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Green Wood I (2/8)

Green Wood I

한 무리의 덩치들이 차민의 어깨를 세게 치고 갔다. 그 바람에 백팩 안에 쑤셔 넣던 책은 물론이고 안에 든 내용물까지 전부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야, 방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냐?”

“글쎄. 누가 도, 도시락이라도 떨어트린 거 아냐?”

도시락이라는 단어가 뭐가 그렇게 웃긴지 근육 덩어리가 말까지 더듬으며 킬킬거렸다. 차민은 한숨을 쉬면서 삐뚤어진 안경을 바로 했다. 유치한 괴롭힘에도 점점 이골이 나서 견디는 요령 같은 것이 생겼다.

저 덩치들이 자신을 고깝게 보는 이유는... 뭐, 차고 넘쳤다. 센터 아일랜드에 위치한 그린우드 스쿨은 오로지 초대로만 입학이 가능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지만... 미국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동의하기 어려웠고, 어지간한 자산가들도 명함을 내밀 수 없는 비싼 사립학교인 것은 확실했다.

프라이빗 로드 사이에 제대로 이정표조차 만들어놓지 않은 불친절한 이곳은, 의외로 인종이나 나이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차민이 저 덜떨어진 놈들의 표적이 된 건 오로지 돈 때문이었다.

제 이름 앞으로 된 부동산을 가지지 못한, 이자가 턱턱 붙는 예금이나 신탁도 없는, 12년 된 중고 혼다를 겨우 끌고 다니는.… 그야말로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놈이 그린우드에 입학한 게, 정확히는 우드가의 추천서와 보증서를 받아서 여기 들어온 게 배알이 꼴려 저러는 거였다.

“야, 저기 쌍둥이들이 뱀파이어라고 하지 않았나?”

무리 중 제일 덩치가 큰 놈이 자라처럼 일순 목을 움츠리며 소심하게 손짓을 했다.

“어디? 아, 맞아. 쟤네도 여기서 AP 핑계 대고서 사회적 나이 다시 맞춘다고 그러더라.”

“이쪽 쳐다보잖아! 빨리 손 내려!”

이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린우드는 밖에서 보이는 것처럼 평범한 학교가 아니었다. 늑대인간, 뱀파이어, 용... 이런 전설 같은 존재들이 학생수의 9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인간의 피부색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물론 졸업하고 나면 저 얼간이들도 그린우드 출신이라며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다니겠지만.

그린우드의 입학 허가서는 돈으로 살 수 없다고 들었다. 더 이상 순위를 다투는 것이 무의미한 거부들의 세상에선 이 학교의 졸업장이 계급을 가르는 새로운 척도인 모양이었다. 물론 차민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차민은 수능을 정확히 100일 남기고서 미국으로 넘어왔다. 사교육에 관심이 많던 부모님 덕에 어릴 때부터 원어민에게 영어 수업을 받긴 했지만, 타국에서 외국어를 좀 잘하는 것과 갑자기 현지에 내동댕이쳐진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상당히 애매한 시기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입을 준비해야 했다. 아니, 입시는커녕 괜찮은 어학원부터 수배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평생의 꿈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니 부모님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차민을 자리에 앉혔다. 우드 제약의 연구소에서 나에게 오퍼를 보냈단다. 환하게 웃으며 말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떨리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했다.

그런 감상적인 부분을 제하더라도, 객관적으로도 수락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우드 제약에서는 아버지에게 기존의 연봉보다 뒤에 0이 하나 더 붙은 액수를 제시했다. 심지어 앞자리 숫자는 세 배로 불어 있었다.

거기에 집 렌트 비와 자녀의 학비 보장 등등 몇 가지 조건이 더 따라붙었다는데 가족 누구도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로또에 1등으로 당첨이 되어도 이 금액을 수령받진 못할 것이다. 평생 책상머리에서 실험이나 하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현실감 없는 오퍼였다.

하지만 부모님이 이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차민을 우드 재단 산하의 유명 사립학교에 입학시켜주겠다는 말을 듣고 나서였다. 미국의 입시 제도는 매우 이상해서 SAT 성적보다 추천서나 기부금이 명문대 입학을 확실히 보장하곤 했다.

그린우드 측에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애매하게 입학한 차민이 졸업한 이후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핑곗거리를 만들어줄 테니 모든 걸 믿고 맡기라는 말까지 했다. 부담스럽다 못해 공포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정도였다.

부모님과 차민이 살짝 질린 얼굴을 하자, 우드 제약의 인사 담당자가 기다렸다는 듯 근사한 가죽 케이스를 내밀었다. 무게가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종이 위엔 판타지 소설보다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담당자는 가족들의 넋이 나간 표정을 보고 예상했다는 듯 싱긋 웃었다. 아버지의 연구가 일부 ‘비스트’들의 신체적 특성을 감추는 약물을 개발하는 데 적합하다고 판단해 러브 콜을 보냈다고 했다.

또한 그린우드는 ‘비스트’들의 신분 세탁을 위해 세운 곳이기 때문에 인간인 자신이 보통의 고등학생들보다 한두 살 나이가 많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무엇보다 우드가의 추천서를 받고 온 사람을 괴롭히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아무 일 없기는 개뿔이....”

차민은 구겨진 남방의 끝을 탁탁 두드려 폈다. 하긴, 인사 담당자도 한 중에 불과한 인간들끼리 하찮은 소모전을 벌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저런 새끼들 때문에 마음 쓸 시간도 없었다. 할 일이 많았다. 그린우드 측의 배려로 입학 전에 어학원 코스까지 수료했지만, 아직까지 미숙한 부분투성이다. 예를 들면 필기체를 빠르게 읽는다거나, 일상적으로 쓰는 숙어 같은 것들.

고민이 뭐냐고 묻는 교내 상담사에게 털어놓기도 부끄러운 사소한 문제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이 자꾸만 차민을 움츠러들게 했다.

우드 연구소에서 책임져주는 건 그린우드 스쿨의 입학과 대학 추천서까지였다. 아버지도 평생 여기에 몸담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처음엔 1, 2년 더 투자해서 하버드에 거저 갈 수 있다고 좋게 생각했는데, 이대론 유명한 대학 어디에 들어가도 문제일 것 같았다. 고등교육 과정도 생각보다 버거운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어, 왔다.”

어딘가에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차민도 퍼뜩 고개를 들었다. 구석에 대충 찌그러져 있던 차민에게도 술렁이는 분위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자기들 잘난 맛에 사느라 무심하고 지루한 얼굴 일색이던 ‘비스트’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폭발할 것 같은 엔진음이 교내를 갈랐다. 차민은 손차양을 만들며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샛노란 아벤타도르였다. 색상을 평하기에 썩 적합한 표현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참 노골적인 노란색이었다.

끼익, 하는 파열음과 함께 낮은 차체가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날개 같은 문을 위로 들어 올리며 등장한 사람... 아니 ‘비스트’는..., 아직 차민이 무어라 정의 내리지 못한 존재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이종족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옛적부터 존재했다고 하는, 알 수 없는 불사의 존재. 늑대인간이나 뱀파이어 같은 종은 대충이라도 상상할 수 있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소설이나 설화 덕에 나름대로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루카스, 늦었어!”

루카스 에이드리언 그린우드 주니어.

이 ‘비스트’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직 이쪽 문화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런 걸까, 어쩐지 듣는 사람 기를 죽이게 하는 굉장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실제로도 그의 이름과 성은 모두를 겁먹게 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비스트’로 알고 있든, 사람으로 알고 있든.

루카스의 뒤를 따라온 검은 차량의 문이 덜컹 열리더니, 뛰어내린 누군가가 그가 던진 차키를 간신히 받아냈다. 새카만 정장만 아니면 야구 선수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열정적인 몸짓이었다.

“엇, 저거 예전에 한 번 몰고 왔던 차 아닌가?”

“아니야. 내가 인간들 뉴스를 봤는데, 차에도 연식이라는 게 있댔어. 저번에 몰고 온 것보다 오래된 차 같아.”

“엥? 더 오래된 거라고? 새로 만든 물건이 제일 좋은 거 아니야?”

“꼭 그렇진 않아. 고미술품을 수집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지.”

“아하....”

어수룩한 표정의 ‘비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주부터 화학 수업을 같이 듣게 된 딜런이었다. 그는 늑대인간과 인간 사이의 혼혈로, 외가가 석유 개발 분야의 큰손이었다. 딜런 본인은 세상물정을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의 차고에도 슈퍼카 한두 대쯤은 당연히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그린우드의 학생들 사이에서 제일 무의미한 것이 돈 자랑이었다. ‘비스트’가 아닌 인간들도 어디 가서 재력으로 빠지지 않았다. 람보르기니 로고가 조금도 부럽거나 신기할 것이 없는 구성원들이었다. 맨해튼에서 센터 아일랜드까지 헬기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루카스처럼 매일같이 슈퍼카를 장난감처럼 갈아치우진 못했다.

채 말리지 못한 젖은 금발을 장난스럽게 좌우로 털어내는 루카스를 보며, 아닌 척 곁을 얼쩡거리던 학생들이 볼을 붉혔다. 인간들 틈에 섞여서 살아갈 ‘비스트’들이라 그런 걸까. 공유하는 감성들이 보통의 틴에이저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물론 살아온 시간만 헤아리자면 대부분 백 년이 넘게 살았겠지만....

어쨌든 영 에이지 로맨스의 법칙으로 분류해보자면 루카스는 이견 없이 쿼터백이나 프롬킹 같은 포지션이었다. 물론 그는 풋볼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위치로 보았을 때 말이다.

왕자님이라고 부르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차민이 보기에 루카스는 왕자님으로 비유하기엔 약간... 무도한 구석이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나 커다란 손 같은, 페티시를 자극하는 외양이 아니더라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지만 어쩐지 날티를 숨길 수 없는 매너라거나, 저속한 농담을 거리끼지 않는 점이나, 아무렇지 않게 셔츠를 벗어 던지고 운동장으로 향하는 걸음이라거나.... 어쨌든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점들이 그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루카스는 잠시 멈춰 서서 안면이 있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뻐근한 뒷덜미를 주무르느라 기울어진 고개가, 드러난 턱 선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수려했다.

의미 없이 익숙한 전경을 훑던 루카스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차민은 고개를 푹 숙이며 구식 차 키를 등 뒤로 감추었다. 그는 아마 자신을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교내에 이런 인간이 있다는 자체를 모르겠지.

졸업 이후 루카스가 인간 세상에 어우러져 산다고 한들, 자신과는 사는 세계가 전혀 다를 터였다. 아버지 또한 우드 연구소에서도 그리 높은 직위가 아니었다. 그에게 자신의 가치란 여기 놓인 돌멩이보다도 못했다.

차민은 조심스레 긴 숨을 토해내며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다시 헤아려보았다. 퀴즈 준비도 해야 하고 에세이도 써야 했다. 소맷부리로 안경을 닦아내고,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제 낡은 혼다를 둘러싼 억 소리 나는 자동차들을 피해 무사히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부터가 큰 숙제였다.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는지 루카스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울렸다. 차민은 엄지로 명치 부근을 느리게 문질렀다. 사실 이 답답함의 1그램 정도는 루카스에게서 기인한 것이다. 아니..., 실은 1그램보다는 무거운 것 같다. 조금 많이.

최근에야 간신히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긴 했지만, 말도 안 될 소리였다. 루카스는 ‘비스트’ 중에서도 종의 이름을 갖지 않은,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만약 그가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 같은 샌님과는 친구로도 지내주지 않을 것이다.

루카스가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자신의 롤은 엔딩 크레닷에도 오르지 못할 스쳐 가는 조연일 게 분명했다. 학교 이름을 걸고 참가하는 경시 대회의-그것도 루카스의 라이벌 학교에 지는 조연의 조연인 학교 소속인- 팀원 4, 라커룸에서 허둥지둥 책을 꺼내다 악역들에게 부딪혀 넘어지는 너드 3... 딱 그런 정도의 이름 없는 조연.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그간 단 한 번도 고심해본 적 없었던 자신의 성 정제성 문제보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했다.

*

“어어, 내가 운전 중이어서. 바로 다시 연락 줄게. 그래, 들어가.”

통화가 끝나자 차민은 손을 뻗어 볼륨을 높였다. 라디오에선 한창 인기몰이 중인 밴드의 신곡이 흘러나왔다.

“요한 아저씨예요?”

“아니, 요한 씨가 소개해준 사람인데... AP가 어쩌고, 필수 이수 과목이 어쩌고 하면서 막 뭘 물어보는데 나도 뭐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이민 2세인 요한 아저씨는 뉴저지에서 해산물 유통을 크게 하고 있는 사업가였다. 차민의 가족이 막 미국에 왔을 때, 공항에서 우연히 어머니의 푸념을 듣고는 넉살 좋게 말을 걸어준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차민은 요한 아저씨네 가족을 좋아했다.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아서 감사한 마음도 컸지만, 사실 미국에서 만난 한국인들 중 유일하게 종교를 권유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학교에서 뭘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원.”

“저도 어떤 시스템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원래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학교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불법은 아닐 거예요.”

우드 연구소도, 그린우드 스쿨도 거창하게 말을 하긴 했지만 편법을 쓴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차민은 남들 대학 다닐 나이에 아직 고교 과정을 밟고 있을 뿐이었다. 그린우드에 입학한 자체가 편법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어쨌든 일반적으로 11학년 끝물의 전학이 명문 사립학교에서 흔한 일은 결코 아니었기에, 교육열이 높은 몇몇 사람들은 차민에게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최근 부모님이 소개를 받은 사람들은 전부 그린우드에 대한 정보가 목적이었다.

“하긴, 내가 선임 연구원도 아닌데 뭐 그렇게 대단한 수를 썼겠어. 그나저나 오늘 혼자서 괜찮겠니?”

“그럼요. 저 법적으로는 성인이에요.”

“그렇다고 술 퍼마시지는 말고. 너 주류 구매는 아직 안 되는 나이인 거 알지?”

차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진지하게 하는 부탁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오늘 저녁에는 우드 재단이 주최하는 자선행사가 있었다. 비슷한 성격의 행사야 매일같이 열렸지만, 오늘은 우드가의 새로운 인물이 호스트를 맡게 되었다며 반드시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차민은 연구소의 직원 복지 해택으로 입학한 장학생이었으므로, 오늘 재단 사람들과 함께 단상에 올라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익숙하지 않은 연미복의 감촉과 촌스럽게 빗어 넘긴 머리가 거슬렸다. 처음으로 껴본 렌즈의 이물감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단 하나 위로가 되는 건 오늘 행사의 호스트는 높은 확률로 루카스일 것이란 점이었다. 우드가에서 선보일 새로운 인사라고 해봐야 가장 어린-나이를 먹지 않는 그에게 이런 표현이 적합할진 모르겠으나- 루카스밖에 없었다.

그린우드 밖에서 그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루카스는 언제나 편한 차림으로 학교를 돌아다녔다. 헬기를 타고 오는 날엔 바람에 날려 까치집처럼 뾰족뾰족 일어선 헤어스타일을 하고서 종일을 농구 코트에 처박혀 있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정장을 차려입은 루카스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뭘 걸쳐도 당연히 멋있겠지만.…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조금씩 기분이 나아졌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어?”

“아…. 뭐…, 그냥요.”

“그러고 보니 오늘 가면 어차피 다 학교 친구들이겠구나. 애들은 어때? 이제 좀 친해졌니?”

“뭐…. 어차피 ‘비스트’들과 어울릴 일은 별로 없어요.”

“그렇구나.”

몇 번 비슷한 주제의 대화가 오갔지만, 늘 이런 식으로 끝나버렸다. 차민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비스트’들과의 교우 관계를 묻는 게 아니라는 것도, 그리고 매번 모르는 척 해 준다는 것도.

잠시 동그랗게 솟았던 차민의 볼이 시무룩하게 내려앉았다. 루카스를 생각하느라 들뜬 마음에 잊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덩치들도, 멀찍이서 저를 품평하고 흉보는 것이 취미인 다른 무리들도 오늘 파티에 반드시 참석하리라는 걸.

*

“이런.….”

핸드폰을 탈탈 털어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물에 젖어 완전히 먹통이 되어버렸다.

멍청한 자식들이 퍽퍽 치고 가느라 옷에 마실 것을 쏟는 정도는 예상했는데, 저를 발견하자마자 냅다 풀에 던져버리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홀딱 젖은 생쥐 꼴로 담당자에게 어기적어기적 걸어가 사진 촬영은 무리일 것 같다고 말하자,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빠르게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꺼지라는 뜻이었다.

차민은 재킷에서 물기를 쥐어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밖에서 적당히 물기를 말리고, 슬슬 자리를 뜨는 사람에게 핸드폰을 빌려봐야겠다. 집에 가는 방법이야 어떻게든 찾을 수 있겠지만, 근처에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가 걱정이었다.

“휴.....”

미역처럼 가라앉은 머리칼에 손을 넣어 빠르게 흩트렸다. 랩풀 위에 둥둥 떠다니던 장미꽃이 여기저기에 장식처럼 걸려 있었다.

“신기하네.”

낯선 목소리에 꽃잎을 뜯어내던 차민의 손길이 뚝 멈추었다.

“누구... 있어요?”

신경질적인 미풍이 차민의 발목을 휘감고 갔다. 방금 전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차민은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애꿎은 꽃잎만 구겨 쥐었다. 여기저기 켜진 조명 덕에 어둡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구석구석 장식된 조각상들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나팔 부는 알몸의 아기 천사가 이렇게 오싹하게 느껴질 줄이야.

