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엇, 아들인가요? 조카?”
짐 정리를 도와주던 대니얼이 환하게 웃으며 액자를 집어 들었다.
“아들이에요. 이름은 노아.”
“그렇군요. 귀여워라.”
대니얼이 구부린 검지로 액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는 전형적인 맨해튼 출신의 중산층 백인 남성이었다. 좋은 의미였다.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동물복지와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신실한 가톨릭 신자.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취미는 운동일 것이다. 혹은 운동경기 관람. 뭐... 둘 다 일수도 있고.
“한 변호사님은 무척 어려 보여서 아이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편한 옷차림이었더라면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었을 겁니다. 앗, 혹시 제가 방금 실례되는 말을 한 건.….”
차민은 별일 아니라는 듯 턱을 슬쩍 당기며 웃어 보였다. 그는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까지도 전형적이었다. 기분이 상한 건 아니었다. 이 정도를 가지고 차별이라고 속 상해했다간 이 도시에서 밥 벌어먹고 살긴 어려울 것이다.
“노아는 몇 살인가요? 두 살? 세 살?”
“음.....”
차민은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노아는 석 달 후 생일이 지나면 열 살이 된다. 이 문제만큼은 대니얼의 편견과는 관계없는 문제였다. 노아는 누가 봐도 제 또래로 보이지 않았으므로.
“저희 딸은 이제 막 두 살이 됐어요. 나중에 노아를 소개 해줄 기회가 있다면 좋겠네요.”
“좋아요. 지금은 정신이 없어서 좀 그렇고... 나중에 함께 식사라도 해요.”
대니얼은 반가운 제의라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서글서글하게 대해주는 그에게 미안하게도 식사 약속은 빈 말로 끝나게 될 것이다.
노아의 몸은 두세 살의 어딘가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말귀는 전부 알아듣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말을 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는 다 해보았지만 원인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답만 들었다.
차민은 크게 침을 삼켰다. 그래봤자 목구멍에 불덩이가 걸린 것 같은 답답함은 가시질 않았다. 아직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짐작 가는 이유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인정했다간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몸은 다 내놓고서 눈만 가리고 잘 숨었다고 믿는 어리석은 짐승처럼.
남자인 자신에게서 태어난 노아.
그리고 자신에게 노아를 가지게 한 사람, 아니 존재는 바로.....
“그나저나 베이비시터는 구했어요? 본사로 옮기기까지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을 텐데.”
“다행히도요.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맨해튼에서 살았거든요. 아는 사람들이 아직 있어서….”
“아, 맞아. 그렇죠. 그린우드 출신은 우리 로펌에서도 흔치 않은 편이에요.”
차민은 쑥스러운 듯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아니, 움찔 떨린 눈매를 들키고 싶지 않아 부디 그렇게 보이길 바랐다. 출신 학교 이야기를 듣자마자 켕기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은 반응을 보여봐야 약점이라는 소리밖에 더 될까.
“그런데 노아는…, 앗. 죄송합니다. 이런 이야기나 할 때가 아니지. 막 출근하신 분께 죄송하지만 오늘 중요한 의뢰인 이 방문할 예정이거든요. 알고 계시죠?”
무어라 말을 더 붙이려던 대니얼이 어깨를 움찔 튀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끝이 둥글게 다듬어진 원목 액자의 사진 속에는 차민과 노아 외에 아무도 없었다. 차민에게 배우자 혹은 파트너의 존재가 없음을 눈치를 챈 대니얼은 쓸데없는 관심을 끄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듯했다.
경계와 의심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차민의 어깨 끝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대니얼이 자신 외에 다른 변호사 둘까지 챙기고 있다기에 걱정스러웠는데, 생각보다 눈치가 있는 듯했다. 만약 앞으로도 그가 지금처럼 싹싹하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준다면 굳이 전담 비서를 붙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괜찮아요. 그 덕에 빨리 맨해튼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떤 소송인 겁니까? 다들 일단 와서 들으면 된다고만 하고, 저는 도무지….”
“간단한 이혼 소송입니다. 위자료 책정은 물론이고 재산 분할까지, 이미 내용이 전부 다 정해져 있으니까요.”
차민은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담당인 자신에게까지 의뢰인의 정체를 극비리에 붙이고 있다는 게 수상했다. 맡을 송사가 이혼 관련이라는 것도 지금에야 알았다. 차민은 기업의 인수 및 합병을 주로 맡아왔다. 구조조정이나 파생상품 같은 쪽을 보조해본 적 있었지만... 이혼 소송은 처음이었다.
“제가 왜 이혼을..., 아니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간단한’ 이혼 소송이라고요?”
대니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한 그의 표정 덕에 결코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돈 많은 사람들이 갈라서는 일이 결코 간단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소송이라 평할 정도라면…. 이미 결말까지 전부 합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차민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이슈를 만드는 것으로 돈을 버는 셀러브리티들도 적지 않았으므로, 그런 종류의 일인가 보다 싶었다.
“게다가 의뢰인이 내건 비용이 천문학적인 액수라고 하더군요. 자세한 금액은 저도 듣지 못했지만…. 깔끔하게 승소하면 그와는 별개로 새 사무실 하나를 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사무실?”
“지금 쓰는 본사 사무실보다 더 좋은 곳으로 마련해주겠다고 했다던데... 이게 건물을 새로 올리겠다는 건지, 본인 소유의 건물 한 채를 다 쓰게 해주겠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 건물 전체를 내줄 것 같다는 건 순전히 제 추측입니다. 이 정도 조건을 내걸 수 있는 사람이면 빌딩 한두 채쯤이야 아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차민이 속한 로펌 ‘레슬리 앤 클리포트아L&C’는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유명세보다는 악명이라고 표현하는 쪽이 옳을까. L&C에 소속된 전원은 승소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원래 로펌이 다 그렇다고 하기엔 L&C는 유독 그런 성향이 두드러졌다. 원래도 패소를 용납하지 않는 판국에 적지 않은 인센티브까지 걸려 있으니 이 소송은 반드시 이겨야 했다. 졌다간 이 지독한 인간들이 역으로 자신에게 소장을 날릴지도 모른다.
