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 step
“뭐라고?”
“그럼 틀려?”
“야.”
차민은 세모눈을 뜨고서 루카스를 쏘아보았다. 틀리냐고? 지적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우선 직전까지 거의 죽어가고 있었던 노아더러 꼬질꼬질하다고 트집을 잡는 것도 어이없었고, 지금껏 애한테 뭘 제대로 먹인 적이 없어 이 모양이지 않냐며 저에게 핀잔을 주는 것도 황당했다.
누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나? 지금까지 어떻게든 노아와 살아보겠다고 혼자 아둥바둥 애써온 건, 최소한 살아는 보겠다고 발버둥친 건 알지도 못하면서. 직접 보지도 못했으면서....
“일단 애한테 제대로 된 것부터 먹이고.... 이 거지같은 모양새는 조금 있다가 생각하자고.”
아니지, 아니다. 맛이 간 눈동자를 하고서 저에게 또 아이를 낳으라는 둥 헛소리를 했던 게 바로 어제였다. 그래놓고선 지금은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곁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상황부터가 문제다.
어쩌면 이렇게 갈수록 엉망진창이지? 차민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보폭이 큰 루카스를 따라 잰걸음을 옮겼다. 노아는 여전히 클러치라도 되는 것 마냥 그의 옆구리에 끼워진 채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었다.
번쩍 들린 채로 꼼지락거리는 작은 아이의 발이 안쓰러워서 손을 뻗으려고 했는데…,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노아의 옆얼굴이, 조그만 볼이 동그랗게 솟아 있었다. 차민은 천천히 내민 손을 거두었다. 루카스를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노아는 웃고 있었다.
5번가에서 가장 유명한 백화점의 화려한 쇼윈도에 비친 노아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났다. 콕 찌르면 말간 웃음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확실히 차민은 노아를 저렇게 쉽게, 거칠게 대한 적이 없었다. 언제 이유 모를 열로 고꾸라질까 걱정이 앞서 싸고돌기 바빴으니까.
차민은 민망해진 빈손으로 연신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꽁꽁 싸맨 채로 유모차를 타는 것보다, 저렇게 장난을 치듯 함께 걷는 것을 좋아했구나. 전혀 몰랐다.
아니…, 모르지는 않았다. 어린아이라면 이런 장난이나 소란스러움을 좋아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여태 시도해볼 생각을 못했다. 조금만 따져 봐도 알 수 있었는데. 별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노아에게 해줄 용기가,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뭐 해?”
“…어?”
루카스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바보처럼 입이 벌어진 저를 보고서 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안 오고 뭐 하냐고.”
“아.....”
멍하니 루카스와 노아를 바라보던 차민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발을 옮겼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바보같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차민.”
“······.”
“뭐야, 너 울어?”
“...아니.”
“아닌 게 아닌데.”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
“야.”
“······.”
“한차민. 갑자기 왜 우는,”
“하나만 해, 제발!”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지자 발을 동당거리며 웃던 노아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차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빌어도 안 멈추던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생각해주는 척하는 거야, 왜!”
순식간에 풀이 죽어 팔자를 그리면서 꺾이는 눈썹, 시무룩하게 제 눈치만 살피는 어린 얼굴....
전부 제 잘못이었다. 좁고 어두운 집에서 덩그러니 홀로 방 안을 지키던 노아를, 뭘 줘도 싫은 건 싫다고 말도 못 했던 노아를 생각하니 자꾸만 눈 안쪽이 뜨거워졌다.
혹시라도 노아에게 허튼 짓을 할까 봐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써왔다. 그런데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걸까…. 어쩌면 어리고 가여운 노아가 좀 더 웃을 수 있는 날이 많았을지도 모르는데. 역시 고작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온갖 ... 말도 안 되는 짓을 시켜놓고..., 그래놓고... 이, 이제 와서,”
루카스의 입장에선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뜬금없이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안다. 노아에게, 루카스에게 성질을 피울 일이 아니었다. 안다, 다 아는데.... 스스로가 한심해서, 허송세월만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서 자꾸만 뾰족하고 못난 말이 튀어나왔다.
차민이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카스는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마른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너무... 오래 시간이 지났어. 너랑 나는.”
그와 동시에 제 발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오가는 사람들은 거의 눈치챌 수 없을 정도긴 했지만, 어쨌든 공중에 발이 붕 뜨자 놀라서 소모적인 실랑이를 벌일 틈도 없었다. 여전히 의중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훅 가까워지는 것 같더니, 다시 땅에 발을 딛자마자 단단한 루카스의 상박과 시무룩해진 노아의 얼굴이 코앞에서 보였다.
“그래서 이젠 나도 잘 모르겠더라고. 내가 왜 이렇게까지 네 뒤를 쫓고, 기다렸는지. 우리가 함께 보낸 좋았던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고, 얼굴도 마주하지 않은 채 보낸 시간은 길었으니까... 계속해서 쌓인 여러 가지 감정들을 풀 방법도 모르겠고, 이게 대체 무슨 마음인지도 모르겠고…. 그래, 며칠 전까지는 그랬었지.”
“······.”
“그렇지만 이제는 알 것도 같아.”
여전히 네가 내 ‘반려’잖아, 하며 루카스가 픽 웃었다.
“어차피 너는 내 종속이고, 그러니 서두를 것 없지. 그래서 내키는 대로 굴어볼 생각이야. 밥 먹이고 싶으면 먹이고, 애 생각으로 돌 것 같아서 섹스하고 싶으면 섹스할 거고.”
종속…
차민은 그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반려’나 구질구질한 과거, 그런 말보다 훨씬 더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전부 진심이야. 너에게 대체 무슨 마음인 건지 모르겠다는 말도, 이렇게 보고 있으면 어떻게든 손을 쓰고 싶어서 들끓는 것 같은 이 기분도, 그리고 반드시 아이를 갖게 할 거라는 말도.”
“...내가 진짜.”
차민은 팔목 언저리로 그새 붉게 짓무른 눈꼬리를 꾹꾹 눌렀다. 아, 진심으로 그가 부러워졌다. ‘반려’라서... 오직 그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미워하고 괴롭히고 싶었던 자신과도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느끼는 감정이 입체적이고 복합적이라지만, 그래도 그렇지 뼈에 새겨진 본능이라는 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이 가능하다니.…
“일단은 이 꼬질꼬질한 인사, 밥부터 먹이고 생각해.”
루카스의 품에 끼이다시피 한 노아가 짧은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울적해 보이는 차민과 갑자기 나타난 강대한 힘의 원천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일이 흘러가든, 내게 남은 것이 어떤 감정이든... 어차피 더는 네 의사가 중요하지는 않을 예정이니까. 그렇게 서러워해봤자 네 기운만 빼는 일 일거야.”
차민은 당장이라도 무릎이 꺾일 것 같았지만, 간신히 힘을 주며 견뎌냈다. 아니, 지금도 제 발목을 붙들고 있는 희미한 루카스의 이능력 때문에 멋대로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그래, 이젠 고작 이런 일마저도 자신의 의지라곤 조금도 깃들 수 없게 되었다.
종속이라.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국 루카스에게서 단 한 번도 그런 처치를 벗어나본 적 없는 것 같으니.
*
“노아, 물 좀 줄까? 아니면 주스?”
입가에 여러 가지 소스와 매쉬드 포테이토 약간을 묻히고서, 노아가 크게 고개를 끄떡였다. 물과 주스 중 뭐가 좋다는 의미인진 모르겠지만.… 고민하던 차민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계산은 루카스가 할 텐데. 둘 다 쥐여 주면 되겠지.
“음....”
차민이 주류와 음료가 빼곡하게 적힌 리스트를 손에 쥐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 주문을 받아 적을 준비를 했다. 그러고는 업장 전체의 분위기를 꽝꽝 얼어붙게 한 장본인을 슬쩍 훔쳐보는 것도 같았다. 정작 루카스는 흥미 없는 얼굴로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중이었지만….
브레이크 타임을 앞두고 있어 라스트 오더는 진작 끝났을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루카스는, 정확히는 루카스가 가진 카드와 우드라는 성에는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케 하는 위력이 있었다. 그가 내던진 백지 수표 몇 장덕에 클로징 푯말은 참 쉽게도 뒤집혔다.
루카스가 노아와 차민을 이끈 곳은 평범한 스테이크 하우스였다. 그도 처음 와본 곳이라고 했다. 셀럽들이 자주 찾는다는 곳도, 유명한 관광 명소도 아닌 그냥 길가에 있는 음식점 중 한 군데였다. 물론 5번가에 위치한 대부분의 식당이 그러하듯 다른 동네보다는 조금 더 가격이 높았고, 오너가 지향하는 바가 뚜렷하게 느껴지는 근사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생수 한 병이랑요…, 주스 종류는 이게 전부인 거죠?”
“네.”
“으음. 그럼 오렌지 주스로,”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닐 것 같은데.”
여전히 핸드폰 액정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루카스가 툭 끼어들었다. 하긴, 그놈의 오렌지 주스 덕에 좋았던 기억이 없으니 질색할 법도 했다.
“노아가 넌 줄 알아? 잘만 마신다고.”
“알 게 뭐야, 내가 싫다는데. 향도 맡고 싶지 않으니까 치워.”
차민이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루카스는 손을 휘휘 내저어 직원을 멀리 쫓아버렸다. 아이용 의자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노아는 터질 것 같은 볼을 하고서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미안, 놀랐구나. 아무 일도 아니야. 많이 먹어, 노아.”
루카스가 포터 하우스부터 시작해서 종류별로 스테이크를 주문했을 때, 사실 차민은 노아가 평범한 식사를 할 수 있으리라곤, 그것도 무려 고기를 씹어 먹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외관으로 보이는 치아 발달 정도나 작은 체구에 걸맞을 위장의 크기를 고려했을 때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다. 아무리 ‘비스트’와의 혼혈이라고 해도 두세 살짜리의 신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능할 것 같았으면 진작 세상 맛있다는 모든 음식들을 노아에게 가져다 바쳤을 터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아는...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앞에 놓인 음식들을 끝도 없이 집어 삼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루카스가 건네주는 대로 얌전히 받아먹는가 싶더니, 이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슬금슬금 손을 뻗어 접시 위의 음식들을 주워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쳐줘야 하는데... 노아의 입으로 끝도 없이 스테이크가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있기는 한 일인 거지?”
“뭐가?”
“아기가 이렇게 많이 먹는 거.”
차민과 노아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비스듬히 등을 돌리고 있던 루카스가 그제야 이쪽으로 흘끔 시선을 주었다.
“일단 쟤는 갓 태어난 아기가 아니고, 보통의 인간도 아니야. 인간의 상식선에서 생각하지 말아야지.”
“그래도 그렇지.... 지금 노아, 포터 하우스를 세 접시나 먹어 치웠는데?”
이 정도 크기면 한 접시당 성인 남자 둘이 서도 먹을 수 있는 양인데... 그걸 몇 번이나 싹싹 비운 데다, 지금도 거의 다 먹어가는 중이라 하나 더 시켜야 할 것 같은 와중이었다.
루카스는 더러워진 노아의 얼굴과 손을 힐끔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면서도 슬쩍 손을 들어 접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니 노아가 멈출 때까지 계속 주문해줄 의사는 있는 모양이었다.
“...종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우드가의 어린 ‘비스트’들은 원래 많이 먹어. 인간들이 괜히 야수라는 이름을 붙여준 게 아니라니까.”
“그래? 고기 위주로?”
