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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28화 (128/130)

에필로그 11화

백화점 한가운데 선 강세헌은 태서의 설명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그러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태서가 백화점 가자고 해서 왔다. 그리고 한 말이…….

“서로 입혀 주고 싶은 걸 골라 오자고?”

“네. 형은 제가 어떤 옷을 입었을 때가 제일 예뻤어요?”

“늘 예뻐서 모르겠는데.”

뻔뻔하기로는 원체 자신 있는 태서도 이번만큼은 부끄러워했다.

“얼굴이 빨개졌네.”

“형이 저를 너무 좋아하니까 그렇죠.”

“알고 있으면서 새삼 느껴져?”

세헌이 살짝 웃으며 상체를 숙여 눈을 마주쳐 왔다.

“어쨌든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게 있지 않을까요?”

강세헌이 태서의 얼굴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길고 곧은 목에 일자로 뻗은 어깨선, 탄탄한 가슴과 긴 다리만 보면 잘생긴 느낌이다. 그러나 옴폭 들어간 허리선이나 일자로 뻗은 팔과 다리의 선은 예쁘다는 인상을 풍겼다. 옷을 입고 있을 때와 벗고 있을 때 다른 느낌을 주는 몸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어떤 옷을 입냐보다 벗고 있을 때가…….

“저한테 잘 어울리는 옷이 있지 않냐고 물었는데 왜 그렇게 봐요?”

“내가 어떻게 봤는데?”

“변태같이.”

“무슨 변태야.”

“아닌데, 내 몸 막 훑어보면서 입맛 다시는 거 봤는데.”

“…….”

강세헌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눈빛은 나중에 하고요. 저를 다시 보세요.”

강세헌의 표정으로 대답을 읽은 태서가 검지를 세우며 자신을 보도록 했다.

“옷. 벌거벗은 임금님 만들지 않을 거면 저한테 어울리는 예쁜 옷을 사 주세요.”

이렇게 되니 강세헌도 마냥 예쁘다 하던 자세를 버리고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태서의 얼굴, 체형, 분위기 등을 따지고 있는 모습을 보니, 한번 마음을 먹자 제대로 할 생각인가 보다.

“아무거나 상관없는 거야?”

“아무거나의 범위가 어디까지인데요?”

태서가 능청스러운 대꾸에 강세헌이 목울음을 울렸다. 순순히 대답하지 않는다?

“인형 탈 씌워도 돼?”

“당연하죠. 저한테 어울리는 이미지로 사 주세요. 맹수나 공룡 쪽으로요.”

“여우나 고양이로 해야 하지 않아?”

“어떤 것이든 구할 수 있다면요.”

장소가 장소인 만큼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태서의 여유로운 뒷말이 붙었다.

“교복이나 한복도 잘 어울리겠네.”

“갓 쓰고 돌아다니면 꽃 선비가 저죠.”

태서가 제 턱을 살살 쓰다듬으며 눈웃음 지었다. 자신의 외모에 한껏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자신감을 좋아하지만, 이번만큼은 당황한 얼굴을 보고 싶었다.

“제대로 하고 싶어지네.”

“그렇죠? 각자 사서 여기서 만나요.”

백화점에 와서 이런 이벤트를 하는 게 당황스러웠는데, 또 재밌을 것 같았다. 강세헌이 태서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싫다고 하기 없기다.”

“당연하죠.”

태서가 강한 긍정을 내보이며 먼저 돌아섰다. 처음부터 생각해 둔 게 있는 듯 그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태서가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던 강세헌이 핸드폰을 들었다.

“강세헌입니다. 옷을 사려고 왔는데…….”

전화를 받는 이가 어딘지 물어보니 강세헌은 대충 보이는 매장을 말해 주고 핸드폰을 내렸다.

“직접 걸어 다녀서 사라고 안 했다.”

***

VVIP룸에서 옷을 갈아입는 게 어떠냐는 퍼스널 쇼퍼의 제안을 거절한 채 강세헌은 이벤트 홀에서 태서를 기다렸다.

“형.”

종이 가방을 들고 나타난 태서가 멀리서 팔을 흔들었다. 그것을 본 강세헌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태서가 다가오는 걸음걸음, 그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언제부터 기다렸어요?”

“꽤?”

“오래 기다렸다고요? 그럼 연락하지.”

태서가 미안한 얼굴로 강세헌을 올려다보다가 슬쩍 혼잣말을 흘렸다.

“그런데 보통 오래 기다려도 방금 왔다고 하지 않나?”

“널 기다리는 시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네요. 자, 그럼 옷을 갈아입어 볼까요.”

태서가 제 종이 가방을 열어 주섬주섬 옷을 꺼냈다.

“티는 금방 골랐는데 바지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요. 형 키가 너무 커서 길이가 맞는 게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기성복보단 맞춤복을 선호하지만 강세헌은 말없이 태서가 꺼내는 걸 바라보았다.

“여기요.”

태서가 내민 옷을 받아 든 강세헌이 천천히 상의와 하의를 훑어갔다.

하얀 반팔 티와 청바지라……. 생각보다 평범해서 강세헌은 정말 이게 전부인가 싶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입히고 싶은 옷이라고 했지 특이한 옷을 입히고 싶다고 안 했는데요.”