“간단한 이혼소송이라.….”
아무래도 이번 의뢰인의 이름값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었다. 차민은 괜히 천장 모서리를 비스듬히 노려보았다. 그나마 자신이 알고 있는 유명한 연예인들과 정치가들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나열해보았다. 혹은 사업가와 연예인의 조합이라거나.
그렇지만 평소에 가십 쪽으로는 도통 관심이 없었던 탓에 납득이 갈 법한 사람들이 단박에 떠오르질 않았다.
“그런데 왜 제가 전담이 된 거죠? 저는 이혼 쪽은 전문이 아닌데요.”
그래서 차민은 이번 발령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본사에서도 충분히 자신을 조사했을 것이고, 대체적인 성향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거물의 일을 저에게 맡긴 것일까.
“글쎄요. 이번 일이 그만큼 간단하다는 뜻 아닐까요?”
차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대니얼이 사람 좋게 웃었다.
“아, 의뢰인이 도착한 모양이군요. 회의실로 가실까요? 참! 벨라는....”
“들었어요. 내일까지 출장이라고.”
연달아 울리는 핸드폰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대니얼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차민 또한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그를 뒤따랐다. 이 업무에 대한 의문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기다리고 있는 의뢰인에겐 죄가 없었다. 납득이 어려운 점은 대표인 벨라가 출근한 이후에 따져 물어도 될 일이다.
두 사람의 족적을 따라 불투명한 유리문이 차례로 열렸다. 처음 안으로 발을 디딜 때도 느꼈지만, 건물 전체에서 과하지 않은 로즈우드향이 풍기는 듯했다.
사무실이라기보다 보안이 철저한 고급 맨션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차민에겐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하는 요소였다. 남 들이 부러워하는 본사 발령, 세련된 사무실 같은 건 맹세코 단 한 번도 바란 적 없었다. 뉴욕, 맨해튼, 학창 시절.... 애써 저 멀리 치워두었던 단어들을 소리 내어 말할 때마다 몸서리가 쳐졌다. 노아에게 꼭 필요한 ‘요람’만 아니었더라면 다시는 동부로 발 들일 일 없었을 것이다.
“죄송하게도 전담 변호사 외의 직원들은 이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의뢰인의 당부를 받았습니다.”
대니얼이 복도 중간에 멈춰 서며 공손히 회의실 쪽을 가리켰다. 잘 교육받은 버틀러도 이보다 완벽하게 에스코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의뢰인이 누군지는 모르는 거예요? 정말로?”
“네, 정말로 모릅니다.”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이내 장난스럽게 눈썹을 휘고는 차민에게 속삭였다. 혹시 유명한 연예인이라면 제일 먼저 자신에게 알려달라면서.
“차라리 연예인이면 다행이겠어요.”
차민은 밀려오는 피곤에 뻐근한 뒷목을 누르며 회의실 앞으로 걸어갔다. 말마따나 세상물정 모르는 연예인들은 차라리 다루기 쉬웠다. 사고를 쳐놓고선 뒤늦게야 어떻게든 해결해달라고 떼쓰는 어느 기업의 손자, 무슨무슨 주니어, 이런 놈들이 제일 짜증났다.
“설마 왕실 인사는 아니겠지?”
그리 중얼거리다 차민은 정신을 차리곤 입을 틀어막았다. 불길한 소리나 툭 내뱉은 자신을 꾸짖기라도 하듯이. 자국도 아닌 남의 나라에 이혼 송사를 맡길 정도면 변호사가 아니라 사람들 입방아를 틀어막을 총알받이나 구하려는 목적일 거다.
차민은 쓸데없는 생각을 몰아내려 잘게 도리질을 치곤 두어 번 노크를 했다. 성의 없어 보이는 자신의 동작을 나무라듯 대니얼이 뒤에서 크게 헛기침을 했다.
“실례합니다.”
몸을 곧게 펴고, 나름대로 정성껏 다시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회의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흘끗 뒤를 돌아보니 대니얼이 고개를 쭉 내밀고는 주억거린다. 들어가 봐도 괜찮다는 뜻인 것 같았다.
차민은 미심쩍은 얼굴로 문고리를 쥐었다. 저렇게 모든 걸 자신하는데도 의뢰인이 누군지 모른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역시 미팅이 끝나자마자 벨라에게 연락을 넣어봐야 할 것 같았다. 노아의 ‘요람’도 중요했지만 천만금을 준대도 위험한 일은 사절이었다. 예전에야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이 잘못되면 노아를 돌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늦었습니다.”
이렇게 무거운 문에나 자동 센서를 달아둘 것이지. 차민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손차양을 만들었다.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은 탓에 쏟아지는 햇빛이 강렬했다. 문제의 의뢰인은커녕 회의실 내부의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회의실이든 사무실이든, 업무를 위한 용도로 사용하기엔 매우 비효율적인 공간이었다. 맨해튼의 명소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파노라마 뷰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한쪽 벽 전면이 유리창인 탓에 냉난방기가 수시로 가동 되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천지 분간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빛은 대부분 근무 시간에 이루어질 회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중요한 손님들이나 오면 모시는 장소로 전락해버린 모양인데, 정작 중요한 의뢰인의 얼굴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걸음 하긴 했는데..., 혹시 오래 기다리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의뢰인이 이쪽을 돌아보는 듯도 했지만, 당장 보이는 건 시커멓고 기다란 실루엣뿐이었다.
“이번 소송을 맡게 된 변호사, 한이라고 합니다.”
차민은 요령껏 눈을 크게 깜빡였다. 때마침 영영 뿌리 내리고 있을 것 같던 빛무리가 천천히 각도를 틀기 시작했다. 도무지 익숙해질 것 같지 않던, 눈이 부시던 시야가 마침내 개는 기분이었다.
의뢰인이 발을 옮기자, 한 덩어리처럼 뭉쳐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조금씩 쪼개지기 시작했다. 차민은 자기도 모르게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섰다. 천지창조를 빠른 속도로 재생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거대한 창을 꿰뚫던 작살 같은 태양빛과 깜깜한 그림자가 한데 엉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음, 저는....”
