 입에서 길게 타액이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차민은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로, 백탁액을 한참을 쏟아냈다.

“하....”

자꾸만 감겨드는 구멍 안에서 좆을 완전히 뽑아낼 기세로 빠르게 허릿짓을 하자, 저 또한 느릿한 사정감이 몰려왔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차민의 구멍이 제 것을 잡아먹을 듯이 굴고 있었다.

“으....응....”

완전히 그의 안에서 물러나자, 성기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좁은 구멍을 비집고 안에 가득 차 있던 정액이 퍽, 하고 터져 나왔다. 사타구니와 엉덩이를 엉망진창으로 적시는 물소리가 괴로운 듯, 차민이 손등을 들어 울음으로 뭉개진 눈을 가려버렸다.

“왜 우는 거야?”

차민의 마른 치골에 잔뜩 사출하고 난 귀두 끝을 닦아내 듯 비비며 묻자, 얼굴을 가린 손끝이 더욱 잘게 흔들렸다. 애초부터 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긴 했다. 차민을 울리기로 작정한 것처럼 못된 말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그래 봤자 속이 후련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근간을 모를 가학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한차민이 더 괴로워하고, 힘들어했으면 좋겠다. 더 울었으면 좋겠다. 더는 자기 속을 내보이지도 않고, 절 이해해줄 생각도 없는 거라면. 그러면 제가 답답한 만큼 차민이 괴로워하기라도 해야 공평할 것 같았다.

“네가 좋아하는 방식 아니었던가? 다시 만난 이후로 그렇게나 강조해왔잖아. 네가 나에게 원하는 것과 네가 줄 수 있는 것.”

“······.”

“아직은 쓸 만한 얼굴과 몸뚱이 말고,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일부러 못된 말을 쏟아내자 손 아래로 드러난 붉은 입술이 허옇게 질리기 시작했다. 제 살을 다 찢을 기세로 아랫입술을 짓이겨댄 탓이었다. 루카스는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차면서 차민의 입술 사이에 검지를 물렸다.

“네 아버지 빚, 대신 갚겠다며.”

“······.”

“그럼 이제 네 몸은 더는 네 것이 아닌데 왜 멋대로 상하게 하는 거지?”

그러자 침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억세게 버티던 차민의 입이 탁, 하고 허망하게 열렸다. 빚이라는 말이 그를 어쩔 줄 모르게 하는 키워드라도 되는 것 같았다. 제 살갗을 억세게 밀어내던 이의 혀가 어디에 자리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손에 가볍게 닿았다, 멀어지다 했다. 참나. 이 와중에도 한차민 하는 짓이 귀여워서, 심각한 지금의 분위기도 잊고서 크게 웃을 뻔했다.

“그, 래서….”

한차민이 고개를 흔들며 입에 물려 있던 제 손을 밀어냈다. 그 와중에 입술 안쪽의 여린살이 손가락을 스치고 가는 느낌이 환장할 정도로 좋아서, 몇 번이나 사정했던 아래가 슬쩍 또 부풀기 시작했다.

“그래서 너랑 얼마나 더 뒹굴어야..., 다 갚은 걸로 쳐줄 건데.”

사나운 기색을 뽐내고 싶은 것인지 애써 눈을 치뜬 모습이 가상했다. 그렇지만 저에겐 조금도 무섭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문제였다. 어쩌면 여전히 앳된 얼굴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저만 보면 덜덜 떨면서도 좋아서 숨이 넘어갈 것 같았던 그 시절의 한차민이 자꾸만 겹쳐져서,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차민. 넌 네 몸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해? 네가 평생을, 내가 원할 때마다 대준다고 해도 다 못 갚을 금액인 것 같은데.”

“······.”

“다시 만났을 때도, 이후로도 몇 번이나 그랬지. 노아의 문제만 해결이 된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누구에게라도 다릴 벌릴 수 있다고. 이미 그 대목에서부터 네가 나에게 신세를 갚을 길은 요원했는데, 이젠 죽고 없는 부모의 빚까지 더 해졌잖아?”

“잠깐, 만.... 너 지금....”

반쯤 일어선 루카스의 성기가 자신의 몸을 쿡쿡 찌르기 시작하자, 차민이 고개를 내저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얼굴과 아래를 번갈아 바라보는 눈이 화등잔처럼 커져 있었다.

“루카스, 더는... 더는 무리야, 못... 못 해....”