“뭐든 상관없어. 당장 눈에 보이는 식당이 여기였을 뿐이야. 할 수만 있다면 다양하게 먹여보는 게 좋겠지. 그래야 어떤 망할 것이 나를 취하게 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어차피 ‘요람’인가, 그것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
“그건 ‘비스트’로서의 핏줄을 이어받는 거랑 관계있고, 뭔가를 섭취하는 것은 또 다른 부분이야.”
차민은 천장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계좌의 잔고를 헤아려 보았다. 그나마 렌트비의 일부를 로펌에서 지원해주니 다행이었다. 빌어먹을 의료보험만 아니었어도 훨씬 더 여유가 있었을 텐데.
“그래서, 몸은.”
멍하니 나뭇결 위의 무늬를 눈으로 따라 그리던 차민은, 뒤따르는 말이 없자 도로 루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투가 어중간해서 설마 저에게 묻는 말인 줄은 몰랐다.
“지금 나한테 물은 거야?”
“그럼 내가 쟤한테 물었으려고?”
“대체 말투가 왜 그래? 노아, 갓난애 아니라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다 알아듣는다고!”
루카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말 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문제로는 차민과 말조차 섞고 싶지 않은 듯했다.
“이봐, 루카스.”
“아무리 내 아이라지만 반쪽짜리 주제에 수장인 나와 이렇게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해. 카터가 본가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너도 모르지 않을 텐데?”
힘이 약한 ‘비스트’와의 혼혈도 서열 밖으로 취급하는 마당인데, 하물며 인간과의 혼혈이라니. 혀를 차는 루카스를 보고 있자니 또 속에서 천불이 일다가도... 사감을 담아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비스트’들의 수장으로서 내리는 평범한 평가라는 걸 알아서 뭐라고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조금 전에 너, 울었잖아.”
“…어?”
“나한테 소리 지르면서.”
분명 아프진 않을 텐데, 하며 루카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꼭 자신의 몸을 투시라도 하는 듯한 음험하고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그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 같았다.
“으음. 그쪽 공간은 건드리지도 않았으니 그런 문제는 아닐 것 같고….”
루카스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이야기나 중얼거리길래 대꾸할 생각이 없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순간이동 같은 걸 할 때를 말하는 듯했다. 역시.... 이전에 온통 시커멓고 숨도 쉬기 어려운 곳을 통해 저를 불러냈던 건 고의였음이 분명했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노아까지 데리고서 수월하게 5번가로 이동하지 않았던가.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
차민은 마른세수를 하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사소한 것으로도 치졸해지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잘도 나불거리는 걸 보면 맹약에 얽힌 부분 같지는 않고.….”
아직 새 요리가 나오지 않은 동안,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전부 먹어치우고 노아가 손가락만 쪽쪽 빨기에 구운 야채라도 건네줬더니, 야무지게 움켜쥐고는 신이 나서 아삭아삭 갉아먹기 시작했다. 하는 짓이 꼭 토끼 같기도 하고. 볼이 빵빵하게 부푼 게 다람쥐나 햄스터 같기도 하고.…
“나는 노아가... 이렇게 평범하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걸 전혀 몰랐어.”
처음 보는 아이의 모습이 신기해서 저도 모르게 간신히 입을 뗀 거였는데... 뭔가 차민의 그럴듯한 말을 기다리던 루카스가, 아무런 부연 설명이 없자 그게 전부냐며 미간을 콱 구겼다.
“뭐야, 고작 그런 이유로 울었다고?”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루카스가 푸우, 하고 과장된 한숨을 쉬면서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넌 아무것도 몰라.”
“그래, 몰라. 얘가 내 앤지 아닌지도 겨우 눈치로 때려 맞춘 상황인데 내가 뭘 알겠어.”
와, 이제는 빈정거리기까지? 간신히 용기를 냈던 차민은 말없이 어깨를 툭 떨구었다. 허탈했다. 대화가 안 되는 상대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고작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싸움이 날 줄은 몰랐다.
“당분간은 이렇게 내내 롤러코스터를 탈거라고 생각하니 좀 아찔한데.”
“롤러코스터?”
“사람 죽일 듯이 몰아가다가도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네 태도 말이야.”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걸까? 괴롭히고 싶어서? 차민은 문득 좋지 않게 헤어졌다가 어영부영 다시 만나게 된 연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과거에 받았던 상처를 보상받으려는 듯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못해 안달이 난…, 그런.
물론 루카스와 제가 서로에게 퍼붓는 말들은 저런 귀여운 상황으로 비유하기엔 스케일이 몹시 컸지만... 저와 그의 어정쩡한 모습 그 자체는 꼭 그렇게 느껴졌다.
“글쎄. 적어도 10년은 이렇게 발작할지도 모르지.”
“하…. 그렇지만 ‘비스트’에게 그 정도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잖아?”
“짧은 시간이라고 해서 그동안 있었던 일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 그리고 자꾸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따지자면 나도 이제 막 수장이 된 셈이야. 한참이나 어린 ‘비스트’라고.”
루카스가 핸드폰을 거의 던지듯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나도 당연히 그럴 수 있어. 뭘 모르고, 서투르고.… 너는 그런 날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지만.”
10년.... 꼭 그만큼의 시간 동안 서로에게 찌꺼기처럼 남은 미련을 퍼붓고 싶은 대로 퍼붓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 수 있을까. 앙갚음을 하고 싶다기엔 대체 무엇을 어떻게 되돌려주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용서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지금도 너보다 내가 받은 상처가 더 크다고 내보이고 싶어 하는 중인데....
“너는 거의 신이잖아. 그런데 이런 것도 몰라? 왜 인간이 든 ‘비스트’든 감정 설계는 이 모양으로 된 거야?”
“그걸 깨달으라고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태어나게 했다고 하는데, 모르겠다. 인간과 난장을 친 우드의 수장이 여태 아무도 없었으니.”
때마침 노아의 새 스테이크가 서빙 되어 자연스럽게 대화가 끊겼다. 어쨌든 먹깨비가 된 노아를 챙겨주려 나이프를 들었는데, 루카스가 이미 손을 썼는지 적당한 크기로 고기가 썰려 있었다.
신이 나서 크게 입을 벌리려던 노아는, 루카스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받고는 주섬주섬 식탁에 놓인 유아용 포크를 서툴게 손에 쥐었다. 익숙하지 않은 데다 겁을 먹은 터라 몇 번이고 접시 위로 식기가 미끄러지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지만, 말마따나 계속 짐승처럼 먹게 둘 수는 없으니... 차민도 이번만큼은 엄한 루카스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잘 먹이고, 수시로 내 기운도 얻어가고, 적절한 때에 ‘요람’을..., 그러니까 내 피를 수혈해가면 어느 순간 나이에 걸 맞게 불쑥 성장해 있을 거야.”
“그러면... 말도 할 수 있을까?”
“보통은 그렇긴 한데, 얘는 조금 이상해.”
“이상하다고?”
“상태가 영 안 좋기도 했지만 의지 하나는 제법 강한 것 같은데... 그런 애가 스스로에게 많은 제약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여. 이런 걸 해선 안 된다, 그러지 말아야지... 뭐 이런 것들.”
차민의 고개가 고장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면서 돌아갔다. 곧 닥칠 끔찍한 비극을 미리 읽은 것처럼, 심장 한켠이 서걱이기 시작했다.
‘그냥 이 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낳을 수는 있다면서요. 수술해서 꺼내야 한다면서요. 그런데 왜 미리 죽여 버릴 순 없는 거예요?’
‘알겠지만 우드의 ‘비스트’가 최상종인 이유는... 타고난 힘도 있지만, 능력을 발휘하거나 제어하는 데 있어서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이야. ‘반려’의 일은 물론이고, 네가 아이를 감추고서 은신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그야말로 마음먹은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거든.’
‘낳아서 기르라고요? 루카스의 피가 흐르는, 인간 남자에게서 태어난 이 괴물을?’
“내가 봤을 때 쟤는, 스스로 성장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 하는 것 같아.”
차민은 손바닥으로 목 언저리를 더듬더듬 쓸었다. 펄펄 끓는 물을 삼키면 이런 느낌일까? 입 안이 쓰다 못해 뜨겁고 아렸다.
전부 나 때문이었구나. 무거운 고개가 아래로 퍽 꺾였다.
노아는 제 여과 없는 미움과 원망을 전부 숨죽여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혹 태어나더라도 자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걸까. 어리고 연약한 모습 그대로 조용히 살다가 빨리 죽어버리려고? 욕심내서 뭔가를 더 먹고 싶어 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주는 대로만 얌전히 받아먹다가 픽 시들어버리려고?
차민은 어느 겨울날을 떠올렸다. 동부의 겨울은 변덕스럽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집 안에 닥친 한파에 비하면 발가락의 감각을 앗아간 눈보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진 살림살이 전부를 날려도 갚을 길 없는 빚 때문에, 그때의 부모님은 거의 산송장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도록 스스로의 무지함을 자책했다. 사기라는 게, 남의 이야기일 땐 저런 뻔한 수에 왜 당하는 걸까 싶지만 막상 내 일이 되면 또 달랐다. 하물며 이건 카터가 작정하고 친 그물망이었다. 물론 그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어쨌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함정이었다.
평생 살면서 쥐어볼까 싶었던 큰돈이 이렇게나 허무하게 사라졌다. 게다가 아버지가 사인한 계약서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채무까지 설정되어 있었다.
합법적 무기 소지가 가능한 나라의-비록 뉴욕주는 금지가 되어 있지만 애초에 총을 들고 설치는 놈들에게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는 듯했다-고리 대금업자들이 부리는 행패는 상상을 초월했고, 이제 겨우 태평양을 건너온 이민자들에게 은행은 야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온갖 서류를 가져다 바쳐도 만 불 이상 빌릴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아버지의 직장이 우드의 연구소여서 이만큼이나 가능한 거라고 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고, 그래서 차민의 가족은 모든 걸 버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복권에 당첨된 수준이었던 높은 연봉이나 꿈같은 수준의 복지... 그런 것들이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팔 수 있는 모든 걸 처분하고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차민은 당연히 귀국을 원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학업 따위는 솔직히 제 알 바 아니었고, 이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루카스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 겨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게 됐는데.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 자꾸만 생기고 있는데....
처음부터 어이없을 정도로 맹목적이었던 루카스에 대한 감정은 이제 여러 가지 이유가 더해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정도가 되었다. 물론 저를 좋아한다는 그의 마음도 믿고 있다. 그렇지만 짧은 시간 타국에서 구르는 동안 사포처럼 거칠어진 차민의 낭만은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문제를 떠올리게 했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도 매번 쉽게 부서지고, 초라해지는 얕은 제 마음이 신기할 정도로.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면 자연스럽게 루카스와 연이 끊기게 되지 않을까. 어차피 그린우드를 졸업한 이후로 더 사귈 수 있을지도 모를 판국인데. 반드시 아이를 낳고 종의 대를 이어가야 하는 그와는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빨리,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떨어져야 한다니.
그래서 집안 사정 다 알면서도 철없는 소리만 늘어놓으며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렇게 집이 어려운 거면 주유소나 세탁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볼까요, 아니면 튜터라도 해볼게요. 두 분이 먼저 귀국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던 공부도 그렇고 저는 여기서 어떻게든 버텨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생기가 싹 사라진 눈동자를 한 아버지가, ‘차민아, 혹시 루카스에게 조금만 돈을 융통할 순 없을까?’ 라는 이야기까지 꺼냈을 때.… 그때 차민 또한 오기로 버티고 말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결국은 꺽꺽 울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한국으로 가자고. 우리 다 정리하고 돌아가서, 아무 일이라도 하면서 살자고. 차라리 까마득한 언젠가의 치기 어린 만남으로 끝을 내는 편이 나았다. 바보처럼 루카스의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벌겋게 달아오른 볼로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너드로 기억되는 편이 나았다.
