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lue Ⅱ(2)(2권) (5/8)

Clue Ⅱ(2)

“윽!”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차민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두덩을 꾹 누르며 크게 숨을 몰아쉬고, 다시 몸에 힘을 실었다. 노아에게 가봐야 했다.

차민은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섰다. 시트를 짚은 손이 덜덜 떨려서 한참을 버둥거린 끝에야 바로 설 수 있었다. 바닥을 딛는 발이, 잔뜩 힘이 들어가는 허벅지 안쪽이... 아니, 느껴지는 모든 감각들이 꼭 자신의 것이 아닌 양 낯설었다.

어제 사무실 책상 위에서 그대로 루카스에게 꿰뚫릴 판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 상황은 모면할 수 있었다. 어이없게도 인간인 차민의 육신이 ‘비스트’ 같지 않은 덕분이었다. 갑자기 맞닿은 그의 것은, 차민의 기억에서보다 훨씬 거대해 무작정 욱여넣는다고 될 수준이 아니었다. 예전엔 인간의 것이 아닌 도구들로 도움을 받아 언제나 절절 끓는 쾌감으로 그치곤 했지만, 어제는 아주 약간의 진입으로도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 와중에 삽입을 강행 한다면... 그저 뒤가 찢어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망가져도 고치면 그만이긴 하지만... 무려 책임지고 내 ‘반려’까지 찾아주시겠다는 분을 막 대할 순 없는 노릇이지.’

루카스가 중얼거리며 귀두만 겨우 걸쳐져 있는 접합부를 느리게 쓸었다. 악문 잇새로 울음 같은 앓는 소리가 자꾸만 새어 나갔다.

‘상대를 찾기 전까진 대신해서 나에게 열과 성을 다해주겠다고 했고…, 그래. 이 정도 호의쯤이야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그와 동시에 시야가 훅 꺼졌고, 눈을 몇 번 깜빡이니 이내 낯선 천장이 보였다. 결이 살아 있는 미색의 벽면과 큼지막 한 전등갓,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침대와 전면 창. 집이라기보다 갤러리의 전시관 같은 공간으로, 고가의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테리어였다. 이런 곳에 흔히, 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일어선 차민은, 당장의 제 처지도 잊고서 창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처럼 맨해튼의 상징과도 같은 고층의 건물이 내려다보이는 높이였다. 혹시 센트럴 파크 쪽으로 길게 내려진 그림자가 이 건물의 것일까? 차민은 높은 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게 될 정도로 현실감이 없는 높이었다.

처음 루카스를 알게 된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 도시에서 부를 자랑하는 방법은 드넓은 건물의 면적과 약간의 녹지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직전까지 머물렀던 홍콩도 그랬지만, 믿을 수 없는 평당 가격을 자랑하는 도시에서 운동장 같은 집과 완벽한 난방 시설을 갖출 수 있는 건 보통의 재력으로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제법 시간이 흐른 지금, 재력가들은 그런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어진 모양이었다. 널따란 집이나 별장 정도야 이미 원 없이 갖추고 있으니, 이제는 구름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이런 건물을 올렸구나....

물끄러미 까마득한 아래를 굽어보던 차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목을 제법 많이 젖혀야 할 정도로 아찔한 천고와 생소한 무늬의 대리석으로 마감한 카운터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득한 높이에서 도시를 오만하게 깔아뭉개고 있는 이 바벨탑의 가장 높은 층에 살고 있는 야수에 대해 생각했다.

‘아, 흐으, 아... 앗!’

‘이런 뻣뻣한 몸을 하고서 그간 잘도 로비가 어쩌고 지껄였던 거야?’

어제의 루카스는 이전에 자주 썼던 ‘비스트’들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윤활유만 구멍으로 쉼 없이 들이붓고, 이따금 손으로 안을 헤집으며 풀어진 정도만 확인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오일에 미약 같은 성분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그도 아닌 듯했다. 만약 그렇다면 제 안을 들쑤시고 있는 그 또한 뭔가 다른 반응을 보였을 텐데...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으니까.

그저 루카스는 저를 실험도구 다루듯 했다. 한계까지 다리를 벌리고서, 손가락의 개수를 늘려가며 뒤를 녹진하게 만들고, 기둥의 어느 지점까지 물고 삼킬 수 있는지 그 임계점을 관찰했다. 어느 수준까지 확인을 한 이후에는 섹스라기보다... 그저 삽입과 사출의 반복뿐이었다.

“어? 잠깐만....”

멍하니 기계처럼 루카스에게 안이 쑤셔지던 어제를 떠올리던 차민은,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굳이 여기로 올 이유가... 있었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했다.

그는 언제나 손짓 한 번으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고, 언제든 필요한 모든 것을 불러낼 수 있었다. 당장 어제도 제 사무실에 왕좌 같은 거대한 소파를 덜컥 소환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집까지 올 것 없이 그 자리에서 도구를 꺼냈으면 될 일 아니었나.... 게다가 분명 다시 만난 날, 루카스는 불순한 의도를 암시하는 듯한 건물의 키까지 건네주었다. 만약 저와 진창으로 뒹굴고 싶었다면, 그것도 감정 없는 욕구의 해소나 괴롭힘이 목적이었다면 그곳으로 갔어도 될 일이었다. 이렇게 누가 봐도 루카스 본인이 살고 있는 것 같은 공간까지 저를 데려올 일이 아니라.

“생각보다 잘 버티던데. 어제는.”

내내 떠올리는 중이었던 당사자의 목소리가 돌연 등 뒤에서 들려, 놀란 차민의 어깨가 파드득 튀었다.

“뭐야, 그 반응은.”

“...갑자기 나타나서 말을 거는데, 그럼 안 놀라고 배겨?”

차민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루카스를 향해 몸을 틀었지만, 민망하게도 다리의 힘이 완전히 풀려버려 털썩 시트 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자꾸 이상한 부분에서 센 척을 하려고 그러네.”

루카스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생략된 구절이 많은 문장이었다. 예전엔 안 그랬으면서, 너답지 않게 그러고 있네... 뭐 그런 이야기들이.

“됐고, 그래서 여긴 어떻게 나가면 되는 건데.”

노아도 문제고, 멋대로 무단결근한 셈이 되어버린 회사도 문제였다. 뭐, 회사야 의뢰인이 미팅을 요청했다고 하면 될 일이겠지만....

차민은 시간을 확인하려 침대 옆 협탁을 흘끔 바라보았으나, 기하학적 디자인의 시계는 그 용도를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한 번에 알 수도 없는 걸 무슨 시계라고 가져다 놓은 건지. 부자들의 심미안은 도대체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벌써 간다고? 나와 좀 더 뒹구는 편이 그 애새끼에겐 더 나을 수도 있는데.”

“그딴 식으로 노아 부르지 말라고 했지.”

루카스는 차민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손을 뻗었다. 아지랑이 같은 빛 무리가 그의 손끝을 타고 크게 일렁이더니, 이내 제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따뜻한 기운이 닿자마자 몸 상태가 좋아지는 걸 보면 예전처럼 치유라도 해주는 모양인데, 어쩐지 그때와는 조금 방식이 다른 듯도 같았다.

뭐... 애초에 이런 이능력이야 인간인 차민의 이해 여부를 떠난 영역이긴 했지만, 확실한 점은 루카스의 힘이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것 같다는 것이다. 비슷한 항렬의 ‘비스트’들을 전부 흡수하고서야 수장이 될 수 있다고 했던가.... 원래도 그는 무적이었는데 그 이상의 권능이 생길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었다.

“인간의 몸은....”

루카스가 손을 거두면서 감상이라도 하듯 차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불손한 시선이었다.

“참 신기해. 조금만 툭 쳐도 부러지고 죽는 주제에, 섹스를 할 때는 주무르고 치대는 대로 곧장 유연해지잖아.”

결국은 어떤 이상한 술수를 쓰지 않고서, 반복적인 삽입 끝에 괴물 같은 좆을 받아들이게 됐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역시나 내 기운이 네가 아닌 다른 곳에서 느껴지는 것을 보니... 전부 그 애새끼한테 흘러들어간 모양이군.”

“뭐?”

“걱정 마. 네가 경계를 풀기 전까진 같은 공간에 있어도 그 애가 보이지 않을,”

“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떨어져 있는데 노아에게 뭔가가 작용을 했다고?”

