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lue Ⅱ(1) (4/8)

Clue Ⅱ(1)

차민은 길을 잃은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목을 길게 빼고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온통 장미꽃뿐이었다. 시야에 전부 들어오지도 않는 압도적인 장관이었다.

“...음. 나는, 루카스.….”

“한차민. 지금 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한데....”

언제나처럼 루카스가 이쪽으로 성큼 걸어왔다. 거부와 거절을 알지 못하는 당연하고 당당한 태도였다.

차민은 그가 제 마음을 순수한 애정이 아니라고 평가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가끔 루카스는 제가 어려워하는 모든 것들을 쉽게 해내곤 했다. 종의 차이에서 오는 압도적인 힘같은 게 아니라, 이렇게 용기가 필요한 순간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구는 것.

그럴 때마다 감탄했고, 부러웠고..., 그래. 루카스의 말대로 숭배하듯 바라보곤 했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제 감정이 온전한 애정이 아니라는 말은 부정하고 싶었다.

아마 루카스는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를 향한 제 감정의 갈래가 얼마나 무수히 많은지, 얼마나 다채로운지..., 그리고 이런 집요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애쓰고 있다는 것도.

“그냥 연애 비슷한 거나 하다가 끝나지 않을까, 내 주제에 곁에 있어도 괜찮을까, 같은 인간이었더라도 이 남자와 진지하게 사귀는 건 불가능해... 뭐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루카스가 차민에게로 손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놀라 얼어버린 뺨을 두드리고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루카스.”

언제 달라붙었는지 그의 손 마디마디마다 저에게서 떼어 낸 꽃잎들로 가득했다.

“그렇지만 나는... 너와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알아.”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루카스가 코웃음을 쳤다.

“무엇보다 너에게 당연한 것들을 나는 하나도 몰라. ‘반려’의 흔적, 그런 것도 잘 모르겠고.….”

“그것도 알아. 아마 네 상태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알걸.”

루카스가 차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차가운 시선이었지만, 그래도 예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긴 했다.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않아서일까. 차민은 가끔씩 루카스에게서 세 살배기 어린애를 떠올리곤 했다. 티끌만 한 홈을 파놓고선 과연 제가 맞출 수 있는지, 없는지 관찰하는 모습이라니.

“그런 너라는 걸 알아서 그간 압박을 주고 싶지 않았던 거고. 무엇보다 네가 부담감을 견디다 못해 도망이라도 친다면....”

루카스가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무심히 바라보았다.

“나도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를 것 같아.… 물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래도 이젠 대충 널 묶어둘 방법을 알 것도 같으니까.”

차민은 침을 꿀꺽 삼키며 반 발자국 물러섰다. 아마도 루카스는 생에 다시없을 낭만적인... 그래, 남자친구임이 분명 했지만.… 그와 꼭 같은 크기로 위험천만한 야수이기도 했다. 절 묶어둘 방법이 뭔지는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다른 ‘비스트’들의 일로 연구소의 자료를 보던 도중에..., 우연히 너의 아버지를 봤어.”

“우리 아빠를 만났어?”

“사진만 봤지. 닮았더라. 많이. 인적사항이 쓰여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바로 알 것 같았어.”

그런가.... 차민은 괜히 제 눈가를 문질러보았다. 도수가 높은 안경 때문이려나. 사실 저는 어머니를 많이 닮은 편이었다.

“사진 속 네 아버지의 희끗한 머리카락을 보니까... 문득 너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됐어.”

루카스가 뚫어져라 차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저를 보고 있긴 했지만, 지금의 저에게서 먼 미래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꿈결같은 표정이었다.

“너는 인간이고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

“너에게 주어진 시간은 덧없이 짧아.”

루카스가 다시 성큼 발을 옮겼다. 차민이 물러선 걸음의 배의 폭이었다. 그래서 잘난 그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가 생각한 저를 묶어둘 방법이 이런 것이라면...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듯했다.

“아이를 못 낳아줄 거라고 걱정을 해서... 사실 좀 기분이 좋았어. 내가 염려하는 부분은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만일 네가 죽는다면. 오래오래 살아봤자 백 년도 채 못 살 너를 떠올리면 벌써부터 애가 끓는데,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겨서 조금 더 일찍 네가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러니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해.”