“식물 수인도 있나?”

“거, 거기 누구야!”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차민은 핸드폰을 꺼내 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차하면 사람을 부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물 먹은 핸드폰은 여전히 먹통이었지만.

“머리에서 장미꽃이 돋아난 것 같은데.... 아닌가?”

그제야 깨달았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차민은 겁먹은 티를 내지 않으려 핸드폰을 쥔 손에 세게 힘을 주었다. 차라리 저만 보면 죽자 사자 괴롭히려 드는 근육 덩어리들이 나았다. 만약 저 목소리의 주인이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비스트’라면.…

“내가 식물 수인은....”

그렇다면 큰일인데,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초조하게 입술을 짓이기는 찰나... 정제를 알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무 뒤에서 느리게 걸어 나왔다.

“처음 보는 것 같아서.”

가느다랗게 눈을 좁힌 채 잘 꾸며진 분재목 틈새를 응시하던 차민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퍽, 하고 반들반들한 바닥의 돌 장식 위로 핸드폰이 낙하하는 소리가 아득했다.

“저런.”

남자가 혀를 찼다. 그의 동작은 느렸고, 또 빨랐다. 긴 다리로 유영하듯 코앞까지 걸어온 그가 허리를 굽혀, 허옇게 가루가 묻어나는 차민의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여기.”

차민은 저를 향해 내밀어진 커다란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크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핸드폰, 네 거 아니야?”

파티 장소로 오는 내내 생각했던 그 사람... 아니 그 존재. 루카스였다.

“...맞아.”

망할. 차민은 입을 여는 순간 절망했다. 방금 전까지 물속에서 허우적거린 데다 잔뜩 긴장한 탓에 목소리가 엉망진창이었다. 헬륨가스를 마신 것 같은 하이톤의 쇳소리였다.

“음..., 꽃이라서 그렇게 젖어 있는 건가? 물을 좋아해?”

꽃이라니.... 민망해진 차민은 쫄딱 젖은 제 몰골을 살피다,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계약서에 사인을 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차민은 지겹도록 ‘비스트’에 대한 설명을 들어왔다. 아니,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다. 이때 ‘비스트’들은 같은 ‘비스트’를 본능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모든 ‘비스트’들을 지배한다는 루카스가 자신을 수인으로 착각하고 있다. 심지어 루카스는 우드가의 차기 수장으로 점쳐질 정도로 강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나는 ‘비스트’가 아닌데. 인간이야.”

“그래?”

차민의 조심스러운 항변이 무색할 정도로 무심한 대꾸였다. 하긴. 제가 수인이든 인간이든 루카스에게 뭐가 그리 중요할까 싶었다.

놀란 마음이 조금 진정된 차민은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왕을 모시던 궁인처럼 내리깔고 있던 눈을 아주 조금씩 치켜떴다.

반질반질한 옥스퍼드 슈즈와 길고 늘씬한 다리를 휘감은 실크 팬츠, 흰색 베스트와 칼같이 주름이 잡힌 윙카라 셔츠, 공들여 재단한 이브닝코트의 깃을 지나... 한숨이 나올 정도로 잘생긴 루카스의 얼굴까지 대담하게 훔쳐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루카스를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사람 같지 않았다. 아니, 물론 사람은 아니긴 한데.... 살아 있는 생명체라기보다 신이 오랜 시간 공들여 빚은 작품 같았다.

넋을 놓고 루카스를 감상하던 차민은 문득 그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그와 말을 섞어본 적도 없는 사이였지만.... 초점이 슬쩍 풀린 것 같은 눈동자나, 조금 크게 내쉬는 숨소리가 어쩐지....

“저기... 혹시 취했어?”

꼭 술에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음, 조금.”

“뭐라고?”

비슷하게 느껴져서 툭 말을 내뱉었을 뿐이지, 정말로 루카스가 취했으리라고 여겼던 건 아니었다. 차민은 막연히 ‘비스트’는 술이나 약에 끄떡도 하지 않으리라 상상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무려 루카스가 취할 정도라면.…

“인간, 나는 술에 취하지 않아.”

차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루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루카스가 가볍게 손짓했다. 차민은 정신없이 내달리는 맥박을 다스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기 쪽으로 오라는 뜻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가까이 다가갔다간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렇게 흠뻑 젖어 못난 꼴을 루카스의 코앞에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멀끔히 빗어 넘겼던 머리도 죄 흐트러져 이마와 뺨에 달라붙은 상태였다.

“어엇?”

제자리에서 꾸물거리고 있자, 루카스가 답답하다는 듯 차민의 손목을 휙 잡아끌었다.

“자, 잠깐만!”

바람 빠진 풍선 인형처럼 질질 끌려가 그의 코앞에 멈추어 선 차민은, 기겁을 하며 루카스의 팔을 붙들었다.

“왜 그래?”

넋이 나간 차민은 대꾸하는 것도 잃고서 데굴데굴 눈만 굴렸다. 왜냐고? 왜냐니. 그렇게 몸을 바투 붙여오면 어떡하자는 거야. 키스라도 하려는 줄 알았잖아.

“이건 아주 중요한 비밀이란 말이야.”

“…뭔데?”

무려 비밀이라는 단서까지 붙이며 부산스럽게 구니, 장단이라도 맞춰줘야 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한쪽 귀를 내어주자, 루카스가 손을 입가에 붙여가며 가만가만 속삭였다.

“나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 취해.”

“...그게 뭐야.”

차민은 시시하다는 듯 곧장 그를 밀어냈다. 진저리를 치는 차민의 몰골이 우스웠는지 루카스가 허리를 숙여가며 크게 웃었다.

사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그런 거였다. 멀리서 훔쳐 듣던 평소 같은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 귓가를 웅웅 울리는 낮게 가라앉은 음색이 자꾸만 가슴 안쪽을 간지럽혔다.

“카터 이 새끼가 사고를 칠 것 같기는 했는데.….”

루카스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차민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우드가의 족보를 떠올렸다. 카터라면... 루카스의 형일 텐데. 그가 일부러 루카스를 취하도록 만들었다는 건가.

“그런데 너는 나를 어떻게 알아?”

“나도 그린우드에 다녀.”

“그래? 마주친 기억이 없는데.”

“그야….”

당연한 일 아니냐며 받아치려던 차민은 스쳐 가는 생각에 돌연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루카스는 자신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을, ‘비스트’들을 모를 것이다. 괜히 자신이 교내에서 좋지 않은 취급을 받는다는 걸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 그야... 당연히 몰랐겠지. 너는 늘 어울리는 애들하고만 어울리니까....”

“그래도 오며 가며 보기는 했을 텐데... 이런 얼굴을 기억 못할 리가 없어.”

차민의 입술이 새부리처럼 뾰로통하게 부풀었다. 동양인을 본 적 없다는 뜻이겠지. 어쩌면 그린우드는 쉽게 동양인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고. 아직은 이렇게 툭툭 쉽게 다가오는 차별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입학 처에선 그린우드에 재학 중인 동양인이 요즘 제일 많은 편이라고....”

“무슨 소리야.”

루카스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얼굴을 다 덮을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손이, 긴 손가락이 꽁꽁 언 차민의 뺨을 스치고 갔다.

“너처럼 야하게 생긴 얼굴을 기억 못 할 리가 없다는 뜻이었어.”

차민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대체 내 어디가..., 아니야. 됐어.”

“화났어?”

아버지가 우드 연구소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때부터 ‘비스트’들의 학교에 입학한 지금까지... 전부 비현실적인 일투성이였다. 그렇지만 방금 들은 루카스의 말이 가장 현실성이 없었다.

야하게 생겼다고? 내가?

“너 진짜 취한 것 같다. 주스를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왜?”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 무구한 그의 목소리에 말문이 턱 막혔다.

“지금 몰라서 묻는 거야?”

“진짜 화났나 보네. 왜, 네가 야하게 생겼다고 해서? 기분 나빴어?”

만약 차민이 막 미국에 건너왔을 때라면 루카스의 말을 듣고 마냥 가슴이 뛰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외국에서의 생활에 적응을 한 상태였다. 훤칠한 틴에이저 무리가 자신을 보고 웃을 때는 저를 괴롭힐 작당모의나 할 때뿐이었다.

“혹시 너 동양인 페티시 같은 거 있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던 루카스가 뒤늦게야 상황 파악을 하고는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린우드에 다닌다며. 그러면 알 거 아냐. 나는 애초에 인간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 네 피부색이 보라색이든 초록색이든 신경 쓰지 않았을 거야. 나는 다만....”

“다만?”

“그냥…, 지금 분위기가 그렇잖아.”

다소 사납게 루카스를 몰아붙이던 차민은 생각도 못 했던 그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난 취해본 적이 별로 없어. 자꾸만 열이 오르고, 살짝 어지러운 것도 같고, 사지는 제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서 이상하고.… 그래서 일단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곳으로 왔는데….”

루카스가 아직 머리에 달라붙어 있던 꽃잎을 떼어주었다. 무언가를 가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머리에 장미 꽃잎을 치렁치렁 단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잔뜩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울적해하잖아.”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취했다는 루카스는 평소와는 많이 달라 보였다.

“그냥... 그런 네 얼굴이 되게 야하다고 생각했어.”

순한 눈망울로 자신에게 사근사근하게 말을 거는 모습은 영상으로 남겨 두고두고 보고 싶을 정도였다.

“저기, 인간. 자동차 좋아하지?”

할 말이 다 떨어졌는지 손끝으로 초조하게 꽃잎을 짓이기던 루카스가 퍼뜩 고개를 들며 물었다.

“글쎄, 난....”

“우리 집에 자동차 되게 많은데.”

“맙소사….”

차민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면전에 대고 웃으면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그 루카스가 이렇게 정직하고 어설프게 사람을 꼬여내려고 들 줄이야.

“으음, 미안. 나는 자동차 별로 안 좋아해.”

“어어....”

사람에게 자동차를 안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게 처음인지, 당황한 루카스는 입술을 뻐금거렸다.

루카스 근처에 있는 이들은 ‘비스트’건 사람이건, 그가 가진 물질적인 것들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왔을 것이다. 차에 관심이 있건 없건, 루카스의 차고를 구경할 기회가 있다면 누구든 마다하지 않았겠지.

“누가 너한테 관심 없다고 한 거 처음이지?”

“어어.”

루카스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꽃물이 뚝뚝 흘렀다. 차민의 머리카락에 걸려 있던 꽃잎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빨갛게 물든 손톱이 꼭 봉숭아물을 들인 것 같았다.

“...혹시 취한 거 깨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다 기억해? 아니면 드문드문? 때에 따라 달라?”

“음, 글쎄.... 어땠는지 모르겠어. 자주 있는 일은 확실히 아니니까.”

루카스가 한쪽 눈을 가늘게 접으며 그간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어울리는 무리들에게 종종 던지던 능숙한 윙크가 아니라 서툴게 찌그러진 그 눈매를 보고, 차민은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너무 좋으면, 좋아서 견딜 수 없으면 온 몸이 지글지글 끓는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좋은데, 힘들었고, 그런데 그 힘들이 또 좋았다. 감정회로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차민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어쩐지 이상한 얼굴로 실실 웃고 있을 것 같았다.

“넌 이름이 뭐야?”

어설픈 유혹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루카스도 차민이 물러선 걸음만큼 성큼 따라붙었다. 그러면서도 이제야 이름을 묻는 자신이 어이가 없는지 잘 뻗은 입꼬리가 삐쭉거렸다.

“한차민. 성이 한 씨야. 이름이 차민이고.”

이제야 이름을 물을 생각을 하다니. 하긴, 루카스가 묻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들의 존재를 어필하려 들었겠지. 차민은 이 와중에도 그에게 뻔하지 않은 인상을 주고 싶어 애쓰는 스스로가 어쩐지 속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모를 리가 없잖아, 루카스.”

루카스, 에이드리언, 그린우드, 주니어. 차민은 그의 이름을 구성하는 모든 단어를 속으로 곱씹어보았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그러다 줄곧 품고 있던 생각이, 아니 마음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뭐가, 내 이름이?”

아까보다 반걸음 더 가까워진 거리.

조명을 받아 더욱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루카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차민은...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루카스’는 빛을 뜻하는 단어에서 따 온 이름이라고 들었어.”

조금 전 한참이나 고민하던 걸 보면, 취하고 난 다음 날이면 그 전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처음에 저를 붙들고 비밀이라고 했을 정도인 걸 보면 그가 취할 수 있다는 것 자제가 상당한 약점인 듯도 했다. 하긴, 저조차 다른 ‘비스트’도 아닌 우드가의 루카스가 무언가에 취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던가.

“처음부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그러니 오늘은 조금 솔직해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정신을 차린 루카스는 오늘 있었던 일들은 다 잊어버릴 테니까.

오히려 루카스가 멀쩡한 정신으로 저더러 야하게 생긴 얼굴이라는 둥, 우리 집에 자동차가 많다는 둥... 그런 말을 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그를 좋아하는 마음과 별개였다. 분명 뒤에서 무슨 내기라도 벌어진 게 틀림없다고 경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루카스가 술김에, 아니 오렌지 주스를 마신 김에..., 어쨌든 상당히 취해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어지러울 테니 제 얼굴이 괜찮게 보이는 것도, 열이 오른 김에 눈앞에 보이는 상대와 몸을 섞고 싶어 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뭐야.... 너도 술 마셨어?”

루카스가 멋쩍어하며 볼을 긁적였다. 이런 말을 처음 들은 걸까.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그래?”

차민 또한 민망함에 괜히 먼 곳을 바라보았다. 외국 사람들은 평소에도 스위티, 허니, 이런 말을 잘만 하길래 해본 말이었는데. 그런 그들의 범주 안에서도 너무 낯 뜨거운 고백이었나보다.

“나도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해본 거야. 네 말대로 부, 분위기가 그렇잖아.”

루카스가 아아, 하며 말을 길게 끌었다. 씩 웃는 얼굴에서 평소와 같은 장난기가 배어났다.

“너, 평소에도 나한테 관심이 있었구나.”

“아닌데.”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답에 루카스가 혀를 튕기며 딱, 하는 소리를 냈다. 정답임을 확신하는 듯한 근사한 미소도 함께였다.

“내가 깨면 다 잊어버릴 줄 알고서 지금 이렇게 받아주는 거고. 맞지?”

망했다. 차민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두고 봐.”

“뭐, 뭘?”

루카스의 큰 손이 허리를 슬쩍 감쌌다. 고작 그 정도의 접촉에도 차민의 몸이 파득 튀자, 그가 악당 같은 웃음을 흘렸다.

“내가 너, 꼭 기억해낼 테니까.”

눈높이를 맞추느라 슬쩍 구부린 그의 무릎이 차민의 허벅지를 툭 치고 갔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루카스가 저보다 훨씬 체격이 좋다는 걸 당연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한 품에 저를 안을 정도였던가.

불순한 의도로 그의 몸을 감상하려 턱을 슬쩍 뒤로 당긴 차민은, 바로 아래 루카스의 한쪽 허벅지가 불룩한 것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야, 너 이거... 이거 뭐야....”

“이거라니?”

“이, 이거! 네 아래에 달린 거!”

사색이 된 제 표정이 우스웠는지 루카스가 실없이 웃었다. 그러다 어지러운지 아아, 하고 길게 말끝을 늘이며 차민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차민의 키가 한참 작았기 때문에, 루카스 역시 목을 길게 빼고 상체를 쭈그리듯 접은 이상한 모양새였다.

몰랐는데, 드러난 그의 목에서 오렌지 향이 솔솔 풍겼다. 정확히는 설탕에 오렌지를 졸인 것 같은, 청량한 과일 그 자체의 향이라기보다는 달콤하고 찐득찐득해서 좀처럼 떨쳐내기 어려운 그런 냄새가.

“네가 직접 확인해봐.”

루카스가 차민의 손목을 붙들었다. 되는 대로 제 손을 움켜쥐었던 그의 손가락이 뒤늦게 허락을 구하듯 느리게 움직였다. 꽃물이 든 검지가 손바닥 위를 길게 그었다. 루카스가 누르고 간 자리가 희게 질렸다가, 반동처럼 더 붉어졌다.

긴장으로 자꾸만 땀이 고였다. 손을 빼내려 꿈틀거리자, 동시에 몸이 휙 돌려세워졌다. 서 있던 자리가 뒤바뀌면서 방금 전까지 그가 바라보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경용 나무가 작은 숲처럼 우거져 있었다. 적당히 어두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루카스는 허락을 기다리듯 빤히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쳐다보지 마, 닳아. 그렇게 가볍게 장난이라도 치고 싶었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미풍이 머리를 흩트리고 흠뻑 젖은 옷감을 흔들고 갔다.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차민은, 이내 떨리는 눈을 감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다 바보처럼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 첫사랑이 어땠는지 물으면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고.

*

“아이고.….”

차민은 손바닥 끝으로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몸 상태는 아직도 엉망진창이었다. 조금 더 쉬라는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엄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게 괜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보다.

