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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23화 (123/130)

에필로그 6화

따로 자리를 잡은 강인혁은 태서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었다. 이젠 전부 털어 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주 보기가 편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 제 걱정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다는 이가 나타나더니 알아서 한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너 대체 언제부터 여기 와 있었냐?”

강인혁이 기가 찬 시선으로 박한수를 보았다. 강세헌의 비서로 취직한 건 봤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늘 주말이라 회사도 안 나가지 않냐?”

“오늘은 태서 친구로 왔는데?”

“너…….”

강인혁이 박한수의 능청스러움을 알고도 당황해하고 있으니 태서가 손을 저으며 끼어들었다.

“한수가 여기 있는 건 신경 쓰지 마.”

그러고는 박한수가 따라 주는 차를 마셨다.

“인혁이 너보다 더 할아버지랑 친할지도 몰라.”

박한수가 강인혁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요즘 회장님이 자주 드시는 차.”

강인혁이 은은한 녹빛을 띠는 찻물을 보다가 헛웃음과 함께 받아 들었다. 자연스럽게 끼어들어서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확실히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효과가 있었다.

“하긴 사교성으로 박한수만 한 애가 없지.”

“그러게.”

태서도 그건 인정하는지 박한수의 얼굴을 보고 혀를 찼다. 한미래랑 연애하기 바쁠 놈이 틈틈이 할아버지를 뵈러 오고 또 태서의 부모님도 찾아뵈었다.

“너, 너희 부모님은 자주 만나?”

“당연하지.”

박한수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이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일도 바쁘잖아. 그런데도 그렇게 사람들 챙기는 게 가능해?”

“잠을 줄이면 된다.”

“잠?”

박한수의 비법 아닌 비법에 강인혁과 태서가 그를 돌아보았다.

“잠을 줄여서 일하는 거라고? 그러다가 건강 망친다.”

태서가 그러지 말라는 듯 손사래 치니 박한수가 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신생아 키울 때보다는 내가 더 잘 자는데? 너 요즘은 자냐?”

제게로 화살이 돌아왔다. 태서가 제 수면 시간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윤서가 제법 커서 이젠 3시간에 한 번씩 분유를 주지 않아도 된다. 밤잠도 제법 길어졌으니 자신도 잘 자냐 싶냐면…….

“일주일에 하루 정도만 잘 자는 거 같은데?”

“윤서도 이제 잘 잔다면서, 왜 굳이 잠을 안 자?”

박한수의 물음에 태서가 흥분해서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아깝잖아. 학교도 다니고 있지만,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은 윤서가 자고 난 후야. 아까워서 못 자겠더라,”

그건 강세헌도 비슷한지 윤서가 나고 나서야 둘이 무언가를 했다. 공부하기도 하고 음악을 듣거나 같이 영화를 보는 등 평소에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게 이상한데 재밌었다.

“너희 소리 없이 보는 좀비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왜 소리 없이 보냐, 아…….”

강인혁이 옆구리를 찔러 오자 윤서가 자고 난 후라서 그렇다는 걸 눈치챈 박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무서워. 왜냐면 좀비가 나타나기 전에 들리는 긴장 어린 배경 음악이 아예 없잖아.”

“그럼 로맨스를 보면 되지 않냐?”

박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또 깜짝 놀라는 그 맛에 보게 돼. 마치 누가 갑자기 나타나 내 어깨를 물어 올 거 같달까? 물었나?”

태서가 제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뜯어먹진 않았는데 물리긴 한 거 같다. 강세헌에게.

“……변태…….”

박한수의 중얼거림을 무시한 채 태서는 다시 차를 마셨다. 달지 않고 뒷맛은 깔끔하고. 이런 매력에 차를 마시는구나.

“잘 살고 있네.”

강인혁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은근한 분위기에 박한수가 몸을 떨더니 강인혁의 등을 내려쳤다.

“그 느끼한 눈빛 좀 치워 봐.”

“이왕이면 아련하다고 해 줄래.”

“아련 같은 소리 하네. 솔직히 너 뻔뻔하게 여기 껴 있어도 되냐? 어? 서다래 생각은 눈꼽 만큼도…….”

강인혁에 다다다 쏘아대던 박한수가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 속에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깬 건 태서였다.

“서다래 어떻게 됐는지 안 궁금해?”

태서가 대놓고 강인혁에게 물었다. 강인혁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니 박한수가 태서의 팔을 잡아 왔다.

“미안하다. 내가 눈치 없이 이름을 꺼내서.”

“평생 피할 순 없잖아.”

태서는 박한수의 손을 밀어 냈다. 그리고 다시 강인혁과 눈을 마주쳤다.

“내가 어떻게 윤서 낳았는지 들었지?”

강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자신은 외국에서 모든 위험한 상황이 다 끝난 후에야 듣게 되었다.

“그거 때문에 서다래 경찰서 가서 자수했어.”

“……그럼 감옥에 있겠네.”

서다래가 그렇게 된 게 자신 탓인 것만 같아 강인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가 먼저 서다래에게 호감을 내비치지 않았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거 같은데.

강인혁의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을 때 박한수가 탕, 소리 나게 주전자를 내려놨다.

“걔 감옥 안 갔다.”

