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8화
갑자기 시작된 야자 타임이지만 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강세헌이 참 좋지만, 너무 좋지만, 그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니까.
“세헌이 너 그러면 안 돼.”
태서가 고개를 저었다.
“질투하는 거 되게 귀여운데 적당히 해야지. 그러다 형 허리 나가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다가 너 평생 형 수발한다?”
저번에 강세헌이 밀어붙일 때 그렇게 그만해 달라고 했던 일이 있었다.
“평생 수발해도 괜찮으면 더 해도 되나요?”
“얘가 말뜻을 못 알아듣는구나. 프로젝트 같은 거 맡으면 잘하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그래요.”
“그래, 밑에 사람들 적당히 괴롭히고.”
“네 형.”
강세헌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가 널 제일 좋아할 거란 생각도 버리고. 할아버지를 더 좋아할 수도 있지 그거 가지고 질투해서 다음엔 안 간다는 말이 나오니? 그때 나 많이 창피했다. 세헌아.”
“그러셨어요?”
야자 타임이라는 게 참…… 이렇게 재밌는 건 줄 알았으면 더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강세헌의 목소리가 낮아진 걸 모른 태서가 신나게 떠들어 댔다.
“앞으로 내가 졸업하고 사회 생활할 때마다 이렇게 일일이 신경 쓰고 그럴 거야?”
“형이 좋아서요.”
“나도 세헌이 네가 좋지. 솔직히 네가 그 얼굴로 돌아다니는데 내가 얼마나 불안할지 생각 안 해 봤니?”
“그랬어요?”
“당연하지. 그래도 난 잘 참았어.”
예전에 정해진과 선보는 자리에 끼어들고 서다래와 마주 선 게 싫어서 방해한 것치고 담백한 목소리였다.
“나는 세헌이 주변에 있는 사람 전부 질투하진 않는단다. 그런데 넌 그 어린 공룡한테도 그러고…….”
“그게 제 관심의 표현이긴 한데 형이 싫으시면 안 할게요.”
“그럴래?”
“네. 그리고 형이 싫다 하시면 아예 질투 안 할게요.”
“응? 아예 안 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젠 누가 들어도 강세헌의 목소리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겠다. 그제야 야자 타임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 태서가 강세헌의 옆모습을 보았다. 말로만 자신을 형이라 불렀지 그의 표정은 완전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이상은 안 돼.’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낌 태서가 제 아랫입술을 물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구는 게 제일 중요하다.
“싫긴 왜 싫어. 그런 게 다 네 애정인데……. 나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다?”
“그럼 질투해도 되나요?”
“그…… 적당한 정도라면?”
어느 정도 타협을 볼 수 있다면 괜찮다 싶어 말하니 강세헌이 태서의 손을 잡아 왔다.
“다른 사람이 형 손 잡으면요?”
“에이, 누가 그렇게 손을 잡는다고 그… 질투해도 돼.”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 같다고 말하던 태서가 잡힌 손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말을 바꿨다. 그래, 그런 경우는 없겠지만 대답이 어려운 건 아니니까.
“그럼…….”
손을 놔주자 재빠르게 숨긴 태서가 한발 늦게 고개를 들었다. 강세헌이 태서의 몸 위를 덮듯이 올라온 것이다. 상체를 뒤로 젖힌 태서가 마른침을 삼키며 강세헌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형한테 가까이 몸을 붙이면요?”
“이런 식으로 붙일 사람은 없는데…….”
“그러면 질투해도 돼요?”
옷 안으로 들어온 손이 배를 훑어 내리니 허리가 잘게 떨렸다.
“이 자세라면 마음껏, 하읏.”
갑자기 터져 버린 신음에 태서가 놀라서 제 입을 막았다. 크게 떠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강세헌의 손이 약한 옆구리만 지나지 않았어도 이런 소리가 나지 않았을 거다. 제 약한 부분을 다 알면서 모른 척 만져 대는데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건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깐만, 세헌아. 갑자기 이러면 안 되지.”
태서는 일단 진정하라는 의미로 두 손을 들었다. 억지로 손을 떼지 않을 테니 알아서 놔달라는 거였다.
“형, 제가 질투하지 않으려면 형의 도움이 절실해요.”
“지금 네 손이 떨어지길 바라는 내 마음이 더 절실하지 않을까?”
“태서 형. 제 마음 알죠?”
“……세헌이 형. 형도 제 마음을 아신다면 그만하면 안 될까요?”
야자 타임은 끝내잔 의미로 태서가 잔뜩 울상을 지으며 강세헌을 올려다보았다.
“태서야.”
말뜻을 알아들은 강세헌은 여전히 태서의 위에서 눈웃음을 지었다.
“너라면…….”
강세헌의 길게 늘어지는 말끝에 태서가 긴장된 침을 삼켰다. 어느새 가슴 위로 올라간 티를 내리고 싶은데 제가 손가락을 꿈쩍하는 순간 신호탄을 터트리는 게 될 것이다.
“여기서 그만둘 수 있겠어?”
“……아니요.”
이런 질문에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게 한탄스럽다.
태서는 강세헌의 목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틈 없이 입술을 포개며 눈을 감았다.
전부 야자 타임에 휩쓸린 제 탓이지.