“방금 네가 한 말 그대로 돌려줘? 더는 그런 부탁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니까.”

“아..., 아니…, 으, 으응.….”

조금 부었는지 구멍 입구는 꽉 다물려 있었지만, 귀두 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밀어붙이자 별 수 없다는 듯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더는 어떤 신기한 도구도 필요 없었다. 야한 체액들로 범벅이 된 차민의 아래는 달래줄 것도 없이 거대한 좆을 부드럽게 물고 삼키기 시작했다.

“어차피 평생을 침대에 묶여 있어도 다 갚지도 못할 빚이니까, 잊고 살아.”

“아....., 아, 아, 아!”

“이 치기가 얼마나 가겠어. 잊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질리는 날이 오겠지.”

“흐아, 앗, 루…, 카....”

내도록 사정이 억눌렸던 여파인지, 절반 정도 삽입한 것만으로도 말간 정액이 꿀럭이며 쏟아져 나왔다.

“벌써 싼 거야?”

“아..., 흣, 흐읏….”

“그래도 아무에게나 내돌리는 짓은 안 할 테니까, 감사하게 생각해.”

일부러라도 박아댈 생각조차 안 들면, 그때는 지금까지의 모든 빚을 다 없던 것으로 해주겠다고.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며 속삭이자, 차민이 진저리를 쳤다. 내도록 흘린 눈물로 뺨이 죄 젖어 있었다.

“후…, 너무 조이잖아. 힘 좀 풀어.”

“정말, 이야... 나, 더는....”

“이런. 한차민, 노아를 생각해야지.”

이번에야말로 차민의 눈길이 단번에 매서워졌다.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꺼낸 루카스가 잠시 허리를 쳐올리는 것을 멈출 정도로.

“너.….”

“혹시 노아가 네 아이기도 하지 않냐고 묻고 싶은 거라면, 글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말했잖아. 되다 만 약해빠진 ‘비스트’는 내 소관까지 갈 것도 없다고.”

루카스는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떨구어진 차민의 손을 쥐어 땀으로 흥건한 오금 아래로 끼워 넣었다. 그가 스스로 허벅지를 벌린 채, 단단히 고정할 수 있도록.

“이번에 진심으로 잘 느끼면, 보여줄게.”

“웃기지...,”

“진짜 ‘야수의 요람’이 뭔지.”

차민의 입이 사납게 열렸다, 닫혔다. 아마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려던 참이었던 것 같은데.

“네가 진짜로 내 애를 또 낳든, 혹 고서를 다 뒤져서 다른 방법을 찾아내든... 그 이전까지 노아의 몸이 상할 일은 없을 거야. 장담하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요람’이니까.”

으르렁대던 눈매가 순식간에 가련해졌다. 루카스는 잔뜩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마른 가슴을 움켜쥐었다.

“예전에 그린우드 기숙사에서, 요정들의 거울에 둘러싸여서 했던 거 기억나? 너 그때 거의 죽기 직전이었잖아.”

분명 둘이서 섹스하고 있었다. 차민을 어루만지는 것도, 차진 구멍 안을 들쑤시는 것도 당연히 루카스뿐이었다. 그렇지만 거울에 비친 저에게도 어루만져지고 범해지는 느낌이 났던 통에 차민은 거의 정신을 놓다시피 했다.

나중에 덜덜 떨면서 말하길, 여럿이서 쪼개진 저와 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구멍 안으로 거대한 좆이 두어 개씩 들쑤시는 것 같고, 커다란 손이 여기저기서 유두를 꼬집고, 빠르게 선단을 쓸고, 핥았다고. 몸에 닿는 손은, 쑤시는 좆은 분명 루카스의 것이 확실해서 더 이상했다고. 머릿속이 한 계 이상의 성감으로 전부 으깨지는 것만 같았노라고.

“그때처럼 싸줘.”

“그...., 게, 응, 무, 무슨.....”

“폭발한 것처럼 자지로 투명한 물을 막 쏟아냈잖아, 꼭 분수처럼.”

정액도 소변도 아닌. 멀겋고, 지독하게 야한 물. 야수들의 도구에 절어, 한계까지 몰린 인간의 몸이 그런 반응까지 보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던 때. 그러니까 루카스는, 그와 비슷한 정도의 한계까지 몰아붙이겠다는 거였다. 물론 차민 또한 제가 주는 쾌락을 한 톨도 빼놓지 않고 받아 마셔야 할 테고.

