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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30화 (에필로그 완) (130/130)

에필로그 13화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진동하자 태서의 손끝이 천천히 바지를 더듬어 갔다. 몸에 달라붙는 슈트를 입어서 핸드폰을 상의 안쪽에 넣었는데 어느 순간에 다시 바지로 돌아갔다. 중간에 칵테일을 하나 더 시키는 사이에 바뀐 거 같았다.

그때부터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가끔 흔들리는 건 강세헌만 알고 있었다.

핸드폰을 손끝으로만 잡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상황이라 강세헌이 그에게 몸을 붙이고 팔을 뻗었다. 다행히 핸드폰이 떨어지기 전에 잘 잡아챘지만 태서의 움직임이 어딘가 위태롭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태서야.”

강세헌은 태서에게 붙인 몸을 떼지 않고 그 상태로 태서가 하는 짓을 봤다. 핸드폰으로 연락을 확인한 태서가 중얼거렸다.

“윤서가 자다 일어났대요.”

지금 잘 시간인데 큰일이네. 다시 깨면 잠들기까지 두어 시간이 걸린다는 말을 하던 태서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사라졌다.

“취했니?”

“몸에 힘은 없지만 그 정도는 아니에요.”

태서의 발음이 정확하니 강세헌도 더 묻지 않았다. 꼭 맨정신과 취한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나뉠 순 없으니까.

바에 깔렸던 선율이 길게 늘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 태서가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마셨더니 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바투 붙은 둘의 틈 사이로 흐르는 건 페로몬밖에 없었다. 농밀한 공기 속 태서는 눈을 깜박였다. 페로몬 때문에 시야가 안개가 낀 듯 흐려 보인 탓이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는데도 장막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진해져 왔다. 손등으로 눈두덩이를 비벼 보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포기했다.

“형.”

속을 뜨겁게 달군 게 술인지 아니면 페로몬인지 모르겠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그 열기가 점점 몸집을 키워 온다는 거였다. 배 속만 뜨거웠던 거 같은데 그 불씨가 가슴을 스치고 목을 데워 온다.

“저 많이 마셨어요?”

“칵테일은 두 잔이지만, 도수가 낮진 않았어.”

강세헌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흘러들어오는 숨결에 태서가 눈을 가물거렸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스키가 더 독한 것 같다.

“집에 갈까요?”

제 목소리조차 아득하게 들려왔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남아 있을 때 집에 가는 게 좋겠단 생각에 태서가 바 의자에서 내려오다 몸을 휘청거렸다. 의자를 잡고 지탱해 보려 했지만 강세헌에게 안기듯 반쯤 기대고 나서야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안고 가야 하나.”

장난으로 하는 말인 게 분명한데 제 허리를 잡은 손 때문인지 그냥 흘려 넘길 수 없었다.

“걸어갈 수 있어요.”

태서가 잘 걸어갈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고 그의 손을 떼어 냈다. 짧은 숨을 내쉬며 혼자 선 태서는 억지로 풀어지려는 눈에 힘을 주며 걸어갔다.

완전히 취한 게 아니니 걷는 정도라면 큰 문제가 없었으니까.

“아쉽다.”

강세헌의 말에 태서가 눈을 흘깃 뜨며 장난스레 노려보았다.

당장 안겨서 갈 뻔한 상황은 넘어갔지만, 한 번 더 휘청거리면 덜렁 들려 갈지도 모른다.

긴장을 놓지 않으며 걸어가는 태서는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듯한 복도를 걸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유독 조용한 복도라서 그런지 걸음 소리가 유난스럽게 울렸다. 좌우로 벽이 있어 통로 특유의 울림이 퍼졌다.

앞은 무엇이 있는지 모를 문이 전부다. 저 문 너머 제 원래 세상이 있는 건 아닐까. 이미 제 삶이 이곳에 넘어왔다는 걸 아는데 왜 이런 불안감이 드는 걸까.

한번 생각의 줄기가 생겨 나니 사방으로 가지가 뻗어 나갔다. 태서가 걷는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멈췄다. 혼자 걸어갈 수 있다고 당당히 주장했지만, 제 생각보다 더 많이 취한 걸까?

“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형이 잘 오고 있나 싶어서.”

태서가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형이랑 같이 나가려고요.”

그러면 어디든 두렵지 않을 거 같다.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이 남자니까.

“형.”

그의 옷이 온기를 품은 것도 아닌데 제 손을 따뜻하게 데워 왔다. 강세헌은 늘 그랬다. 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하고 몸이 늘어졌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았고 무언가를 하면 즐거웠다.

고민에 머리가 복잡할 때도 그와 대화하다 보면 아무렇지 않아졌고 힘들 때마다 그를 찾고 반대로 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자신만 기대고 싶은 그런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할까. 생각은 오래 걸리지 않아 나왔다.

“사랑해요.”

빳빳하게 당겨진 옷을 통해 강세헌의 몸이 순간 굳은 게 느껴지자 웃음이 나왔다. 강세헌을 사랑한다. 매 순간 느끼는 벅찬 감정은 전부 그를 향한 사랑으로 버무려졌다. 아니 근데 이 인간이 왜 이래.

“처음 고백 듣는 것처럼 굴면 어떡해요. 그럼 내가 미안해지잖아.”

“자주 듣질 못해서 그런가 심장이 떨리네.”