물론 루카스에게 도움을 구하면 이유도 묻지 않고 선뜻 돈을 내어줄 것 같았다. 아니, 그럴 것이다. 한 가족이 수렁으로 곤두박질칠 수 있는 액수가, 그에겐 좋아하는 옥션의 경매가보다도 못한 정도라는 걸 잘 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그에게 인간적인, 전형적이다 못해 구질구질해서 인간이 아니면 불가능할 로맨스의 마지막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버지의 눈가가 붉어지는 걸 보았다. 핏기가 싹 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어린 아들이 엉엉 우는 걸 보고서야 다시금 나락으로 떨어진 지금의 처지를 깨달은 굵은 눈물이 미웠다. 위로를 해드려야 하는 순간이라는 걸 알았지만 갑자기 닥쳐온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다 원망스러워서... 괜찮다는 말이, 빈말로도 나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의 앞에 카터가 나타났다. 방문을 뚫고 나오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점점 희망에 들뜨기 시작했을 때, 그때 이유를 물었어야 했는데.
제집 문을 두드린 카터에게 버선발로 달려가는 아버지를 보고서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 생각 이상으로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고작해야 차민은 겨우 스무 살을 넘긴 어린애였다. 잘못된 사업이니, 투자니, 계약서니... 전부 그 나이에 몰라도 되는 일들이었다. 게다가 열병 같은 첫사랑에게 바닥까지 내보이고 싶지 않은 같잖은 자존심까지 더해져, 사정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중이었다.
‘어려울 거 없어. 루카스가 너에게 준 것들 있잖아. 그 새끼의 피로 만든 결정들. 그거 하나만 넘겨주면 돼. 나머지는 네가 몰라도 되는 일들이야.’
‘아아.… 그래, 맞아. 이 약을 먹으면 임신을 할 수도 있어. 너희 아버지가 몰래 만들어낸 역작이지. 장담하는데 ‘비스트’들 중엔 이 약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목숨도 내놓을 것들이 있을 거야. 그런데 넌 인간이니까. 글쎄. 확률은 불가능에 가까워. 무엇보다 루카스가 진짜로 너와의 아이를 기대하지도 않을 거고. 우드의 야수들이 무적인 이유는 모든 힘의 근원이 본인의 의지여서니까.’
‘그런데도 왜 이런 짓을 벌이느냐고? 예전에도 말했잖아, 루카스는 인간인 널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가족을 안면몰수 할 수는 없는 너 때문에,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이렇게까지 무너진 너 때문에... 그러니까 네가 인간이라서 처할 수 있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었을 때의 그 새끼의 얼굴이 너무 궁금하거든.’
‘야. 말도 안 되는 가정은 그쯤 해둬. 만에 하나 아이를 갖게 된다고 한들 인간과의 혼혈을 우드 쪽에서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아? 다 알아서 하게 되어 있어.’
‘책임? 무슨 책임? 인간, 너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이 약은 너의 아버지가 나와 맞은 계약의 부산물이야. 의무와 책임은 너희 인간들의 몫이라고. 뭐? 받은 돈 다 돌려주겠다고? 하하. 네가 갚을 수 있는 주제가 되는지도 의문이지만, 이건 더 이상 돈의 문제가 아니야. 서로의 목숨을 걸고 한 약속이거든. 넌 무조건 이 약을 먹어야 하고, 루카스와 자야 해. 네 몸에 애가 들어서든 말든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지. 그렇지 않으면....’
“…한차민?”
“…어?”
루카스는 사람 속도 모르고 자꾸만 저를 불러대고 있었고, 노아는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여기저기 눈치만 보기 바빴다. 좀 더 뭔가를 먹고 싶은지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잠자코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말은 이해한 거야?”
“아아..., 응.”
“꽤 중요한 문제라고. 만약 쟤가 스스로를 걸어 잠근 거라면 아무리 나라고 한들 무슨 수를 써도 방법이 없을 수 있어.”
“저기, 루카스.”
“왜.”
“‘비스트’와 인간과의 혼혈은... 얼마나 살 수 있어?”
거만하게 내리깔고 있던 그의 눈이 일순 사납게 꿈틀거렸다.
“뭐?”
“아니, 사례가 있기는 있어?”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허튼 소리를,”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차피 나는 언젠가 늙고, 죽어.”
당장이라도 폭언을 쏟아낼 듯 미간을 좁혔던 루카스의 얼굴이... 다소 어색하게 굳어졌다.
“앞으로 50년은 더 살 수 있을까? 그것도 모를 일이잖아.”
‘비스트’와 달라서, 인간은 예외 없이 죽는다. 그것도 제법 빨리. 심지어 짧은 생 가운데 싱그럽고 정정한 시간은 그리 길지도 않다. 언젠가의 루카스 또한 차민에게 고백하면서 분명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너도 예전에 그랬잖아. 우린 시간이 없다고.”
루카스는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하긴, 생각해보니 제가 먼저 그의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도 같다. 어쩌면 차민의 입에서 흘러나온 좋았던 언젠가의 이야기가 의외인 것 같기도 하고....
“이왕 이렇게 됐으니 내가 죽기 전에 노아가 어떻게 될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
어쨌든 우드의 피가 흐르는 아이니 모르는 척은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싶었으나, 늘 그렇듯이 이야기는 혼잣말로라도 중얼거릴 수가 없었다.
“야, 이제 그만 먹어.”
갑작스러운 루카스의 일갈에, 짜리몽땅한 손가락으로 텅 빈 접시를 콕콕 눌러보던 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돼지도 아니고.”
“뭐? 어린 ‘비스트’들은 많이 먹는다고 한 건 대체 어디 사는 누구였어?”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냅킨을 들어 노아의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갑자기 뽀얀 김이 나는 것을 보면 빌어먹을 이능력으로 냅킨을 축축하게 적신 모양인데... 아니, 그럴 거면 그냥 손 안 대고 깨끗하게 닦아줄 수도 있는 거잖아. 일부러 노아를 괴롭히려고 저러는 게 분명했다. 왜 애한테 시비를 걸고 난리야.
“다 먹었으면 이제 일어나. 애 입을 옷 좀 사게.”
냅킨으로 난데없는 괴롭힘을 당하고, 작작 먹으라는 폭언까지 들은 노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루카스와 차민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바둑돌처럼 커다랗고 동그란 눈동자가 순식간에 영문 모를 서러움으로 반들반들하게 부풀어 올랐다.
“뭐야, 너 걷지도 못해? 혼자 못 내려와?”
“노아 잘 걷거든? 어린애... 아니, 아직 몸이 다 자라지 못 한 애한테 이 높이의 의자에서 스스로 내려오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루카스는 차민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면서 한 팔로 노아를 들어 올렸다. 그래도 아까 그랬던 것처럼 짐짝 취급을 하지는 않고, 품 안에 제대로 안기는 했다. 비록 세일 마감 직전의 바게트 빵들을 봉투 안에 마구 퍼 담은 듯한 성의 없는 모양새긴 했지만.
*
루카스는 긴 다리를 꼰 채로 카탈로그 속으로 빨려 들어 갈 것 같은 차민과 로브스터롤을 작살내는 중인 어린 먹보를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눈이 꼭 흘겨보는 듯이 보였지만,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갑자기 이렇게 흘러간 상황이 좀 낯설기도 하고, 이 와중에 기꺼이 지갑을 자처한 스스로가 어이없기도 해서였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차민은 대체 무슨 놈의 옷이냐며 툴툴거렸다. 노아에게 뭘 사주기 싫었던 건 아닐 테다. 그저 제가 아이에게 충분히 해주지 못했다는 뜻처럼 느껴져 불만을 토했을 뿐.
루카스 또한 노아가 입은 옷이 유명 브랜드가 아니라고 무시를 하는 건 아니었다. 기함할 액수의 명품이 아니다 뿐이지, 노아가 입고 먹는 모든 것들은 상당히 공을 기울이는 티가 났다. 뒤늦게 또 다른 아버지랍시고 나타나 꼰대짓이나 하려는 건 절대 아니었고, 그저... 마음이 좀 안 좋았을 뿐이었다.
기대에 부풀어 노아의 큰 옷을 샀다가, 절망했다가, 혹시나 싶은 기대감으로 다시 큰 사이즈를 골랐다가 혼자 울었을 한차민을 생각하니까... 그냥.
“혹시 달콤한 것은 안 좋아할까요?”
“누구... 아, 저 애요.”
저 작은 아이에게 직원이 둘이나 붙어 있었다. 한 사람은 끊임없이 먹을 걸 놓아주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빈 식기를 정리하고 노아의 얼굴이나 손을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중간 중간 보습 제품도 잊지 않는 것을 보니 저에게 어필하고 싶은 브랜드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새로 입점한 디저트 브랜드가 몇 있는데, 반응이 무척 좋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나이가 지긋한 총괄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두드렸다.
루카스가 버그도프 굿맨을 찾는 이유는 별것 없었다. 백화점 본점의 바로 건너편에, 센트럴파크를 발아래 두고서 퍼스널 쇼핑을 할 수 있는 살롱이 마련된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점점 발걸음을 자주하자 은밀한 조사와 추천을 통해 ‘비스트’에 조금이나마 사정이 훤한 직원을 총괄로 고용한 점 또한 마음에 들었다.
프라이빗 살롱을 이용하는 유명인사가 루카스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의 설계나 인테리어는 전적으로 루카스의 취향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액수 이상으로 가면 재산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지지만, 권능과 권력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애초에 인간이 아닌 데다, 온갖 종들의 수장격인 루카스에게 댈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 누가 있을까.
“조심스럽게 여쭙겠습니다만... 동행하신 분은 따로 찾으시는 제품이 없으신가요?”
수완이 좋은 총괄 직원이 두터운 컬렉션 북과 태블릿을 옆구리에 끼고서 상냥하게 말을 붙였다.
“주제넘은 질문이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저 손님께 잘 어울릴 것 같은 구두가 있어서요.”
루카스는 별다른 대꾸 없이 차민을, 정확히는 차민의 발에 시선을 주었다. 적당히 생활감이 느껴지는 로퍼였다. 난데없이 새 집으로 옮겨놓은 걸, 다시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5번가로 끌고 나오긴 했지만.... 직원이 왜 신발부터 영업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정도로 낡아 있었다.
“세 달 전에 구입하셨던 제품과 같은 브랜드인데, 마침 이번 달부터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히는 수석 디자이너와 공방을 이끄는 장인들이 협업해서 별도로 제작하는 제품인데, 저희 백화점에서만 만나보실 수 있고….”
저로부터 딱히 긍정의 답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눈치가 빠른 직원이 잽싸게 테이블 위로 여러 가지 자료를 세팅 하면서 매끄럽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생각해보니 대니얼 같은 비서들을 제외하곤 누군가와 함께 살롱에 들른 것이 처음이었다. 직원들에게서 매출 상승으로 인한 보너스를 노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것도 당연했다. ‘비스트’고 인간이고, 별별 일을 다 보고 겪는 프라이빗 살롱의 직원쯤 되니 주요 고객의 연인의 성별에 대한 편견은 사라진 지 오래일 테고, 그 와중에 아이까지 동행했으니... 말이야 주제넘은 질문 운운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월척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음, 그런데 사이즈가... 사실 그게 제일 큰 고민이거든요, 저는.”