“흐으….”

또 한 번 울음 같은 신음이 터졌다. 그러면서도 제 다리를 벌린 손에서 힘을 빼지는 못했다.

“그래, 그렇게.”

할 수 있지, 하며 길게 차민의 목을 핥자 젖은 솜털이 오소소 일어섰다.

“아, 응, 으응!”

미약한 거부로 삐거덕거리던 박자가 조금씩 맞물리기 시작했다. 루카스는 차민의 어깨에 이를 박아 넣었다. 울혈이 맺힐 정도로 씹고, 빨아들이자 기이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그래. 어쩌면 한차민과 이렇게 얽히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앞으로는 노아 때문에라도 저를 두고 훌쩍 돌아설 수는 없을 테니.

*

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했다. 그래서 더 힘들고 괴로웠다. 루카스의 대단한 능력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개운하고 상쾌했지만, 머릿속에는 직전까지 겪었던 일들이 내 내 재생되는 중이었다. 루카스는 알까. 그 유리감이 사람을 더 돌게 만든다는 걸.

오로지 그의 만족을 위해 아래를 조이고 풀고, 그가 시키는 대로 낯뜨거운 자세를 취했다. 분명 시작은 반쯤 협박이나 다름없었는데... 끝에 가서 쑤셔달라고, 빨아달라고 엉엉 울며 애원했던 건 저였다.

“그 와중에도 흘러넘친 내 기운은 싹싹 훑어갔군.”

노아의 몸 위에 손바닥을 댄 채로 한참을 살피던 루카스가 혀를 내두르면서 물러섰다.

“저번에도 말한 적 있지만 ‘요람’이라는 게 대단히 거창한 건 아니야.”

차민은 조금 멍해져서, 반 박자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부에 닿는 가운의 감촉이 낯설었다. 아무리 깨끗하게 페인트칠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 밑색의 존재감처럼, 노아를 내팽개치고서 루카스의 몸 위에서 요분질을 쳤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정신이 조금 든 건, 루카스가 허공 어딘가에서 단도를 빼 냈을 때였다.

“진짜 ‘야수의 요람’을 보여주겠다고 했잖아.”

“그 칼은 뭔데?”

“걱정 마. 난 너랑은 달라서 약속은 지키니까.”

무감한 얼굴을 한 루카스가 날카로운 칼끝으로 손바닥을 길게 그었다.

칼날 따위가 결코 루카스를 다치게 할 수 없다는 걸 아는 데도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예리한 금속이 제법 길게, 그리고 깊이 살을 찢자 당연한 수순으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딱히 그를 걱정해서 눈살을 찌푸린 건 아니었다. 그저… 고통을 학습한 인간에겐 그다지 유쾌하게 다가오지 않는 광경이기 때문이었다.

그놈의 피가 ‘비스트’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카터가 ‘요람’이랍시고 건네준 것도 자신의 피를 섞은 영양제였고, 언젠가 루카스에게서 건네받은 호신도구 같은 물건도 그의 피로 빚은 것이었다. 물론 카터의 반 협박을 이기지 못하는 바람에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된 이상한 약을 제조하는 데나 쓰여 버렸지만.

그래서 혹시 노아의 몸 위에 피로 주문 같은 것을 쓰지는 않을까 싶었다. 하다못해 오컬트 마니아들이 좋아할 법한 수상한 진법 같은 거라도 그린다거나.

어느 쪽이든 그 또한 유쾌하지 않을 풍경일 게 뻔해서 조금 떨떠름하게 루카스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허무하게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몇 번이고 강조하던 우드가 수장의 진짜 ‘요람’이라기에 대단한 의식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칼로 찢어 피가 줄줄 흐르는 손바닥을 노아 쪽으로 향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게 전부야?”

“전부야.”

“다른... 뭔가 다른 절차는 없어? 주문 같은 걸 외운다거나.….”

루카스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내가 언제 주문 같은 걸 중얼거린 적 있었나? 이걸로 끝이야.”

“하, 고작....”

애한테 핏방울이나 떨구는 게 그 잘난 ‘요람’의 정체였냐고 물으려는 순간..., 노아의 배 부근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 했다. 루카스가 손바닥을 향하고 있는 바로 그쪽에서부터 시작한 빛의 파도는 이내 작은 몸 전체를 뒤덮어버렸다.

