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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21화 (121/130)

에필로그 4화

집으로 돌아온 태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욕실에 들어가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고 나왔다.

따뜻한 물에 씻어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본 강세헌이 그를 안으려 다가갔다.

제가 질투하는 걸 알고 달래 줬으니 꼭 안아 줄 것을 의심하지 않은 채.

“윤서야, 아빠 보고 싶었지?”

그러나 강세헌이 벌린 팔을 보지 못했는지 태서는 그를 지나쳐 윤서를 안아 들었다.

“아빠도 윤서 보고 싶어서 혼났어. 세상에, 안 본 사이에 살이 더 올랐잖아. 대체 밥을 얼마나 먹은 거야.

태서가 윤서의 볼살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잔뜩 애정을 드러냈다.

“뱌.”

윤서가 붕어처럼 튀어나온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강세헌을 향해 손을 들었다. 반가워하면서 안아 달라는 듯한 바둥거림에 태서는 윤서를 꼭 끌어안았다.

“윤서야, 알파 아빠는 지금 기분이 안 좋아.”

태서가 윤서의 머리를 제 두 손으로 잡아 자신을 보도록 했다.

“아빠 안으려고 다가오는 걸 내가 피했거든.”

태서는 진지한 얼굴로 강세헌을 지나칠 때의 상황을 말해 줬다. 모르고 그런 게 아니라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자 강세헌이 괘씸죄로 태서의 몸에 제 무게를 실었다.

“윤태서.”

“으윽.”

“알고도 나한테 안기지 않았다 이거지?”

태서는 윤서 위로 엎어질까 몸에 힘을 잔뜩 줘 버텼다. 평소엔 강세헌의 큰 체격을 마음에 들어 했는데 지금은 온몸이 부들거렸다.

이 인간이.

“발긋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왔으면 나한테 먼저 얼굴을 들이밀었어야지.”

“내가 미쳤다고, 형한테…… 들이밀어요.”

태서가 억지로 입가를 끌어 올려 웃었다.

“왜 안 하는 건데?”

강세헌이 태서의 밑에 있는 윤서를 빼내더니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얌전히 옆에 눕히자 윤서가 알아서 몸을 빙글 돌아 앉았다.

이제 몸에 힘을 빼도 된다고 생각한 태서가 철푸덕 엎어졌다. 그런데 등을 누르는 무게가 사라지질 않았다.

“질투하는 남편한테 씻은 몸으로 다가가는 건 대놓고 잡아먹으라는 거랑 뭐가 달라요.”

“그래서 윤서를 핑계로 도망쳤다?”

“그건 아니고…… 진정하라는 의미였죠. 윤서가 반갑기도 하고?”

태서가 강세헌의 밑에서 팔을 뻗었다. 윤서를 도로 품에 안으려고 한 시도였는데 윤서는 저 멀리 장난감을 발견한 모양인지 어느새 멀찍이 떨어졌다.

윤서야, 아빠 살려 줘.

“태서야.”

강세헌이 태서의 목덜미를 잘근거리며 깨물었다.

“공부 열심히 하자.”

“당연히 열심히, 흐앗.”

태서가 이상한 기분에 제 목을 가리며 옆으로 굴렀다. 강세헌에게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벗어났다.

알고 보니 강세헌이 먼저 일어난 거였다. 윤서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가 버리자 혼자 남은 태서가 어벙벙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1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 안아 줬다고 진짜 삐진 거야?”

“설마.”

문이 열리며 들려오는 대답에 태서가 그의 얼굴을 보고 시선을 내렸다. 강세헌의 품에 안겨 있어야 할 윤서가 보이지 않았다.

“윤서는요?”

“재웠어.”

“벌써요?”

“잘 시간만 맞추면 어려운 일도 아니지.”

8시부터 자기 시작하긴 하지만 그래도 방금까지 엄청 신나게 놀던 애를?

그 기술에 놀랄 틈도 없이 태서는 다시 제 위로 올라온 강세헌을 보다가 말했다.

“애 재우고 뭐 하려고요?”

“뭐겠어.”

