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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27화 (127/130)

에필로그 10화

강세헌이 윤서를 안고 대학교에 온 게 인상 깊었나 보다.

태서가 윤서를 단단히 안고 회사 앞에 나타난 걸 보면 말이다. 높은 건물을 고개를 젖혀 바라보던 태서가 윤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느꼈던 그 감정을 형이 고스란히 느껴봐야 해. 그렇지, 윤서야?”

똑같이 복수하겠다는 듯 굴지만 태서의 입가가 움찔거리며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하는 모습이,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기대하는 모양새였다.

“형이 너 안고 나타났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알아?”

생각지도 못해서 더 좋았던 것 같았다. 그냥 봐도 귀여운 윤서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얼마나 귀여웠는지. 거기다 강세헌은 정말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멋진 사람이 아기 띠를 매고 나타났으니 보자마자 입이 찢어질 듯 웃음이 나왔다.

“분명 형도 좋아하겠지?”

윤서의 볼을 톡톡 두드리는 태서가 단단히 마음을 먹고 걸음을 옮겼다.

***

분명 강세헌에게 바로 갈 생각이었다. 그와 함께 대학교를 거닐 때를 생각했으니까 어려움 없이 사무실까지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윤서 맞죠? 안녕 윤서야.”

“몇 개월이죠?”

“이제…….”

“육 개월 넘었잖아. 곧 칠 개월 될걸?”

안면이 있는 두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알아서 이름을 언급하고 인사를 해 오는가 하면 몇 개월인지 물어서 대답해 주려는데 다른 사람이 해 줬다.

태서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이름도 알고 개월 수도 알고. 강세헌 전무의 아들인 것도 알았다.

강세헌의 2세 소식이 알음알음 알려진 만큼, 아이를 특별히 좋아하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어쩜 이렇게 전무님이랑 똑같지?”

“오늘은 하늘색이네? 이모는 네가 노랑 입었을 때도 좋았는데 하늘색도 좋아질 거 같아.”

그냥 비서실이나 전무님 직속 부서라면 어느 정도 이해하겠는데 로비를 가로지르는 사람마다 말을 걸어오는 걸 보면 부서를 특정 지을 수 없었다.

“윤서야, 자주 와.”

“내가 안아 주고 싶다.”

“나는 윤서 입에 넣고 아르르 하고 싶어. 너무 귀여워.”

엘리베이터까지 겨우 갔다 싶은데 내리는 세 사람에게 잡힌 태서는 이제 포기한 듯 가만히 있었다. 윤서가 싫어한다면 모르겠는데 자기 예뻐하는 걸 아는지 아주 신이 났다.

“까아. 바바. 어버버.”

“옹알이 너무 귀여워.”

“전무님 닮은 얼굴로 이런 목소리라니 신기해.”

“저…….”

어느 정도 감탄이 잦아들 때쯤 태서가 운을 뗐다. 그제야 제게 쏠리는 세 사람의 시선에 태서는 궁금한 걸 물어봤다.

“이 아기가 윤서인 건 어떻게 아세요?”

“네? 그야 전무님 아기니까 알죠.”

“그렇긴 한데 아기 이름이랑 또…… 개월 수 이런 거는 잘 모르지 않아요?”

제 아이를 예뻐해 주는데 싫어하는 부모는 없다. 다만 너무 당연하게 알고 있으니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윤서가 베이비 모델도 아닌데 어떻게 그리 자세히 아는지 말이다.

“아아.”

태서가 어떤 걸 궁금해하는지 안 사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별거 아니란 듯 말했다.

“혹시 전무실 가 보셨어요?”

“아직요.”

“그럼 우리한테 듣는 것보다 가서 보시는 거 더 나을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곧 퇴근 시간이네. 서두르세요.”

누군가 손목시계를 보더니 직접 엘리베이터를 잡아 줬다. 문이 열리니 태서에게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까지 했다. 엉겁결에 움직인 태서가 멍한 눈으로 그녀들을 보았다.

“그…… 감사합니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엉거주춤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윤서까지도 반가운 듯 팔다리를 마구 흔들어 웃어 주니 세 사람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되자 태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다르게 흐른 상황에 어쩔 줄 몰랐다.

“형은 이렇게 오지 않았던 거 같은데…….”

공원을 산책하듯이 걸어온 강세헌에 비하면 자신은 힘겹게 정글을 빠져나온 기분?

어쨌든 고지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태서는 아기 띠를 잘 정리했다. 제일 중요한 정글의 왕이 남았다.

***

“안녕하세요. 혹시 전무님 안에 있어요?”

태서는 곧장 낯이 익은 비서에게 가서 인사와 함께 물었다. 그러자 비서가 벽시계를 확인하더니 곧 나올 거라 대답했다.

태서도 따라서 시계를 확인하니 6시 되기 직전이었다.

“흐음.”

평소에도 칼퇴가 아닌 이상 이렇게 빨리 올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일찍 오더니 맞나 보다. 그리고 정확히 6시가 되자마자 전무실이 열리며 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들어갑니다.”

슈트의 칼라를 정리하면서 나오는 게 아마 급하게 걸친 모양이었다. 강세헌이 남은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그 찰나, 태서가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자리로 들어갔다.

“태서?”

태서를 발견한 강세헌의 눈빛에 놀람이 나타나더니 이내 그 모든 감정이 기쁨으로 변해 갔다. 그 변화를 바로 앞에서 지켜본 태서가 당황할 정도로.

“좋아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이야.”