희미한 웃음소리와 함께 태서는 눈을 감았다. 서로의 혀가 얽히고 숨이 끊어지기 시작하니 이제는 무슨 말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은근하게 오르기 시작하는 열에 기대 강세헌이 주는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아, 웁.”
태서가 고개를 젖혀 강세헌이 더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내어주었다. 억눌린 신음 소리마저 강세헌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듯하니 오늘 잠은 다 잤다는 생각뿐이었다.
‘다음부터는 하지 말아야지.’
강세헌은 태서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며 흘러나오는 신음을 달게 삼켰다. 질투가 전부 자극이 되어 그의 몸을 달아오르게 해 이렇게 되었지만, 뇌리 한편엔 공룡에 대한 생각을 지우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공룡에게 아주 따끔한 본때를 보여 줘야겠다.
***
“정말 혼자 가도 괜찮으십니까?”
“모교인데 길 하나 모를까 봐?”
강세헌이 카 시트의 벨트를 푸르고 있으니 운전석에 있던 박한수가 내려서 뒤로 갔다. 문을 열자 강세헌이 윤서를 안고 내렸다.
“그렇게 가시게요?”
박한수가 다시 걱정을 드러냈지만 강세헌은 외려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직접 윤서를 안고 가신다고요?”
“내 아들이니까 내가 안는 게 맞지.”
강세헌은 이상한 말을 다 한다는 듯 박한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지나갔다. 여전히 그의 품엔 윤서가 있었다.
“아기 띠로 윤서를 안고 가는 강세헌 전무님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겁니다.”
박한수는 계속 잡고 있던 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강세헌은 아기 띠로 윤서를 제 몸에 단단히 고정했다. 그러니까 그의 가슴과 배에 윤서가 안겨 있는 모습이었는데 둘이 함께 대학교를 구경하고 있으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볼이 빵빵하니 귀여운 아가를 먼저 보다가 뒤늦게 아빠를 보고 놀라곤 했다.
“강세헌이야.”
“KH 강세헌.”
“……학교에 다닌다더니…….”
“태서…….”
드문드문 말이 들려오니 자신을 아는 이가 많았다. 그들 사이를 태연히 지나가며 강세헌은 윤서의 볼을 손등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윤서 네가 내 본때가 될 거야.”
공룡의 앞에 당당히 내세우려고 앞을 보게끔 맸다. 그래야 윤서의 귀여운 얼굴이 더 잘 보일 테니까.
“울어도 되고 웃어도 된다. 잘 부탁한다. 윤서야.”
아빠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서인지 윤서는 낯선 공간을 어색해하지 않고 즐거워했다.
그렇게 강세헌과 강윤서는 태서가 있는 곳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태서가 있는 강의실이 1층에 있는 걸 확인하고 왔다. 그렇다면 건물 밖에서 태서가 보일 수도 있겠다.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 태서의 앞에 나타날 생각이지만 수업을 듣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윤서 너도 그렇지?”
강세헌이 윤서의 머리를 어루만지다가 물었고 윤서는 온몸을 바둥거리며 좋아했다. 팔다리가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귀여워서 잠시 멈춰 선 강세헌이 윤서의 턱을 훔쳤다.
좋다고 난리 치는 걸 보니 침을 잔뜩 흘려 댔을 게 뻔해서 그랬는데 역시나 손에 침이 묻어났다. 침독이 오르지 않게 아기 손수건을 꺼내 닦아 준 강세헌이 고개를 들었다.
“진짜 가 볼까?”
계속 윤서가 귀엽다고 신경 썼다간 태서의 수업이 끝나겠다.
강세헌은 아까보다 더 늘면 늘었지 절대 줄어들지 않은 시선 사이로 꼿꼿하게 나아갔다.
건물을 끼고 돌던 강세헌이 반가운 얼굴을 발견한 듯 윤서에게 말했다.
“운이 좋네. 저기 네 아빠 있다. 윤서야.”
창가에 앉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을 수 있었는데 다행히 태서가 창가 근처, 밖에서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집중한 태서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세헌이 미소 지었다.
“집중하는 모습이 참 예쁘고 멋지네.”
평소엔 장난을 잘 치다가도 저렇게 진지한 모습을 보이면 그렇게 눈을 뗄 수가 없다.
“저렇게 매력이 넘치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어.”
윤태서라는 인간을 모를 땐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자신만 알고 싶었다. 자신만 윤태서의 전부를 알고 다른 이에게 내보이기 싫었다. 제게만 윤태서가 예뻐 보일 게 아닌 걸 아니까 더욱 남들이 몰랐으면 싶었지만…… 그 모든 게 다 제 이기적인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네가 봐도 멋있지?”
“까아.”
강세헌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윤서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또 바둥거려 왔다.
“너도 아빠를 발견해서 좋은 거 알겠는데 진정해.”
강세헌이 윤서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대답해 주고 고개를 들 때였다.
방금까지 교수를 보던 태서가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수업이 끝난 모양이다.
전부 가방을 싸고 나가는 와중에 태서는 여전히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는데 옆에 앉은 누군가가 가까이 얼굴을 붙이고 속삭여 왔다. 생각 이상으로 가까워 보이는 공룡과의 사이에 강세헌의 눈매가 좁혀 들었다.
“아무래도 야자 타임을 한 번 더 해야 할까?”
이번엔 일정 거리 안에 다른 이를 들이지 못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