차민은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두리번거렸다. 손바닥에 고인 땀을 바지춤에 대충 문질러 닦아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목 뒤를 훑고 갔다.
자신을 향해 느리게 걸어오는 의뢰인의 구두굽 소리가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분명 처음 겪는 일인데 과거의 어느 날, 꼭 이런 순간을 마주한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L&C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을 얼핏 듣긴 했지만....”
애써 부산스럽게 굴던 차민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가 돌아갔다. 기름칠이 필요한 로봇처럼, 어색하게 툭툭 끊기는 동작이었다.
“내 기억엔 홍콩 지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타들어갈 듯한 빛기둥과 너른 하늘을 등지고서, 창조주가 공을 들여 빚은 것 같은 남자의 형상이 서서히 드러났다.
“어쨌든… 오랜만.”
아….
차민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신처럼 등장한 남자를 바라 보았다.
그래…, 신처럼.
10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 표현 말고는 남자의 아름다움을 설명할 길을 찾지 못했다.
“…루카스.”
빛을 뜻하는 단어에서 따 온 이름이라고 했던가. 지금 와선 아무도 원류를 따지지 않는 흔한 이름이었지만... 어쩌면 눈앞에 선 남자가 최초로 그 이름을 사용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빛이 난다는 수식어는 처음부터 루카스의 것인 듯이 자연스러웠으니까.
“네가 동부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보고를 받긴 했어.”
눈을 내리깐 채로, 루카스가 살짝 턱 끝을 치켜들었다. 그의 외모는 사람이 자극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지점을 아득히 뛰어넘는 무언가의 선에 있었다.
“안 그래도 네 유일한 뒷배였던 카터가 죽었으니.”
루카스는 무심한 얼굴로 잎사귀들이 조각된 회의실 의자의 등받이를 두어 번 쓸었다.
“혹시 일부러 그런 거야?”
너무 놀란 덕분일까. 다행스럽게도 목소리가 볼썽사납게 떨리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도 믿기질 않았다.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루카스라는 게.
“일부러라니?”
루카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모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 소송에서 고의로 나를 전담으로 지정한 거냐고 물었어.”
“그럴 리가.”
“그렇지 않으면 이혼 전문도 아닌 날.….”
따지려던 차민의 목소리가 천천히 멎어들었다. 말을 내뱉고서야 깨달은 것이다.
이혼....
어떤 사연이 있어 이혼 소송 절차를 밟게 된 건진 몰라도, 어쨌든 루카스는 결혼한 적이 있다는 소리였다.
차민은 떨리는 손을 감추려 뒷짐을 졌다. 이제 와서 그와 다시 잘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제가 자라지 않는 노아를 붙들고 전전긍긍하다 카터를 찾아가 무릎을 꿇었을 때, 루카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잘도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식까지 올렸다.
말 그대로 루카스는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차민이 10년이 지나도록 지워지지 않은 흉터를 더듬으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동안. 물론 그는 노아가 자신의 아이라는 걸 몰랐겠지만....
“말할게, 내가. 벨라... 그러니까 로펌 대표에게.”
엉망진창인 머릿속만큼이나 내뱉는 말도 두서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이 소송을 전담하게 될 거야.”
“아니, 번거롭게 그럴 것 없어. 어차피 만나긴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니까.”
“나를?”
차민을 빤히 바라보던 루카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순진한 척하는 자신이 역겹기라도 한 것처럼.
“카터가 그렇게 뒈져버린 이상 날 만날 필요가 있었던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황금을 녹여 빚은 것 같은 성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루카스는 상스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렸다.
“그래, 우드가家의 수장으로 묻지. 카터, 그 새끼한테서 애 하나를 봤다고 들었는데.... 이름이 노아, 라고 했던가?”
차민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주춤 물러섰다. 루카스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짐작이 간 까닭이었다.
“사진으로 보이는 모습보다는 나이가 많다고?”
노아는 멀쩡하다가도 이따금 고열로 절절 몸이 끓곤 했다. 보통 사람들이 앓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마 위에 얹은 차가운 물수건이 치익 하고 달궈지는 소리를 내며 뜨거워지곤 했다. 고용했던 시터 여럿이 화상을 입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루 정도 앓고 나면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을 뜨고서 활짝 웃었다.
시한폭탄을 안고 살면 이런 기분일까?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나날이었다. 언제 노아가 다시 쓰러질지 모른다. 당장이야 다음 날이면 괜찮다는 듯 방싯 웃지만, 다음번에는 영영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가장 차민을 괴롭게 하는 것은, 아픈 아이에게 무엇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었다.
과거의 어느 날, 그전처럼 노아가 픽 쓰러졌다. 그러나 열흘 내내 눈을 뜨지 못했다. 차민은 자존심 따윈 내다 버리고 우드가로 달려갔다. 노아가 이따금씩 불덩이가 되는 원인 중 하나가 이 집안의 빌어먹을 피 때문이 아닐까 싶어서.
‘비스트’라는 존재들이 있다. 단어 그대로 사람이 아닌 존재들. 예를 들면 늑대인간, 그 외 수인들, 용, 뱀파이어... 뭐 이런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이종족들은 확실히 실존하고 있었고, 그들 전부를 일컬어 ‘비스트’라고 불렀다.
야수라는 말보다 좀 더 고상한 단어가 어울릴 것 같지만, 어차피 인간들이 가져다 쓰는 단어는 ‘비스트’들 중 아주 일부의 존재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했다. 당사자인 ‘비스트’들은 세간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쓰이든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리고 우드가는, 루카스는, 그런 ‘비스트’들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이 일족에 대해서는 무어라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단어가 없다고 했다.
힘의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늙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 피 한 방울로도 모든 ‘비스트’들을 복속시킬 수 있는... 까마득한 고대부터 존재했던 신성한 핏줄.
루카스는 전능한 존재들로 이루어진 우드가의 일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지만 그는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주위의 모든 종속들로부터 이미 다음 대의 수장으로 떠받들어졌다고 했다.