“그래서 이 제품을 추천 드리는 것도 있어요. 다른 ‘비스트’ 고객님들도 성장기에 돌입한 어린 자녀분 때문에 고민이 많으셨거든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케이프 스타일이라서 갑자기 키가 크거나 몸집이 커지더라도….”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차민은 누가 봐도 직원이 권해주는 대로 구입을 할 게 뻔한 모양새여서, 루카스는 작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야.”
막 푹신푹신한 퍼프를 베어 물려던 노아가 깜짝 놀라 먹던 것을 내려놓았다. 그게 또 못마땅해서 루카스는 들으라는 듯 혀를 찼다.
“너는 말할 수 있지? 너까지 맹약에 얽혔을 것 같지는 않은데.”
노아는 슈크림이 잔뜩 묻은 자기 입술을 뻐끔거렸다. 계속 먹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러는지,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주제라 그러는지.... 차민이 들으면 어린애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다고 하겠지만, 루카스는 적어도 ‘비스트’의 피가 흐르는 꼬맹이라면 속에 능구렁이가 열댓 마리는 들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왜 말을 안 해? 차고 넘치게 내 기운이 흘러들어갔을 텐데.”
통통한 볼을 축 늘어뜨리고서 제 앞에 놓인 접시들만 삐죽삐죽 바라보던 노아가, 결심이라도 한 듯 팔을 쭉 뻗었다. 제 딴에는 대단한 용기를 냈는지,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뭘 어떡하라는 걸까. 어린 것들이 보내는 신호에 면역이 없는 루카스는 멀뚱멀뚱 그 꼴을 바라보다, 성의 없이 제 손을 그쪽으로 툭 떨구었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노아는 별수 없다는 듯 구부러진 루카스의 검지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하고, 체온이 높아서 그런지 조금 축축하고... 그리고 느껴지는 기운은 형편없이 약했다. 이렇게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생각 이상의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는 게 정상일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노아의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은 듯했다. 애초에 타고 나기를 우드가의 ‘비스트’의 정수를 담을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작고, 약했다. 꼭 자길 낳은 인간처럼.
“...주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루카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자꾸만 새어 나가는 발음, 앳되고 낯선 목소리.
“방금 네가 말한 거야?”
아무래도 노아가 입을 연 것 같았다. 설마 싶어서 차민을 흘끗 보니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할 수 있었는데, 일부러 여태까지 침묵했던 것일까. 노아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어색하게 턱의 근육을 움직이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주거, 미워, 주... 거 버려. 그으래서.….”
그러면서 노아가 반대편 손으로 주먹을 쥔 채 자신의 몸을 쾅쾅 내리쳤다. 주거, 하고 제대로 발음도 못 하면서 루카스가 제 뜻을 이해한 건지 슬쩍 쳐다보다가, 다시 자신의 몸을 내리치다가....
“...한차민이 그랬다고? 아직 네가 배 속에 있었을 때.”
노아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도 안 하고... 이렇게 아기 모습으로 있어야겠다, 생각한 건가?”
설명하기 어려운지 잠시 손발을 허우적거리던 노아는 이 내 고개를 푹 숙이고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 노아, 미안.”
“무슨 소리야. 한차민이 그랬다고?”
노아가 이번에는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그게 노아의 더딘 성장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왜 이런 덜떨어진 모습으로 버티고 있냐고 물은 건데. 이해가 안 가? 지금 무슨 엉뜽한 소리를.”
“루우카스, 미안.”
덜떨어진 어린 먹보에게 손가락을 붙들린 채로, 루카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미안, 루우카스, 미안.”
약이라도 올리는 듯 느리고 어설픈 발음이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루카스의 눈빛이, 표정이 조금 무서운지 슬쩍 몸을 웅크리면서도 노아는 꼭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 잘 전달이 된 것인지 빼꼼 고개를 빼고는 루카스를 관찰하기까지 했다.
“한차민이 미안해했다고? 나에게? 왜?”
제가 진지하게 말을 들어주다 못해 다른 질문까지 던지자, 예상 밖이었는지 노아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그러고는 우, 아우, 무어라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자유로운 한 손을 정신없이 휘둘렀다.
아무리 루카스가 야수들의 꼭대기에 군림한다고 한들, 저런 바보같은 몸부림까지 알아들을 재주는 없었다. 노아 또 한 저의 수장에게 조금도 뜻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몸부림이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어쨌든 한차민은 네가 죽길 바랐고, 그러다 막상 너를 낳고서는 너에게 미안해했다는 건가?”
“우아우!”
훌륭한 추리라는 듯 노아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그런 한차민의 눈치를 보느라 이런 덜떨어진 꼴을 하고 있는 거고.”
“우.... 우우.....”
“뭐가 우우, 야. 거지같은 이유식 말고 다른 먹을 거 달라는 말도 못 하고 쫄쫄 굶고 있는데. 그럼 덜떨어진 게 맞지.”
루카스는 코웃음을 치면서 노아 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였던 몸을 곧게 일으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자연스레 떼어지는가 싶었던 짜리몽땅한 손가락이 있는 힘을 다 해 제 검지를 붙드는 거였다.
뭔가 싶어서 흘끔 바라보니, 노아가 잔뜩 겁을 먹었는지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도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자기 딴에 어찌나 애를 쓰고 있는지 턱과 목까지 바들바들 떨릴 정도였다. 난감해진 루카스는 턱을 짧게 쓸었다. 딱히 위협을 하려던 게 아니었음에도 이렇게나 저의 영향을 받는 나약한 몸뚱이로 먼저 제 몸에 손을 대고 무언가를 어필하려 들었다니....
“...내가 이래서 어떻게든 너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건방지게 구는 어린 야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카스가 이내 노아의 미간을 노크하듯 툭툭 두드렸다. 커다란 손이 다가오자 잔뜩 긴장했던 꼬맹이가 꾹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말간 노아의 눈이 방금 전 새로운 디저트를 먹었을 때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났다. 투박하긴 했어도 나름대로 다정한 제 손길에 꽤나 놀란 듯했다.
고작 몇 마디로 애틋한 마음이 생긴 건 결코 아니었지만, 내내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차민이 카터와 정말로 부정을 저질렀다고 믿었던 때도 있었고, 뭐든 될 대로 되라 싶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어쨌든 문제의 그 아이를 직접 보면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것도 같다고.
“우.....”
“닮았어.”
“....으우?”
“너랑 한차민. 둘이 닮았다고.”
제 앞에선 주눅이 들어 말이나 더듬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를 돌려버리고, 자기 딴에는 숨었다고 숨었는데 결국에는 다 티가 나서 대체 어쩌라는 말인지 싶고... 그런데도 자기 좋을 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끝까지 다 하려고 들어서 괜히 남의 속만 시끄럽게 만드는 거.
“그래, 곧 죽어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거. 그거 하나는 정말 닮은 것 같다.”
제 앞에서 주눅이 들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저와 연결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또한 한둘이 아니었고. 친구, 애인, 하룻밤 상대... 그 무엇이든.
그래서 차민 역시 뻔한 족속이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그간 저에게 접근했던 다른 사람들보다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글쎄. 시트콤에서 튀어나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너드의 표본 같은 모습이라거나, 유독 심하게 파들거리는 목소리 정도였을까?
물론 앞머리를 넘기고 안경을 벗기니 제법 구미가 당기는 얼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살면서 다신 못 볼 전무후무한 미모까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부터 차민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던 건, 역시 그 빌어먹을 눈 때문이었다. 저에게 더없이 진심인 듯하긴 한데,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깊게 가라앉은 눈.
제가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는 점은 확실했다. 가끔씩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후진 추파나 보내고, 최대치의 용기를 끌어 모아 애써 치근덕거리려 애쓰는 게 가상했다. 밀고 당기기라고는 요만큼도 모르는 듯한데, 오히려 무서울 정도로 직진으로 달려들어서 자꾸만 신경이 쓰이게 한다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저를 좋아하게 된 상대들은 어디서 짜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순서를 반복했다. 자기가 아이를 가질 수 있게 수를 써보라거나, 갖고 싶은 시계가 있다거나, 예약이 어렵다던 어떤 식당을 예약해줄 수 있냐고 묻는다거나, 자기 친구들도 차로 데려다줄 수 있느냐고 한다거나.… 특히 상대가 인간일수록 자신에게 바라는 것들이 속이 훤히 보이긴 했지만, 그 속물적인 뻔한 마음들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진짜 루카스를 지치게 하는 바들은 따로 있었다. 인간들과 우드가 사이의 유일한 소통 창구를 자처하며 되먹지 못 한 정치질을 하려고 든다거나, 인세의 물정을 잘 모르는 저를 대신해 기꺼이 귀찮은 일을 맡아주겠다고 나선다거나... 뭐 그런 것들. 게다가 이런 인간들은 백이면 백 자신만큼은 다른 이들과 다르니 믿어달라면서 읍소하곤 했다.
그런데 한차민은 제가 좋아 숨이 넘어갈 듯한 와중에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별것도 아닌 선물들을 부담스러워 했고 공들여 준비한 화려한 데이트 코스는 영 어색해했다.
처음에는 일부러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 척 하는가, 싶었는데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아시아인이 올라갈 수 있는 괜찮은 위치까지 가볼 생각이라고 했고, 루카스가 슬쩍 귀띔해준 우드 재단의 장학 정보도 부지런히 체크하고 다녔다. 돈 욕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저를 이용하는 것에 딱히 거부감이 있는 듯하지도 않았다.
그런 와중에 차민이 저에게 한다는 말은... 참 다시 생각해도 가관이었다. 어차피 루카스 너와는 결혼할 수 있는 것도, 평생 사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날 어땠더라? 못 들은 척하고 넘겼지만 실은 본가로 돌아오자마자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헬기 하나를 작살냈던 것 같다. ‘비스트’들의 방식으로도, 교과서에서 배운 사람들의 방식으로도 이해가 가질 않는 감정의 귀결이었다.
아기자기하고 한편으론 아슬아슬한 관계였다. 그래서 자꾸만 애가 탔다. 게다가 아무리 차민과 붙어 있어도, 그의 몸 안에 잔뜩 사정하고 체취를 들이켜도 제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를 않았다.
아니,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기운이 희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건 제법 그럴싸한 추측이었던 게, 그린우드의 수많은 ‘비스트’들조차 차민에게서 저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제 ‘반려’의 기운이 느껴진다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제 패거리들도 갈수록 무덤덤해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을 부려 알아봐도 돌아오는 답이라곤 전부 술에 물을 탄 듯, 물에 술을 탄 듯 애매모호한 것들뿐이었다. 제가 부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차민이 인간이라서 그런 거라고 했다. 너무나 변수가 많은 인간이라서.
씨발, 그래놓고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전형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가르치다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거지?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발아래 있는 게 당연했던 루카스로서는, 한낱 인간 하나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 상황 자체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제가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엎을 듯이 굴자, 그나마 산하의 연구소 측에서 조금이나마 납득할 수 있는 답을 들려주었다. 무언가를 꾸준히 연구하고 제계적인 관찰을 하기엔 인간들의 삶이 너무나 짧다고. 그래서 인간은 존재 자체가 변수이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라고.
아마도... 그때. 어린 ‘비스트’들의 전염병 신약을 개발하느라 정신이 없던 연구소장의 보고를 들으면서 결심을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한차민에게 ‘반려’로서의 위치를 확실히 해둬야겠다고.
애초에 차민에게 주어진 시간 자체가 덧없이 유한하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러니 이 감정의 인과를 따질 시간에 앞으로도 확실히 내 것으로, 내 ‘반려’로 살아야 한다는 통보를 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차민을 본가로 불러들이면서 정원 전체에 장미를 피워냈던 건, 프로포즈에 가까운 진지한 고백을 위한 로맨틱한 장치라기보다... 반쯤 협박에 가까웠다. 너에게 ‘반려’가 되어 달라고 말하는 저는 인간들의 기준에서 괴물 중의 괴물이고, 야수들의 왕이니 앞으로는 이런 일들을 일상처럼 받아들이라는.