“그래. 넌 인간이니까. 내 흔적이 너에게 머무르지 못하고 우드가의 어린 핏줄에게로 흘러가버린 거겠지.”

그 말을 하며 루카스가 아득 이를 가는 것도 같아서, 차민은 더는 캐묻지 못한 채 물러섰다. 루카스의 말마따나 그의 흔적을 완벽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인 건 맞았다.

그런데 지금 한 ‘반려’의 이야기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노아는 루카스의 아이고, 저 역시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아직까지 자신이 그의 ‘반려’가 맞기는 할 터였다. 루카스 또한 여태 다른 이를 ‘반려’로 들이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루카스 고유의 기운들이 모조리 노아에게로 향했다고? 그리고 그는 그게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 저만 모르는 ‘비스트’들의 상식 같은 게 있는 걸까.

“네가 우드가의 수장이기 때문에?”

“그래. 부체든 모체든 온전치 못한 어린 권속들을 돌봐줄 의무가 있지.”

루카스가 차민의 어깨를 가볍게 떠밀었다.

“이제 좀 장단을 맞춰줄 기운이 나? 그토록 바라던 ‘요람’과 별개로, 이렇게 몸을 섞는 정도로도 너의 노아에겐 결코 손해가 되지 않을 테니까.”

얼결에 시트 위로 누운 꼴이 된 차민은 제게로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얼굴 위로 드리운 루카스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적당히 좀 해.”

“이봐, 한차민.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뭐?”

“처음에도 분명 그랬던 듯한데, 너. 앞으로 내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하겠다고.”

루카스의 손이 차민의 목을 움켜쥐었다. 살갗을 꾹 누르고 있는 그의 손끝이 혈맥을 따라 움찔 튀는 듯도 했다. 키스하려 붙든 것인지, 단단히 졸라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정도의 악력이었다.

“그래놓고서 막상 손을 뻗으면 이런저런 조건이나 달면서 물러서기 바쁘잖아.”

“잠깐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믿을 수 있겠어, 이렇게 나와 배만 맞대고 있어도 네가 얻어가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와중인데. 게다가 너에겐 이미 전적이 있잖아?”

“흣.....”

몸을 비틀어 루카스의 아래에서 빠져나오려던 차민은, 뒤에서 흐르는 척척한 느낌에 그대로 쩡하니 얼어버렸다.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줄줄 흐르는 것 같았다. 같은 종족은 아닐지라도 같은 남성체이기에, 차민 또한 잘 알았다. 밤새 내내 사정한다는 게... 그 여파로 다음 날까지 안에 고인 액이 비집고 나온다는 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대체... 얼마나 한 거야.”

마지막엔 기절한 듯 잠들어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섹스라기보다 훈련이나 개발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로 반복적인 움직임이었는데... 몸에 남은 흔적들을 보아하니 확실히 루카스와 다시 얽힌 게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뒤늦게 한숨이 터졌다. 이제야 어젯밤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이 나다니. 늘 이런 식이었다. 그의 앞에만 서면 스무 살짜리 얼뜨기로 다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말이나 더듬고, 굼뜨고, 멍하니 어쩔 줄을 모르던 그 시절로.

“미안한데 나중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 밤새 노아가 혼자 있었을 거라고.”

“아침이 되었으니 시터가 왔겠지. 사람 고용하고 있잖아?”

“루카스.”

“게다가 걔가 진짜 두세 살짜리 어린애인 것도 아니고.”

“루카스!”

“네 애새끼, 아직 안 죽고 잘 살아 있어.”

“그걸 네가 어떻게,”

“네가 내 앞에 데려다놓지 않는 이상 볼 수는 없어도 느낄 수는 있으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말했잖아, 그 애한테 내 기운이 흘러들어갔다고. 아무리 반쪽짜리여도 우드가의 권속은 권속이니....”

“참... 편리한 시스템이구나. ‘비스트’의 ‘반려’든, 아이든....”

루카스가 삐딱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인간들처럼 친자 검사를 할 수 없는 건 아쉽긴 하지. 하긴, 인간으로 치더라도 형제의 씨를 구별하는 일은 어려우려나?”

답답함과 짜증이 치밀어 길게 한숨이라도 쉬고 싶었지만, 맹약에 걸린 몸은 그조차도 마음대로 운신할 수 없었다. 적어도 카터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도, 루카스는 잊을 만하면 이 주제를 끄집어내곤 했다. 이 쯤 되면 진위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어디에든 화풀이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여전하네. 이 이야기만 나오면 아무 말도 안 하려고 드는 건. 누가 보면 꼭….”

골치 아프다는 듯 작게 중얼거리던 루카스가 돌연 입을 꾹 다물었다. 세월이 켜켜이 쌓인 깊은 눈동자가 잠시 드높은 천고를 응시하더니, 이내 천천히 차민을 돌아보았다.

“한차민.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

차민은 헐벗은 어깨를 둥글게 말며 몸을 움츠렸다. 어쩐지 겁이 났다. 돌연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은 그의 표정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타이밍이... 어쩐지 큰일이 벌어지기 직전을 암시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한차민.”

나지막이 제 이름을 부르는 루카스의 목소리에, 차민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케케묵은 구속에 얽힌 몸뚱이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반항과 도피는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시야가 차단되자 오히려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불안들이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할 수만 있다면 마른 가슴을 움켜쥐고 싶었다. 쥐어짜고, 두들겨 불이 난 것 같은 속을 좀 다스려보고 싶었다. 물론 그런다고 해소가 될 감정이 아니지만... 시시한 그러나 거대한 비극의 시작이 곧 까발려질 것만 같아 아찔하게 심장이 조여들었다.

“너... 카터와 맹약이라도 맺었어?”

“······.”

“설마 카터와 피를 걸고 약속이라도 한 거야? 노아가 누구의 아인지 말하지 않겠다고?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야?”

놀라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듯했지만, 아마 차민 본인만의 느낌일 것이다. 이전에 속으로 그렇게나 울었어도 부모님조차 눈치재지 못하셨으니... 아마 루카스 또한 평소와 다름 없는 시큰둥한 표정의 제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터이다.

“내가….”

입술을 초조하게 짓이기는 루카스의 얼굴이... 끔찍했다. 싫다거나, 밉다거나, 하물며 추하게 보인다거나 하는 건 절대 아니고... 조금 속상해져서. 살면서 이렇게 절망하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저를 빤히 내려다보던 루카스가 이내 지휘하듯 검지를 휘둘렀다. 그의 의지를 따라 허공 위로 글씨가 둥실 떠올랐다.

‘맹약에 대해, 특히 이미 죽은 자와의 맹약을 깰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찾아볼 것.’

불씨가 타닥일 때와 같은 튀는 소리가 나더니, 루카스가 허공에 마침표를 찍자마자 과연 일련의 문장들은 화르륵 불에 타 사라져버렸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가 부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식으로 지령을 내리는 모양이었다.

“...환장하겠군.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빌어먹을 구속을 깨기 전까지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루카스는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연신 쓸어 넘겼다. 현실은 복선을 되짚어나가다 보면 말끔하게 일이 풀리는 극본의 줄거리와 달라서, 간신히 열쇠꾸러미를 손에 쥐었음에도 여전히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카터가 이런 쪽으론 참 천부적이긴 했지. 음습하게 속 긁는 거.”

맞는 말이었다. 발설하지 않겠노라 맹세한 것이 사실이라고 한들, 노아가 누구의 아이인지 확실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계약까지 감수하고서 노아를 살리고 싶었더라면, 루카스가 생각하기로는 카터 이전에 자신을 한 번 쯤 찾아오는 것이 당연했을 텐데 그때의 차민은 루카스 대신 카터를 찾아갔다.

물론 카터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지만, 루카스는 알지 못할 테고... 이제 그에게는 이전보다 더 많은 변수와 의심이 꾸역꾸역 뭉쳐 몸집을 키우기 시작할 것이다.

“잠깐만.”

구겨진 시트를 바라보던 루카스의 고개가 느리게 들렸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음울하고 싸늘한 분위기였는데, 온몸의 솜털이 오소소 일어날 정도로 한기가 일었다.

“한차민, 내가... 지금 상황에서 무시할 수 없는 추측이 하나 더 떠올랐는데....”

그와 동시에 루카스의 몸이 저에게로 풀썩 쏟아져 내렸다. 깃털처럼 가벼운, 그러나 천근처럼 느껴지는 무게였다.