노아는 그런 루카스의 핏줄을 이어받았다. 약해빠진 인간의 육신이 우드가의 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대책도 없이 찾아간 우드가의 저택에서 우연히 마주친 카터는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비책이 있다며 차민에게 정체 모를 시럽을 내밀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우드가 사람의 피와 우드가 내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몇 가지 약재를 넣은 이 처방을 ‘요람’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연이 아닌 게 분명했지만, 어쨌든 카터가 건넨 약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노아는 즉시 눈을 떴을 뿐만 아니라, 아주 조금이지만 머리카락이 자라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이후로 노아가 앓는 주기가 점점 잦아지기 시작했다. 더 많은 피를 바라는 것처럼. 아니면 불완전한 제 몸뚱이를 죄 태워버리고 싶은 것처럼.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설마 내 애도 밴 적 있는 건 아니지?”
다른 생각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성큼 다가온 루카스가 차민의 턱 끝을 쥐었다. 사나운 눈길이 차민의 몸을, 특히 배 부근을 지그시 응시했다가 훑고 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왜 말이 안 되는데? 카터의 애를 가졌으면, 내 애도 가졌을 수 있는 거잖아.”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체격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무슨 수를 쓴 건지 조금 전과는 공기의 흐름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그의 앞에 선 이 자리만 중력이 다르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태산 같은 루카스의 존재감이 버거워 목소리를 높이기는커녕,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한차민.”
오랜만에 부른 차민의 이름이 낯선지 루카스는 잠시 볼 안쪽으로 둥글게 혀를 굴렸다. 여운이 남은 듯 몇 번 입술을 달싹이기도 했다.
“나밖에 없는 척 굴어놓고선 뒤로는 잘도 카터와 붙어먹었던 너를, 내가 어떻게 믿겠어?”
그러나 그뿐이었다. 냉기가 뚝뚝 흐르는 그의 목소리에선 어떠한 미련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차민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루카스가 하는 말이 몇 박자 느리게 입력이 되었다.
“…뭐, 라고?”
어안이 벙벙했던 것도 잠시, 순식간에 뒷목이 뻣뻣해졌다.
“지금 너, 무슨 말을....”
짐승이 투레질을 하듯 내뱉는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주체가 안 될 정도로 분노가 들끓었다. 루카스는 그런 차민을 관찰이라도 하듯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뻔한 각본의 촌극이라도 보는 듯, 권태로운 얼굴이었다.
“노아란 애가 우드가의 핏줄이 확실하다는 건 알겠어. 카터가 하는 짓은 다 어설펐지만, 그 새낀 몰라도 집안의 늙은이들이 증거도 없이 함부로 인간에게 약을 빼돌리는 걸 눈감아주진 않았을 테니까. 그 아무리 하찮은 약이라도 말이야.”
루카스의 커다란 손이 차민의 뒷덜미를 감쌌다. 키스라도 할 것처럼 부드러운 손짓이었다. 위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지만, 차민은 어쩐지 그가 제 목을 세게 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드가의 일원이기만 하면 누구든 상관없다던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긴 했지만... 너처럼 형제에게 전부 대주고 임신까지 성공한 사례는 없었으니, 축하할 일인가?”
귀에서 이명이 일었다.
방금 전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루카스는, 차민이 자신과 형인 카터에게 동시에 손을 뻗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부귀영화를 노리고서,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다고.
“하하….”
어이가 없으니 미친 사람처럼 헛웃음이 나왔다.
카터와 몸을 섞기는커녕 손끝 한 번 닿은 적 없었다. 그와 정기적으로 만나긴 했지만 루카스의 말대로 노아의 약, ‘요람’을 받아 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카터는 차민, 정확히는 인간에 대한 형오를 감추지 않은 채 금세 자리를 떠버리곤 했다.
예전에 루카스가 간단히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비스트’들에게 있어 부모나 형제의 존재는 인간들이 정의 내린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고.
같은 성씨를 공유하는 완벽한 타인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 그나마도 언젠가 수장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할 장에물에 가깝다고 들었다. 그러니 ‘비스트’들의 기준을 따르자면 카터는 루카스의 형이라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카터가 인간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는 그와 같이 자란 루카스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카터의 면전에 대고 인간과의 섹스를 운운하는 놈이 있었다면, 농담이 아니라 그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을 뻔히 다 알면서도, 루카스는 지금 저더러 형제를 오가며 뒤를 대줬느니 하는 소리를 잘도 지껄이고 있는 거였다.
당황으로 멍해져 있던 차민의 동공에 시커먼 불길이 일었다.
루카스의 말도 안 되는 추측이, 저질스러운 오해가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차민의 아버지가 실은 우드 집안의 연구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배신감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래, 처음부터 차민이 의도를 가지고 접근해, 자신의 정보를 빼돌렸다고 오해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때의 자신들은 너무 어렸다. 죽지도 늙지도 않는다는 ‘비스트’인 루카스도, 분명 그 시절만큼은 차민과 같은 시간을 살았던 소년이었다.
애써 이해하려 들자면 못 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루카스가 돌연 자취를 감춘 뒤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을 때에도, 차민은 그렇게 루카스의 행동을 납득해보려 애썼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듣고 싶은 대로 듣기 이전에, 최소한 제게 해명할 기회는 줬어야 했다. 오해를 풀어보려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저였기 때문에. 당시의 차민은 루카스에게 그 정도의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여전하네. 혼자 멋대로 판단하고 자기 좋을 대로 지껄이는 건.”
차민은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며 루카스를 밀어냈다. 고상하신 불멸의 존재는 한낱 미물에게 10년 전 어떤 상처를 줬는지 까맣게 잊고 있는 듯했다.
“노아가 카터의 아이라고? 어이가 없지만 마음대로 생각 해. 어차피 넌 내 말은 듣지도 않을 거잖아?”
차민은 간신히 뒤로 물러서며, 루카스에게 붙잡혔던 목을 쓸었다. 그가 조금의 악력도 가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데도 어쩐지 선명하게 손자국이 남았을 것 같았다.
“그럼 대체 누구의 아인데.”
손등으로 이마를 꾹 누르는 루카스의 목소리는 매우 낮고, 또 작아서 거의 읊조리는 수준에 가까웠다.