기침이 좀처럼 멈추질 않아 배가 당겨올 정도였다. 동부는 일교차가 심한 데다 날씨도 변덕스러웠다. 낮에는 반팔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다가도 밤에는 패딩을 껴입고 우산을 쓰기도 했다. 자선행사날도 그랬다. 해가 지자 바람이 제법 불었다. 그런 와중에 쫄딱 물에 젖은 채로 밖에서 내내 루카스와 뒹굴었으니.... 게다가 차민은 섹스 자체가 처음이었고, 루카스의 것은 단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크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차민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던 루카스의 전능함을 그제야 실감했다. 저 말도 안 되는 걸 도대체 어떻게 제 뒤로 욱여넣은 건지 모를 일이었다.

“으으.....”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앓는 소리가 절로 터졌다. 아직 몸살기가 다 가시지 않은 데다, 평소엔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기 때문이다.

차민은 오로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미 이틀이나 결석한 상태였다. 여기서 수업을 더 빠지면 진도를 따라잡기 힘들 거다. 게다가 사진 한 장만 찍어주면 된다는 부탁도 들어주지 못해서 학교 직원에게마저 찍혀버렸으니 당분간 성실한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루카스가 보고 싶었다.

솔직히 기억나는 것이라곤 몸을 반으로 가르는 듯한 고통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사정을 하긴 했는데 아직도 연유를 알 수 없었다. 거대한 성기가 문득 안쪽의 깊은 곳을 짓이기듯 쿵쿵 찧는 순간, 그야말로 얼결에 싸버렸다.

대체 섹스로 무슨 희열을 느낀다는 거지? 차민은 미디어가 모두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첫날밤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낯선 고통으로 뚝뚝 떨어지던 제 눈물과 땀을 핥아 주던 루카스가 좋아서, 다짐이라도 하듯 내내 저를 잊지 않을 거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좋아서.… 그래서 견딜 만도 한 것 같았다.

자꾸만 간밤을 곱씹던 차민은 긴 한숨을 흘리며 깊이 고개를 묻었다. 자신의 모습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취한 그가 다음 날이 되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리라 확신하고서 관계에 응한 주제에, 한편으론 잊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품고 있다니. 대체 무슨 삐뚤어진 심사란 말인가.

“어? 이 새끼는 왜 또 여기서 이러고 있어?”

세운 무릎에 이마를 기댄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차민은, 정수리 위에서 울리는 달갑지 않은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매번 저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었다. 이쯤 되면 저놈들이 ‘비스트’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구석진 곳까지 잘도 찾아오는 것을 보니 추적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또 도시락이나 까먹나 보지.”

“아니, 카페테리아가 뭐 얼마나 한다고 이렇게 궁상을 떠는 거야?”

그린우드는 겉으로 보기엔 몹시 작은 학교였다. 그러나 ‘비스트’들이, 아니 아마도 이 학교를 세운 우드가에서 어떤 술수를 부려놓았는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끝도 없는 공간들이 펼쳐졌다. 예를 들어 겉으로 보기에는 3층짜리 건물이지만 실제로는 5층까지 존재한다거나, 한참을 걸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복도가 이어진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차민에게까지 그린우드의 숨겨진 비밀을 알려주는 친절한 이는 없었지만, 아마 마법 같은 것을 부려 공간을 감춰놓은 것 같았다. 늑대인간도 있는 판국인데 마법사라고 없을까 싶었다.

학교 부지 내에는 총 다섯 개의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기에는- 건물이 있었고, 각종 식당과 편의시설이 들어선 기숙사가 개중 가장 크고 화려했다.

기숙사는 전부 1인실로,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종족별로 세심하게 분류해놓았다. 물론 몇 안 되는 인간을 위한 공간도 할당되어 있긴 했는데, 수가 많지 않아서인지 ‘비스트’들이 지불하는 것보다 배 이상을 요구했다. 물론 그 비용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운 맨션처럼 꾸며져 있다고는 들었지만... 기숙사 내부로 들어가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기숙사 건물 내에는 없는 게 없었는데, 입점한 식당들은 맨해튼 최고급 레스토랑 수준을 자랑했다. 맛은 물론이고 가격 또한 그러했다.

저 덩치들의 리더 격인 스티븐은 방금 전 차민에게 고작 카페테리아라고 말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린우드에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카페테리아 같은 것이 없었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매일같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건 아니었다. 외식이 물린 학생들은 웃돈을 주고 개인 요리사를 부르거나, 헬기를 타고 도심까지 다녀오곤 했다. 차민으로서는 어떠한 선택지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얘네 아버지가 우드가 따까리라서 식대 지원도 받는다며. 그런데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도시락을 고집하는 거야?”

“홍보 기사에서 봤는데, 식비도 전부 계좌로 넣어준다잖아. 한 푼 두 푼 아껴서 차라도 새로 사려나 보지.”

차민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려 마스크를 끌어 올렸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 반박할 수 없었다.

우연히 주어진 기회가 영원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이전보다야 여유가 생겼지만, 가족 모두가 혹시 모를 만약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아가고 있었다. 부모님은 맛있는 걸 먹고 힘내서 공부하라고 했지만, 차민은 대가족의 식비로 쓰고도 남을 돈을 분수에 맞지 않는 곳에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새끼는 벙어리도 아니면서 왜 매번 사람 말을 무시해?”

스티븐이 발끝으로 차민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야. 야! 대답 안 해?”

차민은 바지 위로 손의 땀을 닦아내는 척하며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 기회에 저 덩어리들이 자신에게 주먹이라도 날렸으면 했다. 물론 평소에는 놈들이 어떤 소리를 하든 무시하는 편이었다. 반응을 보일수록 더 집요하게 괴롭힐 게 뻔했으니까.

그런데 열이 심해서 그런 건지, 오늘따라 그냥 넘어가주고 싶지 않았다. 저의 얼굴만 보면 돈, 돈, 돈 노래를 불러대니 이 기회에 합의금이라도 크게 불러볼 작정이었다.

비열한 주제에 소심해서 놈들은 제 몸에 멍이 남을 정도로 때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둘러싸고 재수 없는 소릴 하다가도 기척이 느껴지면 즉시 몸을 사리곤 했다. 그러니 이번엔 영상이라도 찍어서....

“잠깐만, 이 너드 새끼, 지금 핸드폰으로 생방송이라도 하려는 것 같은데?”

“뭐라고?”

“봐, 저거 카메라 화면이잖아.”

...찍어서, 증거 자료로 보관할 생각이었는데.

“너 미쳤냐?”

스티븐이 핸드폰을 쥔 차민의 손을 냅다 걷어찼다. 몸 상태도 별로인 데다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어설픈 수작이 전부 티가 난 모양이었다.

“뭐 이런 음침한 새끼가 다 있어?”

몸이 크게 밀릴 때마다 맹렬한 기침이 튀어나왔다. 안경은 땅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스티븐 패거리들은 너드의 반항에 크게 분노한 듯했다.

“우드 연구소가 대단한 방패라도 되는 줄 아는 것 같은데, 그거야 저어기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고. 너 같은 조무래기 작살내는 것 정도는 우드가 눈치 볼 필요도 없어. 알아?”

스티븐이 차민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었다. 당장에라도 터트릴 것처럼 손에 잔뜩 힘을 주려던 그는, 무언가 발견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평생 빛을 쬐어본 적 없는 것처럼 희멀건 차민의 목에 울긋불긋한 흉터가 있었다. 아니, 상처라기보다 누군가 깨문 자국 같았다.

“어? 야, 이거.….”

헐렁한 라운드티의 목이 순식간에 쇄골까지 당겨졌다.

“허허.... 이 새끼 꼴에 할 건 다 하면서 돌아다니나 봐.”

“어어? 이거 잇자국 아니야?”

동물원 원숭이라도 구경하듯, 패거리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차민의 몸을 들여다보았다. 컥컥거리며 버둥거려봤지만 이리저리 몸을 비틀수록 숨쉬기만 어려워질 뿐이었다.

“와.... 대체 어떤 여자가 저 새끼랑 자주는 거야?”

“그건 모를 일이지. 사내새끼 밑에서 앙앙 울었을 수도 있잖아. 생긴 것도 비리비리해가지고는.”

무례한 덩치들이 뻑하면 던지는 질 낮은 농담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혼자 소중히 품고 있었던 지난밤의 추억이 전부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저 덩치들이야 정재계에서 한가락 하는 집안 출신이니, 언젠가 루카스와 파티 같은 데서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민은 아니었다. 살면서 다신 올 수 없을 밤이었다. 그린우드를 졸업하면 그걸로 루카스와의 인연은 끝일 터였다. 놈들의 말마따나 한낱 말단 연구원의 연봉 정도로도 인생이 뒤집혀버린 자신과 날 때부터 보석이 세공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놈들과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저들은 전부 다 가져놓고선 어째서 혼자 몰래 품은 비밀까지 빼앗아가지 못해 안달인 걸까.

“어억!”

스티븐 아래 깔려 있던 차민은 있는 힘을 다해 무릎으로 위를 찍어 올렸다. 급소를 맞은 그가 살충제를 뒤집어쓴 벌레처럼 버둥거리며 계단 위를 굴러다녔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자기들의 리더가 어이없이 당한 꼴을 보곤 다른 놈들이 질세라 차민을 에워쌌다.

“야. 평소에 찍소리도 못 하던 게 갑자기 이 지랄을 떠는 걸 보니까... 찔려서 그러는 것 같지 않냐?”

불쑥 머리채가 붙들렸다. 안경은 어디로 떨어졌는지 시야가 온통 뿌얬다.

“어이, 머저리. 너 진짜 남자랑 잤지?”

차민은 옆에 너부러진 백팩을 들어 이리저리 휘저어보려 했지만, 하나뿐인 무기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빼앗겨 버렸다.

“왜 우리가 진작 널 손보지 않았게? 네가 우드가의 추천서를 받고 들어와서? 아니, 그 빌어먹을 ‘비스트’들이 대체 교내 어디에 숨어 있을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야. 우린 너와 달라서 대단하신 분들의 인맥이 절실한 상황인데, 너 같은 새끼 때문에 그들의 심기라도 거스르면 이쪽만 손해 보는 거잖아?”

빼앗긴 백팩이 내팽개쳐지면서 안에 든 내용물들이 여기저기로 날아갔다. 패거리들이 매일같이 놀리던 도시락통 또 한 처참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평범한 인간이 그린우드의 졸업장을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잘도...!”

흐릿한 시야로도 안면을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주먹이 느껴졌다. 차민은 다급히 팔을 교차해 얼굴을 가려보려 애 썼지만, 뒤에서 목을 뽑아버릴 듯 머리채를 붙든 다른 놈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퍼억-!

굉장한 파열음에 차민의 굽은 어깨가 더욱 둥글게 굽어졌다. 그나마 꼴사납게 덜덜 떨지 않아서, 또 입가를 얻어맞은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우드 연구소에서 제법 괜찮은 의료 보험 플랜에 가입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치과 치료는 비용처리가 매우 골치 아팠다.

“으윽......”

그런데 어이없게도 비명은 저에게 주먹을 날리려던 놈에게서 터져 나왔다. 너무 아프면 한 박자 늦게 고통이 몰려오는 건가 보다, 하고 곧 밀려올 아픔을 기다리던 찰나였다.

얼떨떨해진 차민은 슬쩍 팔을 내렸다. 눈만 빼꼼 내놓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안경이 떨어진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에워싸고 있던 놈들의 그림자가 슬슬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새로이 보이는 것이라곤 길쭉한 누군가의 실루엣뿐이었다. 놈들의 반응을 보니 ‘비스트’인 게 분명했다.

차민은 슬금슬금 손을 뻗어 바닥을 샅샅이 훑었다. 패거리들은 아버지를 한낱 따까리라며 얕잡아 보았지만, ‘비스트’들에겐 우드 연구소의 이름이 조금 더 무겁게 느껴질 터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저 ‘비스트’는 자신에게 어마무시한 폭력을 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심한 차민은 조금 더 대담하게 몸을 움직였다. 허둥거리는 손가락에 걸린 안경은 대충 느끼기에도 처참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차민은 소맷부리로 안경알을 대충 닦았다. 이음새에 모래 같은 것이 꼈는지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지금으로썬 이 안경이라도 있는 게 어딘가 싶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줄까?”

거북이처럼 목을 쭉 내밀고서 안경을 살펴보던 차민은,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우스꽝스러운 모양새 그대로 굳어버렸다.

“우드가의 추천서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버러지 같은 새끼들아.”

안경다리를 붙든 손이 덜덜 떨렸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라고 인지되기 이전부터 몸이 절로 반응했다.

“하, 하하.… 루카스,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루카스였다.

방금 전까지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그가, 환영이 아닌 진짜 루카스가, 돌연 제 앞에 나타나 절 구해주었다.

“꺼져.”

무표정한 얼굴의 루카스가 손가락을 딱 퉁기자, 덩치들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몇 초 후 담장 너머에서 요란한 물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야외 수영장에 빠진 모양이었다.

차민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계단과 바닥에 나뒹구는 자신의 소지품들, 그리고 눈앞에 선 루카스만 번갈아 바라보았다.

“인간들은 대체 왜....”

혐오감을 숨기지 않은 루카스의 목소리에, 차민은 어쩐지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놀랍고, 고맙고, 또 서글펐다.

혹시나 싶었지만 당연하게도 루카스는 저를 까맣게 잊은 듯했다. 느리고 다정하던 말투는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저 주사였을 뿐이었다. 자선행사의 밤은 혼자서만 짊어져야 할 비밀이 맞았노라 최종 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차민의 고개가 앞으로 푹 꺾였다. 그래, 그의 말 그대로였다. 인간들은 대체 왜. 다 알고 있었으니 괜찮을 거라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놓고는... 왜 멋대로 기대하고 상처받는 것일까.

차민은 목을 괜히 문지르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벌건 손자국이 남았을 게 분명한데 부모님께 이를 어떻게 변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전까진 그저 친구가 없나 보다 여기고 넘어가셨지만 명백한 폭력의 흔적을 보면 방관하시진 않을 텐데....

차민은 삐걱거리는 몸을 굽혀 박살이 난 핸드폰을 줍고, 고물차 차키도 주섬주섬 주웠다. 최대한 루카스의 발치를 피해가며 떨어진 물건들을 줍고 있는데..., 갑자기 거대한 그림자가 시야에 드리워졌다.

막 책을 움켜쥐려던 차민의 손가락이 슬로모션을 건 것처럼 느리게 굽어 들어갔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설마 싶었다. 루카스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고, 그렇다면 저에게 말을 걸 이유도, 다가올 이유도 없었다.

“야.”

분명 없는데... 그런데....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가죽 로퍼를 신은 이가 탐색이라도 하듯 차민의 측면을 서성이다, 이내 정면에서 서서히 멈춰 섰다. 차민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마스크는 조금 전 겪었던 난동 탓에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인간, 너 말이야.”

루카스가 명확히 자신을 지칭함과 동시에 딸꾹질로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망할.... 차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혹시라도 재채기를 해서 그의 신발에 침이라도 튀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입을 막은 거였는데... 그보다 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줄이야. 눈치가 없는 이 몸뚱이는 단 한 번도 주인을 도와주는 법이 없었다.

“분명히 처음 보는 인간인데 어째서.….”

그때보다 훨씬 차가운 손이 차민의 턱 끝을 성의 없이 붙들었다. 자꾸 땅바닥만 쳐다보는 시선이 못마땅한지, 그가 엄지로 자꾸만 수그러드는 턱을 툭 밀어 올렸다.

방황하던 차민의 시선이 그제야 앞을 향했다. 놀랍게도 루카스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댄 채로, 자신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야.”

딸꾹.

차민의 몸이 아까보다 훨씬 더 크게 들썩였다.

“너, 나랑 잔 적 있지?”

차민은 안경을 고쳐 쓰는 척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루카스가 무의식중에라도 저를 기억하는 것 같아서 심장이 터질 듯 뛰었지만, 그래도 눈치라는 게 있었다. 이 상황에서 옳거니 고개를 끄덕였다간 스티븐 패거리들보다 더한 보복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차민의 아버지는 그들보다 훨씬 더 우드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게 매만지는 의미가 있어? 그 안경.”

순간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 튀더니 시야가 깨끗하게 개였다. 폭발음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은 차민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손을 들어 안경다리를 더듬어보았다. 멀쩡해졌다. 찌그러졌던 프레임도, 실금이 갔던 안경의 렌즈도.

“너랑 잔 건... 어이가 없지만 뭐, 그렇다 치고.”

안경이 멀쩡해지니 안 좋은 점도 있었다. 차민을 훑어보는 루카스의 눈매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대체 눈에 뭐가 씌어서 이런 놈과 뒹굴었던 거지,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뭔가 특정한 행동을 반복했어? 네 구멍 안에 가득 쌌다거나, 네 걸 계속 빨면서 사정시켰다거나.”

“왜 그런, 그런 말을.….”

놀라 반박하려던 차민은 꼴사납게 덜덜 떨리는 제 목소리에 놀라 헙, 입을 다물었다. 침착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차민은 속으로 자신의 이런 반응이 당연한 거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해 보았다.

루카스가 스티븐 무리를 손가락 한 번으로 떨구어낸 것을 목격한 직후였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이능력보다 더 파괴력이 대단한, 아름다운 그의 얼굴이 제 코앞까지 다가와 자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이상했다.

“왜 너한테서 내....”

루카스는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듯 몇 번이나 말을 삼켰다.

“이걸 인간한테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답답한 듯 짜증 섞인 목소리로 루카스가 결 좋은 머리칼을 헝클었다.