태서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강세헌이 가까이 다가왔다. 평소엔 잘 하고 다니지 않던 아기 띠까지 매고 온 태서를 귀여운 눈으로 보다가 윤서를 꺼내 안았다.

“내가 윤서 데리고 학교 간 걸 따라한 거야?”

“그렇긴 한데…….”

괜히 따라했나 싶은 생각은 조금 있었다고 말하려고 했다. 아직도 이유를 모르지만 회사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과 윤서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으니까.

“좋네.”

강세헌의 한마디에 태서는 힘들었단 말을 도로 삼켰다. 그래, 그를 기쁘게 해 주려는 게 목표였으니까.

“저 그런데 형 사무실 한 번만 봐도 되나요?”

“내 사무실?”

강세헌이 의아한 듯 물었고 태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힘겹게 뚫고 왔으니 대체 어떤 이윤지 궁금했다. 지금껏 그가 일하는 공간을 보고 싶단 생각을 많이 해 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궁금했다.

강세헌이 잠시 생각하더니 그러라며 돌아섰다. 나왔던 곳을 도로 들어가며 아까부터 보고 있던 사람들에게 퇴근할 것을 지시했다.

그제야 굳어 버린 사람들이 하나둘 가방을 정리하는 걸 보며 태서가 따라 들어갔다.

반쯤 열린 문을 밀어서 안으로 들어가던 태서는 반사적으로 전무실의 풍경에 감탄을 흘렸다.

“와…….”

새삼 강세헌이란 사람이 어땠는지 떠올려 보았다. 제게는 다정한 사람이긴 하지만 첫 만남을 생각해 보면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일적으로는 더 맺고 끊음이 확실해서 차갑지 않을까 생각했던 게 강세헌을 향한 느낀 점이었다.

그런 사람이…….

“여기 다른 사람도 드나들지 않아요?”

“그래도 기본적으로 내 공간이니까.”

“그렇긴 한데…….”

태서가 벽을 따라 걸려 있는 작은 액자들을 보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놓인 액자 속엔 자신과 윤서, 또는 강세헌까지 셋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보통 자기 책상 위에나 액자를 하나 두지 이렇게 많이 두지 않잖아요.”

일하는 공간이기에 최소한으로 두는 거 같은데 여긴 대충 보이는 것만 열 개가 넘었다. 말로는 이래도 되나 싶은데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자신과 윤서를 향한 애정이 보여서 좋았다.

“할아버지가 보시면 뭐라고 하시지 않을까요?”

“……몇 개 가져가던데.”

혼내는 게 아니라 사진을 가져갔다고 하니 태서는 미소를 짓고 말았다. 어쨌든 회사 사람들이 윤서의 얼굴을 알아보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어? 그런데 윤서 개월 수는 어떻게 알았지?”

“그건 내가 알려 줄 수 있을 거 같구나.”

“할아버지.”

태서가 반갑게 소리쳤다. 강학중 회장이 들어오더니 뒷짐 지고 태서처럼 벽을 따라 걸었다. 액자를 하나하나 바라보더니 어떤 것에선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익숙한 듯 그 액자를 집더니 그의 수행 비서에게 넘겼다.

저렇게 가져가셨구나.

“전무란 놈이 정시 퇴근하기 시작한 게 딱 그 무렵부터지. 그것만일까. 무슨 프로젝트 이름을 정하려고 할 때마다 그리 증손주의 이름을 거들먹거리니 임원도 다 안다. 저 팔불출.”

다 강세헌 때문이라고 말하는 강학중 회장의 혀 차는 소리에 태서가 다가가서 팔짱을 꼈다.

“할아버지께선 저나 윤서 이야기 안 하셨고요?”

“나는 안 했다.”

“……이사…회.”

뒤에서 강세헌이 억울하다는 듯 내비친 작은 목소리는 강학중 회장의 헛기침에 묻혔다.

“그런데 제가 온 줄 어떻게 아셨어요?”

할아버지가 이곳에 왔다는 건, 자신과 윤서가 회사에 왔다는 걸 알았다는 뜻이기에 더 궁금했다. 오늘은 일부러 강세헌을 놀라게 해 주려고 조용히 나타났으니까.

“숨기면 뭐 하느냐. 다 아는데.”

“하긴…… 저 진짜 윤서가 베이비 모델 된 줄 알았잖아요. 한 사람도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없었어요.”

“모델 사이에 끼워 넣어도 부족하지 않지.”

강학중 회장이 윤서에게 두 손을 뻗으며 말했다. 당연히 윤서는 강학중 회장을 향해 반갑다는 듯 두 팔을 뻗었다. 오늘도 할아버지에게 윤서를 빼앗긴 강세헌이 제 허전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특별한 일 없으면 둘이 놀아라. 증손주는 내가 데려가마.”

강학중 회장이 비서에게 눈짓하니 그가 알아서 태서가 아직 메고 있던 아기 띠를 풀어 주곤 챙겼다.

윤서는 품에 얌전히 안겨서 인사하는 것처럼 두 손을 흔들곤 강학중 회장과 함께 사라졌다. 얼떨결에 강세헌과 태서 둘만 남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태서가 강세헌의 손을 잡았다.

“데이트할 기회가 생겼네요.”

강세헌은 허전했던 마음을 태서로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까지 봐 달라고 하자.”

“네? 하지만 할아버지가 그렇게…… 으앗.”

태서가 걱정스러운 말을 내비치는데 몸이 쏠리며 말이 끊겼다. 이미 강세헌은 둘이 있을 생각에 태서의 말을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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