“...카터는 아니야.”
“씨발, 대체 너는...!”
중얼거리던 루카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손을 올리고 있던 의자에 쩌적 금이 갔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쪼개졌던 등받이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아마도 그 시절보다는 체면치레라는 것을 익힌 루카스가 간신히 화를 참는 모양이었다.
“한차민.”
이제 차민을 부르는 루카스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어색함도, 약간의 그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날것의 분노와 절절 끓는 배신감뿐이었다.
“우드가의 이들 중 그나마 인간을, 그것도 같은 남자를 임신시킬 가능성이 있는 존재는 나 아니면 카터뿐이라는 걸 몰라서 이래?”
루카스가 잇새로 바람을 훅 불고는, 돌연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삐딱하게 웃었다.
“아아.… 혹시 다른 종에게도 대준 건가? 그것도 부모님이 내린 지시였어? 직접적으로 우드가의 지배를 받는 종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 피는 종속되는 법이니까.”
차민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길게 뻗은 속눈썹 끝이 조금 젖어드는 것도 같았지만, 순간일 뿐이었다.
동부에서의 기억은 여전히 차민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아주 잠깐 과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명치 아래가 끊어질 듯 저렸다. 그렇지만 노아를 위해서라도 루카스를 만나긴 해야 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카터가 죽은 이상, 노아에게 생명줄과도 같은 약을, 그 빌어먹을 ‘요람’을 건네줄 수 있는 건 수장인 루카스뿐이었으므로. 물론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무슨 소리를 해도 네가 안 믿을 건 알겠는데...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하지만 헛된 생각이었다. 금이 간 의자를 억지로 다시 붙일 수 있을진 몰라도, 이미 부서져 가루가 되어버린 것을, 이미 사방으로 날아간 지 오래인 가루더미를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제아무리 전능한 루카스라 할지라도.
“널 만나면서 카터도 같이 만난 적은 없어.”
“그 애새끼는,”
“노아를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
한숨 섞인 목소리만 내뱉던 차민이 잔뜩 날을 세우자, 루카스가 다소 놀란 듯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래, 노아는.….”
물론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듯, 이내 조금 전과 같은 오만한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카터에게서 ‘요람’을 받지 못한 모양이지?”
놀란 차민이 숨을 들이켰다. 그것만으로도 루카스는 원하는 답을 얻어낸 눈치였다.
“조잡한 수를 ‘요람’이라며 속여 온 모양이군.”
“하…, 하지만.….”
루카스의 추측은 반은 맞고 맞은 틀렸다. 정확히는, 차민은 ‘조잡한 수를 요람 대신으로 속였다’라는 부분에서 놀란 것이었다.
“그간 반출이 된 약들…, 그래. 너희 아버지 같은 연구원들이 하는 거. 우드가의 비밀병기를 관리하고 개발하는 일들 말이야. 뭐, 어쨌든 카터가 우드가와 인간의 혼혈을 핑계로 손을 댄 것들은 대단할 것도 없는 수준이었어. 인간인 네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비타민 같은 영양제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그럴 리가….”
차민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노아는 분명... 괜찮아졌다. 앓는 시기가 점점 앞당겨지는 기분이었지만, 그건 계속해서 성장이 멈춘 상태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억누를수록 반동이 세지는 것은 당연할 테니까.
“아무 약에나 카터가 약간의 피를 담아서 줬겠지.”
10년이었다.
혹시라도 카터의 눈에 날까 두려워 그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다했다. 이제 차민은 눈 하나 깜빡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카터가 자신의 명의로 이런저런 일을 벌이는 것 또한 알고 있었지만, 전부 묵인해왔다. 수상한 문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당장 사인하지 않으면 노아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했지? 그러니까 약간의 피 정도는….”
오늘 일어난 모든 일들은 차민의 허용 범위 밖에 있었다. 아니... 오히려 다행인 것도 같았다. 전부 현실감이 없으니 오히려 매번 간절했던 한 가지 주제에만 온 신경을 기울일 수 있었다.
노아를 살릴 수 있는 ‘요람’에 대해서.
루카스는 여태 카터가 준 ‘요람’이 가짜라고 했다. 약간의 피만 섞은 영양제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핵심은 피라는 소리였다.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비스트’인 우드가의 몸에서 흐르는, 그 피.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루카스의 얼굴은 화사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잘 빗어 넘긴 금발이 빗어 넘긴 결을 따라 세밀하게 반짝였다.
정말 이름 따라 가는 것인지, 빛마저 그의 편인 듯했다. 그리고 이제 차민에게 남은 말이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잘 아는 거만한 야수는 느긋하게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제법 똑똑했으니 상황 파악도 빠르겠지.”
루카스의 노골적인 조롱에 차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분하게도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전에 듣기로 ‘비스트’들은 피에 종속된다고 했다. 그리고 루카스는 이제 우드 가의 수장으로 모든 권능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피도 분명 노아의 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카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쪽은 노아에게 생명을 준 또 하나의 창조주이기도 하니까, 어떻게 생각해도 카터보다 좋은 ‘요람’의 공급처가 되어줄 수 있을 터였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넌 나에게 뭘 해줄 수 있는데?”
차민은 혀를 내어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루카스의 앞에 발가벗고 선 기분이었다. 보잘것없는 육신이, 삶 전체가 잘게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가진 그에게, 한 낱 인간인 자신이 어떤 이득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일을..., 우드 쪽에서 꾸리고 있는 기업의 일이라거나....”
말을 꺼내면서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우드가에선 차민은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쟁쟁한 사람들을 이미 손끝으로 부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너는 인간이 아니지만, 어쨌든 여기 살고 있으면서 인간들 사이의 일을 중재해줄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
루카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알기론, 차민. 우드라는 성은 ‘비스트’의 존재조차 모르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것으로 아는데.”
루카스의 희고 긴 손가락이, 조금 전 그의 손으로 재생시켰던 의자의 등받이 위를 느리게 훑고 갔다. 불손한 함의를 담은 손길이었다.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한차민.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묻겠어.”