“한차민.”

“······.”

“너 아직 내 ‘반려’ 맞지?”

분명 맹약에 묶인 제 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카스는 뻣뻣한 자신을 보고 무엇을 확신 했는지, 굉장한 기세로 침대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몇 번을 그러다가, 나름대로 스스로를 다스릴 요량이었는지 시트를 꾹 움켜쥐었다. 물론 힘이 제어가 되지를 않은 탓에 부드러운 천이 까드득, 하고 그의 손톱 사이에서 결대로 찢어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귓가를 울렸지만....

“아직 네가 내 ‘반려’니까, 그러니까 어제 ‘요람’을 주면 내 ‘반려’를 찾아주겠다는 둥... 잘도 그런 소리를 해댄 거겠지.”

루카스의 상박이 크게 들썩였다. 입만 뗄 수 없을 뿐,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 제 몸 위로 쓰러진 그를 밀어낼 수도 있고, 거슬리는 소리를 막으려 귀를 덮어버릴 수도 있는데.... 그런데 어쩐지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

“그렇다면…, 네가 여전히 내 ‘반려’라면... 노아는 당연히 내 아이가 맞을 테고.”

미간에 내 천 자가 그려질 정도로 세게 눈을 감고 있던 루카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드러난 오묘한 색의 눈동자에는 온갖 감정들이 단층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마음에 드는 이를 ‘반려’로 삼을 수 있게 돕겠다고 한 건…, 노아가 무사히 성체가 되면 죽어버릴 심산이었다는 건가. 그래, 그렇겠네. 네가 아이까지 낳은 상황에서 다른 이를 ‘반려’로 들이려면 지금 ‘반려’인 네가 죽어야 가능한 일일 테니까.”

차민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밤새 시달린 탓인지 눈꺼풀이 빡빡했다. 달군 쇠막대로 안쪽을 마구 들쑤신다면 이런 기분일까? 당장이라도 펑, 하고 터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온 몸이 울컥 뜨거워졌다. 괴로웠다. 그런데... 눈물 한 방울도 멋대로 흐르질 않았다.

“멋대로 내 앞에 나타나서, 멋대로 내 삶을 휘저어놓고는... 이젠 자기 멋대로 죽어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고.….”

혼자 죽으려고... 날 영원히 이 지옥에 밀어 넣고서, 너는 그저 죽어버릴 생각이나 했다는 거지.

중얼거리는 루카스의 목소리가 섬뜩했다. 살의가 넘실넘실 흘러넘쳤다. 만약 그가 자신의 힘을 적절히 제어하지 않았더라면 음색만으로도 온 혈관을 터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루카스가 늑골부터 허벅지까지 유영하듯 부드럽게 쓸고는, 이내 오금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분명 그가 멀끔히 고쳐 줬는데도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느낌이었다. 지난했던 어젯밤의 기억이 덧씌워진 탓인 듯했다.

“네가 지금 내 아이를 가지면 되잖아.”

차민은 제 시야를 덮은 비현실적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그러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 아냐. 네가 아직도 내 ‘반려’가 맞는지.”

차민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풀며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쩐지 손끝에서 감각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인간....은.....”

귓가를 무섭게 때리는 정도의 심장박동을, 떨리는 제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힘겹게 말을 꺼냈다.

“불가능해, 그런 일. 알잖아.”

“그래, 남성체는 아이를 가질 수 없지. 원래대로라면.”

루카스가 엄지로 마른 허벅지를 꾹 눌렀다, 뗐다. 그나마 차민의 몸 중 살집이 붙은 몇 안 되는 부위였고, 그는 누르면 누르는 대로 엉겨 붙는 살의 감촉이 좋은지 그곳을 장난감처럼 움켜쥐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네가, 네 아버지가 그 예외사항을 만들어냈잖아.”

“······.”

속삭이는 루카스의 잔인한 목소리가 가슴을 할퀴고 갔다.

‘차민아, 카터... 그 ‘비스트’ 말이다. 그 사람이 날 찾아와서 이상한 말을 했어. 인간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약을 만들어 달라고 하더구나. 너에게 말을 하면 무슨 말인지 알 거라고 하던데... 혹시 학교 과제 같은 거라도 되는 거니? 아, 신경 안 써도 되는 거야? 나는 또. 연구소까지 직접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하길래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여보, 아무래도 이상해. 그 카터라는..., 그래? 집 근처에서도 봤다고? 우연이 아니라? 조금... 이상해. 집요하게 뭘 요구를 하는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 건지 임신 가능성이 있는 약물을 개발해보라고 하잖아. 아, 당연히 루카스보다는 서열이 아래이긴 한데, 그래도 무시하기는 좀 어려워. 쉿, 차민이가 듣겠어. 목소리는 낮추고.….’

‘미안하다, 차민아.... 어려운 부탁인 거 아는데... 루카스의 피 몇 방울만 있으면 된대. 그러면 전부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빠는 그냥, 엄마랑 너랑 더는 고생 안 하고 여기서 자리 잡았으면 해서 결정한 일이었는데... 투자자가 그렇게 잠적할 줄은 몰랐어. 너랑 루카스랑 친한 친구라고 하니까... 그것만 있으면 카터가 전부 갚아줄 수 있다고 하니까.….’

그리고 동시에 언젠가의 지친 아버지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내려앉은 거무죽죽해진 얼굴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가 만든, 정확히는 카터가 고서적을 뒤져 만든 있어서는 안 될 약은... 분명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긴 했지만, 어쩐지 지금의 그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 같았다. 카터가 해냈는데 루카스라고 어려울까.

“루카스, 이건... 이건 아니야. 누구에게도 좋은 생각이....”

내내 자라지 않는 노아도 버거운데... 혹시라도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부터 났다.

차민은 로비스트를 파견하고 합의 조건을 이끌던 순간을 떠올리려 애썼다. 지금의 저는 협상을 하기에 적합한 태도가 아니었다. 이렇게 겁에 질려선 안 된다. 이러면 결국 그에게 질질 끌려가게 될 거다.

그래. 언제나처럼 문제점이 뭔지 알고는 있다, 다 아는데….

“왜, 네가 ‘반려’가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겁먹을 이유가 뭐가 있어.”

“아…!”

기다란 손가락이 무심히 뒤를 들쑤시고, 다물린 구멍을 잡아 벌렸다.

“어제도 이 안에 넘치도록 사정했잖아.”

“그... 그건....”

“평범한 인간은 안에 몇 번을 싸도 내 아이 같은 건 가질 수 없다고. 게다가 오늘은 그 빌어먹을 약도 없는데. 안 그래?”

루카스가 안으로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반복되는 마찰로 퉁퉁 부었던 조금 전과 달리, 적당히 풀어진 뒤가 기분 좋게 그의 손을 물고 조였다.

“그렇게 놀랄 필요 없잖아. 혼자 죽어버리고 끝낼 생각 같은 걸 하지 않았다면 말이야.”

혼자, 죽어버리고, 끝낼, 생각.

루카스는 그 부분을 유독 음산한 목소리로, 음절마다 끊어 말했다. 거리가 가깝지 않았다면 한숨에 묻혀 명확히 들리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차민은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답답한 기분으로 그의 손과, 번듯한 얼굴을 번갈아가며 응시했다. 다시 만난 이후로 루카스는 언제나 화가 나 있었다. 그가 좀 잠잠할 땐 제 속이 뒤집어지는 날이었고. 가장 눈에서 불꽃이 튀었던 순간이... 언제였더라. 아마 제가 ‘요람’을 달라면서 같잖은 조건을 들이밀 때였던 듯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때의 루카스가 이만큼 이성을 잃었던 것 같지는 않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눈은... 그야말로 어딘가 휙 돌아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 절로 발끝이 곱아들 정도였다.

“....왜 그렇게, 흐… 화를 내?”

차민은 그게 몹시 이상했다. 그의 추론 중 가장 화를 내야 하는 대목은 카터와 맹약을 맺어버린 일 같은데. 그도 아니라면 자신의 핏줄인 노아를 내놓지 않는 것 정도. 제가 죽든 말든, 그건 더는 신경을 쓸 일이 아니지 않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내가 죽는 게..., 읏, 뭐가 그렇게…, 아, 대, 대수라고....”

“...뭐?”

검지와 중지를 밀어 넣고는 회음을 문지르려던, 막 난잡하게 굴려던 그의 손길이 뚝 멎었다.

