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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22화 (122/130)

에필로그 5화

윤서를 안아 들던 태서가 순간 허리에서 올라오는 둔중한 통증에 멈칫했다.

부쩍 무게가 늘어난 윤서를 안아 들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강세헌이란 돌 밑에 깔려서 그런지 모르겠다.

“이런 작은 아기가 뭐가 버겁겠어. 다 그 바위 탓이지.”

윤서가 목을 끌어안은 덕분에 자유로운 한 손으로 허리를 두들겼다. 관계를 맺은 지 이틀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몸이 삐걱거렸다.

“아파?”

갑자기 나타난 강세헌이 태서의 허리를 어루만졌다.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눌러 주니 태서가 눈을 감고 즐겼다. 서서 받는 것 치고 만족스러운 마사지 후 강세헌이 윤서를 안아 들며 허리의 부담을 줄여 주었다.

“허리가 뻐근해요.”

“윤서가 많이 무거워졌네.”

강세헌의 뻔뻔한 대꾸를 태서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세헌이가 더 무겁더라.”

어쨌든 강세헌이 윤서를 안아 준 덕분에 한결 부담이 덜어진 태서가 이리저리 움직여 굳은 몸을 풀었다.

‘앞으로 공룡 이야기 하나 봐라.’

세상에 공룡보다 무거운 게 있다는 걸 알게 된 좋은 경험이었다.

태서가 몇 번 더 허리를 두드리는 사이 강세헌이 한팔엔 윤서를 그리고 다른 한팔로는 가방을 들고 돌아섰다.

“가자.”

오늘은 강학중 회장을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

“할아버지.”

본가에 들어서자마자 태서가 큰 부름으로 강학중 회장을 찾았다. 마치 제 할아버지를 찾는 듯한 목소리에 곳곳에 자리한 고용인들이 미소를 지었다.

강세헌은 앞서 들어가는 태서를 눈으로 쫓았다.

“잘 지내셨어요?”

“어서 와요. 감주 만든 거 있는데 줄까?”

“제가 올 줄 알고 만드셨구나.”

태서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 상대는 강세헌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 집의 주방을 맡아 온 분이었고.

“윤서야, 안녕하세요. 인사해야지.”

윤서에게 인사를 건네는 분은 본가에 드나드는 비서에다가.

“저번에 주신 과자 잘 먹었어요. 윤서가 과자를 안 가리고 다 좋아하는데 그거 먹은 이후로 다른 걸 안 먹어요. 어디서 사셨어요?”

“아기 이유식을 만드는 가게를 지나다가 산 건데 다음에도 사 오지요.”

이 집을 관리하는 실장까지 지나가는 사람은 누구든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눴다.

“여기서 자랐다고 해도 믿겠네.”

저 사교성 어쩌지?

본가의 사람들을 이제 완전히 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태서의 친화력에 강세헌이 기가 찬 듯 웃었다. 처음에나 놀랐지 이젠 그냥 그렇구나 하고 보게 되었다.

지금은 태서의 친화력에 윤서의 귀여움이 합해지니 둘이 나타났다 하면 일하던 사람들이 다 한 번씩 나와서 인사하는 게 당연하게 되었다.

“나 보러 오라고 했더니 왜 이렇게 안 들어오는 것이냐.”

결국 안채에서 기다리다 못한 강학중 회장이 나왔다. 그를 보자마자 온몸을 바둥거리며 반가워하는 윤서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죽 좋아하면 태서가 윤서의 몸부림이 버겁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때마침 강학중 회장이 아기를 안아 들었다.

“인사하는 데 그리 오래 시간을 들일 거면 그냥 여기서 살지 그러냐.”

“저는 좋은데 할아버지가 싫다고 하셨잖아요.”

태서의 태연자약한 대답에 강학중 회장이 코웃음 쳤다.

정말로 태서는 강학중 회장이 윤서를 예뻐하니 당분간이라도 자신들과 함께 사는 게 어떠냐고 하면서 본가로 들어왔다.