“그럼 네가 보고 싶은 게 이거야?”

“네. 다녀오세요. 아니면 같이 들어갈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벤트홀의 탈의실을 이용하는 거라 주변에 직원이 많았다. 안 그래도 주목을 받고 있는데, 둘이 같이 탈의실에 들어가면 그들의 상상에 불을 지펴 주는 격이었다.

강세헌은 상표도 떼지 않은 새 옷을 바라보다가 탈의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바깥에 붙어 있는 거울이 태서의 얼굴을 비쳤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광대가 올라가 있는 게 한껏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진정 진정.”

태서가 제 광대를 살살 어루만지다가 뒤늦게 떠오른 게 있어 재빨리 움직였다. 강세헌이 나오는 동시에 덮으려면 지금 준비해야 한다.

한편 탈의실 안으로 들어간 강세헌은 옷걸이에 티와 바지를 걸어 두고 보았다.

정말 이 흔한 의상을 입은 걸 보고 싶었다? 태서가 그렇다고 하니 강세헌은 의심 없이 제 슈트를 벗었다.

강세헌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태서가 두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얼굴에 씌웠다.

“왼팔, 오른팔.”

태서가 부르는 대로 팔을 쏙쏙 빼고 보니 흰 티 위로 검은 티가 올라왔다. 윤서에게 하듯 옷을 입힌 태서가 다 됐다는 듯 손을 뗐다. 처음부터 티 두 장과 청바지를 준비했다.

태서가 강세헌의 주변을 돌면서 세심히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형한테 청바지가 잘 어울릴 줄 알았어요.”

슈트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냥 무엇을 입든 다 예뻤다. 강세헌이 마지막으로 운동화까지 갈아신고 나서야 태서를 바라보았다. 기본 티에 청바지를 입은 건 태서도 마찬가지라 커플로 맞춰 입은 듯한 느낌이 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번엔 내 차례네.”

그제야 강세헌이 산 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는 태서의 얼굴에 점점 의문이 차올랐다.

“어디 있어요?”

강세헌은 대답 대신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이쪽으로 가져다주세요.”

누구에게 연락을 했을지 곰곰이 생각하던 태서가 뒤늦게 당했다는 눈빛을 드러냈다.

“누가 강세헌 아니랄까 봐 치사하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다니…….”

“틀렸어. 윤태서 아니랄까 봐라고 해야지.”

강세헌이 웃으며 팔짱을 낀 사이 사람들이 다가와 태서를 둘러쌌다.

“죄송하지만 이곳에서는 옷을 갈아입기가 여의치 않아서 저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태서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탈의실에서 갈아입지 못할 게 뭐가 있나 싶은데 자세히 물어볼 수 없었다.

그렇게 VVIP룸까지 가서 옷을 입었다.

일단 옷을 입는 것까지는 별다른 게 없었는데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붙어 가벼운 가봉 작업이 진행되었다. 태서에게 어울리는 쓰리피스 슈트를 고른 건 강세헌이었지만, 디테일한 부분들은 전문가들의 솜씨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은 태서는 야무지게 단상에 올라서 강세헌을 맞이할 준비를 맞췄다.

당했어.

태서가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사이 커튼이 열리며 소파에 앉아 있던 강세헌과 눈이 마주쳤다.

“…….”

“…….”

“이런 장면 드라마에서 나올 때 채널 돌렸거든요? 막 사람 손발 오그라들잖아요. 그리고 너무 진부해.”

그걸 지금 제가 하고 있었다.

“클리셰는 영원하니까.”

강세헌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진지한 눈으로 태서를 바라보았다.

“그럼 형도 저 보자마자 놀라서 넋 놓고 바라봤어요?”

“샅샅이 훑어보기도 바쁜데 넋 놓고 볼 시간이 어딨어.”

“와…….”

태서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은 사이 강세헌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살펴봤다.

숨겨진 몸의 라인이 드러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고른 옷은 제 생각 속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졌다.

셔츠가 몸에 잘 맞아서 그런지 슈트의 핏이 유난히 깔끔하게 떨어졌다. 해맑고 순수해 보이던 태서에게서 관능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예쁘네.”

“그래요?”

“네가 보기엔 어때?”

태서가 사방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야한 거 같아요.”

자신도 모르는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어색함을 떨칠 수 없었다. 이후로도 제 모습을 빤히 보던 태서가 나중에 기막힌 웃음을 흘렸다.

“형이 나한테 보고 싶은 게 이거였구나.”

태서가 단상에서 내려와 강세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까이에 서서 서로를 보니 아까와 반대가 되었다. 강세헌은 슈트에서 청바지로 태서는 청바지에서 슈트로.

“이제 어디 갈까요?”

“내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괜찮다면 거기로 가고.”

“좋아요.”

태서가 강세헌의 손을 잡고 걸어가자 퍼스널 쇼퍼를 비롯한 직원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남몰래 웃었다.

강세헌이 입은 평범한 검은 티의 등판에 곰이 프린팅되어 있었다. 그것도 뒷모습이 그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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