“....응.”

“늙은 네 얼굴이나 보면서 혼자 남은 내 앞날을 헤아려야 하는 건 내 몫이니까.”

차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사적이던 고갯짓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참나. 이렇게까지 말해줘야 안겨주는 거야?”

어쩔 줄을 몰라 루카스를 세게 끌어안았다. 루카스, 하고 중얼거린 이름이 그의 품 안에서 속절없이 뭉개졌다.

“너 맨날 나한테 쫄아서 덜덜 떠는 듯해도 무지 못된 거 아냐? 꼭 너 죽고 없을 때의 내 이야기까지 끌어와야 고개를 끄덕여주는 거냐고.”

“미안....”

광활한 공간을 가득 채운 장미꽃은, ‘반려’가 되어달라던 굵은 고백은 차민의 마음을 둥실둥실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루카스의 퉁명스러운 독백은 차민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 같았다. 그가 고른 단어 하나하나가 느리게 온 혈관을 타고 굴러다녔다.

“…너는 인간을 정말 몰라.”

“지금까진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런 네가 좋아.”

어느 순간부터 차민은 신의 화신같은 루카스의 외모나 거대한 부에 대한 관찰을 그만두었다. 물론 그를 볼 때마다 홀리는 것은 여전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서... 루카스에 대한 묘사의 톤이나, 색재가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 감정의 흐름을 정확히 묘사할 수 있다면... 마음을 꺼내 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널 좋아하고... 너도 날, 조…,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이렇게 서로 외롭고 무서운 생각부터 하는 걸까.”

차민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먼발치에서 짝사랑이나 할 때엔 루카스의 눈짓 한 번에도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았는데. 그와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욕심이 자라서 괴롭다. 서로 좋아하게 되면 그걸로 모든 일이 끝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렇게 순탄한 행복이 저에게도 찾아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좋아서, 벌써부터 잃는 게 두려워지니까.”

“아...”

“그러니까 이제 그런 삽질 그만하자는 거야. 아까도 말했잖아, 넌 시간이 없다고.”

루카스가 차민의 코를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음, 솔직히... 쉽지는 않은 일이야. 나는 상대방을 위해 노력해본 적이 없어. 네가 아니라 누구였더라도.”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살면서 대부분의 일은 조금만 웃어줘도, 지갑 속 카드나 지하수장고의 보석 몇 개로도 손쉽게 해결이 되었을 테니.

“그래도 네가 알려주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볼게. 인간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언제나 등신 같은 일의 반복이라 지겹기만 하지만.... 그래도.”

“...정말?”

“그래, 대신 너도 하나만 약속해.”

“응.”

“솔직하게 말해.”

“...응. 마, 많이 좋아해, 루카스?”

표정을 구기는 모습을 보니 또 엉뚱한 답을 내놓은 것 같아 문장 끝이 요상한 의문문이 되어버렸다. 삐끗한 제 목소리가 우스웠는지 루카스가 피식 웃었다.

“방금 내가 말한 방식이 싫었다, 그런 행동은 이상하다..., 네가 느끼는 모든 것들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하라고. 그걸 이해를 하고 받아들이는 건 내 몫이니까 네 멋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거야.”

“아... 알겠어.”

“나에게 헛된 것들을 바라게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그런 것까지도 솔직하게 말해.”

“헛된 것이라니?”

“인간들 좋아하는 거. 시계, 차, 건물, 돈….”

“뭐, 뭐라고?”

“이상하게 인간들은 나에게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모습을 어필하려 들더라고. 초탈한 존재 앞에서 그런 척 굴어봤자 아무 매력도 못 느끼는데 말이야.”

그러니 나에게서 마음이 아닌 부질없는 것을 탐하게 되었다고 해도, 속이지는 마. 덧붙이는 목소리에 잠겨, 차민은 고장난 인형처럼 빠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 그가 했던 모든 말들을 녹음했어야 했다. 처음으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했다. 루카스가 고른 단어들을 하나하나 곱씹어야 하는데, 빌어먹을 기억은 벌써부터 휘발되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거든 나한테 바로 말해. 특히 저 새끼.”

“...저 새끼라니? 아, 카터?”

“그래. 내가 생각보다 너에게 진지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한텐 뭘 어찌지 못할 테니 너를 휘두르려고 들겠지. 게다가 넌 ‘비스트’도 아니니까.”