최근엔 윤서를 돌보느라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그 와중에 틈틈이 공부하느라 바쁜 매일을 보냈다. 바빠서 사랑한다는 고백 좀 소홀히 할 수도 있지.

“이전에 몇 번이나 했잖아요.”

아침에 눈뜰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다. 그러면 지금 덜 놀라지 않을까 싶은데…….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저 진짜 거짓말 안 하고 형 때문에 이렇게 살기로 결정했으니까 형 아니면, 읍!”

갑자기 턱이 들리며 두 볼이 잡힌다 싶은 순간 입술에 말캉한 것이 닿아 왔다.

아니, 닿았다고 표현하기엔 부족하고 강하게 눌렸다는 게 더 맞을 거 같다.

입술이 뭉개질 정도로 밀어붙여지자 태서가 눈을 떠 강세헌을 보려고 하는데 초점이 맞질 않았다. 강세헌의 얼굴보다 뒤의 천장이 더 또렷하게 잘 보일 지경에 태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혀?”

형이라는 발음은 강세헌이 입 안에 혀를 넣으며 받침이 사라지고 뭉개져 버렸다. 무작정 밀고 들어온 혀가 제 혀를 감싸고 치아를 훑었다. 뾰족하게 세운 끝으로 혀를 눌러 오니 피하려고 태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소용없는 몸부림이었는지 그의 혀가 더 깊게 들어왔다. 피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니 제게 무언가 갈구하는 듯 쑤셔 오는 혀 때문에 태서가 숨을 쉬지도 못한 채 따라가기 바빴다.

“자, 잠깐요. 여기에서…….”

누가 지나가면 어쩌냐는 말을 하려는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무슨 발음이든 혀가 움직여야 나올 수 있는데 한껏 벌어진 입에 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그의 어깨를 툭툭 때리며 잠깐만 비켜 달라는 표현을 하는 게 전부였는데 강세헌이 무언가를 건드는 걸 느끼는 순간 벽이 사라졌다. 뒤로 넘어갈 뻔한 태서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강세헌의 목을 잡았다.

손으로 그의 상의를 꼭 잡고 파르르 눈꺼풀을 떠니 놀란 게 그대로 드러난 모양이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짧은 웃음소리에 태서가 고개를 들었다.

“넘어지게 둘까 봐?”

“놀라게 하는 건 괜찮고요?”

누구든 기대고 있던 벽이 사라지면 놀랄 게 분명하다. 그나마 소리 지르지 않고 살아 보겠다고 손을 뻗은 게 전부니 이 정도면 꽤 잘 반응하지 않았나?

그와 입 붙이고 있을 때 소릴 낸 거 같지만, 모른 척했다.

“태서야.”

강세헌의 품에 안겨서 옴짝달싹 못하던 태서가 눈동자만 겨우 위로 올렸다. 보이는 건 강세헌의 머리카락과 귀가 전부였다.

“사랑해.”

제 몸을 끌어안는 힘이 무지막지해서 숨 막혔지만, 귓가에 속삭여 오는 다정한 목소리 때문에 밀어 내지 않았다.

‘붉어진 귀도 봐 줄 만하고…….’

“저 있잖아요. 아침마다 형이랑 눈 마주치면 고백하려고 하는데 형도 할래요?”

“몸으로?”

태서가 키득거리며 웃더니 강세헌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요.”

***

문을 열고 나오자, 어두운 골목과 가로등이 보였다. 옆엔 여전히 강세헌이 있었고 자신은 여전히 윤태서다.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졸업이고 부모님의 옆에서 일을 배울 예정이다.

강세헌의 오메가이며 배우자이고 윤서를 낳았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둘째도 낳고 싶고, 쉽진 않지만 강학중 할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 같이 살 기회를 노리고 있다.

처음 악역의 몸에 빙의 되었다고 절망하고 슬퍼하던 이는 사라졌다. 이제 미래를 꿈꾸고 가끔 오늘처럼 소소한 일탈을 즐거움 삼아 살면 좋겠다.

‘다음엔 특이한 거 입혀 봐야지.’

강세헌을 훑어보는 태서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장난기를 감췄다.

“태서야. 다음엔 정말 고양이가 될지 모르니 긴장해.”

강세헌이 코웃음 치며 태서의 속을 들여다보았다.

“두고 보지요.”

태서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 응수하고 있으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웃음이 가라앉을 때쯤 태서가 주변을 불어오는 바람 냄새를 맡았다.

완연히 가을로 접어든 날씨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태서가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는 동안 강세헌이 핸드폰을 꺼냈다. 술을 마셨으니 운전할 수 없어 대리를 부르려는데 태서의 나직한 부름이 들려왔다.

“걸어갈까요?”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강세헌이 태서의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태서를 보던 강세헌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빈손을 내밀었다. 인기척을 느낀 태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걸어가도 좋을 날씨네.”

강세헌이 제 손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태서가 씩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제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아 주는 상대가 있다는 게 좋았다.

“윤서 내일 데리고 올까요?”

“그래.”

“윤서 안고 잘까요?”

“그래.”

“좋아요. 그럼 윤서 아기방에 두고 우리 둘만 자기로 해요.”

태서가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고 강세헌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둘째 생기면 강헌이라고 해야지.”

“……임신했니?”

“아니요.”

손을 잡은 채 걸어가는 둘의 입가에 같은 미소가 걸렸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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