윤서를 매일 볼 수 있어 좋아하던 강학중 회장은 정확하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더는 못 견디겠다고 선언했다.

“둘이 그렇게 붙어 있던 건 생각 못 하는구나.”

“아직 신혼이라 그렇죠.”

밥 먹다가 태서가 강세헌의 볼에 입을 맞추고 출근하는 강세헌을 배웅하러 나가서 입을 맞추고.

차를 마시자고 앉으라고 하니 딱 달라붙어서 마시는데 견디다 못한 강학중 회장이 가끔 보는 게 낫다며 내쫓아 버린 것이다.

“그것만 버티면 매일 윤서 보실 수 있는데…….”

“그걸 못 버티겠다.”

강학중 회장이 단호하게 잘라 냈다. 내심 할아버지랑 같이 살 때 몇 걸음만으로 그를 만날 수 있어 좋았던 태서가 아쉬워했다. 혹시 다른 사람이 도와주면 다시 본가로 들어올 수 있을까 싶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크흠.”

“어머, 감주를 내놓는 걸 깜박했네.”

“……과자를 사러 가야겠다.”

아까는 그렇게 친근하게 받아 주던 사람들이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긴 듯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태서가 배신당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강세헌이 어깨를 토닥거렸다.

“역시 제 마음을 아는 건 형뿐이네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네 편이지.”

“그렇게 말해 줬으니까 어제의 일은 다 잊어 줄게요.”

“우리가 보낸 시간만큼은 기억해. 아니면 오늘 다시 머릿속에 새겨 줄까?”

“그 부끄러운 걸 계속 기억하라고요? 막 떠올리고 그러다가 형한테 입 맞춰도 돼요?”

“당연하지. 기대되네.”

애초에 둘이 붙어서 생긴 일을 둘이서 토닥이고 난리가 아니다. 보다 못한 강학중 회장이 단칼에 끊어 냈다.

“들어와라.”

꼭 사업을 할 때만 맺고 끊음이 명확해야 하는 게 아님을 손주 내외를 통해 깨달았다.

태서가 히죽 웃으며 강학중 회장을 따라 들어서다 안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어? 강인혁.”

“오랜만이다.”

서서 기다리고 있던 강인혁이 다가오며 인사했다.

“언제 왔어. 왔으면 전화라도 하…….”

다가오는 강인혁을 보고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하던 태서는 순간 자신을 와락 안아 버리는 그의 행동에 숨을 멈췄다.

“보고 싶었다.”

태서를 끌어안은 강인혁이 속삭였다.

“……친구로서.”

그리고 한마디를 뒤에 붙이니 태서가 굳었던 몸에 힘을 풀며 강인혁을 마주 안았다.

제게 가졌던 모든 감정을 정리했음을 알게 되자 강인혁에게 안긴 게 부담스럽지 않아졌다.

“잘 지냈냐. 친구야.”

태서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대답하니 강인혁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강인혁을 안고 있는데 두 사람의 좁은 틈 사이로 손이 들어왔다.

그 손이 태서의 어깨를 잡고 뒤로 당기니 붙어 있던 둘 사이가 찢어졌다.

“친구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리면 더 안고 싶어지는데?”

강인혁이 다시 손을 뻗어 안으려고 하니 강세헌이 쳐내 버렸다.

“반가워하는 건 거기까지.”

강세헌이 아예 태서를 제 옆에 끼고 이제 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분위기를 풍기니 강인혁이 황당한 눈빛을 드러냈다. 제 사촌 형이 처음 보이는 쩨쩨한 모습에 기가 찬 것이다.

“인혁아, 네가 이해해.”

강인혁의 마음을 알겠는지 태서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원래 사랑에 눈이 멀면 다 이렇게 된단다.”

이해하는 게 아니라 놀리려고 그런 걸 알자 강인혁이 고개를 저었다.

“넌 진짜 달라진 게 없구나.”

“너는 많이 달라졌네.”

태서가 강인혁의 머리부터 훑어 내려갔다.

“어때?”

“엉망진창이야.”

“……뭐?”