카터는 평생을 나한테 작은 흠집이라도 내보려고 발버둥을 쳐왔어, 하며 루카스가 까득 이를 갈았다.

“게다가 넌....”

“나?”

말을 이으려 이쪽을 돌아본 그는... 이상하게도 저와 눈이 마주치자 도로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당황한 차민이 몇 번이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루카스는 초조한 듯 입술만 짓이길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기....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는 거면 편히 말해도 돼. 난 정말 괜찮으니까.”

진심이었다. 그가 저를 ‘반려’로 인정하겠다는데. 저와 같은 마음이라는데. 세상에서 제일 놀라운 일을 이미 겪은 마당인데 그보다 신기한 일이 뭐가 더 있을까 싶었다.

“...너는…, 잖아.”

“응? 잘 안 들려.”

루카스가 으으, 하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네가 좀, 색기가 흐르는 편이잖아! 그러니까 걱정된다고!”

“.....어?”

차민은 거북이처럼 목을 엉성하게 빼고서 루카스의 눈치를 살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카터에게 무슨 능력이 있든, 우드가에 어떤 음험한 비밀이 있든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색기? 조금 전에 색기라고 한 거 맞지?

“평범한 인간 주제에 말이야.”

“내..., 내가?”

“그래.”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려던 루카스는... 차민의 넋이 나간 표정을 보고는 무어라 씨근덕거리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욕을 하는 것 같았다. 저에게 하는 건지, 카터에게 하는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카터 그 새끼는 인간을 무지 싫어하긴 하는데...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까. 아니지, 기본적으로 인간을 혐오하는 놈이니까 더더욱 너를 표적으로 삼으려 들 거야.”

“알겠어. 조심할게.”

“만약에..., 아. 아니다.”

루카스가 오른손을 펼치고는 반대편 팔 위쪽을 짧게 훑었다. 불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새끼손톱보다 조금 작은 정도의 붉은 구슬들이 허공 위를 둥둥 떠다녔다.

“윽.....”

차민은 불시에 퍼진 처음 맡는 향에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악취는 결코 아닌데... 루카스가 만들어낸 물건에서 풍기는 냄새가 심하게 강했다. 머릿골이 쪼개질 것 같았다. 코가 아니라 뇌로 바로 꽂히는 것 같은 강렬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루카스, 미안한데 그것 좀....”

번쩍이는 붉은 구슬 위로 투명한 막 같은 게 덧입혀졌다. 차민은 그제야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아직도 잔향이 남아 있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참나. 겨우 이 정도로 엄살을 떨면 어떡해?”

“뭐, 뭐야? 그거.….”

“내 피.”

“피?”

루카스가 손바닥 위로 떨구어진 구슬..., 아니 피의 결정을 불쑥 차민에게로 내밀었다.

“그래, 내 피. 앞으로는 꼭 가지고 다녀. 주머니 속이든, 지갑 안이든... 언제나 네 손에 닿을 수 있는 곳에.”

“부적 같은 거야?”

“음, 그럴 수도 있긴 하겠네. 비리비리한 것들은 내 피 냄새로도 물리칠 수 있을 테니까. 정확히는 어디서든 나를 불러낼 수 있는 용도야. 혹시 카터가 갑자기 접근한다든지, 그게 아니더라도 무슨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걸 바닥으로 던져. 아니, 바닥이 아니더라도 괜찮아. 그 결정이 부딪혀서 깨질 만한 곳으로 던지면 돼.”

“그러면 네가 나한테 바로 올 수 있어?”

“그렇긴 한데... 같잖은 일로 부르면 가만 안 둬.”

차민을 걱정하는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고 쑥스러운지 루카스가 괜히 툴툴거렸다. 어차피 소심한 ‘반려’에겐 그럴 만한 담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기… 루카스.”

차민은 루카스에게서 넘겨받은 결정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조금은 익숙해져서일까? 그에게 안기면 나는 향이 나는 것도 같았다. 설탕에 졸여 구운 것 같은 달콤한 과일향.

“왜 불러.”

“내가 만약 ‘비스트’였다면... 나한테서 너의 향이 이렇게 강하게 났을까?”