다행스럽게도 차민은 벅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이후로는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차민 또 한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굴지 않았으며, 이제는 제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새파랗게 어렸던 그가 뭘 알았을까 싶다. 불사의 삶, 기원조차 까마득한 피의 종속.... 전혀 다른 삶에 대한 각오를 마쳤다기보다는... 그저 예전처럼 제약을 두고 좋아하지 말아야지, 기껏해야 이런 정도의 생각이나 했을 게 뻔했다.
그리고 루카스는 그즈음부터 괜히 본가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고서를 뒤적이곤 했다. 우드가의 ‘비스트’는 아니었던 듯하지만, 어쨌든 야수도 인간에게서 아이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분명 들었던 것 같아서.
딱히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찾아보는 중이었는데, 의외로 빨리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산하의 연구소에서 야수들의 수태를 돕는 약을 개발한 적이 있는데, 이때 가장 중요하게 쓰인 것이 우드가의 피라고 했다. 정확히는 보석을 가루로 내어, 조금이나마 핏방울과 비슷한 조직으로 가공한 것이 핵심이라고. 모조품으로도 이만큼이나 효과를 낼 수 있다는데, 제 진짜 피가 섞인다면 인간이 임신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듯싶었다.
물론 인간 남자인 차민은 아이를 갖는다는 점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 테니 당장 강요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 겨우 한 걸음을 뗀 그에게 날아보라고 다그치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저 빌어먹을 본능 탓이었다.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짝을 만들고, 종의 고리를 계속해서 이어가야 하는 야수의 본능.
게다가 이 약은 필연적으로 제 밑의 연구소에서 만들어야 할 테니, 연구원인 차민의 부친 또한 신경 써서 설득해야 할 것 같았다. 직위가 그리 높지는 않아 연구 개발에까지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 아들이 임신할 수 있는 약이 몸담고 있는 건물 어딘가에서 만들어 지고 있다고 하면... 썩 달가워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제 성격대로 나가자면 차민의 아버지든 어머니든 좆도 알 바 아니었으나, 제 속을 몇 번이고 짓무르게 한 이 문제 많은 ‘반려’께서 몹시 울적해할 게 뻔했다. 못된 말로 차민을 놀리는 것도, 섹스하다 울리는 것도 좋아했지만 이런 쪽으로 얼굴에 그늘이 지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루카스는 인간들의 가족이라는 개념이 잘 와 닿지 않았다. 이따금 차민이 그의 가족에게 품는 생각을 들려 줄 때마다, 저와의 관계보다도 더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제가 공부했던 바에 의하면 차민의 가족 정도면 제법 화목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인간들의 기준으로 돈이 궁한 것도 아니었고, 자식인 차민이 엇나가는 것도 아니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이라고 해봐야 마당의 잔디를 규정에 맞지 않게 다듬어 언성을 높이는 일 정도일까?
그렇지만 막상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게까지 멀쩡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앞으로’에 대한 문제가 그랬다. 그의 부모님은 언제든 연구소에서 잘릴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그때를 대비해 집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부동산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고향인 한국과 새 터전이 된 미국 중 어디에 남아 있어야 할지, 정년퇴직 이후로는 어떻게 수익을 이어나가면 좋을 지로 흘러갔고, 끝내 모든 짐은 차민에게 부메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대체 왜 그런 결론이 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하나뿐인 아들인 차민이 좋은 대학에 가고 성공해서 자신들을 부양해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차민 또한 그러한 관심과 기대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어쨌든 부모의 뜻에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부모가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 드문드문 얼굴을 내밀기도 할 정도로.
같은 피를 나누었으니 쉽게 끊기 어려운 울타리 같은 것이 당연히 있겠지만, 차민의 가족에겐... 그러니까 평범한 인간의 가족이란, 책에서 배운 개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형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물론 그들이 차민을 학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손가락질 받을 만큼 염치없는 짓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인간이 아닌 루카스가 보기엔, 자식인 차민은 때때로 태어난 그 자체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듯했다. 그래서 인간들은 원죄라는 말을 쓰는 걸까?
그리고 어느 날. 풀리지 않는 에세이 때문에 스트레스가 크다던 차민이 드디어 울적한 기색을 풀고는 저를 불러냈다. 여느 때처럼 그의 작은 방 안에서 실컷 뒹굴거릴 거란 생각이었는데... 아래층에서 간식거리를 챙겨 온 차민이 부스럭거리며 문을 연 순간, 저도 모르게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불멸의 생을 위협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공포였다.
그나마 눈앞의 인영이 한차민이라서 간신히 참아낸 거였다. 아니었으면 일대를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뻔했다. 저게 대체 뭘까. 혹시 희미하게 느껴지는 오렌지 향 때문일까? 아니다. 그건 불쾌했으면 불쾌했지, 두려움 비슷한 감정까지 불러오지는 않는다.
루카스는 손끝으로 몰리는 힘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트레이를 건네받았다. 확실히 차인지 뭔지, 이 옅은 색의 음료가 문제였다. 수면이 일렁일 때마다 오싹한 향이 머릿속에 벼락처럼 꽂히는 것 같았다.
그래, 이 빌어먹을 것이 까닭 모를 오싹함의 원인이고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겠는데... 그런데 여기에 수를 쓴 건 누가 봐도 한차민이라는 점이 조금 어이가 없었다. 잔을 쥐는 그의 손은 조금 떠는 것도 같았고... 얼굴은 언젠가 자신을 훔쳐보던 때처럼 이미 체념을 각오한 것 같은 허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 의심을 덜어내려는 듯 차민이 컵으로 입술을 가져다 대는 순간, 이 망할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책에서 봤던 조합 그대로였다. ‘비스트’의 임신 가능성을 돕는다던 그 약. 제가 봤던 내용과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소량이나마 자신의 피가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 약의 전달뿐 아니라 제조에도 차민이 관여했음을 알게 됐다.
예전에 본가에서 카터와 마주쳤던 이후로, 그에게 프루타를 만들어준 적이 있었다. ‘비스트’의 피로 만든 그 결정체는 소유자를 위험에서 지켜주기도 하고, 프루타를 만든 ‘비스트’를 그 자리로 소환할 수도 있었다.
그 일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피를 보인 일이 없으니... 차민에게 건네준 프루타가 이 수상쩍은 액체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전력을 보탠 것이 분명했다.
아. 어디서부터 놀라워하면 좋을까. 한차민이 뻔히 보이는 수로 저를 속이려고 든 점? 다른 인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그가 그 누구보다 전형적인 악인처럼 굴고 있다는 점?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이 장단을 맞춰줄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
“우우....”
타임랩스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언젠가의 과거를 빠르게 훑던 루카스는, 제 손가락을 잡아끄는 희미한 힘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 손에 먹다 남은 퍼프를 쥔 채 노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루카스는 깃털이 내려앉은 것 같은 자신의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반대편 손으로 포동포동한 노아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저보다는 차민을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고유의 기운으로 종을 구분하는 ‘비스트’면 몰라도, 외양으로 인물을 구분하는 인간들이 보기엔 전혀 자신을 떠올리지 못할 것 같았다.
“역시 가족이라서 그랬던 걸까....”
중얼거리는 루카스의 목소리를 미처 알아듣지 못했는지, 노아가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죽기를 바랄 정도로 미워하다가도 결국은 너를 낳고서 미안해했던 게....”
나중에야 알았다. 카터의 사주에 넘어간 차민의 아버지와 어쩔 수 없이 진창으로 끌려들어간 차민이 벌인 합작이었다는 사실을.
루카스가 끝내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차민이 저를 속이려고 들었던 게 아니었다. 그간의 일을 상의할 생각도 못 했던 건..., 그래 그 점은 역시 화가 나긴 했지만 카터가 워낙 저열한 수를 잘 쓰는 놈이니 순진한 차민이 당해내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 짐만 되는 바보 같은 부모를 당장 끊어 내라는 제 말에, 차민은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지금 처한 상황의 답답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냥 눈 딱 감고 도망치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걸 자기도 잘 아는데... 그런데도 가족을 버릴 수는 없다고.
“그럼 나한테 미안해했다는 건 또 무슨 개소리였을까?”
‘비스트’들처럼 가문의 영광에 도움이 안 되는 개체이니 죽여 버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아버지고 어머니고 무슨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든 알아서 해결하게 두라고, 그냥 너는 나와 멀리 떨어져서 있자고 했을 뿐인데도 힘들다고 했다. 인간이라서 어쩔 수 없는가 보다고, 그러면서 눈물을 뚝뚝 떨구는 차민의 얼굴을 보니 복장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그 잘난 가족의 구성원에, 나는 없었을 텐데 말이야.”
그래놓고서 한차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카터에게로 가버렸다. 설마 아이를 가졌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제 피가 섞인 약을 먹고서 몸이 상했을 게 분명한 차민을 위한 회복제를 찾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그사이를 견디지 못하고서.
“우... 아우우....”
“왜, 뭐.”
노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푹신한 퍼프를 와앙 베어 물었다. 조그만 입이 욕심내어 와구와구 움직일 때마다 위에 뿌려진 슈거 파우더가 솔솔 휘날렸다.
“후우...., 웅.....”
“야. 너 대충 말할 수 있는 거 이제 알거든?”
황당해서 흘겨보았더니 어린 것이 고작 그 시선도 받아치질 못하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꺾었다.
“하고 싶은 말 있거든 귀여운 척 그만하고 다 처먹은 다음에 말해.”
“루카스!”
한참 넋을 잃고 각종 카탈로그와 브로슈어를 뒤적이던 차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가 앞서 했던 말은 다 잘라먹고 ‘처먹은’만 듣고 저러는 게 뻔했다.
“적당한 걸로 골라서 보내주세요. 저 사람이 고르는 것들 하고 같이.”
저게 진짜. 못마땅하게 차민을 쏘아보던 루카스는, 그제야 제 근처에서 공손히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러면 의류와 신발 위주로 구성해서 준비해보겠습니다. 마음에 드실 거라고 장담합니다. 그런데... 아이 용품은... 관심은 보이고 계시지만 딱히 뭘 원한다는 말씀은 없으신 것 같아요.”
“누구? 저 사람이요?”
“네.”
차민이 잠깐이라도 관심을 보였던 건 전부 불러주는 주소로 넣어달라고 하자, 직원들이 더욱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도 정중하긴 했지만 어찌나 친절하게 구는지 노아 정도 되는 것들은 그 극진함에 녹아버리는 것 아닐까 싶었다.
“참, 서류가방이나 백팩도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루카스가 차민을 가리키면서 턱짓하자 담당자의 눈이 반짝였다. 월척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미소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지만-아무래도 한차민과 무슨 사이라고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이 아니면 그 빌어먹을 자존심 때문에 아무것도 받지 않을 테니, 저 궁상맞은 꼴부터 고쳐놓을 심산이었다.
“쟤 꼴을 보면 알겠지만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영... 변변치 않아서.”
그래도 명색이 L&C의 변호사인데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이 닳고 닳아 어디 내놓을 수도 없는 것들뿐이지 않은가.
“어머. L&C에 다니시는 분이었어요?”
“홍콩 지사에 있다가 얼마 전에 넘어왔어요.”
“와, 그러셨구나.... 유학생이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의뢰인들과의 미팅을 염두에 둔 스타일링으로 진행해보겠습니다.”