차민은 되는 대로 손에 잡힌 물건을 세게 움켜쥐었다. 불규칙적인 호흡을 따라 낡은 책의 표지가 힘없이 우그러졌다. 한국으로 다시 들어가는 가족이 물려주고 간 고전 시리즈물 중 하나였다. 차민은 촌스러운 표지에 적힌 문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To be or not to be. 그야말로 지금 차민의 심정을 대변하는 글귀였다.

“하여튼, 내 기억엔 너랑 뒹군 적이 없는데 너한테서 나의..., 그래. 나의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져.”

위아래로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잡아먹힐 것 같다는, 좋을 대로 저를 도려내고 발라내, 끝내 갈가리 찢어버리고 말 거라는 근원 모를 공포가 차민을 덮쳐왔다.

구겨진 종이가 손바닥 여기저기를 날카롭게 찔러댔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 차민은 간신히 마른 입을 열었다. 너는 기억 못 하는 것 같지만 같이 뒹군 적이 있기는 하다고. 잘난 당신의 기운 같은 게 묻어나게 되어 미안하다고…. 그렇게 사과를 하려는데,

“만약 너와 잤다고 하더라도.….”

타닥, 하고 불씨가 타오르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울리더니 순식간에 눈앞이 흔들렸다. 거대한 백열등 조명이 천천히 꺼졌다 켜지는 것을 반복하는 듯했다. 최면에 걸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몸 전체가 붕 뜨는 느낌에 헛구역질이 일었다.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이지.”

“...어어?”

핑 도는 시야를 다잡으려 짧게 도리질을 친 차민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믿을 수 없어 눈만 깜빡였다. 방금 전까지 교내 구석의 흙바닥이었는데... 감았던 눈을 뜨니 호화로운 저택 안이었다.

차민은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바닥에 닿는 푹신한 러그와 구겨진 햄릿 표지가 지금 일어난 일이 거짓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내 기숙사 방이니까 놀랄 것 없어. 쓸 일이 없어서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아.... 방금 전에 덩치들을 저 멀리 던져 버린 것과 같은 원리인가 보다. 차민은 목을 움츠린 채로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여기가 저택이 아니라 기숙사라니.… 기숙사 또 한 그린우드의 다른 건물처럼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면적을 자랑하는 듯했다. 다른 ‘비스트’도 아니고 루카스의 방이라 더더욱 거대하게 꾸며놓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비스트’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지?”

“음,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소리군.”

루카스는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차민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허리에 손을 짚은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발을 까딱일 때마다 구두굽의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그 여린 반동을 타고 황금을 녹인 듯 한 루카스의 머릿결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대부분의 ‘비스트’들은 반려에게 흔적을 남길 수 있어.”

머릿결을 따라 둘러진 엔젤링을 멍하니 보던 차민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방법은 각기 달라서 나도 몰라. 그 종족이 아니면 알 필요도 없는 이야기지. 반려라는 말 대신 다른 특정한 호칭으로 부르는 종족도 대다수고. 다만 확실한 건, 누군가의 반려가 된 ‘비스트’에게는 흔적이 남아. 그래서 저 ‘비스트’를 잘못 건드리면 좆 될 수도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돼.”

“그런…데?”

“아까 너한테서 내 기운이 묻어난다고 했지?”

차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괜히 제 양쪽 어깨에 코를 가까이 해보았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우드가의 경우는 반려에게서 자신과 똑같은... 그래, 향이 나. 기운 같은 말보다는 그게 더 이해가 쉽겠군. 그리고 나와 같은 향을 심는 작업은 매우 복잡해. 같은 우드가의 ‘비스트’라고 해도 그 과정과 결과는 전부 다르고.”

루카스가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익숙한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자선행사의 밤에 맡았던 그 향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달콤한 것들을 품은 오렌지 향.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시스템이야.”

차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지금까지 겪은 일도 충분히 놀라웠지만, 방금 루카스에게서 들은 말만큼 충격적이진 않았다.

“그..., 혹시... 너의 향이... 나한테서 난다는 뜻이야?”

“그래. 네가 우드가에 방문한다면 모든 사람이 네가 나와 잤다는 걸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하, 하지만 고작 하룻밤 정도로….”

“아하. 확실히 내가 너와 섹스한 적은 있다는 뜻이네?”

“그렇긴 하지만 넌 잔뜩 취해 있었고....”

루카스의 눈썹 끝이 삐딱하게 솟았다. 꼭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인간, 나는 술에 취하지 않아.”

“알아. 술이 아니라... 오렌지 주스에 취한다고 했잖아.”

차민이 설마 그런 정보까지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 했는지, 루카스의 동공이 크게 일렁였다.

“이 부분은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카터...라고 했던가. 그 사람이 네 술잔에 장난을 친 것 같다고 했어.”

루카스의 눈이 순식간에 가늘게 좁혀졌다. 그 말을 듣고서야 짚이는 구석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아아. 설마 자선행사 때?”

“마, 맞아. 브루클린에서 열린.”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한 루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남은 듯 아까보다 불손한 눈길로 차민을 여러 번 훑어보았다. 이런 인간이 자선행사에 왜 나타났을까, 하는 궁금함과... 내가 대체 왜 얘랑 뒹굴었을까, 의아해하는 그런 시선.

“네가 취하면 모든 것을 잊는다기에 응한 거였어. 나도 뭔가..., 너의 반려 같은 것을 노리고 네게 덤벼든 게 절대 아니었고…. 아! 책임을 회피하려고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네가 먼저 나에게 그, 그걸 제안을 했어. 그리고.….”

“당연히 그랬을 거야. 같은 향이 묻어난다는 건 내 의지이지, 네가 용을 쓴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루카스는 답지 않게 몇 번이나 말을 골랐다. 조금이나마 신사적으로 굴어보겠다는 듯 애써 입꼬리를 당기며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냥... 신기해서 그래. 내가 너에게 무언가를 강렬히 바랐다는 사실이.”

‘내가’와 ‘너에게’ 사이에 아주 많은 단어들이 숨겨져 있었지만... 차민은 애써 외면하기로 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 이상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으므로 끝내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차민은 마른세수를 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냥 집에서 푹 쉴 걸 그랬다. 혼자만의 추억으로 묻어두고 있을걸. 내심 품었던 기대가 그렇게나 큰 죄였던 걸까, 성치도 않은 몸으로 이런 조롱을 들어야 할 정도로?

그러나 한편으론, 취해 있던 루카스의 말이 진심이었다는 것에 명치 안쪽이 시큰하게 저려왔다. 아마 오렌지 주스로 맛이 가버렸던 이 전능한 ‘비스트’는, 관계를 갖는 내내 진심으로 저를 잊고 싶지 않다고 바랐던 모양이었다.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반려의 흔적을 남겨버릴 정도로.

“그 ‘반려’라는 게... 영원한 건 아니지?”

“글쎄.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방금 전에는 나에게 무언가를 강렬히 바랐다고 했고, 이전에는... 그, 사정…했냐고 묻기도 했잖아.”

“그래서?”

“그렇게 여러 가지 조건이 있다는 걸 알게 되려면 이미 몇 번의 반려를 거쳤다는 뜻일 테니까... 그, 그리고... 우드 가의 사람, 아니 ‘비스트’라고 해서 반려에게 흔적을 남길 때 모두 같은 방법을 쓰는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럼 결국 네가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을 것 같고....”

처음으로 루카스의 눈에 흥미로운 기색이 스쳤다. 비웃음도, 의아함도 아닌 좋은 방향의 호기심이었다.

“...그래, 아이만 갖지 않으면 반려는 몇 번이고 바뀔 수 있어. 혹은 그 아이가 죽어도 가능하고.”

“그렇다면... 더는 걱정할 것 없지 않아?”

“어떤 측면에서?”

“나, 나는 남자라서 아이를 가질 수가 없고…. 어차피 넌.….”

꼭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열이 훅 올라 어지러웠다. 차민은 짧은 시간 동안 천당에서 지옥까지 몇 번이나 고꾸라지고 있었다.

“넌... 다른 ‘비스트’와 어울리게 될 테니까.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른 반려가 생기게 될 거고....”

차민은 입이 썼다. 기대를 품지 않았다고 해서, 좋아하는 상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건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멀리서 그의 등교를 지켜보던 때처럼. 그저 조용히. 없는 존재인 것처럼. 그렇게 몰래 좋아하다 자연스레 마음을 접고 싶었는데.... 이제는 전부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린우드엔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거지? 아까 우드가의 추천서를 받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아. 그건 아버지가 우드 연구소의 연구원이셔서....”

차민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무해함을 어필하려 애썼다. 볼 것도 없는 집안, 루카스가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연구원의 아들. 그러니 이 달콤한 향도 신기루처럼 금세 사라져버릴 게 분명했다.

“나는 인간에게 흔적을 남겨본 적이 없어. 아마 그린우드에 있는 대다수의 ‘비스트’들도 그럴 거야. 그런 사고를 치지 말라고 여기 몰아넣은 거니까.”

그러나 그런 차민의 의지가 우습다는 듯 커다란 손이 헐렁한 옷깃을 쥐고는, 마른 몸을 훅 잡아당겼다.

“다른 ‘비스트’도 아닌 내 흔적을 달고 다니는 인간을 보면, 그것들이 가만히 있을까?”

차민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루카스가 부드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 거야. 그럼 넌 몹시 곤란해지겠지? 가뜩이나 몇 안 되는 인간들에게도 밉보인 모양이던데.”

“저기. 루카스, 나는....”

“그러니 당분간은 내가 도와줄게. 취한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빛을 받은 그의 동공이 여러 가지 색으로 반짝였다. 감탄보다는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공포가 밀려왔다. 한낱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었다.

“질식할 정도로 내 향에 잠기면, 감히 누구도 널 쳐다보지 못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차민은 바닥을 짚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기도 전에 루카스에게 손목이 붙들려버렸다.

“다시 한 번 겪어보면 알게 될 거라는 말이지. 너도, 나도. 여러 방면으로.”

땀으로 흥건해진 손바닥에 달라붙은 책 표지가 쩌적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반쯤 찢어져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꼴이 꼭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종이에 눌려 빨갛고 하얗게 잔뜩 선이 그어진 손바닥 위로 루카스의 더운 시선이 힐끔 스쳐 갔지만, 차민은 눈치재지 못한 듯했다.

“음..., <햄릿> 좋지.”

한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루카스가 차민을 잡아끌었다.

“나는 <오셀로>가 좀 더 취향이지만. 세익스피어보다는 스탕달이 확실히 괜찮은 것 같고.”

“그, 그렇구나.….”

“혹시 <연애론> 읽어봤어? 누가 인간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면서 추천해줬는데.”

“어..., 미안. 내가 아직 고전문학은 잘 몰라서....”

차민이 기억하는 스탕달의 책은 <적과 흑> 정도였고, 그 나마도 이름만 겨우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게 뭐가 대수일까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오셀로>와 <연애론>을 구입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 루카스가 깊은 인상을 받았을지 상상하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삼킬 듯이 탐독해볼 터였다.

“자꾸 다른 생각 하네.”

“어? 방금....”

차민은 입안으로 <오셀로>와 스탕달, <연애론>을 계속 해서 되뇌고 있었다. 처음으로 알게 된 루카스의 사적이고 사소한 정보를 놓칠 순 없었으므로.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너른 침대 위였고, 루카스와 묘한 자세를 취하려던 참이었다.

“어, 어떻게... 전혀 몰랐는데....”

“힘을 줘서 침대 위로 내 던졌는데도 아프지 않을 수 있냐고?”

차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스가 픽 웃었다.

“인간은 이래서 재미있어.”

긍정적인 의미인지 부정적인 의미인지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미소였다.

“음, 저기…. 루카스.….”

반쯤 눕혀진 차민의 위로 루카스가 몸을 겹쳐왔다. 돌처럼 단단한 허벅지가 어정쩡하게 벌어진 무릎 부근을 스쳐 갔다.

“저, 내가 감기에... 그때 자선행사날 이후로 몸이 아직 좋지 않아서....”

차민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필사적으로 여러 가지 핑계를 떠올렸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만약 루카스와 다시 마주친다면, 그리고 그 밤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번엔 자신이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고 싶었다.

장소는 브루클린이 좋을 것 같았다. 뭐가 있는지 잘 알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처음 만났던 곳이니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그 유명한 브루클린 브릿지 위를 걸어보면 좋을 것 같았다. 사람들로 미어터지겠지만, 인파속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뒤늦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 만난 루카스는 다짜고짜 알 수 없는 ‘비스트’의 반려 시스템을 알려주고는, 곧장 침대 위로 저를 이끌었고... 그리고 어쩐지 다시 섹스나 하게 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괜찮아. 기분 좋아질 거야.”

“아니... 미안, 너무 아파서... 지금 컨디션으론 다시 감당 할 자신이 없어. 미안.”

“처음에만 그럴 거야, 알잖아.”

“글쎄... 나는 계..., 계속 아프기만 하던데.….”

다 알지 않느냐며 짧게 윙크를 했던 루카스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방금 차민으로부터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뭐라고?”

“어, 음... 미안, 나는....”

“아프기만 했다고?”

“그렇게 크, 큰게... 안에 들어오니까.….”

“좆이 크면 클수록 좋은 거지. 다 아는 사이에 무슨 내숭을.....”

“...으음, 그래도 네 얼굴 보니까 좋았어.”

너무 부정적인 말만 하는 것 같아 필사적으로 꺼낸 부끄러운 고백이었다. 그런데 루카스는 오히려 기분이 더 상한 것처럼 보였다. 기가 막히다는 듯 몇 번이나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는 이내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뜨고서 차민을 노려보았다.

“야, 인간. 너 지금 나 꼬시는 거야?”

“아, 아니?”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해? 왜, ‘반려’ 이야기를 들으니까 자신감이 생겨? 이참에 영영 내 반려로 눌러앉고 싶어서?”

“어, 어떻게 그런... 그럴 리가 없잖아, 진짜로 그런 거 아니야.”

정말인데.... 팔뚝만 한 게 내내 뒤를 짓찧는데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가 있지? 그나마 제가 루카스를 좋아해서, 그의 얼굴이 때때로 고통도 잊을 정도로 눈이 부셔서 견딜 수 있었던 거였다.

“내가 그날 그렇게 섹스를 못했다고?”

그건 말이 안 되잖아, 하고 어깨를 으쓱이려던 루카스는... 어설프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차민의 얼굴을 보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인간, 너, 설마 내가, 내 섹스가, 그렇게 별로였다는 거야?”

단어마다 토막토막 끊어 발음하는 루카스의 목소리가 살벌했다. 차민은 어어, 하고 말을 삼켰다. 자꾸만 바보처럼 말을 더듬는 것도 신경이 쓰이는 와중에 이야기가 이상하게 튀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 별로였다고….”

더 큰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신중히 말을 고르려던 거였는데, 루카스는 멋대로 결론을 내버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비장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와 동시에 딱, 하는 소리가 울렸다. 스티븐 패거리를 날려버릴 때 들었던, 그리고 단번에 기숙사로 이동을 할 때 들었던 그 소리였다.

“헉, 이... 이게....”

차민은 얼이 빠진 얼굴로 순식간에 휑해진 제 하체를 내려다보았다. 루카스가 손을 튕기자... 어이없게도 펑, 하고 바지와 속옷이 한 번에 터져버렸다. 말 그대로였다. 폭탄이라도 맞은 듯 갈가리 찢겨져서 마치 가루 같아진 천 조각들이 여기저기에 하늘하늘 떠다니고 있었다.

“내가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랬던 것 같은데... 이번엔 확실히 다를 거야.”

“아니, 나는...! 루, 루카스!”

오금이 붙들리는가 싶더니 몸이 아래로 쭉 미끄러졌다. 도로 위쪽으로 기어가려 버둥거리는 사이 발목이 세게 잡히고 세상이 휙 뒤집혔다. 시트 위에 고개를 처박은 차민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제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깨닫곤 더욱 거세게 몸부림을 쳤다.

“기다려봐.”

“아니, 루카스, 이건, 이건 아냐....”

차민은 개처럼 엉덩이를 치켜든 채로, 루카스에 뒤를 훤히 내보이고 있었다. 술, 아니 오렌지 주스에 취해 저를 좋게 봐줄 수 있는 것도 아닌 상황인데... 이런 자세로 제 몸을 그에게 열어 보이다니. 게다가 환한 대낮인지라 방 안이 밝아서 서로의 솜털까지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허읏, 아, 안....”

차민은 숨도 쉬지 못한 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믿을 수 없게도 입구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구멍에 그의 손이 닿아 있었다.

“그럼 나 씻고..., 씻고 올게, 조금 전까지 땀을 많이 흘려서... 루카스, 제발....”

“괜찮아.”

놀란 차민이 삐걱대며 숨을 끊어 내쉴 때마다 루카스의 손가락이 기다렸다는 듯 다물린 구멍을 천천히 헤집기 시작 했다.

구멍을 두드리는 루카스의 손가락에 무언가 둘러져 있는 듯했다. 젖은, 작고 얇은 막 같은 것. 뭔지는 모르겠지만 콘돔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이건 ‘버튼’이라는 거야.”

“으으.....”

차민은 시트를 움켜쥐며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확실히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피가 쏠려서인지 열이 다시 확 오르는 기분이었다.

“‘버튼’이 알아서 깨끗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부끄러워할 것 없어.”

그게 뭐지.... ‘비스트’가 쓰는 콘돔 같은 걸까. 뭐가 됐든 좋으니 민망한 이 자세 좀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루, 루카스?”