“괴롭길... 바랐잖아, 내가.”

사실...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할 비밀을 덕지덕지 온몸에 바른 채로 간신히 오늘까지 버텨왔다. 이미 아슬아슬한 정도까지 물로 가득한 컵과 같은 상태여서, 단 한 방울로도 넘쳐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이상의 드라마와 비극은 감당할 수 없을 터이다. 아마도.

“너 때문에 힘들어하고, 네 밑에서 수치스러워하길 바랐잖아. 그런데 왜….”

짙고 지독한 무언가로, 초점이 완전히 흐려진 루카스의 동공이 어쩐지 맨질맨질한 바둑돌처럼 느껴졌다.

“맞아, 그랬어. 네가 괴롭고 아프길 바랐지.”

가만히 제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가 이내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허무하게 네가 삶을 끝내버리면, 내가 공들인 10여 년이 허무해질 것 같아서 말이야.”

“공을 들이다니…?”

“내가 다른 ‘비스트’들 모가지 분지르고 다니느라 바빠서 그간 가만히 널 내버려뒀겠어?”

신중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하며 루카스가 귀두를 입구에 문질렀다. 윤활유도, 다른 특수한 도구도 없었다.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어제 내내 시달렸던 탓인지 생각보다는 쉽게 아래가 벌어졌다.

“네가 자주 가던 편의점, 마트, 공원, 식당.... 일상에서 마주쳤던 모든 사람들이 다 내가 부리던 사람들이었어.”

“…뭐?”

“나에겐 곧 죽어도 허락을 않으니,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수밖에 없었거든.”

골이 징징 울렸다. 둔기로 세게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노아를 낳고, 차민은 도망치듯 홍콩으로 건너갔던 때를 떠올렸다. 이제는 흐릿해진 얼굴들이 멀거니 선 저를 빠르게 스쳐갔다. 영사기로 오래된 필름을 넘기는 듯이, 뚝뚝 끊기는 기억들이... 조금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네가 가진 기억, 추억.... 그런 것들은 모두 다 내가 준 거야. 너는 내 기억을 다 도려낸 듯이 굴고 있었지만.”

“······.”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 푼돈에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더군. 처음부터 내 지시를 받고 움직이던 사람들은 소수야. 적당한 보상을 베푸니 알아서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으니까. 뭐...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인간들이라 뒤처리도 탈 없이 진행됐고.”

다시 만난 날, 아무렇지 않게 차민이 해야 할 일을 일러주던 그때와 비슷한 표정, 닮은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그때도 루카스는 사실 치미는 화를 간신히 참고 있던 것일까.

차민은 제 것이 아닌 듯한 손을 들어 간신히 명치 아래를 꾹 눌렀다. 루카스의 성기가 제 안에 조금씩 진입을 하고 있어 오히려 속을 불편하게 하는 행동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달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몸 안에서 칼날 같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관리자 위치로 파견했던 ‘비스트’라고 해봐야 대니얼 하나 정도였으니.”

그렇지만 무심하게 던진 이 말에는 도저히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니얼이라고? 어제까지 제 사무실을 드나들던 그 비서? 그 대니얼?

“...대니얼? 지금 L&C의 대니얼 말하는 거야?”

루카스가 귀찮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야 좀 어떤 상황인지 알겠어?”

“······.”

“내 묵인이 없었다면 그 무엇도 허락되지 않았어, 너에겐.”

그와 동시에 루카스의 것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민은 멍하니 벌어진 입을 다급히 틀어막았다.

“흐아, 앗...!”

“그런데 감히, 멋대로 죽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고?”

어떻게, 네가, 감히, 날.

루카스는 몇 번에 걸쳐 삽입을 시도했고, 그때마다 말이 툭툭 끊어져서 의도치 않게 내용을 강조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자기만 혼자 두고 죽을 생각을 했냐니. 어투만 들었을 땐 그가 버림받은 비운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아, 으.….”

그러나 그런 것을 트집 잡을 새도 없었다. 골이 울릴 정도로 치받는 루카스 때문에 차민의 몸은 무기력하게 허물어졌다. 비명도 신음도 아닌, 꺽꺽대며 숨넘어가는 소리만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온몸의 근육이, 맥이 요동을 쳤다. 아직 그의 것이 전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도.

“루, 카....스, 잠.....”

분명 적당히 몸은 풀려 있는데. 게다가 루카스가 이능력으로 어루만져준 덕분에 상태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데... 그럼에도 쉽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진입이 버거워, 이 짧은 시간에도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렸다. 아이러니하지만 당장의 삽입 덕분에 어제 그가 얼마나 자신을 배려해주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선 조금도 위로가 되지는 않았지만….

“아..., 아앗, 루…, 카스, 제발...!”

“안 죽어.”

어제 종일 쑤셔 넣었어도 안 죽었잖아. 루카스가 붉어진 귓불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무엇보다 함부로 죽게 놔두지도 않을 거고.”

“흐, 그…러지, 마….”

‘그거 알아?’ 하며 루카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묻는다기보다 독백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였다.

“목을 따든, 팔다리가 죄 갈려나갔든, 네 몸에 단 한 방울의 피만 남아 있다면 나는 어떻게든 숨을 붙여놓을 수 있어.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복원시킬 수 있지.”

“안…, 안 돼....”

“그러니 넌 함부로 못 죽어. 절대로.”

루카스는 복원이라고 말했다. 재생이나 치유가 아니라... 복원이라고. 자신이 마땅히 그가 소유해야 할 피조물이라도 되는 것 같은 단어의 선택이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다정하게 어르는 그의 목소리는 독이나 다름없었다. 살갗에 튀고, 혈관에 스며들어, 폐부를 찌르고 전신을 뒤틀리게 했다.

“흐앗, 아…!”

루카스가 느리게 상체를 숙이면서 몸을 겹치자, 안을 찌르는 각도가 더욱 깊어졌다. 차민의 전신이 경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비라도 된 듯이 어떠한 둔통도 느껴지지 않는 제 몸이 무서웠다. 아니, 정확히는... 굳어버린 몸에 어느 순간 벼락처럼 찾아올 쾌감이, 달아오르는 홧홧함이 두려웠다.

“한차민, 차민아.”

루카스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땀으로 젖은 차민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목소리만큼이나 다정하고 달콤한 손길이었다. 허리 아래로는 몸통을 찢어놓을 것처럼 움직이고 있으면서.

“이번엔 내 아이를 낳아.”

카터의 피 같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그런 의심 따위는 할 수 없는 온전한 나의 아이 말이야.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을까, 하며 루카스가 환하게 웃었다. 그림같이 말간 그의 눈동자를 스치고 가는 감정이 너무 짙어서, 두렵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신...좀 차려, 제발...!”

차민의 울음 섞인 애원 같은 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루카스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굴었다. 성마른 손이 접합부를 문질렀다. 곧이어 어제와 비슷한 감촉의 끈적끈적한 액체를 붓는 느낌이 났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윤활유일 뿐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다.

“지금 상황에서 미약 같은 걸 들이부었다간 내가 감당이 안 될 테니까.”

목선을 따라 입을 맞추던 루카스의 입술이 턱 끝에 닿았다. 뾰족한 송곳니로 아랫입술을 꿰뚫을 것처럼 세게 씹고는, 이내 틈을 갈라 더운 혀를 밀어 넣었다. 삽입과 꼭 닮은 무겁고 두려운 키스였다.

“으....., 흐으.....”

차민이 내뱉으려던 말들은 혀끝에서 맴돌다 사라져버렸다.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제대로 호흡하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었다.

“......!”

퍽, 하고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루카스가 크게 허리를 움직인 탓이었다. 제 몸의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느껴질 정도로 욕심껏 욱여넣은 그의 좆 때문에 까딱하다간 혀를 깨물 뻔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루카스가 손가락을 밀어 넣은 틈에 벌어져 피를 보지는 않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 우읏.....”

벌어진 허벅지로 루카스의 몸이 철썩이며 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길이라도 내듯 몇 번이나 안을 때리고 가는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두툼한 귀두 끝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극점을 슬쩍 스치고 갔다. 그와 동시에 개화라도 하는 것처럼 숨어 있던 감각들이 모조리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으응, 읏.....”