강인혁이 제대로 들었나 싶어 되묻는 물음에 태서는 대놓고 그의 머리부터 옷까지 콕콕 가르켰다.

“그 뻗친 머리카락부터 이상하게 그을린 얼굴색도 그렇고 전혀 안 맞는 티랑 바지까지 막 엉망진창이고 이상한데…….”

제가 알던 강인혁은 사라졌다. 원작에서도 끝까지 깔끔하기만 하던 그였기에 지금의 자유로운 모습은 낯설기까지 했다.

“잘생겼어.”

지저분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그 모습에서도 잘생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만큼 강인혁의 웃음이 청량했고 완전히 커진 행동이 긴 팔다리와 어우러져서 그런지 너무 멋있었다.

“형이랑 비교하면?”

태서의 진심이 담긴 말에 강인혁이 좋아하다가 강세헌을 가리켰다. 잘생겼다고 하니까 자신감이 차오른 모양이었다.

“응, 사랑 앞에선 잘생긴 놈이 잘생긴 게 아니라 좋아하는 놈이 잘생긴 거야. 물론 우리 자기가 객관적으로 더 잘생기기도 했고.”

태서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정리해 버렸다. 강인혁이 당했다는 표정으로 있으니 그를 버린 채 강세헌과 들어가서 앉았다.

혼자 버려진 듯 서 있던 강인혁은 졌다는 듯 웃으며 뒤따라 들어가 앉았다. 태서와 반가운 재회를 나눴으니 이제 아기를 볼 차례였다.

“우리 윤서 처음 보지?”

“사진으로만 본 꼬맹이가 여기 있네. 그런데…….”

뒤늦게 윤서에게 다가간 강인혁이 얼굴을 빤히 보다가 감상을 내뱉었다.

“윤태서 너 세헌이 형을 낳았구나.”

“많이 닮았지?”

“세헌이 형은 언제 어린이집 출근하시냐?”

윤서를 세헌이 형이라고 말하는 뻔뻔함에 태서가 웃으며 받아 줬다.

“적당한 때를 봐서 보낼 참이야.”

“그래? 그때 한번 말없이 세헌이 형 보내 봐. 그냥 얼굴 보고 ‘윤서야, 아빠 왔다.’ 이럴지도?”

“나도 그 생각했는데 통했어.”

“이렇게 똑같이 나올 수 있다니. 이 정도면 그냥 세헌이 형이 낳은 거 아니야?”

“그래도 귀엽지? 웃으면 나 닮았다는 말도 많이 해.”

“귀엽네. 얘 모델 시켜도 되겠다.”

강인혁이 윤서의 손가락부터 하나씩 손을 대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강학중 회장에게서 아예 데려가려고 손을 뻗었다. 강학중 회장이 어림도 없다는 듯 윤서를 안은 채로 몸을 돌렸지만.

아쉬워서 윤서의 볼만 매만지던 강인혁이 뒤늦게 태서를 돌아봤다.

“복학했다며.”

“응. 이번 학기만 끝나면 졸업이지.”

“다가오는 애들은 없고?”

“한 명 빼고 없던데? 누가 나랑 놀고 싶겠어.”

“그래? 의외네. 그 한 명이랑은 얼마나 친한데?”

강인혁과 주고받는 자연스러운 대화에 뒤늦게 강세헌을 떠올린 태서가 입을 다물었다.

어제도 질투하는 남편한테 얼마나 시달렸는데 지금 또 말할 순 없지.

“공룡이랑 고작 하루 수업 들었어. 그런데 뭐 얼마나 친하냐고 해 봐야 그럴 것도 없다.”

“그러겠네. 그런데 신기하다. 해찬이가 같은 과로 올 줄이야.”

“어? 그 이름인 거 같아. 어떻게 알았어?”

다음에 만나면 물어보겠다 생각한 태서나 이름을 듣고 눈을 빛내는 강세헌을 차례로 보던 강인혁이 의아한 듯 굴었다.

“박한수가 알려 줬는데?”

다 아는 애가 옆에 있잖아.

맹점을 찔린 듯 강세헌이 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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