누가 목구멍에 자갈을 쑤셔 박으면 이런 기분일까. 깔깔 하다 못해 아팠다. 차민은 애꿎은 울대를 꾹 눌렀다. 그런다고 목 안쪽이 괜찮아질리 없는데도.
“노아, 정말 내 아이 아니야?”
루카스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회의실에서 마주한 이 후 그가 처음으로 드러내는 날것의 감정이었다.
“너희 아버지가 네게 준 약이 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보석을 녹여 빚으면 이런 빛이 날까. 오묘한 빛으로 반짝 이는 루카스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차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우드가의 말단 연구원이었다.
먼 옛날, 우드가에서는 잊혀진 제국의 왕과 맹약을 맺은 일이 있다고 했다. 책임지고 ‘비스트’들을 다스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노라고. 물론 그 방법까지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우드가에서는 생을 걸고 맺은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모든 ‘비스트’와 인간들을 자신들 아래 무릎 끓게 만들었다. 감시하고, 통제하고, 좋을 대로 휘둘렀다. 그들의 핏줄에 새겨진 권능과, 그들이 움켜쥔 부와 권력으로. 지배만큼 손쉬운 방어는 없었다.
그러나 인간들의 삶과 세상이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우드가를 대신해 한낱 귀찮은 일을 대신해줄, ‘비스트’들의 비밀을 아는 평범한 사람들 또한 필요해졌고, 아버지는 그 들 중 하나였다.
“내 피가 섞인 약이었지? 인간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생명을 수태할 수 있게 만드는.”
차민의 어깨가, 손끝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그렇다고 한들 설마 ‘비스트’의 아이까지 임신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
“너와 함께라면, 언젠가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으니까. 평범한 인간처럼.”
루카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아버지가 그런 약을 만든 건 사실이지만, 일부러 자신에게 먹인 건 아니었다고. 감히 우드가를 협박해 호의호식할 생각으로 그런 발칙한 짓을 꾸몄던 게 아니라고. 무엇보다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루카스에게 접근했던 게 절대 아니었다고....
차민의 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혀끝에 걸린 변명을 입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었다. 말 그대로였다. 이 주제로 차민은 울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어떤 말도 지껄일 수 있었다. 아버지를 욕하는 말도, 자신을 음탕한 남창이라 깎아내리는 말도... 얼마든지 읊을 수 있었다. 백날 천날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노아가 루카스의 아이라는 이야기는 불가능했다. 죽을 때까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고 하더라도, 노아와 관련한 이야기만큼은 영원히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게 카터가 ‘요람’을 대가로 내걸었던 조건이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노아가 루카스의 아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
차민이 아무리 사실을 밝히고자 입을 열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며, 글을 써보려고 한들 손이 굳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카터가 내민 계약서엔 그렇게 쓰여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검지에 피를 내어 낡은 종이 위에 한 방울 떨어트리는 것으로 계약이 성립되었다.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혼잣말조차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제가 원망을 하느라 이 일에 대해 함구하는 것이라 여겼다. 죽을 때까지. 죄인처럼 쭈그러들어, 자신을 향한 미안함에 제대로 눈도 감지 못한 부모님의 얼굴을 보며 차민은 가슴을 치면서 울었다.
그러나 울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꺽꺽대는 쇳소리조차 나오질 않는 완벽한 침묵이었다. 계약으로 묶여버린 목청은 끝의 끝까지 차민을 불효자로 만들었다. 통곡에 섞인 단어들이 어떠한 조합이 될지 알고라도 있는 듯이.
“그래, 내 아이였으면 진작 날 찾아왔겠지. 카터가 아니라....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야.”
생각에 잠긴 차민을 더 기다려줄 수 없는지 루카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엄지로 미간을 문지르는 그는 조금 지쳐 보였다.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여러 가지 해묵은 감정들이 켜켜이 쌓인 음성이었다.
“거짓말로라도 내 아이란 말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카터를 사랑하면서, 내 앞에선 그의 아이는 아니라고 부정하는 건 좀 우습지 않나?”
발아래 아무 곳이나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차민을 향했다. 일부러 느리게 재생한 영상의 한 장면처럼.
헛숨을 들이켰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차민 또한 말하고 싶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카터를 사랑한다니. 그 비열한 새끼는 그 잘난 피 몇 방울을 내어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개처럼 굴렸다. 뒤늦게야 카터가 제 절실함을 이용해 장난질을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평범한 인간인 차민은 ‘비스트’와 피로 묶인 계약을 푸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어쨌든 지금 너와 그 빌어먹을 애새끼에겐 나뿐이라는 거지.”
억지로 차민의 고개가 들렸다. 루카스는 커다란 손아래 드러난 긴 목빗근과 설핏 드러난 쇄골을 흘끔 바라보았다.
차민은 눈을 내리깐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루카스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어쩐지 그는 저도 몰랐던 감정들을 기어이 죄 끄집어낼 것만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루카스가 전부 눈치채주길 바랐다. 아무 일도 없던, 천진하던 시절로 돌아가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러기에 차민의 속은 이미 시커멓게 썩어버렸다. 다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왜 자신이 카터의 말이라면 껌뻑 죽었는지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러니 걸레면 걸레답게 굴어.”
입만 다물고 있었을 뿐, 한참이나 꼬인 지난날 중 무엇부터 짚고 가면 좋을지 헤아리던 차민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무형의 공간이 무수히 얇은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차민에게 얽혀 있던 선들이 잠시 뚝 끊겨버린 듯했다.
방금 루카스가 뭐라고 한 거지.… 세포 하나하나까지 날이 서는 기분이었다. 눈을 깜빡일 때 속눈썹이 스치는 감각마저 생생하게 느껴졌다. 한숨으로도 살갗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걱정 마, 그래도 너희 식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저기 내돌릴 생각은 없으니까.”
잠시 먹먹했던 차민의 눈동자에 다시 새카만 생기가, 아니 울분이 차올랐다. 눈앞에 선 남자는 차민이 알았던 그 시절의 그 소년이 아니었다. 직전까지는 기계적으로 스스로를 이해시키려 애써왔다면, 이제는 피부로 와 닿았다.
“…루카스.”