미치겠다. 차민은 루카스가 시킨 것도 아닌데, 꼭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이 입에 문 손가락에 매달렸다. 뭐라도 물고 빨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은혜라도 베풀 듯 긴 손가락이 하나 더 입안을 파고들었다. 손톱 끝의 가장 단단한 부분이 입천장의 부드러운 살을 문질러주었다.

뺨을 쓸고, 키스하고, 어깨와 늑골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있었지만, 내벽을 쑤시고 가는 루카스의 성기는 난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제까지는 확실히 쾌감보다는 익숙해지는 것에 중점을 두긴 했던 모양이다. 그의 것이 이렇게 쉽게 자신의 이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도 몰랐지.”

“아, 으.….”

“무엇 때문에 네가 이렇게 미운 건지, 왜 이렇게까지 네 흔적이나 찾아다니고 있는 건지, 다시 만나면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건지... 그리고 결국 내 앞에 끌고 와놓고서도 너와 뭘 하고 싶었던 건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태도,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거부와 부재….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납득할 수 없는 사소한 이유들이어서 나조차 답답할 때가 많았는데....

“흐앗, 루, 아...!”

“난 너와 줄곧 이러고 싶었던 것 같아.”

루카스가 차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입안을 채워주던 온기가 사라지자 민망할 정도로 열띤 신음이 터져 나왔다.

“넌 여전히 내 ‘반려’였고, 그래서 나는 내내 초조했던 거지. ‘비스트’에게 ‘반려’는 그런 존재거든.”

“흐으....”

뒤를 빠듯하게 메운 루카스의 것으로도 돌아버릴 듯한 와중에, 틈 하나 없이 몸이 맞물린 덕에 반쯤 발기한 아래가 자꾸만 그의 배에 문질러졌다.

“넌 모르지, 네가 느끼는 곳들이 꽤 닿기 어렵다는 거.”

구멍 입구에 간신히 걸쳐 있던 거대한 자지가 끝부분을 쿡 찍고는 내벽 안 이곳저곳을 찍어내듯 긁으면서 다시 안으로 진입했다.

“하, 아, 아앙…!”

“이렇게 어려워..., 네가 느끼는 곳들이.”

허리가 절로 튀는 아찔한 감각이었다. 발가락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곱아들고, 뻐근하다 못해 저릴 정도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 바람에 뒤까지 잔뜩 조이게 되어서, 젖은 내벽이 압력을 이용해 조금 더 수월하게 루카스의 성기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응, 아, 안… 돼…, 아...!”

살점에 스며든 윤활유가 찰박이며 물소리를 냈다. 마찰로 보글보글 일어나던 비말이 팡팡 터지는 소리, 젖은 살이 울컥 조여들면서 그의 성기를 집어 삼키는 소리, 서로의 살이 철썩이며 맞부딪치는 소리.... 루카스가 뱀처럼 온몸을 칭칭 옭아맨 통에 제대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안을 헤집는 감각과 귓전을 때리는 음란한 소리로도 충분히, 아니 과하게 자극적이었다.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차민의 몸이 격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아래에서 울컥 백탁액을 쏟아냈다. 그래도 이쯤이면, 싶은 예상조차 불가능했던 갑작스러운 사정이었다. 더욱 괴로운 건, 루카스의 허릿짓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아 그의 단단한 복근이 좆을 문지르는 자극 또한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흐아, 그만, 아냐, 아, 아아앗!”

사정 직후 가장 예민해진 부위에, 직접적인 자극이 쏟아지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이 와중에도 그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유연하게 허리를 쓰고 있었다.

“L&C? 플린? 그런 거…, 후, 전부 알 게 뭐야.”

“하아, 아, 으...!”

“어차피 모조리 다 핑계였어. 그저 나는….”

루카스의 눈이 번들거렸다. 간신히 붙들고 있던 무언가를 풀어버린 것 같은... 맹목적이고 기묘한 안광에 소름이 오싹 돋았지만, 한계 이상의 쾌감이 휘몰아치는 탓에 이내 멍한 얼굴로 그의 몸을 붙들게 되었다.

“넌 이렇게 내 것만 품고 있으면 돼.”

“아…냐, 나는..., 아아!”

“네 구멍도 좋아서, 이렇게 내 자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잖아.”

뒤로 반쯤 몸을 물렸던 루카스가 크게 박아 넣으며 웃었다.

“네가 내 ‘반려’라서 그래.”

...그렇지 않았다. 인간은 ‘비스트’가 남기는 ‘반려’의 흔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의 몸으로 잘도 이 괴물 같은 성기를 받아내고 있는 건, 어제 내도록 그에게 꿰뚫린 탓이었다. 루카스 또한 모르지 않을 테지만, 일부러 그런 말만 골라서 하는 듯했다. 어쩐지 차민이 아니라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시키고 싶은 것처럼.

“아닌 거..., 흣, 알...잖, 아, 응....”

“아니라고?”

“흐아아, 앗!”

그렇지만 제 구멍은 그의 말마따나 꼭 출납을 위해 만들어진 듯이, 끈덕지게 루카스의 것을 물고 조이고 있었다.

차민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몸 아래 납작 눌린 제 몸이, 정확히는 배 쪽이 어쩐지 조금 불룩하게 부푼 것 같았다. 설마... 기분 탓이겠지. 차민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루카스의 성기가 저렇게까지 제 몸을 들쑤시고 있지는 않을 거다.

“하앗, 아....”

시야가 흐릿했다.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울컥하고 눈 안쪽이 뜨거워졌다. 아니... 잘 모르겠다. 지금 보이는 거라 곤 단단한 루카스의 몸과 잘게 쪼개진 근육의 섬세한 움직임, 잔뜩 젖어 번들거리는 살결... 뭐 그런 것들뿐이었다. 거기에 구멍 안을 들쑤시고 있는 거대한 좆의 움직임만이 느껴졌다.

“흐으, 읏…, 아앗!”

반복된 마찰로 선뜩한 감각이 발끝부터 내달린다 싶은 순간, 루카스가 이전보다 빠르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명백히 끝을 보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긴 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버거웠다.

잔뜩 풀어진 내벽은 속도 모르고 부드럽게 루카스의 것을 조이고 당겼다. 어딘가 망가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아아앗.....!”

크게 찌르고 휘젓는 느낌에 일순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발가락이 곱아들고 종아리의 근육이 팽팽하게 일어설 정도로. 이내 피잇, 탓, 하고 물이 튀는 민망한 소리와 함께 까마득한 절정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와 시간차를 크게 두지 않고 루카스 역시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드디어 사정한 모양이었다.

“하....”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숨결이 인중을 간지럽혔지만, 루카스는 아직 차민의 안에서 빠져나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고여 있던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감각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단할 것 없는 전희와 체위였다. 물론 어제부터 내내 시달렸으니 조금 더 예민한 상태일 수는 있겠지만... 그저 정직하게 밀어 넣고 흔들고 쌌을 뿐인데. 고작 그 정도로도 이렇게 버겁고 무거운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천, 천히 움직여, 제발....”

조금 멍해진 차민의 주위를 환기시키려는 듯, 아직 안에서 물러서지 않은 채로 루카스가 상체를 슬쩍 일으켰다. 그래봤자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정도였다. 여전히 바투 붙어 있는 채였으므로 구멍 안을 찌르는 각도가 조금 달라진 수준이었다.

서로의 침 넘어가는 소리, 심장 뛰는 맥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새삼스럽지만... 루카스에게도 심장이 있었다. 그래, 신이 되기 위한 마지막 시련을 견디고 있는 듯한 그에게도, 인간과 똑같은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마 이 관계가 이렇게까지 배배 꼬이게 된 것의 1할 정도는 이 외양에도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얼굴의 근사함이나 비현실성 같은 게 문제가 아니라... 루카스에게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그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잊었던 것 같다. 상상의 동물이나 귀 달린 수인 같은 존재라면 변해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너무나 인간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서.

“아무리 인간이라곤 해도.….”

가만히 저를 내려다보는 루카스는... 말 그대로 시선만 주고 있을 뿐 자신을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초점이 흐려진 뿌연 그의 눈동자는 열렬했던 언젠가의 흔적을 좇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인간들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조금 전보다야 광기가 덜하긴 했으나 루카스의 깊은 눈에는 여전히 숨길 수 없는 짙은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스포이트로 잉크를 뿌린 것처럼 갖가지 색이 너울거리며 가라앉고 있는 동공. 차민은 주박에라도 걸린 듯이 꼼짝도 못 한 채, 복잡하고 아픈 그의 시선을 모조리 받아냈다.