그래요, 하고 대충 말을 흘리던 루카스는 차민이 시계조차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슈트도 몇 개를 돌려가면서 입는 듯했는데 행커치프나 턱시도 같은 건 당연히 없겠지.
“시계라면... 혹시 따로 생각하시는 브랜드는 없으신가요?”
“음... 어차피 내가 착용할 것도 아니니, 뭐... 당장 재고 있는 걸로 아무거나 줘도 괜찮아요.”
담당자가 진중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 물량이 없어도 어떻게든 고가의 제품을 구해 오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루카스는 괜히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는 차민을 아니꼽게 훑어보았다. 뻔한 브랜드의 뻔한 제품으로 가져왔다간 어디다 팔아먹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인터넷에 검색해도 가격대가 잘 안 나 오는 브랜드 제품이면 좋을 것 같네요. 수준이 낮지는 않지만 되팔기에 그리 좋지는 않은 거요.”
“말씀 주신 부분 주의해서 준비하겠습니다.”
노아에 대한 의문은 대충 풀리긴 했지만 아직도 차민의 빠듯한 생활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렵게 로스쿨에 진학했다고 하더라도, 바로 입사한 곳이 L&C였다. 평범한 사람을 기준으로 연봉이 적은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궁상맞게 살고 있을까.
카터한테 증여받았던 것들이야 그 새끼가 편법 같은 걸 부렸다고 치더라도.… 차민의 부모가 우드 측에, 정확히는 저에게서 챙겨간 돈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과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저를 대신해 만나는 자리에 나간 대니얼이 몇 번이나 지폐 다발을 안겨주었다. 심지어 그들이 요청했던 액수에 조금씩 더 얹어서. 거기에 매달 차민이 밤낮으로 일해서 버는 돈도 있는데... 왜 저렇게 궁핍하게 지내는 거지.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러니까 검증되지 않은 약으로 몸이 상했을 게 분명한 차민을 위해 아이슬란드까지 날아간 동안. 카터는 우드의 피를 잇는 아이가 생겼다고 본가에 보고를 했다. 심지어 인간과의 혼혈이라고. 그 아이가 얼마나 약체일지는 저도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우드의 피가 흐르는 아이이니 최소한의 금전적인 지원은 필요하지 않겠냐는 간곡한 요청이었다.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다. 만약 카터 그 새끼가 말하는 인간과의 혼혈이 한차민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말하는 거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부체는 저일 터였다. 처음 대니얼을 통해 그 말을 들었을 땐, 무시했다. 한시가 급한 와중인데 말도 안 되는 헛소리까지 챙겨 들을 시간이 없었다. 아이슬란드에 사는 빙괴는 다스리기 까다로운 존재였고, 그를 통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는 약재가 필요했기 때문에 루카스의 온 신경은 빙괴의 둥지에 몰려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얼음으로 된 가시밭길을 헤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자, 본가의 모두가 차민이 카터의 아이를 임신한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지금 이것들이 말하는 한차민이, 그 한차민이 맞아? 넋이 나간 루카스에게 대니얼이 침울한 얼굴로 상황을 일러주었다.
“얼마 전 한차민의 아버지가 카터의 재산을 노리고 약에 손을 썼다고 자백했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제조법에 따라 무단으로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카터에게서는 한차민의 아버지가 먹였다는 약의 성분이 검출되었습니다. 다른 연구원들도 확인한 부분이고요.”
루카스는 멍하니 제 손에 들린 자줏빛 얼음의 파편을 바라보았다. 저의 존재는 불멸이고 불사이기에, 발바닥이 얼음송곳에 몇 번이고 꿰뚫리고 다시 재생되기를 반복하는 고통을 참아내고 얻어 온 것이었다. 빙괴의 모욕을 견뎌내고 간신히 손에 넣은 약재였다. 그런데....
한차민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카터가 목적이었다고 자백했고, 카터 그 새끼도 인간을 임신시킬 수 있는 약을 먹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걸 다른 연구원들도 확실하다는 확인을 내렸다고….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얼음으로 된 가시밭길을 다시 걷는 게,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깨지는 것 같던 그 고통이 차라리 덜 아플 듯했다.
그래서 아이의 부체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더는 중요한 대목이 아니었다. ‘반려’가 되어달라고까지 말을 한 저를 두고서 다른 ‘비스트’와, 그것도 무려 카터와 의심할 만한 일을 벌인 것 자체를 용서할 수 없었다.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었다. 마땅히 한차민은 저에게 사죄하고, 이 일의 경위를 설명해야 했다. 사실이 아니라면 더더욱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자신이 용서하고 말고를 떠나서, 또 인간과 ‘비스트’라는 종의 차이와 상관없이... 함께 보낸 시간이 진심이었다면 그 정도는 저에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다렸다. 주제를 하지 못하고 바다를 말리고 몇 몇 종을 날려버리기까지 하면서도, 내내 차민이 저를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그는 저에게 흔적을 감춘 채로, 카터에게 가버렸다. 카터의 지원 하에 어찌어찌 대학에 다니고,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루우….”
“······.”
“루... 우, 카스!”
“…뭐야.”
유쾌하지 않은 회상에 젖어 있던 루카스의 탁한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자, 노아가 반색을 하며 박수를 짝짝 쳤다. 작은 것이 먹지도 못하고 끙끙 앓았다고 생각하니 조금 짠해져서 마음이 풀어질 뻔했는데, 예전 일을 떠올리자 또 속이 뒤집혔다. 그러고 보니 지금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뭐가 예쁘다고 저것에게 밥을 먹이고, 한차민을 데려다가 쇼핑이나 하고 있지?
“루우카스, 뎌… 아, 져.”
“...뭐?”
“노아…, 뎌아... 져.”
건방진 어린 야수가 쭉 뻗은 팔을 버둥거리며 각종 장식이 올라간 퍼프를 가리켰다. 멜로디 모양의 커다란 초콜릿 장식과 딸기가 슈크림 중간중간 크게 박힌, 보기만 해도 혈당이 치솟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시계든 가방이든 알아서 챙겨주고, 저거 먹을 것 좀 더 가져다줘요.”
처음엔 저와 눈도 못 마주치고 쭈뼛거리더니, 이제는 자기 처먹을 빵이나 전해 달라고 슬슬 말 붙여? 감히? 루카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퍼프를 건네... 아니, 거의 던져 주었다. 노아는 뺨을 푹신한 빵으로 얻어맞고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까아, 하고 생글생글 웃었다.
“루우....”
“······.”
“루우, 카, 스.”
“이게 어디서 자꾸.”
이제는 까불지 말라고 눈을 세모나게 치켜떠도 헤헤, 하고 웃고 말 뿐이었다. 저걸 받아주는 게 아니었는데. 제가 험악하게 구는 듯해도 은근히 요구하는 것들을 다 들어준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영악한 것이 자꾸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귀찮으니 힘으로 찍어 누를까 싶다가도 너무 약해빠진 것에게 진심으로 열을 올리면 저만 우스워지는 듯해 관두기로 했다.
“아아냐, 바바, 요기...., 요기에... 이써어.”
코끝에 슈크림을 대롱대롱 매달고서는 노아가 자기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어쩐지 꾸역꾸역 처먹더라니. 손끝을 튕겨 입안에 물을 쏘아주자 컥컥대며 받아 마시고는, 그래도 아니라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요기... 요기에....”
“나더러 뭘 어떡하라고.”
“우웅.....”
자기도 어눌한 발음을 내고 싶지 않은지 노아가 답답하다는 듯한 얼굴로 짧은 발을 마구 동당거렸다.
“거 되게 귀찮게 하네, 진짜.”
루카스는 제가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보아도 저렇게 멍청하게 굴지 않았던 터라 노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애초에 왜 말도 안 하고 안 자라겠다고 고집을 부려.”
“우..., 아, 우!”
“그렇게 한차민이 걱정스러웠으면 얼른 자라서 지킬 생각을 했어야지. 멍청한 것 같으니.”
“아우우?”
“맙소사, 루카스! 미쳤어?”
하여튼 속이 그렇게나 답답하면... 그럼 전부 게워내면 괜찮아지겠지. 뭐 그런 마음으로 노아의 발목을 낚아채 거꾸로 탈탈 털기 시작하자마자 차민이 불을 뿜으면서 이쪽으로 달려왔다.
“너 왜 자꾸 애한테 화풀이를..., 아니다. 말을 말자. 네 곁에 내버려둔 내 잘못이지.”
차민이 노아를 빼앗아 안으며 나긋한 손길로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다 잠깐 사이에 벌겋게 손자국이 나버린 어린 것의 발목을 보고는 기겁을 하여 삿대질까지 해댔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지적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듯, 입을 연신 벙긋거리면서.
“루카스 진짜, 너...!”
“호들갑 그만 떨어. 안 죽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안 죽으면 다야?”
“그래, 다야.”
“루카스!”
“적어도 ‘비스트’들은 그래.”
차민이 말을 말자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렇지만 사실이었다. 타고난 힘이 세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거면 아예 대니얼이나 노아처럼 약해빠져서, 강한 놈들의 권속이 되어 보호를 받는 편이 나았다. 어중간한 놈들은 비슷한 또래 중 가장 빼어난 하나가 수장으로 치고 올라올 때 다 죽어버리게 되어 있다. 모든 ‘비스트’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우드의 야수들은 그랬다. 그러니 끝까지 죽지 않으면 그걸로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저건 어쨌든 인간이 아니야.”
“······.”
차민은 등을 팩 돌려버린 채로 더는 대화를 잇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말을 할 수 없는 건지, 하기 싫은 건지. 아마도 둘 다 일 것 같지만....
그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저것의 어떤 반응을 보고 먹을 것을 공급해주면 되는지, 효율이 좋은 음식을 찾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렇지만 순식간에 방어적으로 돌변하는 차민의 눈을 보며 아무 말도 않기로 했다. 이제 와서 네가 무슨 자격으로. 서글픈 그의 눈동자가 그렇게 외치는 것도 같았다.
*
“아니, 이게 대체.….”
차민은 머리를 싸맨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긴 복도와 거실, 부엌까지 넘쳐나는 쇼핑백들로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게다가 거실의 테이블 위에 쌓인 손바닥만 한 것들은 크기만 작을 뿐이지, 하나만 잘못 건드려도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될 듯한 고가의 보석이나 시계 같은 것들을 품고 있었다. 차민이 생전 처음 보는 로고도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건 아니었다. 잘 알려진 명품들보다는 오히려 그런 브랜드의 제품들이 어지간한 집 한 채보다 비쌀 가능성이 농후했다.
“일단 무사히 수령하셨다는 서명부터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서명을 안 하면, 아니 못 하면 어떻게 되나요?”
“해주실 때까지 제가 퇴근할 수 없겠지요?”
“으으.....”
차민은 이를 갈며 백화점 직원이 건넨 태블릿에 대충 서명을 했다. 노아는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산재한 쇼핑백 더미를 헤집고 다니는 중이었다. 와중에도 먹을 것의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킁킁거리다가 좋다고 박수를 짝짝 치고 있었다.
“오늘은 천천히 둘러보고 계세요. 내일쯤 사람을 보내 도와드리겠습니다.”
“도와요? 뭘?”
“혼자서 정리를 하시긴 버거우실 것 같아서요.”
그 때 프라이빗 룸에서 쇼핑을 도와줬던 직원이 루카스가 안 그래도 지시를 내려놓은 상태라며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내내 쇼핑백을 열어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하하, 행복한... 시간이요.”