정제 모를 무언가가 몸 안쪽을... 정확히는 구멍 입구부터 내벽까지 빠르게 훑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십 개의 손가락이 뒤쪽을 찌르고, 안쪽 여린 살점을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방금 전 루카스가 손가락 위에 두르고 있던 그것인 듯싶었다.

그가 말한 ‘버튼’이라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자신의 몸 안을 유영하는 이것이 맞다면... ‘버튼’은 꼭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았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불편하고 음탕한 이물감이 들어 자꾸만 몸을 뒤채게 했다.

반대로 ‘버튼’은 차민이 꿈지럭거릴수록 신이 나서 안쪽 깊은 곳을 쑤시고 다녔다. 차민 자신조차 몰랐던 내벽의 생김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구멍 안의 부드러운 부분, 어딘가 툭 튀어나온 쪽, 주름의 방향과 결까지, 전부다.

“이상한 건 아니야. 이런 방식의 피임이 필요한 ‘비스트’들이 쓰는 기구이니까. 그저 이름 그대로, 방금 네 안에 자리 잡은 ‘버튼’이 눌리지 않으면 사정할 수 없을 뿐이야.”

“…뭐?”

“아무리 극한까지 쾌감이 고조되어도 모조리 해방이 되는 느낌은 들지 않을 거야. 내가 절정에 올라도 괜찮다고 명령하지 않는 이상.”

그러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낮선 천장과 자신의 아래를 살펴보는 루카스의 정수리가 보였다.

당황한 차민은 크게 히끅이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침대는 바다처럼 넓어서 어딜 둘러보아도 다른 것이 보이질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멎은 것 같았던 딸꾹질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름이 뭐야?”

정처 없이 파르르 떨리던 차민의 눈꺼풀이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난밤과 같은 물음이었다. 그렇지만 처한 상황도, 분위기도 전혀 다르다는 점이 차민을 조금 슬프게 했다.

“성은 한…, 이고, 이름은 차민….”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를 악무는 순간, 발목이 붙들리고 허리가 둥글게 말렸다. 민망하게도 몇 번의 자극으로 반쯤 일어선 성기가 팅, 하고 흔들리며 제 배꼽을 두드렸다.

“내 이름은 알지?”

“아, 아...!”

긴 손가락이 세 개쯤 단번에 구멍 안을 파고들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흡사 루카스가 허리를 쳐올릴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흐, 으읏....!”

차민이 허리를 들썩일 때마다 하얗고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푸딩처럼 파르르 흔들렸다. 마른 몸 중 유일하게 살집이 붙은 곳이었고, 루카스도 몇 번이나 통통한 제 엉덩이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었다. 부드러운 허벅지살과 도톰한 회음까지, 얼굴보다 여기가 더 야하면 어떻게 하냐며 한숨을 쉬면서 입을 맞춰주기도 했다. 물론 지금의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야.”

정신없이 움찔대며 손을 집어삼키는 구멍을 보고는, 루카스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차민을 불렀다.

“너 손가락만으로도 이렇게 자지러지면서 무슨.….”

“그때는... 이렇게 안, 해줬…, 응, 안 했.….”

“뭐? 그저 좆만 휘둘렀다고?”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지만 목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제격의 차가 커서일까, 루카스가 손가락만 삽입했을 뿐인데도 크게 몸이 흔들렸다.

“음.....”

방금 전까지 다소 약이 오른 듯했던 루카스의 얼굴에 아주 약간의 미안함이 스쳐 갔다.

“이렇게 손으로 풀어주지도 않았다고?”

“응, 사, 사람들이 언제 올지..., 밖이었고, 아, 그냥....”

사납게 일어섰던 눈썹 끝이 다소 누그러들었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구멍 안을 헤집던 손을 고리처럼 모아 긁어내리자, 벌어진 허벅지에 마른 근육이 팽팽히 일어섰다. 차민의 옅은 체모와 완전히 단단하게 일어선 좆, 바로 아래 올라붙은 동그란 음낭을 바라보던 루카스는, 이제야 정신이 들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교내에 감도는 미미한 제 향이 거슬렸을 뿐이었다. 반려의 각인이라기엔 희미했고, 그렇다고 무시해버릴 순 없는 정도였다. 각인이 있었던 걸까. 짐작이 가는 것은 기억이 없는 밤, 그때뿐이었다. 분명 사고를 친 듯한데.... 이상하게 다른 때와는 느낌이 무언가 달랐다.

추적은 손쉬웠으나 인간이라는 점이 뜻밖이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각인의 주인은 낯선 얼굴의 비쩍 마른 너드였다. 남성체와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거부감도 없었다. 애초에 ‘비스트’들끼리는 그런 것을 따지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취향을 완전히 비껴가는 외양은 처음이어서 루카스는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와중에 제 좆이 크기만 해서 섹스 내내 아프기만 했다는 말을 들으니 눈이 뒤집혔다. 그래서 설욕전을 펼쳐 보일 생각이었다. 유치하게도, ‘버튼’까지 써가면서.

“흐읏.....!”

차민의 목이 뒤로 크게 꺾였다. 방금 전 굉장한 자극을 받은 듯했지만, ‘버튼’으로 인해 절정이 통제되고 있었으므로 사정까진 이르지 못했다. 틀어 막힌 감각이 답답한지 좁은 구멍은 세게 개폐를 반복하며 손가락을 조여 대기 시작했다.

런웨이에나 설 것 같은 이런 스키니한 몸매는 루카스의 취향이 아니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질까지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손에 감기는 맛이 있는 몸이 좋았다. 아무래도 자선행사날에는 무슨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찌면 간만에 취해서 환각 같은 게 보였던 걸 수도 있고....

“음…, 그래도 미안하니까….”

루카스는 볼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저 인간은 반려든 각인이든 알지도 못할 텐데, 괜히 붙들고 늘어질 필요가 있나. 이왕 이렇게 됐으니 ‘버튼’ 같은 장난도 그만두고, 단번에 극점까지 찍어주고 끝낼까....

“으....응.”

직전까지 유치하게 굴었던 게 민망해져서, 루카스는 조금 더 깊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차민의 내벽으로 스며든 ‘버튼’을 도로 회수할 생각이었다. 자신과의 섹스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하니 눈이 뒤집힐 정도의 쾌락으로 기억을 정정해주면 그만이지 싶었다.

“아, 아아...!”

한층 더 짙어진 감각에 차민의 몸이 다시 한 번 세게 들썩였고, 그 바람에 모범생 같은 두터운 안경이 삐뚤게 흘러 내렸다.

그런 차민의 모습을 의미 없이 흘끗 보다, 다시 벌어진 구멍에나 집중하려던 루카스의 고개가 세차게 들렸다. 아마 우드가의 누군가가 보았더라면 호들갑을 떨면서 기어이 사진을 찍고 말았을 정도로 넋을 놓은 표정이었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야, 인간 너….”

단춧구멍만 하게 보였던 조그만 눈이 과장을 보태 주먹만 하게 커다래졌다. 아니... 저 안경이 대체 뭐길래 사람 얼굴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거지.

루카스는 홀린 듯 반대편 손을 뻗었다. 그 바람에 안쪽을 쑤시던 각도가 달라졌는지, 차민이 밭은 숨을 흘리며 짧게 도리질을 쳤다. 조금 전 자신이 힘 안 들이고 고쳐주었던 그 좆같은 안경은 완전히 옆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아, 루카… 스.….”

붓으로 세심하게 그린 듯한 긴 눈매가, 속눈썹이 물에 젖어 반들거리고 있었다. 루카스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차민과 렌즈가 두터운 안경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거지같은 안경만 벗겨졌을 뿐인데 장학 퀴즈에나 나올 것 같던 너드가..., 하이 패션지의 변태 같은 포토그래퍼들이 환장할 것 같은 야한 눈매의 미인이 되어 있었다.

“야, 너….”

당황한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슬쩍 뒤로 물러섰다.

“흐, 아, 아읏...!”

차민이 크게 허리를 들썩였다. 내벽을 둥글리던 손이 갑자기 전부 빠져나가자 그것만으로도 큰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차민이 몸부림을 칠 때마다 매끈한 허벅지살이 아주 얕게 요동쳤다. 지금 이 상태로 박아 넣으면 어떻게 제 살에 감겨들지 뻔히 예상이 가는 그런 모양새였다. 루카스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비쩍 말랐으면서 이런 곳만 살이 붙은 게 신기했다.

“...이게 말이 돼?”

고작 그만큼 들쑤셨다고 벌써 발갛게 손자국이 난 말랑말랑한 엉덩이와 허벅지, 그리고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한 차민의 얼굴을 한참이나 훑어보던 루카스는... 안경이 떨어진 쪽으로 더듬더듬 손을 휘저어보았다. 그렇지만 거기에선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들의 흔한 물건일 뿐이었다.

어떠한 마법도, 주술도 걸려 있지 않은데 어떻게 얼굴이 저렇게까지 바뀔 수 있는 거지? 루카스가 손날을 세워 옆으로 밀어내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자 문제의 안경이 공중으로 둥실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차민의 얼굴에 다시 두터운 뿔테 안경이 씌워지자, 놀랍게도 직전까지 마주했던 너드의 얼굴이 드러났다.

벗겨내면 방금 전의 모델 같은 얼굴이, 다시 안경을 씌우면 도로 단춧구멍만 한 눈이, 그리고 또 다시….

“.....루, 카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차민에게 안경을 씌우고 벗기던 루카스는 정신을 차리려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음, 자세히 보니 확실히 눈에 띄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라거나 오밀조밀하지만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라거나.... 왜 그간 눈에 띄지 않았을까, 왜 진작 안경을 벗겨볼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전형적인 미인상이었다. 만국 공통으로 먹힐 것 같은, 그러나 주위에는 잘 없는 분명히 예쁜 얼굴.

“야. 이거 대체 뭐야? 왜 그렇게 얼굴이.….”

다르게 변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루카스는... 이내 민망해져서 슬쩍 말을 바꾸었다. 명색이 우드가의 ‘비스트’인데 한낱 인간의 외양에 감탄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왜 그렇게 눈이 커다랗게 변하는 거야?”

“아... 시력이 안 좋아서. 렌즈를 많이 압축했거든.”

“압축?”

그 말을 듣고 안경을 빙글빙글 돌려보니, 옆에서 보면 프레임 밖으로 렌즈가 삐져나왔을 정도로 두꺼웠다. 그림처럼 뻗은 콧대에 공룡 콧구멍 같은 자국이 난 것도 저 안경에 달린..., 음. 정확한 명칭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두껍고 시커먼 프레임 아래 달린 이상한 실리콘 딱지 탓인 것 같고.

“하긴. ‘비스트’들이 눈이 나쁠 일은 없을 테니까.... 안경 낀 사람이 낯설겠구나.”

루카스는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주변에는 이런 안경을 쓰는 또래의..., 아니 또래처럼 보이는 인간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린우드에서 같이 어울리는 무리들 중에는 분명 인간도 몇 있었지만, 선글라스 외엔 눈에 뭘 껴본 적이 없는 놈들이었다. 그리고 아마 놈들이라면 만약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되더라도 이런 끔찍한 안경은 절대 끼지 않을 것이다.

“저기…, 그러면.….”

차민은 크게 벌어졌던 다리를 슬쩍 오므렸다. 당장 입을 수 없게 되어버린 바지가 난감했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루카스의 기숙사니까, 전화로 관리실 같은 곳에 연락하면 샤워 가운이라도 대령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그러면 급한 대로 그거라도 걸치고서,

“맙소사. 안경만으로도 답답해 죽겠는데 앞머리는 대체 왜 내리고 다니는 거야? 머리통에 착 달라붙어서는... 그, 뭐라고 하더라?”

...걸치고서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 크레용 같아, 너.”

“크, 크레파스?”

“왜, 애기들 가지고 노는 거 있잖아. 끝이 반질반질하고 동그란 크레용 말이야.”

성큼 다가온 루카스의 손이 이마를 빼곡하게 덮고 있던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바람에, 차민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크레용은 보통 끝이 뾰족하지 않냐는 소심한 대거리 역시 목 안으로 꿀꺽 삼켜버렸다.

“아, 혹시 얼굴을 내놓고 다니면 그 새끼들이 괜히 괴롭힐까 봐서?”

“그, 글쎄.”

차민의 고개가 낮게 수그러들었다. 지난번과는 다른 의미로 열렬하게 다가오는 루카스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물론 여전히 그를 좋아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단 한 번도 그와의 미래를 꿈꿔본 적이 없어서일까. 차민은 숨어서 하는 짝사랑이 마음이 편한 것 같았다.

꼬박 앓는 동안 아주 잠깐 허튼 기대를 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막상 루카스를 마주하니 어이없을 정도로 포기가 빨랐다.

“저기, 루카스. 미안한데.….”

이건 제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이, 온도가 아니었다.

“관리실 같은 곳에 전화 좀 할 수 있을까?”

“왜?”

“옷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까….”

차민은 양말만 신은 맨다리를 최대한 가려보려 몸을 웅크렸다. 잔뜩 긴장해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이 무릎 너머로 전부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민망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보다야 낫지 싶었다.

“혹시 가능하다면, 음... 샤워 가운 같은 거라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차민은 말하는 도중에도 불쑥 튀어 나오려는 신음소리를 꾹꾹 누르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쿨쩍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젖은 구멍이 크게 개폐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루카스가 제 안으로 수상한 무언가를 밀어 넣었던 것 같은데.... 음, ‘버튼’이라고 했던가.

“어, 음... 그리고 혹시 아까 전에 여기에... 넣어준 거 있잖아. 그건... 어떻게 빼, 빼는 거야?”

지나치게 아래를 의식을 해서일까. 말을 꺼낸 순간부터 몸 안쪽이 홧홧하게 달구어지는 기분이었다.

차민은 크게 침을 삼키며 괜히 요동치는 울대를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자신의 모범생 같은 안경에 루카스의 산통이 깨진 모양이니, 최대한 조용히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이득일 터이다.

‘반려’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나중에 아버지에게 에둘러 여쭤보거나,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보든지 할 생각이었다. 허나 그런 시스템을 처음 듣는 자신의 추측으로도 인간과 ‘비스트’의, 그것도 우드가의 일원과의 영원한 연결 같은 건 불가능에 가까울 듯했다.

그런데,

“‘그날의 나’는 어땠어?”

지긋하게 차민을 훑어보던 루카스가 돌연 의중을 읽을 수 없는 질문을 던져왔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네 말대로 기억이 나질 않아서 좀 궁금해졌어. 그때의 내가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잠시 일으켰던 상제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도로 눕혀졌다.

“너는 그때와 지금 중 어떤 섹스가 더 마음에 들지.”

루카스는 차민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고는, 무릎으로 허벅지를 밀어 올렸다. 그 바람에 이전처럼 다리가 크게 벌어진 자세로 단단히 고정되어버렸다.

“일단 여태까지 네가 한 말을 종합해보자면 열에 들떠서 무작정 안으로 쑤셔 넣었던 것 같은데.”

“음.....”

차민은 갑자기 돌변한 분위기가 당황스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우왕좌왕하며 부산스럽게 굴었는지, 루카스에게 턱이 붙들렸다.

방금 전까지 제 구멍을 쑤셔대던 그 손가락은... 놀랍게도 조금 젖어 있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그의 향이 묻어나고 있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달콤한 그 향.

“그래도 그때는 다정…, 다정했어. 그래서 나도 나쁜 기억 같은 걸로 남지 않았고, 그냥... 몸이 좀 안 좋을 뿐....”

“뭐야. 다정했다고? 아프기만 했다며.”

“그렇긴 하지만.... 말이나 표정 같은 게 훠, 훨씬....”

루카스는 입을 다문 채로 으음, 하고 목을 울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안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래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벌어진 둔부 안쪽이 쫑긋 일어서며 민망한 곳의 수축을 돕기 시작했다.

“어…, 저기, 루카스.”

“그러니까 그때의 나는 이 얼굴을 보고 놀라서 얼뜨기처럼 굴었다는 소리군. 요령도 없이 처박기나 하면서.... 뭐, 그런데 그럴 만해.”

“자, 잠깐만...!”

루카스의 손이 남방 속 얇은 티 안을 불쑥 파고들었다. 커다란 그의 손이 몇 번 꿈틀거리며 몸을 훑어 내렸다. 그 바람에 걸치고 있던 옷가지들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목까지 걷어 올려졌다. 조금 전과 같은 초능력을 쓰지 않았음에도 루카스는 충분히 솜씨가 좋았다.

“루, 루카스?”

동공을 가늘게 좁힌 채 드러난 몸을 응시하던 루카스가 별안간 양쪽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곤 무언가를 가늠하듯 몇 번 주물렀다.

“아.... 앗.....”

이후 망설임 없이 작은 유두를 베어 물었다. 예고도 없는 갑작스러운 어루만짐에 숨이 뚝 멎었다. 루카스는 잔뜩 긴장해 도드라진 늑골과 크게 부푼 흉곽을 쓸더니, 톡 솟은 반 대편 유두를 세게 꼬집었다.

“아…!”

얼얼한 아픔은 한순간이었다. 그가 입안에서 굴리고 있는 쪽의 젖꼭지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채 비벼지고 있는 유두도, 이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뾰족하게 일어서기 시작했다.