“어쩌면 이렇게 한 올도 남지 않을 수 있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루카스의 손이 차민의 뺨을, 어깨와 쇄골을, 그리고 심장 부근을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아마 자신의 몸에 새겨지지 못하고 흩어져버린 ‘반려’의 흔적 같은 것을 더듬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참 그와 붙어 다닐 때 코끝을 간지럽히던 달콤한 과일향 같은 게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으음. 방금 전 루카스가 했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노아는 성장 동력이... 그러니까 ‘비스트’로서의 영양분이 한참이나 부족한 상황이라, 부체이자 가장 강력한 수장인 루카스가 흘리는 기운들을 모조리 흡수하고 있는 중이라는 건가.

“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결국은 아이까지 걸게 하는 비싼 화대에 분노해야 할지.... 차민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직전까지 시달린 탓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렇게 단 하나도....”

루카스의 손은 갈 곳을 잃고 한참을 차민의 몸 위를 허망하게 더듬다, 결국 엉망이 된 시트를 꾹 그러쥐었다. 손톱이 부러지는 소리가, 이미 너덜너덜해진 천 조각이 뜯기는 소리가 생생했다.

그제야 몸을 섞는 내내 그가 던졌던 못된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똑같이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들 수도 있었다. 그런데 루카스의 방향 잃은 분노를 이해할 구석이 조금은 남아 있어서, 어설픈 연민으로 그러지도 못했다.

당장은 무엇도 생각할 여력이 없었지만, 확실히 카터가 오매불망 고대하던 상황일 것 같기는 했다. ‘비스트’와 인간이라서 영원히 좁혀질 수 없는 그 간극. 무엇도 아닌 하찮은 인간이라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던 같잖은 삶의 정의와 끝내 고르지 못했던 선택지들. 덫에 걸린 먹잇감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제 모습과 그런 저를 끝내 이해하지 못할 루카스….

‘나도 모르는 파훼의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나와의 맹약이 아니더라도 넌 끝내 루카스를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그 이기적인 새끼가 널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을 테고.’

‘그나마 네가 맞이할 수 있는 최고의 해피엔딩은 루카스 그 새끼한테 평생 얽매여 있는 것 아닐까? 어차피 죽지 못 해 살게 된다면 애도 최소한의 보호는 받을 수 있을 거고, 이렇게 돈 때문에 허덕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네 알량한 자존심이, 결국 부모를 죽게 했다는 인간의 양심이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보진 않겠지.’

‘아무리 오냐오냐 자랐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우드가의 차기 수장인데, 너와 몇 번 말 섞다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겠어? 나는 그 순간을 제일 고대하고 있어. 루카스 그 멍청이는 자기 마음도 모르고서 ‘반려’니 뭐니 하는 것에만 얽매여서 널 제대로 받아들이질 못할 게 뻔하거든. 좋아해도 좋아하는 줄 모르고 ‘비스트’의 본능 정도로 치부하고 말겠지.’

‘한, 네가 인간이라서 정말 다행이야. 언젠가 반드시 죽을 테니까. 혼자 남겨진 루카스는 죽지도 못하고서 서서히 미쳐가겠지.’

“집 옮겨.”

생각에 잠긴 차민을 꾸짖기라도 하듯 루카스가 딱, 하고 손을 튕겼다.

“...집, 이라니?”

“전에 카드키 준 걸로 기억하는데. L&C 회의실에서.”

“흐읏.....!”

다시 이채가 돌기 시작한 차민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루카스가 서서히 뒤로 몸을 물렸다. 그 짧은 허릿짓으로 잠시 식은 듯했던 몸이 다시금 달구어질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루카스는 이대로 섹스를 끝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잠깐만, 루카스. 나는, 더는....”

루카스의 손이 뿌옇게 빛났다. 그의 손을 떠난 알갱이 같은 빛들이 차민의 몸을 덮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쾌적한 기운이 전신을 훑고 가는 것이 느껴졌다. 단, 그의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부분만 제외하고서.

평소보다 배는 넘치는 기력이, 한편으론 녹진하게 풀린 몸 한구석이 공존하는 감각이 기묘했다. 너무 이질적이어서 어쩐지 제 몸이 오로지 루카스를 위한 구멍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차피 옮기게 될 거 그래도 좋은 말로 할 때 네 발로 움직여.”

그나마 그쪽이 덜 비참하지 않겠느냐는 루카스의 텅 빈 웃음이 귓가에서 흩어졌다. 쓰고 달아서,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청아하고 허망한 숨결.… 차민은 어쩐지 루카스가 조금씩 부서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루... 아니 거의 이틀을 자리를 비웠더니 핸드폰이 먹통이었다. 배터리가 이렇게 빨리 닳다니, 혹시 무서울 정도로 알림이 쌓여 있는 탓일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뚝 끊겼다는 거였다.

아마 그 시점에서 루카스가 지시를 내린 모양인데... 무슨 내용인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내팽개친 회사와 돌아가는 꼴을 알려면 필연적으로 비서인 대니얼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그가 오랜 시간 몰래 저와 노아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루카스의 말이 떠올라서 자꾸만 화가 치밀었다. 그래 놓고선 처음 만났을 때 노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식사나 하자고 능청을 떨었지.

“아, 미안.”

부지런히 입가로 퓨레를 날라다 주던 숟가락이 뚝 멈추자, 노아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면서 차민의 옷을 잡아당겼다.

“많이 먹어. 이거 먹고 과자도 하나 줄게.”

과자라는 말에 뚱하던 얼굴이 사르르 녹았다.

다행히 노아에겐 아무런 일도 없었다. 여전히 말도 하지 못했고, 눈에 띄게 자라지도 않았지만... 안색이 확연히 달라졌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던 조그만 아기가 아니라..., 뭐랄까. 거대한 생명력이 막 움트기 시작한 것 같은, 깊고 청량한 활력이 느껴졌다.

“아, 벌써 다 먹었어?”

입이 아니라 볼로 먹은 것일까. 턱이며 뺨에 퓨레를 잔뜩 묻힌 노아가 손을 쭉 뻗고는 차민에게 안아달라고 버둥거렸다. 어지간히 과자가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평소보다 어리광을 심하게 부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거의 이틀을 함께 있어주지 못했던 것이 미안해, 아무 말 않고 어르고 달래주기로 했다. 게다가 또래의 평범한 아이들과 비교하면 노아의 칭얼거림은 징징대는 수준에 들지도 못해서, 딱히 힘이 들 것도 없었다.

“그래, 부엌 가보자. 실은... 아빠도 여기 구조를 아직 잘 모르겠어.”

노아가 볼을 잔뜩 부풀렸다. 꼭 차민의 말을 알아듣고선 깊게 한숨이라도 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지난밤, 루카스와의 섹스는 온 신경을 갉아먹을 것처럼 소모적이었다. 막판에는 중간중간 정신을 잃는 통에 솔직히 대부분의 기억이 소실된 상태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땐 또 다른 낯선 곳이었고... 노아 또한 제 곁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멀끔한 상태로, 옷을 갖춰 입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될 따름이었다.

처음에는 루카스가 노아를 발견한 것일까 화들짝 놀랐는데, 자세히 방 안을 둘러보니 사용하던 가구와 짐들까지 모조리 이동한 듯했다.

대체 어떤 원리로 가능했던 걸까. 편두통이 도지는 듯했지만 어차피 차민의 상식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 게 뻔하여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로 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어울렸고, 남성의 몸으로 노아를 낳기도 했는데, 이보다 불가능한 일이 뭐가 더 있을까. 그저... 저와 노아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 이 공간 안에서는 몹시 이질적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도 우리 노아가 좋기는 좋은가 보다. 울지도 않고. 낯설어하지도 않고. 그치?”

창밖으로 보이는 평화로운 풍경이 마음에 들었는지, 노아가 짧은 목을 길게 빼고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곳곳에 신흥 부촌이 형성된 탓에 예전만큼의 이름값은 못 한다지만, 그래도 트라이베카는 트라이베카였다.

루카스가 머무는 곳은 까마득한 높이 때문인지 약간의 공포심이 일 정도였는데, 이곳은 딱 좋았다. 분명 낮은 층은 아닌데 어쩐지 아늑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 정말 괜찮아?”

