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빗발치는 상소
아침 조례는 지난밤 집무가 없는 사이 지방곳곳에서 올라온 서류들을 처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방에서 정기적으로 올라온 이들은 때에 따라서는 관리일 때도 있고, 관리가 보낸 자일 때도 있다.
그런데 이날만큼은 지방에서 올라온 서류들을 처리하지 않고, 대신들이 올린 상소문부터 처리하게 되었다.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낸 대신들을 중심으로 모인 이들이 올린 상소문은 황제가 보기에도 가찮은 내용이었다.
후사를 볼 수 없는 사내아이를 황후로 삼은 탓에 국운이 기울고 있으며, 용정을 받아 다음대 황제를 생산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황후임에도 불구하고 의무를 다하지 않는 다는 것이 상소의 내용이었다.
상소를 읽어 내려가던 황제는 상소문을 올린 이들을 살생부(殺生簿)에 올려두었다.
“후사를 위해 후궁전으로 가라는 건가? 아니면 황후를 내쳐라?”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통촉하라....훗....내궁의 일을 그대들이 상관하는 것을 통촉하란 이건가?”
황제의 나직한 말에 내신들은 절을 하며 발발 떨기 시작하였다.
사실 황후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권력에 눈이 멀어버린 이들이 시작한 소란이었기에 정사를 보는 내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황제는 싸늘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다.
사실 후사라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후궁전에 있는 어떤 꽃이라도 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는 지금 후사를 볼 생각이 없었다.
아직 25살 밖에 안되어 살날이 많은 이상 지금 반드시 후사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선황제가 50세도 안되어 갑자기 자리를 물려주어서 현황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에 후사를 지금쯤 보는 것도 괜찮겠지만 현황제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이루기 전에는 후사에게 절대로 자리를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국경을 위협하는 변방 민족을 처리한 것은 현황제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 중에서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이 아닌 40세에 들어서 후사를 본 후에 황태자가 20세정도가 되면 자리를 물려주고 평온한 은퇴생활을 즐기려고 했다.
그런 황제의 마음을 모르는 이들이 후사에 대해 입을 놀리고 있는 것이다.
황제는 자신의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통촉하여달라고 외치는 이들을 싸늘히 보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을 이루려면 필요 없는 썩은 것들이지만 그들의 조상이 공신이라서 가만히 놔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진해서 제거해달라고 하다니....
“황제가 후궁전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의무가 아닐텐데? 그대들은 사가에서 첩실들과 의무적으로 밤을 보내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통촉이란 말은 그만하고 짐의 질문에 답하라”
황제의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자신의 딸을 사가의 하찮은 첩이라고 칭한다 해도 말이다.
통촉만을 외치고 있는 이들을 내려다보며 황제는 생각했다.
그들이 폐하라고 외치는 황후가 종친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그들이 어리석다고....
황제와 같은 항렬인 황후의 아비가 선황제의 이복동생이며 유일하게 황위 계승 서열 2위였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 그들의 실책인지도 모른다.
아침 조하가 끝난 후, 쌓인 서류들을 처리하며 자신의 그림자 호위의 장(將)인 균하가 보고하는 아이의 아침 일상을 들었다.
해가 뜰 무렵에 일어나는 황제와 달리 아이는 잠을 많이 자기에 점심이 다 되어갈 무렵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기에 아이의 주변에 숨어서 아이를 지키는 그림자 호위가 보고를 올리는 아이의 일상을 아침 조하가 끝난 후, 듣는 것이 황제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특히 아침 조하가 마음에 안 들었을 경우, 화를 가라앉게 해주는 진정제 역할도 해주었다.
“어제 독극물을 넣은 이들을 찾았나?”
“예. 폐하.”
“뒷배는?”
“1시진 전, 지하 고문장에서 자백을 받았다하옵니다”
황실 대대로 내려오는 그림자 호위의 고문 기술은 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하였다.
수많은 세월동안 연구한 탓에 고문 기술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 고문 기술은 황제가 자신의 정적들을 처리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으며 지금처럼 암살자들의 자백을 얻어내는 데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누구지?”
“....저....그게....”
균하는 자신이 보고를 올려야할지 말아야할지 조금 난감했다.
같은 후궁이면서도 황제를 모신 자들을 투기도 하지 않고, 평소 조용하다고 소문났으며 정숙하다고 칭송받는 영빈이 매수한 자들이 범인이었기 때문이다.