차민도 그린우드에 재학 중일 뿐, 나이로는 이미 성인이었다. 당연히 자위를 해본 적 있었고, 나름의 성적 판타지 같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가슴을, 유두를 지분거릴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아까 삽입한 ‘버튼’이 다 알아서 해줄 거라고 했지?”

“으, 으응…, 아-!”

“윤활제 같은 것 없이도 충분히 젖을 테니까 걱정할 것 없어.”

생소한 자극이, 그것도 입으로 빨아주는 느낌이 계속되니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 루카스가 손가락으로 내부를 실컷 휘저었던 탓에 성감이 조금씩 오르던 차였다. 적절한 타이밍에 흥이 다 깨지는 바람에 몸이 다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애매한 구석에서 멈추었던 탓에 아까보다 훨씬 더 빨리 불이 붙는 기분이었다. 방금 전 끝까지 고조되지 못했던 쾌감에 대한 보상이라도 요구하는 것처럼.

“흐, 루, 루카스.….”

전기가 흐르는 칼이 몸을 자근자근 난도질하는 기분이었다. 따갑고, 어쩐지 가려운 것도 같고, 그러다가 뒷구멍이 다 뒤집힐 것 같은 낮선 쾌락이 몸을 훑고 갔다.

“괜찮아. 내가 명령하지 않는 한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 앗...! 아! 루, 하윽...!”

순식간에 벌어진 바지의 파스너가 제 엉덩이 부근을 짓누르는가 싶더니, 이내 두터운 귀두가 구멍 안을 불쑥 파고 들었다. 아직 입구에 거의 걸쳐지다시피 한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부피감이었다.

“야. 너 기억 없다고...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거 아니야?”

당장 저는 숨이 턱턱 막혀 죽을 것 같은데, 루카스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어이없어하며 허리를 크게 흔들었다. 루카스가 묘사하는 제 뒤가 낯설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버거운 건 분명한 듯하지만 쫀득한 구멍은 잘도 어린애 팔뚝만 한 좆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버튼’은 오르가즘을 컨트롤할 뿐이지 이렇게 쉽게 자지를 받아먹도록 도와주지는 못해.”

“그, 그게 무슨..., 아, 무슨 말....”

“이 구멍이 야해빠졌다는 소리야, 네 얼굴만큼.”

자선행사의 밤에도 실컷 즐겨놓고서는 괜히 아쉬우니까 아프기만 했다는 헛소리한 거 아니냐고,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 일부러 좆같은 안경을 준비한 거 아니냐며 루카스가 뜻 모를 추궁을 계속했다.

“응, 그런 적, 아, 없, 없어.….”

“아니면..., 후, 하다하다 마지막엔 박아대기만 했나 보네. 네 구멍이 지금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면... 너 절대 그런 소리 못 해.”

차민은 억울했다. 그날, 처음부터 루카스는 약 빤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그렇지만 그의 말마따나 구멍이 멋대로 뻐끔거리고 있었다. 무어라 변명할 수도 없게. 루카스의 허릿짓을 따라 부드럽게 녹은 내벽은 두툼한 성기 끝을 물고 당겼다가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흐, 흐아... 앗...!”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전류 같은 쾌감에 비명 같은 신음이 터졌다. 차민은 이런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한 게 뭐가 있다고. 고작 가슴 좀 빨리고, 구멍을 쑤셔준 것만으로 이렇게 쉽게 몸이 달아오르다니.

“흐, 아, 아읏....”

벅찬 감각이 꼬리뼈를 짓누르고 있었다. 차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정 직전이었다. 더 큰 파도가 온몸을 일렁이게 할 것임을 예견한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아....”

구기듯 꾹 감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여전히 불이 붙은 쾌락이 온 신경을 긁고 다녔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싸기 직전의 애매한 감각에서 시간이 영영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저기, 이, 이상…해.… 루카스, 몸이....”

끔찍했다. 절정이 바로 코앞이었다. 딱 한 방울만 더해지면 흘러넘칠 것 같은 찻잔 속의 물 같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사정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감각이 고조되어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핫, 아, 아앗.....!”

“...내가 왜 무턱대고 박아 넣었는지 알 것도 같아. 정확히는, 네가 왜 그렇게 느꼈는지를.”

루카스가 부푼 유실을 잘근잘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겨우 절반은 들어온 것 같은 거대한 좆이 빠르게 출납을 반복했다. 자신의 살 위에서 뭉개지는 루카스의 목소리가, 그가 한 단어, 한 단어 발음할 때마다 징징 울려대는 몸 안쪽이....

아, 차민은 모든 것이 다 버거웠다.

“확실히... 그때의 내가 반드시 널 ‘반려’로 삼고 싶다고 강하게 느꼈던 모양이야.”

차민의 체취를 들이켜며, 루카스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래봤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정확한 설명은 어렵지만... 상대의 몸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고, 계속해서 사정해야 하니까.”

차민이 미친 사람처럼 도리질을 쳤다. 턱을 따라 흐른 땀방울이 사방으로 튈 정도로 격렬한 몸부림이었다.

“싸고 싶은데 잘 안 돼서 그러는 거지?”

“흐으, 루카... 스...”

“아까 설명해줬지? 내가 싸도 좋다고 허락하면, 갈 수 있어.”

“가, 가고 싶어.... 제발....”

망설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면 내 말 잘 들어야겠지?”

차민의 검은 눈동자가 불안함과 기대감으로 크게 일렁였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축축해진 눈가를 핥으며, 루카스가 개구쟁이처럼 씩 웃었다. 허리 아래로 음란하게 움직인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빨게 해줘.”

“어, 어디를....”

“네 구멍.”

닳아 없어질 것처럼 녹여서,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내 향이 묻어나는 물이 질질 흐르는 걸 보고 싶어.

“그, 그건 불가능해.”

깊게 생각하기도 이전에 반사적으로 거절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조금 늦게 루카스의 목소리가 차민의 귓가에, 뇌리에 훅 꽂혔다. 세상에. 곱씹을수록 졸도할 것 같은 요구였다. 어디를 어떻게 하겠다고? 차민은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몇 번이나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거길 어떻게... 그렇게... 말도 안 돼.”

“어째서?”

“당연히... 그런 걸, 그래도 되는... 그런 곳이 아니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루카스가 해온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딱히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성격이 아닌 듯했다. 하긴 비단 섹스가 아니더라도... 아마 살아온 모든 날들이 그렇지 않았을까. 굳이 그의 뜻을 거스를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그런데, 그런 루카스가 저에게 허락을 구한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이미 충분히 멋대로 제 몸을 주무르고 있으면서? 분명 뭔가 더 있을 게 뻔했다. 아무리 극점을 박아대도 사정할 수 없게 만든 이상한 물건처럼.

“아하. 그럼 여기에 내 좆이 들어가는 건 괜찮고?”

루카스가 짓궂게 허리를 쳐올렸다. 내벽을 꿰뚫고 있는 거대한 성기의 존재감을 일깨울 요량인 것처럼.

“네 구멍은 원래 남자 좆이나 물라고 만들어진 곳이야? 아니잖아.”

“아, 아앗…, 흐앗!”

크게 젖혀진 허리가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온 신경이 짓눌려 터질 것만 같았다. 급히 몰아쉬는 숨이 닿았다. 차민은 어이없게도 그제야 제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과 며칠 전 이미 내도록 시달렸던 터라 쉽게 루카스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도. 물론 몸 어딘가에서 팔딱거리고 있는 ‘버튼’의 탓도 있겠지만....

“음.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어. 인간의 구멍이 내 걸 이렇게 잘 받아먹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루카스가 모로 고개를 기울였다. 닿으면 데일 듯한 뜨거 운 시선이 발갛게 익은 차민의 허벅지와 비부를 훑고 갔다.

“루, 카스..., 그렇게 보면.….”

차민은 손을 들어 접합부를 가려보려 버둥거렸다. 먹먹한 귀로 열에 들뜬 제 숨소리가 크게 울렸다. 심장이 배 안쪽까지 떨어진 것처럼 혈맥이 세차게 뛰었다. 반쯤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절정 직전이었다.

질척하게 젖은 내벽이 적당한 온도와 찰기로 루카스의 성기를 부드럽게 조이고 물었다. 차민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들었다. 그의 말대로 남자의 자지나 받아먹으려고 존재하는 구멍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빠른데, 또 한편으론 생각보다 잘 버티는 것 같고....”

차민의 반응을 살피던 루카스가 조금 더 상체를 밀착해 왔다. 서로의 골반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잘 여문 과실처럼 부푼 젖꼭지가 단단한 그의 가슴에 으깨지듯 문질러졌다. 더운 혀끝이 돌기 끝을 후벼 파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자극이었다.

“흐읏.....”

여기저기서 추적이는 소리가 났다. 아랫도리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애액 같은 것이 흐를 수가 없는 구멍인데, 선천적으로 그렇게 타고난 몸인데... 차민의 상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잔뜩 넘친 끈적끈적한 물이 엉덩이골을 타고 시트까지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기다란 성기가 이전과는 다른 각도로 안쪽의 여린 살을 모조리 뒤집어놓았다. 조금 전까지는 관찰을 하듯 이곳저곳을 쿡쿡 쑤시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구멍 안쪽에 제대로 길이라도 낼 심산인 듯이 내벽 전체를 훑고 가는 느낌이었다.

“아-!”

견디다 못한 차민이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질렀다. 숨 쉴 틈도 없이 쏟아지는 자극이 버거웠다. 만약 지금의 감각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윗부분에서 내도록 일직선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축에 닿을 것 같지만 절대 일정 구간 이상을 뚫고 올라갈 수 없는 잔인한 임계점에 계속 쾌감이 머물러 있었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간신히 이성을 조이고 있던 나사가 전부 튕겨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사정하고 싶다. 싸고 싶었다. 끝의 끝까지 달하고 싶다. 온통 그 문장만이 제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차민은 어느새 자신의 다리를 한계까지 잡아 벌리고 있었다. 루카스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제 통통한 허벅지를 쥐어뜯을 듯 움켜쥐고서 어설프게 허리를 흔들어댔다.

“핫, 루카, 스, 나...!”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말이야.”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종아리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찰랑찰랑하게 고여 있던 절정이 또다시 슬금슬금 밀려오고 있었다. 벌어진 입으로 타액이 줄줄 흐르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 차민은 자신의 몸을 한 군데도 통제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가고 싶지 않아?”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차민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꺼떡대는 아래 끝이 아리다 못해 욱신거렸다.

“그럼 빨아도 되는 거지?”

팔뚝만 한 자지가 크게 출납을 반복했다. 차민의 동공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몸 안에 단단히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무언가가 깨지고, 부서지고 있었다. 방금 전, 루카스의 단 한 번의 몸짓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마지막 경계였던 모양이다.

“흐, 흐아, 빠, 빨아줘, 아무렇, 게나 괜...찮으, 아앙, 니까...!”

방언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어서 잇새로 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식으로 제 전립선이 어디에 어떻게 붙어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한계까지 내몰리고도 보상을 받지 못한 구멍이 어떻게 물을 흘리고 뻐끔거리는지는, 앞으로도 영영 모르고 싶었다.

“똑똑하네.”

루카스가 칭찬하듯 차민의 코끝에 입을 맞춰주었다.

“쥐약이라도 먹은 듯이 내내 덜덜 떠는 건 좀 별로였는데... 한 번 한 말은 잊지 않는 것 같아서 좋네.”

그러곤 골반이 붙들리는가 싶더니 몸이 반 바퀴 돌려졌다. 여전히 루카스의 것을 머금은 채였다.

“아, 아아앗...”

게다가 그는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단번에 자신의 것을 뒤로 물렸다 넣기까지 했다. 잔뜩 부은 구멍이 마찰열로 비명을 질러댔다. 아팠다. 그렇지만 문제는 지금 고통보다 더한 쾌감으로 온몸이 지글지글 끓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엔 몸이 완전히 뒤집혔다. 장밋빛으로 익은 뺨과 젖꼭지가 시트 위에 뭉개지고, 다리가 벌어진 채로 엉덩이가 높이 들렸다. 크게 벌어진 구멍에서 보글보글 거품이 터지는소리가 났다. 그리고,

“.....!”

뜨거운 혀가 회음을 길게 핥았다. 차민은 무어라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숨만 헐떡였다. 루카스의 그림 같은 콧대가, 코끝이 곧장 벌어진 둔부 사이로 자리하는 것이 느껴졌다.

차민은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 세게 시트를 움켜쥐었다. 허연 손등 위로 핏줄이 투둑 불거졌다. 루카스는 ‘버튼’이 모든 걸 알아서 해준다고 했다. 도저히 불가능한 반응을 잘도 보이고 있고 있는 제 몸을 보아하니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그렇지만 이건 더럽고 깨끗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리적인 거부감과 날것의 쾌락이 뒤엉켜 차민을 혼란스럽게 했다. 굵은 성기에 맞춰 잔뜩 벌어졌던 구멍이 꿈틀대면서 수축을 반복하다, 이내 루카스의 혀를 성기처럼 받아들이며 조이기 시작했다.

“후....”

둔부의 갈라진 틈으로 울리는 루카스의 목소리와 숨결 덕에 발가락이 빳빳하게 굽어 들어갔다. 좁은 문으로 꿀럭 삐져나오는 끈적끈적한 애액을 샅샅이 핥으며, 루카스는 차민의 한쪽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탱글탱글한 살이 손아귀 안에 터질 듯 감겨들었다.

차민은 언제부터인지 잔뜩 일어선 젖꼭지를 시트 위에 문지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 비참했다. 더욱 비참한 것은 추태를 벌이고 있다는 걸 깨닫고서도 멈출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차민은 고개를 돌려 얼굴 전체를 시트 위에 처박았다. 숨이 탁 막혔다.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분명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두 번째 섹스인데... 행복하기는커녕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죽고 싶었다.

“우읏.....”

사람 속도 모르는 더운 혀가 회음을 간질이다, 다시 구멍 안을 둥글게 헤집었다. 그와 동시에 차민의 몸이 아주 얕게 흔들렸다. 진동의 근원은 아마 루카스인 듯했다. 조금씩 거칠어진 숨결, 타탓 튀는 소리.… 아마도 루카스는 제 구멍을 빨며 자위하는 모양이었다.

박 같은 하얀 엉덩이가 멋대로 크게 실룩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 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또 죽을 만큼 좋았다. 루카스 역시 제 몸뚱이를 보고 흥분하고 있었다. 적어도 자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저에게 만족을 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몸이 크게 출렁였다. 잊고 있던 고양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흐으, 응.... 으응.....!”

눈치 없는 가느다란 신음이 울음처럼 새어 나왔다. 그제야 팅팅 부은 점막의 주름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던 루카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거봐, 좋으면서.”

“응, 좋아, 좋...아, 루카... 스, 으…, 아.....!”

“한 가지 부탁만 더 들어주면 쌀 수 있게 해줄게.”

“하, 할게! 뭐든, 뭐…든, 할, 아, 아앗.....!”

꼬리뼈 부근을 갉작이며 깨물던 루카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조금 더... 너를 탐하게 해줘.”

“흐, 그, 그게... 무슨....”

“인간, 너와 엮이는 걸 이번으로 끝내고 싶지 않다는 말이야.”

아. 차민은 엉망이 된 제 얼굴을 감출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지니 구멍이니, 지금까지 온갖 천박한 말을 잘도 늘어놓았으면서 이런 순간에 너를 탐하게 해달라는 문장을 고른 루카스에게 기가 막혔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그런 어이없는 루카스가 좋아서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미 가시만 휘둘러도 해를 입을 것 같은 고아하고 투명한 얼굴을 하고서, 행동거지는 전혀 그렇지 않은 루카스를 좋아했다. 또래들과 날뛰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고지식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그 간극이 좋아 미칠 것 같았다.

사실, 차민은 사정을 빌미로 루카스가 음탕한 구걸을 요구하리라 짐작했다. 지금 상태로는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담백한 목소리로 너를 좀 더 원한다는 말을 하자, 명치 안쪽이 세게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속이 따끔따끔했다.

차라리 발정난 짐승처럼 이지를 놓게 내버려두지. 기대와 절망으로 속을 뭉개는 루카스가 미웠다. 밉고, 또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줄 거지?”

차민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잔뜩 부어 앓는 소리조차 내기 버거웠다. 그러자 루카스가 뽀얀 엉덩이를 크게 한입 베어 물고는, 신호라도 보내듯 찰싹 내려쳤다. 아프지는 않았고 그저 흥을 돋울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아, 아아-! 아, 안…, 이건 아, 아앙!”

그때를 기점으로 발끝에서부터 무시무시한 쾌락이 거대한 해일처럼 차올랐다. 내벽 안쪽에 촘촘하게 퍼져 있던 그물망 같은 것이 탁 찢긴 기분이었다. 뻣뻣하게 일어선 성기 끝에서 물총처럼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몇 번이나 제지를 당했던 오르가즘은 배의 배로 부풀어 차민의 몸 안에 난장을 치기 시작했다.

“안..., 돼, 이, 이렇..., 아앗! 흣, 조, 좋아..., 아아!”

개처럼 한껏 치켜든 엉덩이가 잘게 흔들렸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잔뜩 짜내지는 것처럼 멀건 정액이 핏핏 쏟아져 나왔다. 코앞에서 제지를 당했던 그 횟수만큼 성난 절정이 파도처럼 넘실넘실 밀려왔다.