손차양을 해도 소용없을 정도로 사방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그래도 차민이 눈을 뜰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땐 툭툭 쏟아지던 붉은 피가, 노아의 몸에 닿기도 전에 보석 같은 결정체로 변하고 있는 중이었다. 붉은 색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푸르기도 하고, 다시 보면 그저 투명하게 빛이 나기도 하는... 도무지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오묘한 색으로. 피로 빚어진 보석이 노아의 상반신을 거의 덮어갈 때쯤, 작은 몸이 빛에 기대어 둥실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루카스의 손바닥은 여전히 광휘로 뒤덮여 이젠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비처럼 내린 핏방울이, 아니 보석들이 풍선처럼 부푼 구 형태를 이루며 노아의 전신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린우드에 입학한 이후로 수많은 기이한 현상들을 접해 왔다고 자부한다. 이능력이나 초자연 현상 같은 게, 사람이 아닌 존재들이 활개를 치는 것이 놀랍지도 않은 세상에 잠시나마 몸을 담아왔다. 하물며 남자의 몸으로 아이를 낳기까지 했으니, 저보다 이상한 일에 면역이 생긴 사람도 없을 것이라 여겨왔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믿지도 않는 신에게 절로 무릎을 꿇고 싶어졌다. 더는 놀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오만한 인간을 꾸짖기라도 하듯, 노아를 둘러싼 빛들은 눈물이 날 정도로 경이로웠다.

일전에 카터에게서 ‘요람’을 받았다고 했을 때, 루카스가 왜 코웃음을 쳤는지도 알 것 같았다. 야수가 아니어도 느낄 수 있었다. ‘요람’은...,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절로 마주한 순간 느끼게 되는 생명의 정수 같은 것이었다.

노아의 몸이 보석들로 완전히 뒤덮이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집중하고 있는 루카스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흩트렸다. 무심하게 눈을 깜빡일 때마다 가뜩이나 긴 속눈썹의 그림자가 섬세한 빛줄기를 따라 길게 드리워졌다. 어릴 때처럼 낯 뜨거운 찬양의 말이 터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절로 침음을 삼키게 되는 아름다움이었다.

그토록 바랐던 야수의 ‘요람’과 루카스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차민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무리 황홀하고 신비로운 광경일지라도 이 이상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간 영영 시력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주제넘은 인간이 겁도 없이 까불다가 태양빛에 녹아버렸다는 신화도 있었지. 이렇게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간 오랜 전설이 더는 남의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차민은 손바닥으로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생각해보면 문화권을 막론하고, 주제를 모르는 것을 탐한 인간의 끝은 늘 좋지 않았다. 감히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해왔던 주제에 결국은 꾸역꾸역 제 마음을 전하고 말았다. 그때는 진심으로 하룻밤의 추억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지만, 내심 어떠한 기대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루카스는 제 얕은 속을 알아봤을까.

아버지가, 부모님이, 어렸던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라는 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내 쫓기듯 홍콩으로 건너가고, 힘겹게 공부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아마 모든 자식들이 자연스럽게 세월의 이면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고, 열을 올리며 실망하기엔 저도 나이를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 다들 그렇게 각자의 사연을 품고 살아간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무 근심걱정 없어 보이는 가족들에게도 고민이 있고, 흠결이 있다. 차민의 담당은 아니었으나, 상속 관련한 소송을 담당하는 변호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지옥도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별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고를 치고서는 발만 굴러 못 견디게 답답한 아버지를, 전화를 받으면 울기만 하는 어머니를, 혈육을... 무 썰듯이 쉬이 잘라낼 수 있었다면. 어렸던 날에 이미 망설이지 않고 루카스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다소 충동적이고 사람들 말에 잘 휘둘리는 면모가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제법 나이가 들었음에도 미국행을 결심할 정도로 용기도 있고, 결단력도 있고... 또 끈기도 있는, 그런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벽의 뒷면이 제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던 때였다.

저만 보면 눈시울을 붉히는 아버지가 짠하다가도, 어머니의 핑계를 대며 돈 이야기를 꺼내면 고개가 푹 꺾이곤 했다. 그리고 그런 밤이면 어김없이 간신히 묻어두었던 옛날 일들이 떠올라 가슴이 꽉 조여 왔다.