“영빈마마와 영빈마마의 외척이옵니다”
“영빈의 외척이라면 황후와 친척이 아니더냐”
“아기씨의 모친께서 영빈마마의 모친과 이복자매이십니다”
“그렇군”
평소 아이의 인척에 대해 조사는 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던 황제였다.
아니, 아이에게 있어서 그들과 인연이 끊어진지 오래기에 관심을 둘 생각도 없었다.
자신의 후궁에 아이의 사촌인 여자가 들어왔음에도 초야조차 보내지 않은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이전에 듣기로는 영빈의 모(母)가 영인왕(永仁王)과 혼사가 오고 갔다고 하던데....”
“예. 하지만 영인왕(永仁王)께서는 영빈마마의 모친과의 혼사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렇군”
영인왕(永仁王)이란 이름을 하사받은 아이의 아비는 자신과 혼사를 오고가던 여인을 거부했었다.
그 이유는 여인의 이복동생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세도가의 정실 부인이 낳은 여인을 거부하고, 천덕꾸러기였던 여인의 이복동생과 혼례를 올렸던 것은 일은 한참 화제가 되었지만 이유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황제께 한번 여쭤봐야겠군”
“네?”
“아니. 혼잣말이야”
황제는 영빈이 자신의 아이를 해하려 했던 것을 잊지 않기로 했다.
아이의 사촌이라서 그냥 두려고 했지만 영빈의 모친이 영빈의 뒷배가 되어 다시 아이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생각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듯 아이는 두 번째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아이는 유모를 졸라서 안하던 기미까지 하여 독이 없음을 확인한 당과를 주머니에 넣고는 정원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황후전에서 일하는 나인과 내관들이 물갈이 당한 탓에 아이의 또래가 없고 모두 40대를 넘긴 지긋한 나이인지라 아이가 놀 때마다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정원에는 황제가 직접 잡아다준 토끼와 노루가 뛰어놀고 있음으로 또래 친구가 사라진 지금 아이에게 있어서 정원이 가장 좋은 놀이터였다.
어른의 반토막 정도 밖에 안되는 다리로 얼마나 빨리 달리는 지, 나인들은 아이가 달려가는 것을 따라잡지 못하고 뒤쳐졌다.
아이는 나인들이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는 게 좋았던지 그림자 호위가 따르는 것도 알지 못 한채 숲으로 들어 가버렸다.
아이가 들어간 숲에는 반짝거리는 호수가 있는 데, 아이는 그곳에서 수영하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아이가 혼자라는 것을 누가 알았을 까?
-피융! 퍽!
간발의 차이로 아이의 앞에 화살이 꽂혔다.
아이는 갑작스럽게 날라온 화살에 놀라 주변을 돌아보는 데, 두 번째 화살이 아이에게로 향했다.
빠르게 날라 오는 화살은 아이에게 피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아이는 화살이 무서운 것이라는 걸 황제에게 배웠는 지라 맞으면 다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피할 수가 없어 눈을 꼭 감고 말았다.
“아기씨”
아이는 어느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있는 자는 아이에게 날라 온 화살을 잡고 있었다.
“아기씨. 죄송합니다만 눈을 감아주시겠습니까?”
-끄덕 끄덕
아이는 자신을 구해준 이의 말을 얌전히 들었다.
그림자 호위 중 한사람인 그는 아이가 눈을 감자 자신의 옷을 벗어 아이를 감싼 후에 아이를 안아들었다.
빗발치는 화살을 피한 그는 자신을 돕기 위해 달려온 동료들에게 화살을 날리는 암살자들을 처리하도록 하고 아이를 황급히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아이는 옷에 감싸져있어 눈을 뜬다고 해도 밖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뜨지 않았다.
“아기씨~~!!”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유모인 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림자 호위 중 한사람인 그는 아이를 자신의 품에서 내려놓았다.
아이를 감싸고 있는 옷을 거두지 않은 채 안심하라는 듯이 아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그는 아이에게 속삭였다.
“이제 안전합니다. 아기씨”
아이가 안전하다는 그 말을 남긴채 그는 유모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 사라져버렸다.
그림자 호위는 빛에 드러나선 안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림자 호위대의 대장인 균하만이 드러날 수 있을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