박한수의 말에 강인혁이 고개를 번쩍 들어 바라보았다.

“윤태서가 처벌을 원하지 않았고 또 계단에서 서다래가 태서 잡으려고 손 뻗었던 것까지 해서 유예 나왔어.”

태서는 말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경찰이 찾아오고 어떤 일인지 묻고…… 그랬던 일이 이제 흐릿해졌다. 서다래에게 아무 감정이 남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했다.

“니들이야 앞으로 걔랑 연락 안 할 거니까…… 나만 서다래 잘 사나 들여다볼라고.”

박한수가 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찻잎을 더 넣었다.

“내가 오지랖이 넓잖아.”

가라앉았던 분위기 속 박한수의 한마디에 태서가 먼저 웃었다. 박한수의 오지랖 때문에 강인혁, 서다래와 한 조가 되기도 했고 또 제 부모님과 연락하기도 했다. 원작에서도 태서에게 먼저 관심을 가진 놈이 저 박한수였다.

한때는 오지랖이 반갑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런 친구가 옆에 있다는 게 다행이라 생각이 되었다.

“고맙다.”

이제껏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강인혁의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맙긴, 더 마셔라.”

박한수가 강인혁의 잔에 주전자를 기울였다.

찻잎을 더 넣어서 그런지 차 맛이 썼다.

“나는 찻잎을 더 가져올게.”

박한수가 빈 통을 들고 나갔고 둘만 남았다. 강인혁은 계속 차를 마셨고 태서는 그런 강인혁을 지켜보다 웃었다.

“안 쓰냐?”

“쓰다.”

“그럼 안 마시면 되잖아.”

태서의 간단한 해답에 강인혁은 제 잔을 기울였다. 아까보다 진해진 녹빛은 쓸 뿐만 아니라 떨떠름한 맛도 있었다.

“이거라도 안 마시면 더 어색해질 거 같아서…….”

그래서 마셨다.

“마음대로 해라.”

태서도 더는 권하지 않겠다는 듯 제 것을 내려다보았다. 서다래의 이야기를 할 때처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굴려고 노력했다.

“다시 외국 나가냐?”

태서가 묻자 강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어떻게 지내?”

“일할 거 같은데…….”

“일? 너 그동안 일했어?”

“응. 설거지도 하고 룸 청소, 서빙…….”

“그런 걸 했다고?”

그냥 평범한 일만으로도 태서가 깜짝 놀라니 강인혁은 고층 창문 닦기 같은 건 더 말하지 않았다.

“잘했다.”

태서는 힘 빠진 미소를 지었다.

“하니까 어땠어?”

“힘들더라.”

의미 없는 말만 주고받았지만 둘의 분위기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다. 태서는 강인혁의 눈빛이 더는 자신을 갈망하지 않는 걸 봤고 강인혁은 태서를 빤히 바라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학교는 어때? 공해찬 말고 어울리는 애는 없어?”

이번엔 강인혁 차례였다.

***

강학중 회장과 둘이 남은 상태에서 강세헌은 윤서를 빤히 바라보았다.

“애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구나.”

강학중 회장이 윤서의 볼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하는데 강세헌은 무슨 생각인지 말이 없었다.

“자라고 있죠. 그중에 특히 달라진 게 있습니다.”

그게 뭔지 보여 주려는 듯 강세헌이 윤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육 개월이 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기가 막히게 상대방을 향하는 몸짓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

혼자 앉아 있는 것보다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게 더 크게 심장을 울렸다면 말 다한 게 아닐까?

태서와 있을 땐 육아하는 시간이 비슷해서 윤서가 쉽게 넘어오지 않지만 지금은 자신 있었다.

매일 보는 아빠와 가끔 보는 할아버지는 다르다.

“윤서야, 아빠한테 오자.”

강세헌이 자신감 어린 눈빛으로 윤서를 바라보았다.

윤서야, 알고 있지? 어젯밤에 아빠 품에서 잠들었고 오늘 분유 먹인 것도 나야.

윤서가 팔을 뻗을 걸 의심하지 않으며 기다렸다.

“바?”

아직 아빠 소리는 못 하지만, 비읍이 들어가는 소리를 낼 때마다 아빠를 부르는 것만 같은 착각은 별개의 기쁨이었다.

“바.”

윤서가 강세헌이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흑백이 유난히 또렷해 눈동자가 더욱 커 보이는 윤서의 시선에 강세헌과 강학중 회장까지 숨을 죽이고 지켜보게 되었다.

이윽고 윤서가 생각을 정했는지 움직임을 보였다.

강세헌을 향해 팔을 뻗은 게 아니라 반대로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것으로.

“…….”

두 손을 내민 채 굳어 버린 강세헌과 외면한 윤서를 바라보던 강학중 회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보다 내가 더 대단하다는 건 요 육 개월 산 아기도 안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습니다.”

“몇 번이고 해 봐라.”

강학중 회장이 어림없다는 듯 코웃음 치고 윤서를 보았다. 마침 강학중 회장을 보고 있던 윤서가 웃으며 옹알거렸다.

“바.”

“그래, 할배 여기 있다.”

아무래도 윤서가 소리 내는 바는 할아버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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