그렇지만 지금의 루카스 또한 결코 모를 것이다. 제가 10년 전과는 아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왜, 지금은 못 할 것 같아? 카터가 죽자마자 나에게 안기라니 자존심 상해?”
차민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못 할 게 뭐가 있겠어. 대신 그 약속, 꼭 지켜. 어려운 일 아니라며.”
루카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로운 기색이 가셨다.
“…지금 너, 뭐라고?”
“한 번 꿈틀거려보라고 나 밟은 거잖아, 지금. 그러면 내가 그런 소리를 듣고서도 천치처럼 가만히 있길 바랐어? 걱정 하지 마. 네가 아니라 네 운전기사에게도 다리 벌리라면 벌릴 테니까, 노아에게 진짜 ‘요람’을 주겠다던 약속은 지켜.”
“하.....”
루카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너른 어깨가 점점 크게 들썩였다. 그러다 울음 같은 웃음이 잦아들 때쯤, 루카스가 짚고 있던 의자가 기어이 박살이 났다. 아니, 그 의자를 시작으로 회의실 내의 모든 집기들이 죄다 가루가 되어버렸다.
차민은 남의 일인 듯 폐허가 된 회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실제로 남의 일이기도 했다. 저의 집도 아니고, 제가 배상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한차민, 너.”
의미 없는 잦은 부름에 차민의 미간이 콱 구겨졌다.
“걸레처럼 굴라고? 그게 뭐가 어렵다고. 카터가 가짜 ‘요람’을 건네줬을 때에도 그가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다 했어. 고작 카터의 피 한 방울이 절실해서. 진짜든 가짜든 그게 아니면 노아가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 루카스는 어차피 제 몸뚱이에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저따위 말이나 하면서 자신에게 수치를 줄 심산 같은데, 카터가 그 피 한 방울 나누어주면서 고깝게 굴었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의 모욕은 끄떡도 없었다. 사람도 죽여 봤다. 칼도 써봤고 총도 갈겨봤다. 못 할 일이 없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루카스는 표독스럽게 눈을 치뜬 차민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뿌옇게 부유하는 잿더미는 루카스의 존재가 두려웠는지 그를 조용히 비껴갔지만, 하찮은 인간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견디다 못한 차민이 몇 번 매운 기침을 쿨럭이자 루카스는 그제야 집요한 시선을 거두었다.
“...처음부터 결정된 이혼이었어. 서로 취할 것을 다 취하면 요란하게 소송을 거는 것 또한 조건 중 하나였고.”
루카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어딘가에서 서류 한 장이 팔랑이며 날아왔다. 방 안에 있는 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뭉개 버린 줄 알았는데, 본인의 일에 중요한 것들은 용케도 내버려둔 모양이었다.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직전까지 나누었던 대화는 까맣게 잊었다는 듯, 루카스가 태연하게 말했다. 차민 또한 아무렇지 않은 척 코앞으로 날아든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읽을 것도 없는, 그야말로 간단한 서류 한 장이었다.
사실 갑자기 확 바뀐 분위기가 얼떨떨했다. 만약 루카스가 계속해서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며 의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면, 아마 차민은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간단하다는 네 이혼 소송은 대표나 비서를 통해서 하라고, 어차피 난 너와 몸만 섞으면 그만 아니냐고 벌컥 화라도 냈을 텐데.… 그런데 루카스가 직전까지의 살벌했던 대화를 도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구니까 저도 모르게 똑같이 덤덤한 태도를 취하게 됐다.
지금 루카스가 저를 시험이라도 하나 싶었다. 몇 번이나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주제를 꺼내놓고, 이제 와선 멀쩡한 의뢰인인 것처럼 굴다니.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꼿꼿한 자세로 서류를 흘끔거렸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이래놓고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여 사람 속을 뒤집어놓을지 모를 일이니까.
오기로 아무렇지 않은 척 서류에 쓰인 숫자를 헤아리던 차민은, 이내 진심으로 방금 전까지 날을 세웠던 일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구김 하나 가지 않은 종이 위엔 숨이 턱 멎는 액수가 적혀 있었다. 큰 액수에 이골이 났음에도 잠시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고작 이혼 소송에 이런 금액이 오간다고?
“잠깐만. 플린? 그 플린이 맞아?”
루카스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플린가는 미국 최대의 미디어 재벌로, 소유한 채널과 제작사, 언론사만 해도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그들의 가장 무서운 점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이 거대한 땅덩이를 들끓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떠올리니 우드가에서 왜 플린가와 손을 잡은 건지도 알 것 같았다. 우드가의 구성원들은 인간이 아니었으나, 그 어떤 인간들보다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깊이와 근원을 가늠할 수 없는 부는 힘들이지 않고 사람들이 무릎을 꿇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가진 게 많아도 언론을 상대하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엔 더더욱 그랬다. 기록은 점점 더 촘촘히, 치열하게 쌓이고 있는데 인간이 아닌 ‘비스트’들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우드가에서는 이참에 자신들을 포함한 ‘비스트’들의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꾸준히 입단속을 해줄 수 있는 협력자들을 구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기엔 확실히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는 결과는 아니지.”
차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플린가가 대단하긴 했지만 우드가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간 언론 쪽으로 연줄이 없었던 것도 아니기에, 우드가에서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가며 플린가와 손을 맞잡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플린가라고 한들 이 정도 합의금을 지불하려면 알짜배기 채널 몇 개는 팔아야 할 것이다.
“이후의 계획이 정확히 뭔데?”
“글쎄, 적당히?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적당히 합의를 볼 생각이야.”
“...설마 그게 전부는 아니지?”
“물론 아니지.”
루카스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서류는 불에 타 사라져버렸다.
“우선 혼인 사실 자체를 무효로 돌릴 거야.”
으음. 차민의 미간이 구겨졌다. 잘 모르는 자신이 보기에도 플린가는 여기까지 동의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플린 쪽 전원을 합법적으로 몰아내고, 내 종속들로 채울 생각이야. ‘비스트’든 사람이든. 영향력 있는 주주들은 물론이고, 직원들까지 전부다.”
“평범한 직원들까지 갈아치우겠다고?”
“참고로, 나와 결혼을 했다는 여자는 세상에 없어.”