그런데... 제가 몰랐던 일들이 또 있었다니. 피 한 방울이 아쉬워서 카터가 시키는 귀찮은 일들을 꾸역꾸역 해치우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루카스에게서 돈을 받아왔다. 혀가 묶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저를 보고 미안하다며 가슴을 치면서도, 끝내 몇몇 숨은 진실들은 말해주지는 않은 채 눈을 감아버렸다. 지금까지 잘 속여 왔으니 앞으로도 밝혀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저에게 면목이 없어서?

왜..., 루카스와 제가 오해할 법한 상황을 꾸몄을까. 루카스에겐 카터와 제가 무슨 일이라도 벌인 게 아닌 가 의심을 하게 만들고, 저에게는 그가 연락도 없이 저를 버렸노라고 짐작하게 만들었다.

루카스에겐 아버지의 빚부터 갚겠다는 말을 간신히 꺼내긴 했지만, 사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았다. 억울하고 화가 나는데 원망할 곳조차 없었다. 여기저기에 속아 실컷 삽질이나 했던 자기 자신을 가장 용서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그가 빚을 핑계로 저를 거칠게 대해주는 쪽이 마음이 편하다고 하면. 루카스는 또 상처받겠지. 시간을 돌려 보려고 했지만 그것만큼은 되지 않았다며 속삭이던 때처럼. 불사의 몸이면서 시커멓게 죽은 눈을 하고서....

“…아.”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했는지, 신이 강림이라도 한 것 같은 빛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크게 눈을 깜빡여 어룽거리는 시야를 다잡자, 보석으로 빚은 찬란한 ‘요람’과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루카스의 옆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래서 널 만나자마자 노아부터 데리고 오라고 했던 거였어.”

당황한 차민은 입을 틀어막은 채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익숙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 전까지는 생존을 위해 부유하는 내 기운을, 너에게 남아 있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모조리 끌어 당겨야 했지만, ‘요람’ 속에 있는 이상 굳이 그럴 필요가 없거든. 때에 맞춰 내가 직접 피를 뿌려주는 것으로 충분해지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꿀에 절인 것 같은 달고 싱그러운 과일 향.

‘반려’만이 느낄 수 있다던 루카스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넌.….”

차민을 향해 돌아선 루카스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다. 너른 어깨가 거친 호흡을 따라 크게 오르내렸다. 서로의 엉긴 시선을 따라 복잡한 침묵이 고였다.

“...상관없어, 이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루카스가 저에게서 반쯤 등을 돌렸다. 둘 사이에 산재한 문제가 그보다 더 복잡하니, 여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반려’이든 말든 더는 개의치 않겠다는 것일까.

노아를, 아니, 노아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야수의 ‘요람’에 흠이 없는지 살펴보던 루카스는 만족스러웠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칼로 그었던 쪽의 손을 두어 번 털어냈다. 이능력을 쓴 것인지 작은 불씨가 튀었다. 벌어졌던 상처를 봉합한 모양이었다.

“정해진 시간은 없어. 한계도 없고. 그냥 하루에 한 번 이상, 내가 적당히 퍼부어주는 기운으로 충분히 유지될 거야.”

조금 더운지 그가 후..., 하고 더운 숨을 내뱉었다. 루카스에게도 쉽지 않은 자극이었는지 빗장뼈의 움푹 팬 곳을 문지르는 손길이 제법 신경질적이었다.

“카터가 남긴 조각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지. 본가에서 알아볼 것도 있으니.”

“잠깐만.”

그대로 루카스가 훌쩍 사라질 것만 같아서, 차민은 엉겁결에 손을 뻗었다. 질리게 군다고, 뻔뻔하다고 혀를 내둘러도 어쩔 수 없지만... 지금 이렇게 그를 가버리게 해선 안 될 것 같았다. 당장 ‘요람’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루카스는 이미 충분히 저를 둘러싼 상황을 대략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예상이 명백한 사실로 확정 지어지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루카스, 나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야 많았다. 죽일 듯이 저를 몰고 가던 분풀이에 가까웠던 섹스, 지금 노아가 처한 상황, 앞으로 정말 저에게 아이를 갖게 할 생각인지, 그리고 혹시 자신이 몰랐던 이야기가 더 있는지.… 뭐 그런 것들을.

“한차민.”

루카스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너도 느껴지지? ‘반려’의 흔적, 기운... 그런 것들.”

만약 루카스의 감정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가느다란 실이 끊어지기 직전 아닐까. 조금 전에 저에게 화를 퍼부어대던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간신히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 건 같았지만.