이전까지는 그래프가 쭉 일직선을 그리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끝을 모르고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감각은 이미 축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앞과 뒤로 말간 물이 쉼 없이 쏟아져 내려 시트 뒤는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차민은 내장이 다 녹아버릴 것 같은 이상한 쾌감에 결국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질식할 듯 짙은 오렌지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골반과 엉덩이 어딘가를 움켜쥔 뜨거운 손이 얕게 떨린다 싶더니, 척추를 타고 무언가가 목까지 주르륵 흘러내렸다. 루카스 또한 제 몸 어딘가에... 아마도 엉덩이나 허리쯤에 대충 사정을 한 것 같았다.

“흐으....”

여전히 몸 안이 들끓었지만, 놀랍게도 루카스의 체향을 들이켜자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처박은 채 눈물만 흘리던 차민은, 벌벌 떨리는 사지를 수습하려 조금씩 몸을 움직여보았다. 땀을 잔뜩 흘린 탓에 루카스가 걷어 올렸던 상의는 그 모양 그대로 찰싹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 진짜....”

루카스가 숨을 몰아쉬며 차민의 허리를 잡아끌어서,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었던 탓에 가벼운 솜인형처럼 그의 손을 따라 몸이 휙휙 휘둘렸다.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손이 피부 위를 훑고 갈 때마다 청량함이 퍼져 나갔다. 여러 가지 이유로 열에 들떴던 몸이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루카스와 뒹굴었던 그날도 분명 이렇게 제 몸을 어루만져주곤 했다. 취했는지 자꾸만 헛손질을 하기는 했지만.... 아, 어쩌면 그 덕에 감기 몸살 정도로 끝났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풀어주지도 않고 거의 구멍을 찢어 가며 박아 넣었는데도 참혹한 유혈 상태까진 가지 않았으니.

“야, 인간.”

차민은 멍하니 제 몸 여기저기를 훑고 가는 루카스의 손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저번보다 노련하고 정확한 몸짓이었다. 덕분에 심하게 고생은 하지 않을 테니 다행일까. 아니지, 인과가 틀렸다. 방금 전까지 죽을 듯이 내몰렸던 게 누구 때문인데.

“야! 너드!”

무심한 손길로 마른 몸 이곳저곳을 살펴주던 루카스가, 돌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차민을 불렀다.

“...어? 미, 미안. 듣고 있어.”

경계 없이 엉겨드는 지난밤과 조금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던 차민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었다. 차민은 루카스가 처음 언급했던 ‘반려’라는 단어를 간신히 떠올렸다. 아마도 섹스를 통해 흔적이 남는 것 같았는데. 그리고 다른 ‘비스트’들도 눈치챌 수 있다고도 했고. 그런데 이렇게 또 해버렸으니….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루카스가 차민의 코앞에서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제야 바둑돌처럼 까맣던 눈동자에 간신히 초점이 돌아왔다.

“...아아.”

차민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방금 루카스가 뭐라고 했더라.... 의외의 말에 놀란 탓에 아까 전과는 다른 의미로 멍해졌다. 주제넘게 갖게 된 ‘반려’의 흔적에 대해 일장 연설이라도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걸 왜 묻는 거지?

“좋아하는 나랑 섹스했잖아.”

루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차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손이 가느다란 차민의 목을 한 번에 틀어쥐더니 이리저리 휙휙 돌려보았다.

“그런데 왜 우는 거야?”

인간의 심리 따위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애초에 헤아리려 노력한 적 없는 최상종의 야수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차민은 자꾸만 굳어버리는 혀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찌푸린 루카스의 얼굴 위로 짜증이 한 움큼 더 얹어졌다. 숨을 쉬는 것마저 그의 눈치를 보는 저를 답답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이 터질 듯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루카스는 자신의 이어질 말을 끝까지 기다려주고 있었다.

아마도 루카스는 자신과의 섹스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았다. 안경이 벗겨지자 잠시 당황하던 그의 얼굴과 덥수룩한 앞머리를 넘기던 손길이 생생했다. 저에게 반하지는 않았더라도 방금 전의 섹스로 이 관계를 끝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도 그가 정중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마무리 짓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 조금 더 그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한 방이 필요했다. 감히 루카스와 잘해보고 싶다는 욕심은 품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답답한 너드 같은 인상만 남긴 채 끝내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루카스가 기다려주고 있는데도, 판을 다 깔아줬는데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입이라도 다물 수 있으면 다행이게. 머저리 같은 울음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히끅거릴 때마다 마른 어깨가 꼴사납게 들썩였다.

차민은 강박증이 있는 사람처럼 연신 명치 아래를 문질렀다. 그런다고 속에서 엉켜버린 거대한 덩어리들이 풀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루카스에게 하고 싶은 말이야 산더미처럼 많았다. 우선 평소에는 절대 이렇게까지 한심하게 굴지 않았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그린우드의 담당 카운슬러도 저를 야무진 성격이라고 평가했다. 스티븐 패거리 같은 놈들이야 상대하면 골치 아파질 걸 아니까 무시했을 뿐, 필요할 땐 듣는 사람이 질릴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 다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왜 루카스 앞에만 서면 도통 입이 떨어지질 않는 걸까. 입을 뻐끔거릴 때마다 뱀처럼 쌕쌕이는 텅 빈 울음이 새어 나왔다.

“실은.....”

루카스, 너만 보면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해버려. 아마 너를 너무 좋아해서... 그래서 잔뜩 힘이 들어가서 오히려 평소보다 더 못나고 서툴게 굴게 되는 것 같아. 그래, 내가 이렇게 천치처럼 굴수록 네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이해가 안 가지? 그래, 나도 이런 내가 답답해. 그래서 오히려 너를 피하고 싶어져. 더는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지금 나는 도망가고 싶어, 네가 너무 좋아서.

“그게….”

차민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한마디로는 너무 간결했고, 그 이상 자세히 설명하자니 살짝 맛이 간 사람처럼 중언부언하게 된다.

이상한 방향으로 욕심이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이왕에 전부 속내를 드러낸다면, 행간마다 숨겨진 질척질척한 뒤틀린 마음까지 루카스가 알아주었으면 했다. 대체 이게 무슨 심보인지. 하지만 한국어로도 이 복잡한 감정을 설명할 수가 없는데.… 그보다 서툰 영어로 그를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말은 않고 내도록 서두만 중얼거리는 것도 답답하게 느껴질 듯해, 차민은 끝내 고개를 숙여 버렸다. 공교롭게도 루카스의 고운 손이 시야에 정확히 들어왔다. 구도를 잘 잡은 카메라의 프레임처럼.

“.....까.”

“뭐라고?”

차민은 지루함을 참지 못한 루카스가 엄지로 검지 끝을 긁어내리는 모양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홀린 듯 입을 열었다.

“키스해주면…, 안 될까.”

“....키스?”

차민을 빤히 바라보던 루카스가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일순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파사삭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키스라…. 그래, 그렇게 물러나겠다는 거지.”

루카스는 이제 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거칠고 문란하긴 했어도 말랑말랑한 구석이 있었던 조금 전과는 인상이 확 달라졌다.

“그간 너 같은 인간이 없지는 않았어. 물론 내가 아주 많은 인간을 겪어본 건 아니긴 하지만.... 원하는 바가 뭔지 선명하게 보이는데 아닌 척, 어떻게 하면 순수하게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 꺼내는 말이 늘 그거였지. 단 한 번의 키스로 만족한다고.”

루카스가 눈을 감은 채로 뒷목을 주물렀다. 차민은 이 와중에도 미세하게 젖혀진 그의 얼굴이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인상을 남기고 싶어서 그러는 경우도 있었고, 정말로 감당할 재간이 없으니 먼저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고....”

커다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루카스에게선 약간의 권태로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전자든 후자든 짜증나긴 마찬가지야. 그렇게 아닌 척 굴어놓고선 백이면 백, 자기 청승 좀 알아봐달라고 계속 내 주위를 맴돌았거든. 차라리 인간 같지 않은 이 얼굴이, 돈이 좋아서 엉겨 붙는 것들이 나아. 적어도 걔들은 솔직하기라도 하니까.”

물론 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하고 싶겠지, 그런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고 하고 싶을 거야. 루카스가 중얼거리며 차민의 옆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아주 잠시 아깝다는 듯 혀를 차는 듯도 했으나, 말 그대로 찰나일 뿐이었다.

“나도 궁금해. 인간에게 대체 키스가 어떤 의미길래 침대 위에서 자기 이미지를 포장하고 싶어지면 그것부터 들먹이는 거야?”

‘비스트’ 치고는 어리다고 하지만 저보다 훨씬 오래 살아 온 탓일까. 아니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손쉽게 누군가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무수한 경험들 탓일까. 루카스는 이미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린 듯했다.

“다시 말하지만 ‘반려’의 흔적은 아이를 갖기 전까지 아무 것도 아니야. 그리고 인간인 넌 내 아이를 가질 수 없고.”

각인에 어떠한 의미부여도 하지 말라는 경고에 가까운 말이었다. 동시에 루카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찢어졌던 것과 비슷한 색상의 바지가 시트 위로 털썩 떨어졌다. 상의도, 속옷도... 그리고 문제의 안경도. 차민은 허공에서 차례차례 떨어지는 옷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여러모로 신기하다고, 아니 신선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차민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에 긁힌 상처가 따끔거렸다. 언제 다쳤더라.... 아아, 아마도 온 힘을 다해 움켜쥐었던 <햄릿> 표지 때문에 손바닥 여기저기에 흔적이 남아버린 모양이었다.

“예전과는 다른 시작이라 그래도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중얼거리는 루카스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이어질 말은 곧장 닿은 입술에 묻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슴을 따끔거리게 만드는 그의 힐난은, 소리 대신 숨결이 되어 차민의 목구멍을 쓰리게 했다.

생기를 잃고 쩍쩍 갈라진 입술 위로 맺힌 핏방울까지 모조리 거두어갈 듯한 열정적인 키스였다. 어쩐지 과일 맛이 난다고 생각했다. 그 생소한 단맛이 이상하게 좋아서, 차민은 울던 것도 잊고 자꾸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뒤통수를 어루만지던 루카스의 손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차민은 천천히 눈을 떴다. 거대한 침대 위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채였다. 입술에 남은 온기가, 침실을 맴도는 달콤한 향기가 애초부터 저에게 허락된 적 없었다는 듯 금세 사라져버렸다.

애초부터 제 것인 적이 없었던 마법이 완전히 끝나버렸다.

*

1. ‘비스트’의 ‘반려’는 인간들의 부부와는 조금 다른 개념으로, 긴 시간을 함께 할 정신적 지주이자 함께 낳은 후손들의 공동 보호자에 가깝다.

1-2. 그러므로 연애 감정보다는 나와 함께 자신들만의 작은 군락을 형성할 능력이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반려’의 선택 기준이다. 사랑보다는 계약을 기반으로 형성된 관계인 셈이다.

2. 상대를 ‘반려’로 염두에 두었다는 증거로 서로의 몸에 무형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데, 이를 각인이라고 한다.

2-1. 각인이 되고 나면 서로에게서 고유의 독특한 체향을 느끼게 되며, 다른 개체들은 이 향을 인식하지 못한다.

2-2. 다만 다른 ‘비스트’들도 누군가의 ‘반려’를 마주하게 되면 그 개체는 본능적으로 나와는 맺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한 ‘반려’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의 체향이 아닌 다른 종류의 향이 매우 강렬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아마도 경고의 의미가 담긴 것으로 추측된다.

2-3. 각인의 방법은 개체마다 다르다. (루카스의 경우는 강하게 상대를 원할 때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2-4. 각인을 맺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가 죽거나, ‘반려’가 죽기 전까지 두 개체의 각인은 영원히 깨지지 않는다.

3. 인간이 ‘비스트’의 반려가 될 확률은 몹시 희박하다. ‘비스트’는 인간에게 흔적을 남길 수 있으나, 인간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인간과의 각인은 고유의 향이 매우 옅다는 것이 정설이라, ‘비스트’들의 불안이 크다고 한다.)

3-1. 반려로 각인이 맺어진다고 한들 ‘비스트’와 인간 사이에서 아이를 갖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수명이 허락하는 날까지 함께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차민은 에세이 대신 노트에 적어내린 ‘반려’에 대한 정보를 훑어보았다. 감기를 핑계로 집에서 며칠 쉬는 동안 아버지의 서재에서 몰래 꺼내 온 책들을 바탕으로 정리해본 것이었다.

유서 깊은 고성 같은 그린우드의 기숙사를 빠져나와 패잔병처럼 집으로 돌아왔을 땐... 그저 루카스가 미웠다. 쉬이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순정은 전부 어디로 갔는지 그저 밉기만 했다.

루카스는 뻔하게 구는 자신이 질린다는 듯 말했지만 남의 진심을 멋대로 재단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새끼 왜 저렇게 등신같이 구냐고 욕은 할지언정, 네가 품은 마음이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고 비웃어선 안 되었다.

그러다가도... 또 어쩔 수 없이 우울해졌다. 제가 루카스였더라도 이런 침울한 너드보다 주변에 널리고 널린 괜찮은 이들에게 마음이 갈 것 같아서.

대체 사람들은 누구를 어떻게 좋아하기에 서툰 첫사랑도 그렇게 반짝일 수 있을까. 나는 루카스 앞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겨워 로봇처럼 삐걱거리다가 쓰러지고 말았는데. 좋아하는 마음으로도 벅찬 와중에 다들 어떻게 좋아하는 상대 앞에서 그리 예쁘게 웃을 수 있지?

속이 쓰렸다. 달군 쇠가 배 속을 마구잡이로 할퀴고 가는 듯했다. 놓쳐버린 기회가 아까워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그런 건 애초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반려’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 나가면서 더더욱 언감생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저라도 질색할 듯한 모습만 잔뜩 보이고 끝이 난 것이 속상할 뿐이었다.

차민은 쥐고 있던 에세이 노트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루카스의 앞에서 자꾸 움츠러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다 아는데, 알면서도 그게 안 되니까 제 자신이 자꾸만 미워졌다.

며칠째 최악의 기억들만 자꾸 머릿속에서 재생이 되고 있었다.

나도 이런 내가 싫은데, 누가 나를, 루카스가 어떻게 나를 좋아해주겠어....

“몰라, 나는 캡이어 필요하다고 집에 말해놨어.”

“야, 말은 바로 하자. 지금 여기서 배우는 것들은 우리가 인간들에 비해 훨씬 유리하다고.”

“됐고, 루카스. 오늘 따로 하는 일 없지?”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차민의 몸이 파드득 튀었다. 내내 지겹도록 생각했던 이름의 주인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듯했다. 차민은 식은땀을 흘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상하다. 아직 루카스가 이쪽을 지나칠 시간이 아닌데.... 설마 무단으로 수업을 결석한 건가?

차민은 답답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루카스가 이쪽 건물로 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오늘 오후에 있을 수학 수업이 끝나고 농구가 하고 싶어질 때나 여기를 지나쳤다. 이 시간에는 루카스뿐 아니라 다른 누구도 오가지 않을 때라 일부러 여기에서 청승을 떨고 있었던 건데. 왜 어째서, 하필이면 이곳인지.

“글쎄.”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틀림없는 루카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체온이 가파르게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도망칠까. 저들이 스티븐 패거리도 아니고 굳이 달려가는 저를 붙들 것 같지도 않으니... 그냥 도망쳐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서 있는 곳에서 두 칸 정도 떨어진 라커룸 위로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같이 문학 수업을 듣는 ‘비스트’ 중 하나의 이름으로, 설정이 귀찮아 이전에 모든 비밀번호를 똑같이 설정해둔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차민은 다급히 라커룸을 열고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안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아, 웬일로 행운이 자신의 손을 들어주었다. 세게 열어젖힌 탓에 쇠문이 반동을 그리며 백팩을 통통 두드리고 있었다. 아마 뒤에서 보면 라커룸이 저를 잡아먹은 것 같은 우스운 모양새일 테다. 그래도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아마 루카스를 둘러싼 ‘비스트’며 인간들의 수가 적지 않은 데다... 무리들은 언제나 떠들썩했으니 죽은 듯 있는 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음, 혹시라도 아직 각인이 남았다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며칠 시간이 있었으니 다른 ‘비스트’에게 새로운 흔적을 남겼을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마지막에 루카스는 자신 따위에게 각인을 새긴 것을 불쾌해 하는 듯했으니까.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차민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루카스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마주쳐버리면 그가 질색을 했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는 셈이었다. 아닌 척 빼놓고선 곁을 얼쩡거렸다던 지난 이들과 똑같아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

늘 그랬듯 떠들썩하게 곁을 스쳐 가려던 무리들이... 돌연 차민의 바로 뒤에서 걸음을 뚝 멈추었다. 어찌나 급하게 멈춰 섰는지 끼익, 하는 마찰음이 들릴 정도였다. 불길한 침묵에 차민 또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 순간, 놀랍게도... 키스할 때 맡았던 달콤한 향이 훅 끼쳐왔다. 조금은 희미해진 오렌지 향도.

그 와중에도 이런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긴 한데... 의외로 루카스는 아직 새로운 각인 상대를 만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깜짝이야.….”

“와.... 너도 느꼈냐?”

“어, 순간 루카스 각인 상대인 줄 알았어.”

여러 목소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차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루카스와 어울리는 이들은 ‘비스트’들의 사회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들었다. 그런 그들조차 확신하지 않는 것을 보니... 음, 책에서 본 것처럼 인간과의 각인은 훨씬 흐릿한 게 맞는 모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린 ‘비스트’들은 시끄러운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고, 루카스의 목소리 또한 더는 들리지 않았다.