“뭐?”
놀란 차민은 구두코에 달라붙은 그을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면 방금 전 다 타버린 종이가 살아나기라도 할 것처럼.
확실히 적혀 있던 이름이 낯설기는 했다. 허나 그건 가십에 밝지 못한 자신의 성향 때문이리라 여겼다. 그래도 플린이라면 제가 들어본 집안이긴 했으니 역시 대단한 곳을 골랐구나 싶었고. 그런데....
“아, 오해하지는 말고. 죽인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처음부터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있지도 않은 사람을 서류상으로 만들어놓고, 혼인신고만 한 거라고?”
“그래.”
차민은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이게 뭐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들을 싹 갈아치우겠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긴 하지만... 그래, 그건 차라리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가짜로 사람 만들어낸 일에 대한 처리를 왜 여기에 맡겨. 작업했던 사람보고 해결하라고 해.”
“어차피 네가 모든 일을 다 맡진 않을 거 아냐. 널 보조해 줄 인력이 부족하다면 그 부분이야말로 네 대표에게 말하면 될 것 같은데? 이 업무는 쳐내라고.”
차민의 숨이 깊게 가라앉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왜 본사에서 부랴부랴 자신을 불러들인 건지 알 것도 같았다. 표면상으론 이혼 소송이지만, 실제론 기업 관련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데다, 까다로운 의뢰인과 동창이기까지 하니 위에서 판단하기엔 이보다 적합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하고 있어. 이제는 섣불리 ‘비스트’의 흔적에 손을 대기 어려운 상태로 흘러와버렸지. 지금이라도 방비책을 다시 조이지 않으면, 나중엔 정말 골치가 아파질 거야.”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을 벌였던 건지는 알겠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이런 비밀은 아는 사람이 많아져봤자 좋을 것이 없지 않나?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니, 우드가에서 알아서 해결하는 쪽이 나을 텐데.
“서류상으로 어떠한 흠집도 없이 말끔하게 모든 일처리를 끝낸다면, 네 애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피를 전부 내어줄 생각도 있어.”
조금도 간단하지 않은 송사의 연결고리를 이어보던 차민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복잡하게 얽혔던 감정과 사건들에 대한 생각이 단숨에 날아가 버렸다.
“필요로 하는... 만큼이라고?”
“그래. 어쩌면 정상적인 속도로 성장하게 될지도 모르지.”
차민은 입술을 감쳐문 재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설치예술로 꾸며낸 듯이 빛무리가 산란하는 풍경이 비현실적이었다. 노아에게 필요한 만큼의 피. 카터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매한 존재의 ‘요람’....
“그렇게 좋아할 것 없어. 당장 내일까지 모든 일을 해결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루카스가 재킷 주머니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 차민을 향해 툭 던졌다.
“이건 뭐....”
차민은 얼결에 받아 든 물건을 살펴보았다. 라이터만 한 크기의 열쇠와 마그네틱 카드 한 장이었다. 신용카드는 확실히 아니고... 어딘가의 출입 전용 카드인 듯했다.
“루카스, 이게....”
대체 무엇이냐 물으려던 차민의 입이 꾹 다물렸다. 출입 카드에 쓰인 건물 이름이, 그 아래 작게 쓰인 주소가 어쩐지 익숙했다. 작은 글씨를 들여다보느라 가느다랗게 좁혀들었던 눈동자가, 순간 스쳐 가는 기억에 동그랗게 벌어졌다. 10년 전, 차민은 만약 맨해튼에서 살 수 있다면 이 동네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말한 적 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당시에 루카스와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었기에 매체 여기저기에 등장했던 핫 플레이스를 대충 둘러댔을 뿐이었다.
“완전한 ‘요람’이 아니라 고작 피 한 방울을 위해서라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그리고 지금, 루카스가 건넨 출입 카드엔 언젠가 말했던 그곳의 주소가 정확히 찍혀 있었다.
“그래서 부르면 여기로 오라는 거야?”
빈정거리는 말만 쏟아내는 입매는 차갑기 그지없는데, 차민을 진득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뜨거웠다. 극과 극은 닿아 있다더니, 정말 그런 가보다.
“그래서 네가 나에게 어디까지 내놓을 수 있는지 궁금하군.”
차민은 손바닥 위에 놓인 열쇠와 카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루카스는 종종 마법인지 초능력인지 모를 일들을 선보이곤 했다. 그가 손을 퉁기면 무거운 물건들도 깃털처럼 가볍게 옮겨지고, 그 자리에 없었던 것들이 풍 솟아나기도 했다. 방금 전 회의실 내부를 초토화시킨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방금 루카스가 내민 것들은, 허공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그의 품속에서 나왔다. 잿더미 속에서 끄집어냈던 종이처럼 갑자기 열쇠가 나타났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열쇠는... 처음부터 루카스가 준비해 왔다는 뜻이었다.
“루카스, 나는....”
어디까지가 우연이고 계획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불분명한 경계를 따져 물으려 고개를 들었으나... 회의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지금까지 누군가 있기는 했냐는 듯.
“허….”
헛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터졌다. 너무 많은 일이 한 번에 터지니 그저 멍했다. 차민은 루카스가 서 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텅 빈 공간 어딘가에서 여전히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루카스에겐 그럴 능력이 충분하니 얼토당토 않는 상상은 아니었다.
시험에라도 응하듯 차민은 눈에 잔뜩 들어간 힘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고도 한참 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다시 그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자마자 맥이 탁 풀렸다. 차민은 글자를 씹어 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몇 번이고 카드 위에 적힌 주소를 되뇌었다.
루카스가 멋대로 떠밀고 가버린 짐을 움켜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카드의 모서리에 짓눌린 살이 하얗게 질렸다. 오늘 마주했던 루카스의 경멸 어린 시선을 헤집고 사랑스러운 언젠가의 기억들이 드문드문 고개를 내밀었다.
푹 숙인 고개 끝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구두코가 보였다. 아마 루카스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비슷한 몰골이었던 것 같다. 차민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어지러웠다. 뒤로 되감기 시작한 시계 바늘 위로 올라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