“인간인 너도 느낄 수 있는데, 그럼 나는 어떨 것 같아.”

아.... 그제야 차민의 입이 작게 벌려졌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이미 대부분의 일이 명명백백히 드러났는데도 망할 맹약은 여전히 자신의 목청을 구속하고 있었다.

루카스가 소매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전에 그는 제가 인간이라서 흔적이 짙게 남지 않는다고 불평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더 애가 닳는다고도 했었고.... 안 그래도 폭발할 것 같은 소유욕으로 돌아버릴 듯했는데, 그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는 본능적인 감각이라는 부분이 루카스를 한계 직전까지 몰고 가는 것 같았다.

차단되었던 그 감각이 한 번에 끓어 넘치는 상태인 걸까. 게다가 조금 전까지 제법 많은 양의 피를 쏟아냈으니 몸 상태도 평소 같지 않을 터였고.

“왜, 이것도 다 내 탓으로만 하고 싶어? 짐승 같아서 질려?”

그래, 확실히 인간인 너는 모르겠지, 하며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와 동시에 루카스의 발끝이 희미해졌다. 지우개로 문지르는 것처럼 기다란 형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얘기해.”

말과는 상반되는, 다시는 저와 마주치고 싶지도 않은 듯 한 얼굴이었다. 가장 강력했던 야수의 본능도 이겨내고 돌아설 정도로, 자신을 지긋지긋해하는... 그런 지친 얼굴.

텅 빈 거실에 남은 것이라곤 흘러넘칠 것 같은 쇼핑백들과, 안에 노아를 품은 둥글고 커다란 보석뿐이었다.

루카스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차민은, 뒤늦게야 조심조심 ‘요람’을 어루만져보았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말랑말랑한 감촉이었고... 생각보다 따뜻했다. 무기질의 단면을 예상했던 탓일까. 막상 손을 대니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노아, 잘 쉬고 있어? 아프지는 않지?”

들리는 거 맞지, 하고 작게 물었지만 이 신기하고 거대한 보석은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이게 진짜 야수의 ‘요람’이래.”

그토록 바랐던 것인데. 이것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는데. 결국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노아의 몸에 남아 있는 카터의 조각 때문에 ‘요람’의 안에는 무사히 안착했어도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고, 루카스에게서 들은 제가 몰랐던 이야기들은 자신을 과거와 현재 어디에서도 머무를 수 없게 했다.

“아빠 목소리 듣고 있지? 노아 혼자 아니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차민은 허공에 둥실둥실 뜬 구를 품에 안아보았다. 정말 노아를 품에 안았을 때처럼 따뜻해서, 울컥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찬란하게 반짝이는 ‘요람’은 루카스의 피가 아닌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표면 위로 떨어진 차민의 눈물을 매정하게 밀어내기 바빴다.

*

“전달받은 사진들은 이게 전부인가요?”

“네.”

차민은 데스크 위에 놓인 흐릿한 사진들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지난번처럼 긴 결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며칠 만의 출근이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받은 건 결재 서류도 아닌 제 얼굴이 찍힌 파파라치 사진이었다.

5번가에서 노아를 안고 걷는 루카스와 그 옆에 선 저의 뒷모습, 그리고 백화점에서 제공한 퍼스널 쇼핑 서비스에 몰입 중인 저의 옆모습이 각각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사실 두 번째 사진은 벌어진 커튼 틈으로 아주 약간 드러난 얼굴을 미친 듯이 줌을 당겨 찍어놓아서, 저라고 말하지 않으면 식별이 어려울 정도였다. 첫 번째 사진과 인상착의가 대충 같아 보이니 동일인인가 보다, 여길 수 있는 정도? 아마 직원이 아이 방에 달면 좋다는 커튼과 침구 샘플을 보여주던 때였던 것 같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플린 쪽에서 벌인 짓이었다. 그쪽에서 가지고 있는 게 죄 미디어 관련 계열사인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이거 언제 풀릴 예정이라고 했죠?”

“음, 두 시간 정도 남았네요.”

연예인도 아닌데 이런 사진이 찍혔다는 게 신기했다.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현실감이 없는 탓인지, 그냥 그 정도 감상이 전부였다. 물론 노아의 얼굴이 제대로 찍혔다면 말이 달라졌겠지만.