‘이게 무슨 소릴 하는 거지?’ 하는 뚱한 얼굴로 차민을 바라보던 루카스가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헛웃음을 삼켰다.

“아까도 그 사람, 아니... 카터가 그랬잖아. 인간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나한테서 네 향이 되게 약하게 난다고.”

그래서 궁금했을 뿐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루카스의 세상이.

“야. 한차민.”

루카스의 부름에 대꾸를 하려던 차민의 목소리는, 이내 맞물린 입술 사이로 녹아내려 버렸다.

“만약 네가 ‘비스트’였으면....”

타액으로 반들거리는 입술을 하고서 루카스가 픽 웃었다.

“너 이렇게 똑바로 서서 나 바라보지도 못해.”

“....그, 그래?”

사실 지금도 이 정도의 거리에서 그를 제대로 마주 보기 어려웠지만, 차민은 아닌 척 말을 흐렸다.

“내가 쳐다보기만 해도 앞으로, 뒤로 다 젖어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될걸. 아이도 벌써 두셋은 낳았을 거고.”

“아, 아이?”

“그러라고 만들어진 시스템이니까. ‘반려’라는 건.”

그래도 그거 하나는 좋을 거 같네, 하며 루카스가 차민의 뒷덜미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다른 놈들에게 확실히 내 ‘반려’라고 경고할 수 있는 거. 지금처럼 이렇게 어정쩡한 느낌이 아니라....”

땀이 송골송골 맺힌 살갗을 문지르는 손가락은 춤이라도 추듯 즐겁게 리듬을 타고 있었다. 적당히 뜨끈해진 저의 체온과 감촉을 즐기는 것도 같았다.

“…너에게도 내 흔적이 남았으면 좋겠어.”

지금보다 더 쉽게 흐트러지는 몸이 되는 것 정도는 상관없었다. 아이의 이야기야 상상 밖의 영역이어서인지 와 닿지도 않았고.... 다만 루카스가 슬쩍 말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네 향처럼 달콤했으면 좋겠다.”

뒷목을 주물럭거리던 손길이 뚝 멎었다. 혹시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고개를 든 차민은 화들짝 놀라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루카스는 저에게 반했다는 말 외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진짜....”

당장이라도 온갖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 넘칠 것 같은 눈을 하고서, 푹푹 한숨을 내쉬던 루카스는... 이내 말을 말자는 듯 차민의 손을 붙들었다.

“어, 어디 가?”

“여기서 하고 싶으면 해도 상관없고.”

“뭐? 지금?”

“그럼 그런 말을 듣고서 내가 얌전히 고개나 끄덕이길 바랐어?”

“그, 그렇지만….”

앞서는 루카스의 걸음이 어찌나 폭풍 같은지, 그가 지나 가는 길목마다 흐드러진 꽃잎이 우수수 떨어질 정도였다. 뒤따르는..., 아니 끌려가고 있는 차민의 발은 거의 땅에 닿지 않을 정도였다.

루카스의 등만 바라보던 차민은, 문득 그가 여느 때처럼 손가락을 튕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늘 하던 것처럼 간단한 스냅으로도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을 텐데.…

“루카스, 우리 이렇게 걸어가는 거야?”

“그럼 날아서 갈까?”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아까 저 또 한 ‘비스트’였더라면 어땠을까, 했던 푸념 아닌 푸념이 은근히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꿀을 녹인 것 같은 결 좋은 금발이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꼈다. 차민은 태산 같은 그의 등을 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숨 쉬듯 당연한 전능 대신, 기꺼이 인간인 저와 함께 걷는 것을 선택한 루카스의 이 마음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겠노라고.

*

“차민아?”

“우응.....”

“한차민? 일어나. 손님 오셨어.”

“네…?”

차민은 잠에 취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떠지지 않는 눈으로 핸드폰을 확인하니 일요일 아침이 맞았고, 오늘은 루카스와의 약속이 없었다. 사실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간 그에게 적지 않게 시달린 탓에 몸이 말이 아니었다. 물론 부서질 것 같은 뻐근함과 죽을 것 같은 쾌락이 정확히 비례하긴 했으나, 어쨌든 차민은 인간이었다. 야수와의 섹스는 다음 날의 체력까지 전부 끌어다 써야 할 정도로 녹록치 않았다.