노아는 가만히 커다란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잦은 이사로 이골이 난 덕일까. 다행히도 노아는 갑작스레 바뀐 환경에도 거부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두세 살배기처럼 보여도 실제론 나이가 적지 않으니 그런 걸 수도 있겠고.…

“하긴, 어차피 여기는 우리 집도 아니야. 여태 남의 집에서 살긴 했지만.….”

이 집의 주인이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 상대인지 투덜거리려던 차민은, 문득 스쳐 가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 어떤 단서들보다도 제가 죽을 생각을 했다는 것에 분노했던 루카스.

“노아, 만약에.….”

바둑알처럼 반질반질하고 동그란 눈이 차민을 올려다보았다. 쏟아지는 아이의 시선에서 몽글몽글한 애정이, 어린 것이 줄 수 있는 최대치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음..., 여기는 직전까지 있던 집이 아니라서. 과자가 없으면 어떡하지?”

차민은 결국 하려던 말을 삼키고서 싱거운 핑계나 댔다. 이런 너를 두고 죽을 생각을 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래서 어쩌면 긴 시간 동안 혼자 지내야 할 수도 있다고 하면... 너도 그렇게 아빠가 밉고 원망스러울까?

“응? 아아, 나가자고?”

노아는 과자가 없는 게 뭐가 문제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차민의 옷을 잡아당겼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뉴욕으로 오고서 노아와 외출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아니, 있기는…했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흘러가자, 지금 상황도 잊고서 미안한 마음에 절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하다못해 강아지도 산책을 부탁하는 전문 시터가 있는 마당인데, 좁은 집... 아니 좁은 침대 안에 덩그러니 누워만 있으려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잠깐만, 그러고 보니 옷은 또 어디에 있지?”

노아의 겉옷부터 챙겨야 하는데, 살림살이가 전부 바뀌어 버리니 어디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루카스의 그 희한한 능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그들의 살림살이는 어느 한 방에 전부 몰아넣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여기에 살았던 사람의 것인 듯 이곳저곳에 착착 스며들어 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아기 코알라처럼 품에 안긴 노아를 생각해 불안한 티는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널따란 집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루카스가 사는 곳보다는 훨씬 사람 냄새가 나는 게, 꽤 오랫동안 성실하게 관리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이것 또한 저와 노아를 추적하면서 준비했던 걸까?

루카스가 흘린 말들이,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그런 걸까? 생각보다 격렬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내내 그에게 화를 냈고, 싫다고 했고, 애원도 해봤지만... 반사적이고 습관적인 말에 가까웠고, 실은 아직까지도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루카스가 도시 한복판에 쌓은 고고한 바벨탑처럼.

“아, 아니야. 미안해. 얼른 나가자, 노아.”

우두커니 선 차민이 불안했던 것인지, 옷을 붙들고 있던 조그맣고 통통한 손이 툭 떨구어졌다. 노아가 바라는 것은 언제나 먼지처럼 부질없고, 포기는 서운할 정도로 빠르다. 원래의 속도대로 몸이 자랐다고 하더라도 조금 더 떼를 쓰고, 울어도 괜찮을 나이인데도.

차민은 마른 등을 토닥여주며 부지런히 이 방, 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쌍하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노아가 딱하고 가여웠다.

“...어? 노아? 왜 그래?”

그런데 가만히 차민에게 매달려 있던 노아의 몸이 심상치 않게 들썩였다. 목에서 꿀렁이는 움직임이 느껴지는 걸 보니, 꼭 토하기 직전인 듯했다.

“속이 안 좋아?”

먹은 음식이라곤 이유식과 퓨레 약간인데.... 큰일이었다. 노아가 이유 모를 고열로 툭 쓰러지는 것도 미칠 노릇이었지만 이렇게 평범한 인간처럼 아플 때도 곤혹스러웠다. 어떤 병원을 데려가서, 어떤 약을 먹이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오래 살았던 홍콩은 알음알음 소개받은 의사들이 몇몇 있었지만... 뉴욕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판국이니....

“노......”

노아의 이름을 부르면서 최대한 침착하게 얼러주려고 했는데..., 바로 눈앞에서 금빛 가루가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셔벗위에나 장식될 것 같은 작은 조각들이 점차 몸집을 부풀리더니, 이내 사진 속 극광처럼 크게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멍하니 창문 너머 화살처럼 쏟아지는 황금빛 궤적을 바라보던 차민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모양으로만 중얼거렸다. 설마, 아니겠지.

“노, 노아?”

그러나 빛의 무리가 인영의 형태를 갖춰갈수록, 노아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모자란 것처럼 작은 흉통이 크게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가르륵, 하고 목 안쪽에서 울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제 어깨에 기댄 가느다란 목에선 툭, 하고 실 같은 게 끊어지는 소리까지 났다.

평범한 병원 같은 걸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차민은 발을 동동 구르며 바지춤을 더듬었다. 지금 상황에서 떠오르는 사람은, 아니 ‘비스트’는... 당연히 루카스뿐이었다. 여태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노아의 반응이 걱정스러웠고... 그리고 이 와중에도 처음으로 소리를 낸 것이 반가웠다.

“이젠 멀쩡한 모양이군.”

“루카스!”

그리고 언제나처럼 화보집 같은 착장을 한 루카스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옅은 안개를 거두어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부유하던 빛의 조각을 보는 순간부터 그일 거라고 짐작을 하긴 했으나, 막상 루카스가 나타나니 너무 다행스러워서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루카스, 안 그래도 지금 연락하려고 했는데....”

처음 보는 노아의 격렬한 반응이 당황스러워서... 차민은 당장의 상황도 잊고 냅다 그의 이름을 외쳤다.

“...뭐지?”

확연히 느껴지는 반색의 기미가 낯설어 반걸음 뒤로 물러선 루카스가... 그제야 차민의 품에 안긴 조그만 덩어리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확 구겨버렸다.

“이상해, 노아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 툭툭 몸 안에서 뭐가 끊어지는 듯한... 그리고 노아도 끄르륵, 하고 목이 긁히는 것 같은 그런 소리를 냈어. 여태 웃음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든 루카스에게 노아를 들키지 않으려 애써온 10여 년이었다. 이전에 당장 그 애새끼를 눈앞에 대령하라며 수치스러운 짓을 시켜도 꿈쩍을 안 했다. 앞으로 저를 어떻게 굴려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노아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낯선 반응을 보이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최근에 루카스에게 죽을 각오로 모든 것을 내주기로 결심한 이유 또한 노아의 건강과 성장 때문이었으니, 어떻게든 그의 눈을 피해 보려 애썼던 지난날의 허무함이나 허망함 같은 건 지금 따질 일이 아니었다.

“루카스, 제발... 그 ‘요람’이라는 것 좀 줘, 제발....”

차민은 여태까지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하던 것도 잊고서 루카스에게 매달렸다. 그는 여전히 잘 조각된 것 같은 오만한 턱 끝을 치켜든 채로, 눈만 내리깐 채로 자신과 노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쩐지... 물론 이건 자신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루카스도 노아를 직접 마주하자 조금은 당황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으.... 으으.....”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지만,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이제는 노아에게서 뼈가 부러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났다. 아니,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묵직한 진동이 차민의 몸에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줘봐 그거.”

발을 동동 구르는 차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카스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노아를? 너한테?”

차민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서 품 안의 노아와 루카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 아마 나와 갑자기 마주쳐서 그런 것 같으니까.”

“뭐? 고작 그런 이유로 애가 이렇게.….”

차민이 말을 꺼냄과 동시에 그의 어깨에 기대어져 있던 가느다란 노아의 목이 힘없이 꺾였다. 꼭 루카스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지금 내 피 같은 걸 줬다간 애 정말 죽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일단 줘봐.”

아주 잠시, 멍하니 노아를 들여다보던 차민은 이내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사지를 덜덜 떨며 루카스에게 다가갔다. 이제 노아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수준 정도가 아니었다. 꼭 뼈가 사라진 것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한 가여운 아이를 보니 더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

“왜, 노아만… 대체 왜.….”

왜, 대체, 어째서.

바보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루카스에게 제대로 된 이유나 설명을 바라고서 묻는 건 아니었다. 그냥..., 속이 상해서 하는 소리였다.