예에. 차민은 더 말을 할 기운조차 없어서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이야 돈 받고 일하는 건데 붙들고 하소연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오늘이야말로 플린 쪽과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연락조차 없이 긴 결근을 했음에도 누구 하나 지적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나니 더욱 오기가 생겼다. 자신의 손으로 일군 줄 알았던 커리어가 사실 전부 루카스의 계획 아래서 쌓였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아서, 더욱 보란 듯이 매끄럽게 협상을 마치려고 했다.
그런데 오후쯤 노아의 시터에게서 연락이 왔다. ‘갑자기 트라이베카로 이사를 한 것도 당황스러운 와중인데 이 산더미 같은 쇼핑백들은 대체 어떻게 하면 좋나요. 도저히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에요.’ 하고.
처음에는 시터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핸드폰으로 전송된 영상을 보니 그야말로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팅이라는 뻔한 핑계를 대고 익숙하지 않은 새 집으로 더듬더듬 돌아왔는데... 실제로 본 광경은 영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대체 이걸....”
어떡하면 좋지? 세상의 모든 부를 깔아뭉개고 사는 놈이긴 했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저를 곤란하게 한 적은 없었는데.
직원이 놓고 간 물건 리스트는 앎은 책자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수준의 두께였고, 대충 보기로도 제가 전날 스쳐가 듯 고개를 끄덕였던 모든 제품들까지 모조리 쓸어 담아온 것 같았다.
물론 이 집은 루카스의 것이었다. 어영부영 발을 들인 주제에 그의 공간에 원하는 물건을 쌓아놓는다고 제가 기겁을 할 이유가 없기는 했다. 그렇지만….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걸까.”
루카스는 직전까지 저를 죽일 듯이 몰아갔고, 모욕적인 언사와 행동을 서슴지 않았으며, 맹약이라거나 노아와 관련 된 상황을 대략 눈치채고는 또 아이를 낳아 확인해보면 되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했었다.
그런데 대충 처박아두곤 내내 저를 괴롭히기나 할 것 같았던 공간을 제법 사람 사는 것처럼 꾸며놓고서는... 난데없이 노아와 저의 물건을 잔뜩 사들여놓기까지 했다. 사람이든 ‘비스트’든 감정이 켜켜이 쌓여 어느 한계 이상을 넘어서버리면... 조금 이성을 잃게 되는 걸까?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나니 루카스만 이상하다고 탓할 게 아닌 듯했다.
그렇게나 밉고 원망스러웠던 그와 잘도 마주 보고서 노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잘 가라고 인사까지 나눈... 기묘했던 어제의 파편이 차민의 머릿속을 드문드문 스쳐 갔다.
차민은... 어쩌면 지금 루카스와 저의 상황이 팔팔 물이 끓기 직전의 상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물이 넘치기까지 단 한 방울이 부족한 컵이라거나.... 당장은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엉망으로 뒤섞여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을 다 보이고 있지만 어느 임계점을 돌파하는 순간 직전까지 감정 소모를 하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만 같았다.
“우.... 우우....”
“노아, 그거 말고 먹던 거부터 일단.….”
낑낑대며 쇼핑백 안으로 들어갈 것 같은 노아를 제지하려던 차민은..., 방금 제가 들은 게 노아의 목소리였나 싶어 작은 몸을 안은 채로 쉼 없이 눈을 깜빡였다.
“…노아?”
따뜻한 기운을 품은 유순한 눈동자가 차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방금 노아가 말했어?”
“아우..., 안, 대에....”
“노아, 말..., 말할 수 있어?”
“으응.”
“언...제부터?”
“모올아. 죠오, 금.”
먹을 것을 손에 쥐려 짧은 팔을 뻗어 버둥거리던 노아가 배시시 웃었다. 차민은 떨리는 손을 뻗어 아이의 허리춤을 어루만졌다. 건드리면 꿈처럼 사라질까 봐 옷을 움켜쥐지도 못하고, 툭 불거져 나온 상의의 주름선만 몇 번이고 애틋하게 쓸었다.
“노아, 아빠가….”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까. 우리 노아 목소리는 어떨까 많이 궁금했어. 아빠가 하는 말을 이해는 하는 거겠지, 걱정도 많았어. 그래도 언젠가는 목청이 트이지 않을까 기다렸어. 내내 기다리려고 했어....
“아빠가 미안해.... 노아한테 많이 미안해.”
떠오르는 것들이야 많았지만 그 어떤 말로도 애가 닳았던 10년을 전해줄 수가 없었다. 결국 간신히 고르고 고른 건 삐죽 튀어나오는 못난 울음에 섞인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히우.….”
노아는 난데없는 차민의 울음이 당황스러운 듯 짧은 팔을 파닥이며 산만하게 주위를 맴돌았다. 목소리를 내면 당연히 제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웃기는커녕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하니 놀란 모양이었다.
“빠아….”
“그래, 아빠 여기 있어.”
“빠아아!”
이 와중에도 자신의 말이 통하자 새부리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자랑스러워하는 노아가 귀여웠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착한 아이를 두고서 바보처럼 울고만 있을 수는 없는데. 목이 트이길 오랫동안 기다렸으니 이제 아이가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런데 한 번 눈물샘이 터지니 쉽게 진정이 되질 않았다.
사실 지금 차민이 가장 서러운 이유는 결국 자신의 쓸모없음이 피부로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을지라도 노아가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했고, 발작처럼 찾아오는 고열로 앓아누웠을 때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루카스와는 몇 번 마주친 것만으로도 쑥쑥 자라나고, 이렇게 말문까지 열렸는데....
“후웅….”
잠시 차민과 쇼핑백 더미를 번갈아 바라보던 노아는 달콤한 냄새를 솔솔 풍기는 박스 포장을 뒤로하고서 힘겹게 돌아섰다. 여전히 아쉬운 듯 손가락을 쪽쪽 빨고는 있었지만 좀처럼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차민이 심히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빠아아, 하며 제 소매를 잡고 흔드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좀처럼 잦아들 것 같지 않았던 눈물이 천천히 마르기 시작했다. 만약 슬픔에도 소리가 있다면 방금 노아의 그 한 마디로 모든 것들이 거품처럼 펑, 하고 터져버린 듯만 했다.
“노아.”
“우웅?”
“한 번만 더 말해줄래? 아빠, 하고.”
“이이잇, 빠아, 배...거파.”
“하하, 알았어. 그만 시킬게. 배 많이 고파? 빵 먹고 싶었어?”
“우웅.....”
차민은 새끼 펭귄처럼 뒤뚱뒤뚱 저를 향해 걸어온 노아를 꼭 끌어안고 오뚝이처럼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조그만 코로 차민의 어깨를 콕콕 내리찍던 노아가, 무언가 불현듯 떠오른 것처럼 작게 발을 굴렀다.
“루우, 카스!”
“…루카스? 노아, 방금 루카스라고 한 거야?”
“루우우.”
“그 새…, 아니. 그 사람은 왜?”
노아는 자기 배를 팡팡 두드리면서 씩 웃어 보였다. 루카스와 같이 있으면 먹을 게 끊이지 않아서 좋다는 걸까. 처음엔 분명 잔뜩 겁을 먹고선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던 것 같은데.
“이고를… 없애야, 해.”
시계 방향으로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노아가 팔자로 눈썹을 휘었다. 쪼그만 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제 몸을 내려다보는 게 귀엽기는 했지만, 없애야 한다니. 저는 모르는 ‘비스트’만의 생태계가 있는 것일까.
“노아가, 뎌아져, 했는데... 루우카스. 바보.”
으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도 노아가 하려는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구나. 차민은 콧등을 문지르고는 노아의 배를 부드럽게 문질러주었다.
“노아. 아빠는 인간이라서 모르는 게 많으니까, 노아가 이제부터는 바로바로 잘 말해줘야 해.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졸리면 졸리다고. 알았지?”
“끄으....”
하고 싶은 말은 많은 것 같은데 명확한 설명이 어려운 듯
노아가 손을 오므렸다, 폈다 부산스럽게 굴었다.
“요기…, 노아, 루우카스….”
노아가 아까보다 더 울상을 하고서 작은 제 몸을 두드렸다. 그러다 기우뚱, 앞으로 머리가 쏠릴 듯해서 다급히 붙들었더니 큰일 날 뻔한 것도 모르고서는 배실배실 웃기만 했다.
“조심해야지. 아무리 ‘비스트’라고 해도 다치지 않는 건 아니란 말이야. 게다가 넌....”
완전한 우드의 핏줄도 아닌데.
“빠아?”
그래도, 그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서 어영부영 입술을 감쳐물자, 노아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전에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부 이해하는 눈치긴 했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렇다고 짐작을 하는 것과 이해하고 답도 할 수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건 전혀 달랐다.
“우우...?”
노아는 이전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워진 저의 행동이 걱정스러웠는지, 괜찮으냐고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빠아, 하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간질간질했다. 꼭 쥐고 있던 통통한 주먹을 펴서는 아직 눈물이 번져 있는 차민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가져다대고는 호, 하고 불어주었다. 작은 생채기가 생겼을 때 연고를 발라주고 살살 바람을 불어주었던 언젠가의 차민처럼.
“....노아?”
그런데.
“노아!”
노아의 손에서 치익, 하고 연기가 솟았다. 달군 쇠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펄펄 끓는 물이 뿜어내는 수증기처럼.
“이게 대체, 노아..., 괘, 괜찮아?”
하얗고 작은 손이 시커멓게 물들었다가,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끝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한 연기는 손목으로, 팔뚝으로 점점 번져가고 있었다. 고열로 까무룩 정신을 놓은 적은 많았어도, 이렇게 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반응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아.....”
차민은 입을 틀어막은 채 주머니를 뒤적였다. 뿌옇게 번지는 연기 너머로 툭툭, 재가 되어 바스러지는 노아의 몸이 보였다.
“핸드폰, 핸드폰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루카스가 필요했다.
가장 직전에 마주했을 땐 평범한 동갑내기 친구들 같았고, 그 이전에 마주쳤을 땐 몸을 섞으면서도 죽일 듯이 서로를 노려보곤 했다. 이번엔 대체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어떤 장단에든 맞춰줄 용의가 있으니 제발....
“전화 좀 받아, 제발....”
노아를 살려줬으면.
검게 흩날리는 저 잿더미가, 공포에 질린 제 눈에만 보이는 환영이었으면.
*
“대표님만 보면 파르르 떠는 것 같아도 사실 제법 성실하게 일을 처리하고는 있어요.”
대니얼이 밀려드는 메일을 확인하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루카스는 그 불량한 태도를 지적할까, 했지만 요즘 그가 맡고 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긴 했으므로 눈감아주기로 했다.
“사실 하는 것만 봐서는 변호사라기보다 악질 로비스트에 가까워 보이기는 하는데... 어쨌든 의뢰인이 원하는 바를 어떻게든 해내고 있으니까.”
차민은 플린 쪽의 주주들을 구워삶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해결책을 내놓을 거라고 했지만,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그린우드를 졸업했다는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긴 했으나, 학연이나 지연을 들먹이기엔 차민은 오랜 시간 동부를 떠나 있었다.
낯선 얼굴에 야박하기 짝이 없는 뉴욕의 저명인사들은 촌뜨기-맨해튼 토박이가 아니면 전부 촌사람 취급하는 정서를 아마도 영영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의 읍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자 차민은 곧장 플린의 주주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산을 가지고 귀찮게 굴기 시작했다. 맨해튼에서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크고 작은 소송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입자와의 관리부터 건물 관리법, 소방법... 온갖 종류의 째째하고 치사한 법률 조항이 다 튀어나오는 중이었다.