차민은 그러고도 한참을 남의 라커룸 속에 고개를 처박은 채로 눈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슬쩍 몸을 뒤로 물렸다

“으으....”

내도록 쭉 뻗고 있던 한쪽 팔이 저려서, 차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목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조용히 라커룸의 문을 닫았는데,

“으아악!”

당황스럽게도 바로 코앞에 루카스의 얼굴이 떡하니 나타나는 바람에, 크게 몸을 휘청거리고 말았다.

놀란 마음에 냅다 소리부터 질러대자, 루카스가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나마 옆의 라커룸을 붙드느라 뒤로 넘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루카스가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이번만큼은 그 잘생긴 얼굴도 호러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서웠다.

“꿩도 아니고…. 머리만 숨기고 있으면 너인 줄 모를 것 같았어?”

차민은 더듬더듬 라커룸을 짚었다. 이번에도 덜덜 떠는 모습이나 보이고 싶진 않았다. 이미 바보 같은 꼴을 보이긴 했지만.

“언제부터 아론과 친한 사이였지? 라커룸 비밀번호까지 공유할 정도로?”

루카스가 라커룸에 적힌 이름을 흘끔 바라보며 물었다.

“같은 수업을 듣고 있고... 우연히 한 자리로 비밀번호를 통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야.”

“그렇다고 걔가 무슨 숫자인지 알려주진 않았을 거 아냐.”

“아아, 여기에... 숫자 3에만 무슨 기름 자국 같은 게 남아 있어서.”

아론은 관광지에서나 파는 기름에 튀긴 싸구려 도넛을 몹시 사랑해, 그의 수행원이 매일 같이 시내로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비스트’인지라 지문은 없었어도 기름기가 선명히 남은 것을 보니 아마 직전에 라커룸을 사용한 것 같았고, 용케도 추측이 맞았을 뿐이었다.

차민은 다시 아론의 라커룸을 열어 보였다. 제대로 확인이라도 시켜줄 심산으로 쇠문을 약하게 밀어 도어락을 보여주려고 하자, 루카스가 됐다는 듯 옆으로 슬쩍 물러섰다.

“인간은....”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그가 말을 골랐다.

“변수가 너무 많아서 피곤해.”

찌푸린 미간이며 삐죽이는 입가에 신경질이 가득했다. 처음으로 보는 듯한... 그래, 만약 루카스가 인간이었더라면 제 또래처럼 느껴질 법한 얼굴이었다.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초조해 보이는 표정.

“거의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희미한 주제에... 이것도 꼴에 각인이라고 기분이 더럽단 말이지.”

어엇. 차민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선 자신의 양 어깨 쪽을 두리번거렸다.

“아…. 나한테서는 아무 향이 안 나는 거야? 나는... 그, 오렌지 향 같은 게 느껴졌는데.”

“하….”

루카스가 연신 눈가를 쓸어 내렸다. 답답한 속을 다스리기라도 하는 듯 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매 끝에 몇 번이나 힘이 들어갔다.

“...그건 아니야. 물론 어지간한 ‘비스트’들은 눈치도 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긴 하지만.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내 기분이 더러워진다고.”

흉포한 기세에 차민이 슬쩍 몸을 움츠리자, 루카스가 바로 그거라는 듯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너는 이렇게 내 모든 걸 쉽게 느낄 수 있는데, 나는 그게 불가능해. 네가 인간이라서.”

루카스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며 자신의 손바닥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다 이내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각인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인간 주제에 굉장히 초조하게 만들고 있어, 나를.”

차민 또한 루카스를 따라 자신의 텅 빈 손바닥을 슬쩍 들여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어쩌면 저에게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 같은 게 생겨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슬쩍 그가 하는 행동을 따라하던 차민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루카스, 인간과... 각인한 건 처음인 거야?”

“...글쎄. 적어도 같은 공간에서 있었던 적은 없는 걸로 아는데. 이렇게... 학교라거나. 집 근처라거나.”

그렇구나, 하며 차민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세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루카스가 오렌지 주스 따위로 인사불성이 된다는 걸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분명 그때 이런 경험 자체가 거의 없다고 했으니, 취했을 때 인간을 안았던 적은 없었을 것 같다. 만약 멀쩡한 정신으로 사고를 쳤다고 한들 그의 성격상 고작 인간에게 그토록 강렬하게 무언가를 원하진 않았을 거다. 저의 경우는 아마 그날 절대 널 잊지 않겠노라 주술처럼 읊던 말이 무의식 중에 영향을 끼친 것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 다시 종합해보자면..., 어쩌면 루카스의 지난 ‘반려’들 중 인간은 제가 처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저기... 아까 화를 냈잖아.”

차민은 답지 않게 먼저 루카스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지만 최초의 인간 ‘반려’일 수도 있다는 이유로, 아주 조금은 루카스에게 가까이 다가서도 괜찮을 것 같았다.

“화를 냈다고? 언제?”

“방금 전에 내가 아론의 라커룸 비밀번호를 안다고 화를 냈잖아.... 그것도 혹시 각인 때문인 거야?”

루카스가 뾰족하게 눈매를 접었다. 짙은 눈썹이 무섭게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차민은 곧장 고개를 푹 숙였다. 혹시 네 거에 다른 ‘비스트’의 기운이 얽히니 질투했냐고 묻고 싶었는데... 허용 범위 이상의 건방이었던 모양이다.

“저..., 루카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차민은 조금 전 열린 아론의 라커룸 문 뒤로 숨어, 슬쩍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기가 차다는 듯 루카스가 쇠문을 붙들었다.

“너 진짜 꿩이라도 돼?”

질세라 온 힘을 다해 라커룸의 모서리를 움켜쥐며 버티자, 의외로 반대편에 선 루카스가 쉽게 힘을 풀어주었다. 자신을 배려한 행동이라기보다 저 하는 짓이 황당해서 손이 미끄러진 것 같았다.

“미안, 그게... 내가 널 보면 너무... 떨려서. 말도 자꾸 더듬고... 하고 싶은 말도 안 나와서….”

짙은 녹색의 쇠문을 마주한 채로 차민이 쥐어짜듯 목소리를 높였다. 열의만 높은 초짜 배우의 우스꽝스러운 방백 같았지만, 지금의 차민으로선 최선의 방법이었다. 바보같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것보다 그냥 바보 같기만 한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얕은 진동이 느껴졌다. 루카스가 아예 손을 놓아 버린 것 같았다. 차민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역시. 말마따나 꿩처럼 얼굴만 숨기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음침하게 보일까.

그렇게 이대로 스쳐 지나갈 게 뻔한 무정한 발소리를 기다리는데,

“뭔데? 하고 싶은 말이.”

놀랍게도 문을 하나 두고 여전히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질끈 감았던 차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작게 난 세 줄의 홈 너머로 여전히 그의 상제가 보였다. 맙소사. 루카사는 자신의 어이없는 우김에도 아직까지는 자리를 지켜줄 마음인 듯했다.

“너를..., 너를 좋아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떠밀리듯 말부터 뱉고 보았다. 그 이후에야 심장이 밑바닥까지 철렁 내려앉았다. 맥박이 천둥처럼 뛰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내보는 발음이 낯설어서, 차민은 몇 번이나 입술을 감쳐물었다. 좋아해. 루카스, 널 좋아해.

“...오래 전부터 좋아했어.”

더없이 진지하게 고백하는 중이었지만... 사실 차민은 이 상황이,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널을 뛰는 제 감정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신기한 일이었다. 직전까지도 루카스를 생각했고 있었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한없이 울고만 싶었는데.… 그런데 난데없이 루카스를 붙들고는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오랜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흠.....”

차민은 목을 가다듬으며 홈 너머 루카스의 피케 셔츠를 응시했다. 그래,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번이 그에게 진지하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진짜 마지막 기회일 터였다. 적어도 말더듬이 너드 주제에 계산적이기까지 하다는 오해는 벗고 싶었다.

“그런데 용기가 나질 않았어. 내가 얼마나 겁쟁이냐면... 자선행사의 밤에선 네가 취한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만약 평범한 상태의 너와 마주쳤더라면 바로 숨었을 거야. 멀리 도망갔거나.….”

“틀려. 좋아하는데 왜 우는 거냐고 물었잖아, 나는.”

라커룸 너머의 목소리는 어쩐지 심술이라도 난 것 같았다. 차민은 머릿속의 조그만 전구가 반짝 켜지는 기분이었다. 아아. 그때도 각인이 된 상태였으니까... 어쩌면 루카스는 본능적으로 초조함을 느낀 게 아니었을까. 제 마음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심지어 흔적조차 희미한 ‘반려’의 반응이 불안해서.... 조금 전 라커룸의 비밀번호 공유 같은 걸로 크게 불쾌함을 표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차피 ‘반려’의 각인 같은 거야 금방 사라질 테고, 너와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게 전부야. 애초부터 너와..., 사, 사귄다거나 그런 생각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어. 그렇지만 너와 이렇게 얽히게 되고 나니까…, 곧 네가 예전처럼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순간이 올 거라는 게...두려워졌어....”

“...그게 두려워서 울었다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응.”

차민은 민망함에 열이 오른 귓불만 만지작거렸다. 루카스가 보기엔 정말 별 것 아닌 이유처럼 느껴졌겠지만, 한낱 인간에겐 그럴 수도 있는 이유였다. 처음으로 맛본 달콤함이 괴로워서 차라리 처음부터 영영 몰랐으면 싶은 이 이기적인 마음을, 아마 모든 걸 다 가진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긴.... 말 그대로 ‘비스트’라서 죽지도 않을 테니 정말 영원히 모르겠구나.

“음, 그리고 네가 키, 키스해달라는 말에 왜 기분이 나빴을까 계속 생각해봤는데... 그건 미안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나는 처음도 너였으니까, 첫 키스도 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맨 정신으로 입을 맞춰본 기억은 없었으니까.… 물론 그, 그거 할 때 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워낙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기억을 못 해서....”

중얼거리던 차민은 화들짝 놀라 제 입술을 세게 두드렸다. 마지막으로 루카스에게 솔직하게 속이야기를 털어놓으려던 거였지, 제 의식의 흐름까지 중계하려던 게 아니었다.

“아, 미안. 으음... 그래서 정리를..., 정리를 해보자면.”

“넌 날 오래전부터 좋아해왔고, 그런 나랑 어쩌다 섹스를 하게 되었는데, 그게 너무 감격스러웠지만, 곧 나에게 잊힐 게 뻔해서 두려웠다는 건가?”

그와 동시에 시야를 가리고 있던 라커룸의 문이 거두어졌다. 이음새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어깨가 튀자, 저를 내려다보던 루카스가 작게 혀를 차는 것도 같았다.

“정말이지 인간은....”

그의 중얼거림에 다시 열이 확 오르는 기분이었다. 차민은 소심하게 팔을 뻗어 활짝 열린 라커룸의 문을 닫아보려고 했으나, 루카스가 제 바로 앞으로 길쭉한 몸을 끼워 넣는 것이 먼저였다.

“어..., 루…카스.”

누군가 반대편에서 이쪽을 보면 라커룸 뒤에 숨어 키스라도 하고 있는 줄 착각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돌연 훅 끼치는 달짝지근한 향에 차민의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열이 오르다 못해 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바보냐? 결국 잃을 게 뻔해 두려웠다는 말은, 그만큼 갖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잖아.”

“그..... 글쎄.”

키가 큰 루카스는 한 손으로 라커룸 꼭대기를 껄렁하게 쥐고서, 목을 깊이 숙였다. 그의 품 안에 안기라도 한 것처럼 밀착이 된 상태라, 울대가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양까지 전부 보일 정도였다.

“널 좋아하냐고 물으면 솔직히 그건 아니고, 그렇다고 네 마음을 믿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지만.... 확실히 여태 본 인간들 중에서 가장 흥미롭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

루카스는 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 음, 하고 말을 고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답답하게 구니 치워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들어는 보자 싶을 정도로.”

기다란 손가락이 안경을 머리 위로 밀어 올렸다. 그 바람에 앞머리도 넘겨져서, 선글라스라도 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렇게까지 변하는 네 얼굴이 제일 어이없지만.”

드러난 맨 얼굴을 보고는 루카스가 아깝다는 듯 입을 다셨다. 차민은 어디서 용기가 샘솟았는지, 저를 뚫어져라 관찰하는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혹시 가능할 것도 같다고.

“루카스. 혹시 피, 피자 좋아해?”

“…뭐?”

뜬금없는 피자 타령에 잘생긴 눈썹이 또 꿈틀거렸다.

“브루클린에... 되게 맛있는 피자 가게가 있대.”

“…그런데?”

“우, 우리가 마침 브루클린에서 처음 만났잖아. 아니, 내 말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사적으로 마주친 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그래서?”

“어, 그래서... 만약 너와 데이트를 한다면... 첫 데이트는 꼭 브, 브루클린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거든….”

루카스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차민을 바라보았다.

“... 야. 너 나한테 감히 바라는 것도 없다고 말했던 게 방금 전이거든?”

“응? 아, 그, 그건 그렇지.”

아, 그건 그렇지? 루카스가 차민의 말을 되짚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어디에서 첫 데이트를 하고 싶은지 염두에 둔 곳이 있었다고?”

“그냥... 상상은 자유니까.”

저도 모르게 볼을 붉히자, 루카스가 질렸다는 듯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섰다.

“... ‘반려’의 속이 안 읽히는 게 다행이긴 이번이 처음이다. 진심.”

차민은 조심스레 루카스의 눈치를 살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지만 키스해달라고 부탁했을 때처럼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내, 내가 살게. 수학 튜터를 해서..., 용돈을 많이 모았거든.”

아…. 이 말은 하지 말걸 그랬나. 루카스의 낯빛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차민은 말끝을 흐렸다.

“아하. 그래? 마침 모레가 금요일이네. 잘됐어. 인간이 사줘야만 먹을 수 있는 유명한 피자라..., 아주 기대가 되는군.”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다시 저를 마주치게 되면 사정없이 족칠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그래도 저번처럼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차민은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구질구질하게 속 이야기를 꺼냈더니, 오히려 분위기는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얼결에 한 고백에 이어 데이트 신청까지 순조롭게 흘러 가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제 세 번 마주쳤다고 이전보다 루카스 앞에서 말도 덜 더듬는 것 같았다.

“내가 살다 살다 고작 인간 얼굴에나 홀려서....”

“응? 루카스, 방금 뭐라고....”

“됐어.”

루카스가 무어라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잘은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 튜터, 용돈, 피자... 그런 말을 되뇌는 것 같았다.

“아, 저기, 루, 루카스! 가게 위치가 어디냐면.….”

“왜, 그 핑계로 내 연락처나 물어보려고?”

차민은 화들짝 놀라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어, 어떻게 알았어?”

“인간들 하는 생각이 다 뻔하지.”

루카스가 삐딱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갑자기 굴러들어온 행운에 정신을 못 차리던 차민도 그제야 마음이 차분해졌다. 으음.... 잘은 모르겠지만 저에 대한, 정확히는 인간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이 완전히 가시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네가 내 ‘반려’인데 그런 게 뭐가 필요해. 수천 명이 몰려 있어도 네 기척은 느낄 수 있을 텐데.”

아….

차민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놀랍게도 꿈이 아니었고, 심장이 터지지도 않았다. 딱히 저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안다. 루카스는 ‘반려’라면 느낄 수 있는 당연한 현상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장 난 감정선이 또 널을 뛰기 시작했다. 잠시겠지만 제 몸에 그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는 게 행복했다. 허나 그럴수록 이번 생에서는 죽어도 그의 ‘반려’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크게 치고 갔다.

거봐, 루카스. 내 말이 맞잖아. 차라리 평생 모르는 편이 낫지, 이렇게 줬다가 빼앗으면 아주 오래 앓게 된다고….

“물론 다른 ‘비스트’들에겐 이렇게 희미한 흔적을 찾아내는 게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긴 아니지.”

“그, 그렇구나.….”

“상상 속에서 데이트 시간은..., 음. 저녁 6시 반 정도였을 테고.”

그래야 다 먹고서 브루클린 브릿지를 걸어보자는 수작질을 걸 수 있을 테니, 하며 루카스가 픽 웃었다.

“마, 맞아.….”

차민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바람에 간신히 걸쳐져 있던 안경이 도로 얼굴에 씌워졌다.

“그래, 기대하지.”

악당의 마지막 같은 대사를 남기며 걸음을 옮기려던 루카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돌연 이쪽을 휙 돌아보았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 말인데, 너 금요일에도 그 좆같은 안경 끼고 오면 진짜 가만 안 둘 줄 알아.”

*

“저..., 한 변호사님?”

조심스러운 대니얼의 목소리에 차민은 얼굴 위로 덮었던 신문을 거두었다. 그래봤자 빼꼼 눈만 내민 것이 전부였지만.

카페인을 들이부으며 버티고 있었지만 슬슬 한계에 다다른 참이었다. 일주일 내내 노아 얼굴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채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끼니는 1층 카페에서 사 온 샌드위치로 해결하고 있었고, 그나마도 지겨운 서류를 붙든 채였다.

“대니얼, 나 좀 살려줘요.”

“으음.... 정말 죄송하지만 방금 의뢰인에게서 급한 연락이 와서요.”

“…의뢰인?”

“우드가의 그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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