“누가... 왔는데요?”

“우드가의 카터 씨.”

우드가...라는 말만 듣고 이불 안에서 꿈지럭거리던 차민은, 뒤이어진 이름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일으켰다.

“누구요?”

“아이고, 깜짝이야. 카터 씨 말이야.”

“카터...? 방금 카터라고 하셨어요?”

“그래. 왜 말을 안 했어, 엄마는 루카스가 가끔 집에 와도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사람이야.”

그야 당연히... 그런 약속 같은 건 한 적 없으니까.

“너희 아빠 마트 가기 전에 마주쳐서 다행이지, 나는 그 집안사람들, 아니 ‘비스트’들 오금이 떨려서 마주 보기도 싫어.”

처음 루카스를 집에 데리고 왔을 때 거의 기절할 것 같았던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했다. 지금은 그래도 같이 마주 앉아 간단한 식사 정도는 할 수 있는 정도로 익숙해졌지만....

“카터 씨가 그린우드 장학재단 담당하게 된다면서?”

“...글쎄요.”

어머니의 말에 따르자면, 카터는 새로운 장학생 프로그램 설명도 들을 겸, 루카스 대신 전달할 물건도 있어서 오늘 집에 들른 거라고 했다.

“내려갈게요.”

“얘는, 옷은 갈아입어야지. 머리도 좀 단정하게 하고....”

“그럴 것 없어요. 루카스 형인데요, 뭐. 괜찮으니까 외출 하세요. 아버지랑 같이 가실 거죠?”

“그렇긴 한데....”

그대로 아래층으로 돌진하려던 차민은... 문득 루카스가 했던 말이 스치고 가, 지갑 안을 뒤적였다. 조그만 봉투 안에 가지런히 넣어둔 피의 결정들이었다. 헐렁한 반바지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차민은 다시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그러나,

“.....이런.”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문 바로 앞에 카터가 서 있었다.

“차민이가 깬 것 같아서 올라와봤습니다.”

그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손목의 시계를 흘끔 들여다보았다. 무지 바쁘다는 제스처에 어머니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바깥양반이랑 저는 어차피 나가봐야 하니까, 편하게 이야기하시다가 가세요. 식탁에 간단한 다과 차려놓을 테니 별것 없어도 드시고요.”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보자마자, 차민이 방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얼결에 방 안으로 끌려온 카터는 불쾌한 듯 잡힌 손을 털어내고는 피식 웃었다.

“나는 뱀파이어의 피가 훨씬 더 많이 흐르는 몸이라, 초대를 하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는데.… 말도 꺼내기 전에 이렇게 들여 줘서 고마울 뿐이야. 너도, 너의 멍청한 부모도.”

차민은 뒤로 주춤 물러서며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여차하면 결정을 던져버릴 생각이었다.

루카스는 지금 햄튼에 있었다. 잘 모르는 분야라 대충 듣긴 했지만, 인간 투자자들에게 무언가 알려줄 일이 있다고 했다. 중요한 일 같으니 방해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피를 긁어내며 직접 주의를 줬던 인물이었다. 루카스의 말마따나 혼자서 끙끙 앓고 말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날 세울 것 없어, 그날 봤잖아? 나는 네게 위해를 가하지 못해.”

카터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감히 루카스의 ‘반려’를 건드렸다가 무슨 꼴을 당하라고.”

차민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밖에 계실 부모님을 떠올렸다. 보나마나 제일 좋은 그릇에, 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먹거리들을 부랴부랴 챙기고 계실 터였다. 혹시라도 거슬리는 소리가 날까 봐 숨죽여 발걸음을 옮기시겠지.

“지금 이렇게 멋대로 남의 집에 찾아온 건 괜찮고요?”

그러니... 큰 소리가 나서는 안 된다. 어차피 제 선에선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 루카스가 오기까지만 버티면 될 것 같았다.

“글쎄. 너와 네 가족이 루카스에게 이르지만 않으면?”

무슨 문제가 있겠어, 하며 카터가 차민의 방을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넌 평범한 인간이니... 아무 일 없겠지.”

사실 루카스도 인간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부로 그 편견을 지워내야 할 것 같았다.