무려 L&C의 변호사가 이렇게 갖은 지랄을 떨어대고 있으니, 그를 상대할 로펌을 선임하더라도 반드시 차민과 한 번은 얼굴을 더 마주해야 했다. 여기서는 우드와 플린에 관한 일을 논하고 싶지 않다고 아무리 선을 그어도, 차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루카스의 이름으로 별별 협박을 늘어놓기 시작 했다.
“그런데 얌전히 트라이베카에 머무르고 있기는 해요?”
“일단은?”
“신기하네….”
“어쩌겠어, 그 애새끼한테는 거기가 훨씬 더 살기 좋은 환경일 텐데.”
“노아는 어때요? 인간과의 혼혈은 처음이라 감이 잘 안 오는데.”
“너보다 훨씬 더 약해. 그릇 자체가 썩 좋지는....”
어린애도 아닌 주제에 아직도 분유 냄새 같은 거나 풀풀 풍기고 있고. 못마땅한 듯 얼굴을 구긴 채로, 그러나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슬쩍 당겨 올린 채로 노아에 대한 말을 꺼내려던 루카스는…, 순간 제 손을 스쳐 가는 심상치 않은 한기에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표님.”
대니얼 또한 무언가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이건..., 더는 이 세상에서는 느껴져서는 안 되는 기운인데.
“지, 지금... 제가 느낀 게 맞아요? 이거, 이거....”
“…나도 알아.”
그와 동시에 재킷 속 핸드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누군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차민일 터였고, 노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그 새낀 죽었잖아요!”
지금 차민과 노아가 머무르고 있는 그 집, 딱 그 정도의 위치에서... 이미 뒈지고 없는 카터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표님.”
“...카터가 죽었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수장이 된다는 건, 저에게 복속의 맹세를 하지 않은 다른 ‘비스트’들을 처리한다는 건... 생각보다 멋지고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차민은 이능력이니, 초능력이니하며 초자연적인 힘을 추켜세우곤 했지만, 그가 매번 놀라워하는 것처럼 손끝을 튕기는 짓만으로 야수들이 펑펑 터져 나가지도 않았다.
우드가 야수들의 생 전체는 유독 피와 많이 얽혔는데, 새 수장을 거부한 배신자들의 죽음 또한 그러했다. 루카스의 혈흔이 묻은 칼자루만이 완벽하고 온전하게 같은 혈육들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다. 목을 따거나 심장을 찌를 때, 그때 죽은 ‘비스트’의 모든 힘과 권속들이 루카스에게로 넘겨졌다. 가장 우아하고 완벽한 ‘비스트’들의 상위 종에게 허락된 최후는 블록버스터나 그럴싸한 미장센의 연출 같은 것이 아닌, 온몸으로 부딪히는 난투극에 불과했다.
어쨌든 루카스는 그 모든 일을 해냈고, 핏물에 전 발걸음으로 왕좌까지 걸어갔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생각처럼 시시하지만도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해치운 상대방은 카터였다.
가슴에 잘 벼린 칼날을 찔러 넣었을 때... 찌른 부위부터 매캐하게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와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와중에도 광기로 기이하게 빛나던 카터의 안광, 순수하지 않은 그의 피와 애매한 힘이 자신에게로 전이되는 감각까지. 모조리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까마득한 고대부터 정해진 질서에 순종하지 않은 대가는 영혼조차 구제받지 못한 허무한 소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카터의 기운이 느껴질 수 있는 거지.
루카스는 텅 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대표님, 그렇다면 혹시 노아가 정말로 카터 그 새끼의 피가 섞인….”
잔뜩 흥분해 아무 말이나 떠들어대던 대니얼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자기가 말을 해놓고서도 아차, 싶었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놀라서....”
“아냐,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으니까.”
“예…?”
“한차민이 카터와 맹약을 맺은 것 같다고 했지?”
“그렇...죠?”
“맹약은 서로의 피를 걸고 하는 약속이잖아.”
“그렇지만....”
“그리고 노아에게, 카터가 몇 방울이지만 피를 넘겨줬잖아. 요람을 대신해서.”
“그게... 카터가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된다고요?”
“그래. 그래서 여태 맹약이 그렇게까지 강하게 남아 있었던 거야, 카터가 죽었는데도.”
제 피를 이어받은 그릇 안에 숨어서. 먼지처럼 미미하게나마. 살아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로 꾸역꾸역 살아서.
“그러다 나와 접촉해서 노아가 억지로 성장하게 되니까 그 안에 있던 카터의 숨도 조금씩 부피를 키워나간 거겠지.”
“그렇지만..., 그 피가 몇 방울이든 저희가 모를 수가 없잖아요.”
“한차민이 숨고 싶어 했잖아. 나에게서.”
발칙한 인간은 제 ‘반려’로서, 아이를 낳고... 우드가의 ‘반려’에게 주어진 힘을 십분 활용해 제 앞에서 자취를 감춘 채 숨어 있었다. 제 얼굴이야 어쩔 수 없이 드러내더라도 아이만큼은, 노아는, 꽁꽁 싸맨 채로 제 둥지 안에 숨겨두고 있었다.
루카스는 자신의 키보다 서너 배는 될 것 같은 높은 천고의 전면 창으로 다가갔다. 처음 이 빌딩을 올릴 때 투자사에서 뭐라고 했더라. 땅에서 하는 놀음은 질렸습니다, 이젠 남들이 엄두도 내지 못할 세상을 구름 위에 지어볼까 합니다... 라고 했던가.
백 년도 채 못 사는 주제에 무슨 욕심이 이렇게나 많은지. 그래도 그 발칙한 발상이 재미있기도 하고 눈물겹도록 안타깝기도 해서 기꺼이 푼돈을 내어주고 받은 펜트하우스였다.
고도가 가장 높을 시간이었다. 루카스는 손을 들어 눈부신 빛을 가렸다. 뜨거운 태양빛에 반사된 동공이 가느다랗게 좁혀들며 갖가지 색으로 빛이 났다.
한때 차민은 이런 색이 될 때의 제 눈을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곤 했다. 바보처럼 말을 더듬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찬사를 늘어놓으려 애썼다. 괴물에게 마음을 빼앗긴 신화 속의 어리석은 유랑시인처럼.
“대표님!”
루카스의 늘씬한 그림자가 순식간에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한 줌의 빛이 된 궤적이 길게 남아 그가 투신한 자리를 밝힐 뿐이었다.
인간과 비슷한 형태를 갖춘 외형으로, 내부의 장기로 쏟아지는 압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지루한 얼굴로 유유히 빌딩숲을 헤엄쳐갈 뿐이었다. 성의 없는 비행에 널따란 간판이나 조형물이 그의 팔다리를 툭툭 치고 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있던 사특한 것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나동그라졌다.
옷이 찢어지고 피가 줄줄 흘렀지만, 뭐가 대수일까. 어차피 그는 골백번을 으깨져도 죽지도, 다치지도 않을 불사의 몸이었다.
*
“루카스! 노아, 노아가…!”
“괜찮아, 안 죽어.”
제 몸이 전부 드러나기도 전에 빛무리를 붙들고서 엉엉 우는 차민을 보니, 예상보다 훨씬 기분이 좋지 않았다.
“노아는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여태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불과 어제, 저에게 퍼프를 달라고 조르던 노아의 통통한 뺨이 바싹 여위어 있었다. 한쪽 손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불에 타고 그슬린 새카만 고목 같았다. 그러고 보니 차민의 뺨이며 이마에 거뭇한 재가 달라붙어 있었다. 저 어리석은 인간은 그것마저 노아의 몸으로 여겨 소중히 하려고 했던 걸까.
“추측해보자면, 노아는 나를 만나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애 몸에 흘러들어간 몇 방울의 피 또한 자연스럽게 힘을 얻기 시작한 것 같아.”
“피? 누구의?”
얼이 빠져서 중얼거리던 차민 또한 금세 답을 찾은 듯했다.
“한차민. 숨 쉬어.”
물기 어린 눈이 초점을 잃고 반들거렸다. 루카스는 거의 정신을 놓기 직전인 차민과 옆에 쓰러진 노아를, 저와 그를 반씩 빼어 닮은 작은 아이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루카스, 지금 설마.….”
우드가로 데려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약한 개체에다, 무려 인간과 혼혈이기까지 했다. 돌아볼 것도 없이 치워버리거나, 하찮은 소일거리나 맡게 해야 할 쓸모없는 어린 것에 불과한데. 그런데 저따위로 바닥에 너부러진 꼴을 보고 있자니 루카스 또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럴…수가, 어떻게....”
“요건이 아주 잘 맞아떨어졌지. 너와 맹약을 맺은 덕분에 아직 세상에 발붙이고 있을 구속력이 있었고, 그런 너의 바로 곁에 제 피가 몇 방울이나마 남아 있는 육신이 있었으니.”
제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잘도 혀를 놀리는 자신의 입과, 먹먹한 마음이, 정신이 유리가 된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말을 하면서도 몸 전체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카터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들을 노리고 차민을 뒤흔들었던 걸까. 맹약을 맺고, 몸서리치게 싫은 인간과 그 혼혈에게 자신의 피까지 나누어 주면서. 그래서 죽는 그 순간에도 낄낄 웃어댔던 걸까.
“그러면 노아, 가 죽...거나... 아니면....”
차민의 입이 천천히 다물렸다. 평소라면 울거나 충격을 받아서 그러려니 했을 텐데, 맹약에 얽힌 몸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혹시 그런 이유 때문인가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카터가 노아의 몸을 빼앗거나, 기생할 수 있는 능력은 없어. 안에 자리한 그 새끼의 피라고 해봐야 고작 손가락 한 마디조차 적시지 못할 양일 테고....”
“그렇지? 그럼 괜찮은 거지? 무슨 수가 있는 거지?”
차민이 루카스와 노아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다소 정신없는 그 시선에 어쩐지 속이 쓰렸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비슷한 일이 있을 때 쓰는 방법이 있기는 해.”
“뭔데?”
“남아 있는 카터의 피를 빼는 거지. 그런데....”
“내가, 내가 할게. 뭐든지....”
“글쎄. 내가 인간에 대해 배운 바에 따르면 네가 그다지 좋아할 것 같지 않은데.”
“루카스, 나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야.”
그렇다면야. 루카스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차민이 바라던 답을 들려주었다.
“아이를 낳아야 해.”
“....뭐?”
“쉽게 말하자면, 저 어린 것에게 수혈을 해줄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소리야.”
“...그게.….”
“덧붙여서 인간들의 윤리관에서 나나 ‘비스트’를 비난하고 싶은 거라면, 집어치우고.”
언젠가 차민에게서 사전에도 없는 인간들의 언어를 배운 적이 있었다. 한낱 작은 인간에게 견딜 수 없는 시련이 닥쳐오면, 무릎이 툭 꺾이고 살이 에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아마 영미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표현인 듯, 차민이 몇날 며칠을 고민하고서야 겨우 설명해준 말이었는데.… 그 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의 얼굴이, 몰골이 딱 그런 상태였다. 무릎이 툭 꺾이고, 살이 에이는.
그렇지만 차민이 잔뜩 흐려진 눈으로 제 손목을 들여다보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루카스는 끓는 듯한 목소리로 야멸차게 경고장을 내밀었다.
“만약 네가 이 자리에서 죽어버릴 테니 알아서 다른 ‘반려’를 구해 아이를 낳으라는 개소리를 하고 싶은 거면, 부디 입 다물기 바라. 맹약의 대상인 너도 사라지고 없겠다, 수혈 같은 귀찮은 짓 할 것도 없이 그대로 죽여 버리는 쉬운 방법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