어떤 이유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는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어제..., 아니 그저께 근처에 있지도 않았던 노아에게도 그의 영향이 미칠 것이라는 말을 루카스로부터 들었다. 고작 그와 섹스를 한 것만으로도 그렇다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우드가의 수장이자 자신의 부체와 직접 대면했으니 그 충격은 몹시 클 것이다.

게다가 노아는 반절은 인간이었다. 예외도 많고 완전하지도 못한 존재…. 그래, 아마 방금 전 자신과 마주쳐서 그렇다는 루카스의 말 또한 그런 의미일 터이다.

그런데... 어떤 흐름인지 이해는 된다는 게, 그 자제가 차민은 힘들고 어려웠다. ‘비스트’의 생태계 시스템을 처음 들었을 때야 인간의 상식 밖을 벗어난 일이니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한 번 얼개를 습득을 한 이후로는 사실 그렇게까지 예측이 불가능한 일투성이였던 건 아니었다.

물론 놀랍고 당황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긴 했어도 이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쉽게 납득할 수는 있었다. 그래서 속이 상하는 거였다. 소설로 따지자면 복선이 충분한 추리물이었고, 드라마로 치자면 대단한 반전까지는 없는 뻔한 이야기였다. 이렇게 원인도 결과도 모두 나와 있는데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루카스와 제가 왜 다시 얽혀서 소모적인 짓이나 벌이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불쌍한 노아가 어째서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홍콩에서 숨어 살던, 아니 숨어 산다고 믿고 있던 지난 10여 년 또한 힘들긴 했지만, 요즘처럼 속이 닳는 기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런 사태까지는 생각 못 했던 모양이야?”

노아를 품에 대충 안은 루카스가 힐끗 차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귓가에 솜털이 일어설 정도로, 긁는 듯한 낮은 목소리.

처음 노아를 발견했을 때는 당황하는 것도 같았는데... 착각이었을까? 그는 평소처럼 뚱하고 무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빙빙 돌려 말하지 마. 이 상황에서도 제대로 알아듣고 반응할 기운 없으니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 말 듣지 그랬어. 나한테 애 보이라고 했을 때 얌전히 데리고 왔으면 어련히 알아서 조치해 줬을까.”

“······.”

“정말 아무런 생각도 없었어? 나한텐 안 보이게 꽁꽁 숨긴다고 한들 이 애가 있는 방 바로 앞에서 널 엎어놓고 박기라도 했으면, 그땐 어쩌려고 했어?”

“너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왜? 틀린 말은 아니잖아. 더는 상상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그럴 목적이 아니면 너한테 뭐 하러 집까지 내줬겠어? 인간들의 재화가 나에게 썩 대단한 가치가 있는 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대가 없이 퍼주는 자선 사업가로 살고 싶진 않다고.”

“그래서, 그걸 알고서 일부러 여기까지 왔어? 내가 노아를 보여주지 않을 수 없는 처지라는 걸 알고서?”

“글쎄.... 꼭 그럴 의도였던 건 아니었지만, 여기에 발을 딛자마자 생각이 나더군. 그리고 누가 변호사 아니랄까 봐 자꾸 이상한 곳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하는데, 다시 말하지만 나한테 애를 보일 수밖에 없는 상태로 끌고 간 건 한차민, 너야. 나는 끝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고.”

욱해서 날을 세우려던 차민은, 루카스의 품 안에서 확연히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한 노아를 보고 꾹 참기로 했다. 방금 전 대가라고 했던가.... 그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먼저 그에게 찾아가 별것 아닌 조건과 제 몸을 내걸었던 이는 저였으니까.

“...어쨌든 노아는 이제 괜찮은 거지?”

“그래. 성장통 같은 거야. 진작 겪었어야 할.”

“아.....”

“나는 또... 호들갑을 떨길래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더니.”

우유에 적신 진저브레드맨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았던 노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루카스가 자신의 몸을 다스려줄 때처럼 빛이 반짝인다거나 하지는 않아서,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차민은 어쩐지 겁이 나서 더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만약 그가 아무 이능력도 쓰지 않고, 그저 안아주기만 했는데도 이렇게 쉽게 멀쩡해졌다면... 무능한 스스로가 미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이상하다고? 노아가?”

“그래. 크기도 작고… 말도 전혀 못 하는 것 같고.”

“성장통이라며? 아, 그리고 방금 전에 처음으로 무슨 목소리를 내기는 했어. 말을 한 건 아니고 우우, 하는 그런 소리긴 했지만….”

“그러니까 문제란 소리야. 얘, 지금 자기 딴엔 되게 열심히 자란 거야. 나름대로 힘을 낸 게 고작 이 정도라고. 아무리 혼혈이라고 해도 내 피가 섞여 있으면 이렇게 굼뜰 수가 없는데.... 역시 반은 인간이라 그런가?”

완전히 괜찮아졌는지 축 늘어졌던 자그만 손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루카스의 품에 파묻혀 있던 노아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노아?”

손만큼이나 조그만 머리가 아주 약간 들렸다. 조심스럽게 들린 뒤통수를 보아하니 루카스를 슬쩍 훔쳐보는 모양이었다. 차민의 목소리가 반갑기는 한데, 저를 안고 있는 존재가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뭘 봐?”

시큰둥하고 쌀쌀맞은 루카스의 말씨에 놀란 노아가 갓 태어난 어린 짐승처럼 화들짝 몸을 움찔하더니, 이내 덜덜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노아한테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말랬지?”

“인간은 끼지 마.”

“루카스!”

“아직 다 자라지도 못한 게 감히 날 똑바로 쳐다보려고 하잖아.”

기가 막힌 차민은 헛숨만 터트렸다. 뭐? 인간은 끼지 말라고? 오늘처럼 맹약에 묶인 입술이 답답했던 적이 없었다. 자기 말마따나 노아에게는 반은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 애한테 다른 ‘비스트’들 대하듯 하면 어쩌자는 거야?

“이리 줘.”

화가 나서 루카스에게 성큼 다가가 팔을 뻗었는데도, 어린ㅇ노아는 여전히 그의 눈치를 보느라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얼른 줘. 안 그래도 노아 밥 먹이던 중이었어.”

“그러고 보니 얜 뭘 먹는 거지?”

루카스가 한쪽 눈을 찡그리면서 노아를 높이 안아 올렸다. 아빠가 아이와 놀아주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봉제 인형이나 베개 같은 것을 불빛에 비추어 하자가 없는지 살펴보는 듯한 모양새였다.

“루카스!”

“겉으로 보기엔 아기 같아도 얘 진짜 나이는 다르잖아. 성장이 좀 느린 ‘비스트’들이랑 비슷하려나?”

“...그런... 경우도 있어? 노아가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야?”

“특이하긴 하지. 그렇지만 내내 아기 같은 모습으로 지내다가 갑자기 자고 일어나면 어른처럼 커져버리는 종도 있고 하니까... 어린 시절 내내 이런 외양을 하고 있는 게 아주 없는 일은 아니야. 그래서 얜 뭘 먹는데?”

“나이에 맞는 이유식이나... 퓨레 같은 거.”

“...10년을 내도록 그런 것만 먹였다고?”

“...음, 아기들 먹을 수 있는 과자도 조금?”

노아를 들어 올린 채 이리저리 뒤집어보던 루카스가 질린다는 듯 차민을 바라보았다.

“얘가 아직도 안 크는 거, 못 먹어서 그런 거 같은데.”

그렇지만 모르잖아. 노아의 위가 인간의 것인지, ‘비스트’인 네 것과 같은지. 혹시 먹이고 탈이라도 나면 어떤 병원으로 데리고 가란 말이야.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는데, 그놈의 빌어 처먹을 맹약 때문에 이런 말조차 속 시원히 나오질 않았다. 만약 지옥에서 카터를 만나게 된다면 인간의 손에 죽는 게 어떤 기분인지 깨닫게 해주고 말 테다.

“뭐 하는 거야?”

한참 노아의 이곳저곳을 감상하던 루카스가 갑자기 제 허리를 잡아 끌었다. 반대편 옆구리에는 아이를 짐짝처럼 덜렁 끼운 채였다. 질색을 하면서 밀어내려는데, 순식간에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발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잠시, 몇 번 눈을 깜빡이자 5번가의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루카스.”

저 밑에 위치한 트라이베카에선 절대 보일 수 없는 전경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얘가 이런 꼬질꼬질한 모양새로 있는 건 못 봐주겠어. 10년을 퓨레 따위나 처먹고 있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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