적당히 작은 방의 크기, 평범한 가구와 책들... 그야말로 보통의 인간, 그 자체의 삶이 잔뜩 묻어나는 공간을 둘러보는 카터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혐오가 가득했다. 이에 비하면 루카스는 인간을 상당히 어여삐 여기는 수준이었다. 저와 가까워지기 이전에도 인간들을 귀찮게 여겼으면 여겼지, 당장 다 죽여 버리고 싶다는 기운은 풍기지 않았는데....

“루카스가 어찌나 살벌하게 널 감시하고 있는지, 짬을 내기까지 쉽지 않았어.”

섬뜩한 동공이 정물에서 자신으로, 느릿느릿 움직였다. 저 얼굴을, 시선을 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텅 비어 새카만 것도 같고, 당장이라도 활활 타오를 것도 같은... 여러모로 신기한 느낌이었다. 이미 죽어 있는데, 그래서 더욱 강렬한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했다. 살고 싶다는 욕구가 다소 과할 정도로 펄떡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뱀파이어의 피가 섞여서 그런 것일까.

“혹시 루카스를 좋아해요?”

“뭐?”

“그렇다면 번지수 잘못 골랐어요, 나는.….”

“이런, 인간.”

카터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몇 번이나 끅끅 웃다가 허리를 짚고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는, 이내 웃음기를 깡그리 지우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민을 노려보았다.

“내 생을 그따위 치정싸움이나 질투 따위로 대충 얼버무리면 곤란해.”

루카스보다는 늘씬하지만 그래도 그만큼이나 크고 기다란 카터가 이쪽을 향해 성큼 걸음을 옮겼다.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래봤자 작은 방 안이었기에, 시야는 금세 침입자로 가득 차버렸다.

“나는 어차피 루카스 손에 죽어. ‘비스트’로서의 힘을 모조리 빼앗기든, 그야말로 찢겨 죽든.…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일이었어. 내가 노력한다고 바꿀 수 있는 운명이 아니지. 이게 말이 돼?”

중얼거리는 카터의 목소리가 선뜩했다. 정신을 놓은 사람의 독백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루카스를 괴롭게 하려 애써왔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삶이 너무 억울하잖아.”

“알아요. 주스를 먹인 게 당신이라면서요.”

“오, 알고 있어?”

그 정도야 어린애 장난이었지만, 하며 카터가 눈을 빛냈다. 차민은 결정을 든 손에 힘을 꾹 쥐었다. 루카스의 말에 따르자면 지금이 바로 그 위급한 상황인 것 같은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구슬을 그 앞에 내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한 종의 수장 급이 되는 놈들은 원래 다 그렇다고는 하는데... 루카스는 그 정도가 지나쳐. 적당한 자리로 치워놓고 종속맹약 정도만 맺더라도 충분히 함께 공존할 수 있을 텐데... 어릴 적부터 네놈들 다 죽여 버리겠다고 말을 하고 다니면, 그걸 듣고서 가만히 있을 천치가 어디 있겠어.”

“인간을 버러지 보듯 대하는 건 당연하면서, 정작 당신은 힘의 논리에 복종할 수 없다고요? 굉장히 이상한 성격이네요.”

차민은 카터의 어깨쯤으로 시선을 비끼면서, 자신의 손에 쥔 루카스의 힘만 생각했다. 혼자 있는 게 아니라고 다독이니, 겁도 없이 건방진 말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이게 정말 버러지처럼 밟혀봐야,”

“내가 루카스의 ‘반려’라는 걸 잊지 말아요. 감히 나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다고 한 건 당신이니까.”

‘반려’라는 위협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차민의 코앞까지 다가왔던 카터의 손이 조용히 떨구어졌다.

차민은 가파른 숨을 삼키며 아무렇지 않은 척 굴려 애썼다. 만약 지금 루카스가 곁에 있었더라면 저를 보고 꽤 놀라지 않았을까. 이렇게 말도 더듬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을 본다면. 아마 여태 자기 앞에선 내숭 떤 거였냐며 호들갑을 떨어서, 이미 돌아버린 카터의 성질머리를 긁어댈 수도 있겠다.

“그래... 차라리 루카스가 마음을 준 이가 너 같은 인간이라서 다행인 것도 같다.”