“우드 쪽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플린에서 이 외의 다른 기사를 낼 것 같지는 않아서 두고 보는 중입니다.”

“백화점에서도 연락 왔죠?”

“그럼요. 어쨌든 거기서도 보안에 신경 못 쓴 책임이 있으니까. 굉장히 곤란해 하고 있습니다.”

“백화점에 책임을 물어봤자 우드가 기준으로는 푼돈이나 건질 테고.… 제가 알기론 백화점 소유주가 플린 미디어에도 조금이나마 지분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차라리 그쪽으로 협력을 구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참, 노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나요?”

대니얼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그의 진짜 정체를 따져 묻지도 않고 물 흐르듯 당연하게 말을 꺼내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음, 그건.... 휴, 역시 전해 들으신 모양이네요.”

“알게 된 지는 조금 됐어요. 홍콩에 있을 때부터 저랑 노아 감시했던 게 대니얼이었다는 것도 물론 들었고요.”

며칠 만에 출근해서 할 일이 제법 많다고, 이제 알 거 다 아는 사인데 빼지 말고서 빨리 끝내자고 하자 대니얼이 민망한 듯 으음, 하고 목을 울렸다.

“우선... 그간 모르는 척해서 죄송합니다.”

“어차피 루카스가 시켜서 한 일이었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한 변호사님이 상처를 안 받은 건 아닐 테니까요.”

물론 처음 루카스가 흘리듯 말을 했을 땐 화가 많이 났었다. 제가 혼신의 힘을 다해 노아의 기척을 지우려 애썼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처음 마주쳤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 액자 속 노아의 사진을 가리키며 몇 살이냐고 물었다니. 그렇지만 어제 그보다 더한 이야기들을 줄줄이 듣고 나서인지, 진심으로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이 정도쯤이야. 가뜩이나 포화가 된 머릿속에 이 사연까지 더할 기력이 없었다.

“어쨌든... 우드에서 움직이지 않는 한 저도 무시할까 합니다. 노아에 대해 언급한다면 또 달라지겠지만.”

차민은 살펴보던 사진들을 한데 모아 옆으로 치워버렸다. 애 딸린 동성 변호사와의 열애보다 있지도 않은 사람과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가 훨씬 더 파장이 클 것이다. 사진이 풀린다고 한들 잠깐 시끄럽고 말겠지.

“그…, ‘요람’은 괜찮던가요?”

“음, 어떤 게 괜찮은 상태인 거죠? 피가 보석처럼 변하던데.”

“아, 그럼 된 겁니다. 카터의 일도... 놀라셨겠지만,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어요? 나더러 아이를 또 낳으라고 하던데.”

“물론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 한 변호사님이 순수한 인간만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대니얼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비스트’들 사이에선, 그 사회에선 정말로 흔한 방법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대표님..., 아, 우드가의 권속들은 모두 그렇게 부릅니다. 하여튼, 대표님의 ‘요람’ 안으로 안착했을 정도면 생각보다 노아의 몸에 남은 카터의 조각이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뜻이거든요. 아마 대표님도 ‘요람’을 만드는 동안 대충 느낌이 오셨을 겁니다.”

“만약 카터의 피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면 ‘요람’ 안에 들어가기 어려울 수도 있는 건가요?”

“그럼요. 반발력이 거셌을 겁니다. 유제가’요람’ 안에 무사히 안착한다는 건 그 야수의 핏줄이 맞다는 공식적인 확인 같은 거니까요. 하여튼 염려했던 정도는 아닌 듯하니 곧 해결이 날 겁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불순한 것이 못 견디고 빠져나갈 정도로 정결한 기운의 피를 쏟아붓는 거지요.”

실소가 터질 정도로 허무한 결론이었다.

“그게 전부예요?”

“네. 원래 부체와 모체가 번갈아 가면서 하는 게 좋긴 하지만, 이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대표님이 도맡게 되시겠네요.”

오거나이저를 뒤적이던 차민의 고개가 느리게 들렸다.

“부체와 모체요?”

“네.”

“모체가... 여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낳은 쪽을 편의상 그렇게 말합니다. 각 종마다 이 관계를 칭하는 언어가 다 달라서, 인간들을 대상으로는 편의상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비스트’들은 성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체가 여성이 될 수도 있지요.”

“아뇨, 그건 저도 아는데.... ‘요람’에 피를 공급해주는 일, 그거 루카스가 아니라…, 저도 할 수 있는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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