이를 갈면서 위협적으로 가까이 다가왔던 카터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네 말대로 인간을 혐오스럽게 여기는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루카스보다는 내가 너를 좀 더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카터가 킬킬대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입술이 거의 귀밑까지 찢어지는,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미소였다.

“그 새끼는 절대 널 이해하지 못할 걸?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협박은….”

“네가 아무리 루카스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모든 걸 다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네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양보할 수 없다는 것도 있다는 점을, 루카스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해.”

아니지... 죽을 수가 없으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는 게 맞겠군, 하고 카터가 중얼거렸다. 조금은 두려움이 가신 차민은 덤덤한 척 고개를 치켜든 채 그를 주시했다.

“쉽게 말해줄까? 내가 지금 네 멱살을 쥐고서 루카스의 술에 주스를 타라고 하면 꿈쩍도 하지 않겠지. 그렇지만 네 부모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서 움직이라고 종용하면... 어떨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다물렸던 입이 벌어졌다. 지금이야말로 아무렇지 않은 척 굴어야 하는 순간인데... 카터의 말마따나 차민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고, 또 너무 어렸다.

“루카스를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죽으라고 해도 죽을 놈도 아니지. 심지어 그 무엇도 잃지 않을 것이 약속이 된 삶이야. 심지어 인세를 떠난 이후에 광영까지 보장된 운명이지. 그런 놈한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주스 몇 방울 마시게 하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어떻게 그런….”

“그래, 그 ‘어떻게 그런’을 루카스는 몰라.”

때마침 아래층에서 조용히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카터가 휘파람을 불며 문 쪽으로 눈을 흘겼다.

“가족까지 갈 것도 없지. 내가 당장 타임스스퀘어로 가서 거기 있는 인간들 눈에 띄는 대로 다 죽여 버린다고 하면…. 그렇지만 네가 루카스에게 그다지 해가 되지 않을 게 뻔한 수를 써주면 전부 살려줄 수 있다고 하면..., 넌 어떻게 할래?”

차민은 카터의 음습함과 비틀림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네가 ‘비스트’였다면 불가능한 이야기겠지. 거긴 철저한 권능의 세계이고, 루카스의 뜻을 어길 수 있는 야수는 그 누구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넌....”

루카스와 닮은 기다란, 그러나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가락이 차민의 턱을 치켜들었다.

“오히려 버러지라서 가능할 것도 같아.”

그 잘난 사랑 때문에 어디까지 버릴 수 있는지 두고 보는 재미도 있겠지. 저 들으라고 하는 중얼거림에 이를 악물자, 카터가 새파란 입술을 더욱 길게 늘이면서 웃어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가볍게 인사라도 할까 해서 왔어. 처음에 정식으로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야 집에 편히 드나들 수 있기도 하고.”

“당신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기까지 두고 볼 루카스가 아니니까.”

오, 하며 카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인간들은 그렇게 뻔한지 모르겠어. 그래도 그런 대사를 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참신함 부분에 약간의 점수를 주려고 했는데.….”

결국 너도 마찬가지였네. 카터가 어느새 길게 돋아난 보랏빛 손톱을 바라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기 하나 할까? 넌 결국 내 명령에 따라 루카스를 배신하게 될 거야. 판에 박히고 뻔해서 지겨워 죽겠는데 이런 종류의 시나리오는 여태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거든.”

그 알량한 사랑만큼이나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특히 너 같은 부류는 어중간한 인간으로서의 윤리와 가치를 전부 벗어 던지지 못할 게 뻔하기 때문에....

“이왕 가족을 걸 거면... 그래, 우리 아이라도 걸어볼까? 넌 무려 루카스의 ‘반려’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대체… 난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으니까,”

“네 아버지가 우리 연구원이라며. 그럼 다룰 수 있는 약도 많을 거잖아? 그럼 가볍게, 네 아버지 목을 걸고서 작은 실험을 해볼까?”

카터가 갈고리처럼 길어진 손톱으로 톡톡 책장을 두들겼다. 자기 딴엔 지금 상황이 몹시 흥겨운지, 리듬이라도 타는 것처럼 느껴졌다.

“루카스에 대한 너의 사랑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지 궁금하네. 이렇게 되면... 끝에 가서 버려지는 건 너일까, 루카스일까?”

결국 넌 네 손으로 루카스를 절망으로 밀어 넣게 될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틀림없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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