강세헌이 곧장 입술을 붙였다. 차에서 태서가 간지럽히듯 물어대는 것에 비할 수 없이 강하게 밀어붙였다.

“질투 잠재우려는 거지.”

“……살살 부탁드릴게요.”

태서가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다.

***

“전무님.”

인터폰이 아닌 노크와 함께 문을 연 박한수가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왜 그러지?”

“그…… 손님이 오셨습니다.”

약속하지 않은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러는지 박한수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누가 왔기에 그러나 싶어 하는데 박한수를 밀어 내고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여긴 달라진 게 없네.”

강인혁이었다. 목덜미를 덮는 덥수룩한 머리카락 때문인지 아니면 무릎이 다 드러나도록 찢어진 청바지 때문인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았다.

강인혁이 밝은 표정으로 들어오다가 깜박한 게 있는지 박한수를 돌아보곤 커피를 달라고 했다. 박한수는 그것을 무시한 채 강세헌을 돌아보았다. 일단 강인혁이 무작정 밀고 들어오긴 했는데 지금이라도 끌고 나갈까요, 싶은 눈빛이었다.

“커피는 한 잔만 갖다줘.”

“알겠습니다.”

강인혁을 놔두라는 뜻을 알아들은 박한수가 나갔다.

“큰아버지는 부회장 되셨다던데 형은 그대로네.”

“그게 궁금해서 온 건 아닐 텐데.”

“잠깐 들어온 거야.”

강인혁이 소파에 눕듯이 앉아 발을 까딱이는데 그 자세에서 은근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달라졌네.”

“나? 아, 옷?”

강인혁이 툭 나온 무릎을 보고 톡톡 건드렸다.

“이 바지가 되게 섬세하게 디자인되어서 나온 거 같지만…… 그냥 찢어진 거야.”

“그래, 너덜너덜하니 그런 거 같다.”

강세헌의 받아치는 말에 강인혁이 좋다고 웃어 댔다.

그사이 커피를 주러 들어온 박한수는 강인혁을 이상한 사람 보듯 보고 나갔다.

커피를 마시지 않고 손끝으로만 살살 건드는 강인혁을 향해 강세헌이 물었다.

“잘 지냈어?”

“음…… 잘 지냈나? 아니면 힘들었나?”

강인혁이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는 말에 강세헌의 눈썹이 올라갔다.

태서로 인한 마음고생 때문에 힘들었다는 말로 들렸다.

“오해하지 마.”

강세헌의 표정을 보고 생각을 알아챈 강인혁이 손을 저었다.

“힘들었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야.”

태서에게 여러 번 고백하고 그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납치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미 한 번 자신 때문에 태서가 쓰러졌는데 두 번이나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게 강인혁에게 참을 수 없는 죄책감을 심어 주었다.

태서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데 제 못난 미련으로 일이 벌어지니 아예 멀리 떠났다.

“태서한테 거리를 벌리는 김에 실연당한 아픔도 달래려고 무작정 나갔거든?”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떠올리는 강인혁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아련함과 비슷한 느낌이 묻어났다.

“커피를 마셔도 마시는 거 같지 않고 유명한 유적지를 봐도 본 거 같지 않고. 입맛도 없고 의욕도 없는 내 모습이 되게 청승맞은 느낌이었어.”

제가 그런 느낌을 가질 줄 몰랐던 강인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일했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아주 바쁜 거로만 골라서.”

강세헌이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강인혁이 소파에서 몸을 세우더니 그에게로 기울였다.

“벌레도 잡고 설거지도 하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서빙도 하고 룸 청소, 수영장 청소도 했는데 물때라는 게 엄청 무서운 거더라.”

생각보다 노동 강도가 센 일이었다.

강세헌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강인혁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소파에 누웠다.

“몸을 미친 듯이 움직이면 다른 생각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한 거였는데, 그것 때문에 힘들다고 한 거야.”

강인혁이 팔만 옆으로 뻗어 커피잔을 쥐었다. 컵 표면에 맺힌 물이 물방울이 되어 강인혁의 바지나 옷에 뚝뚝 떨어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효과가 최고야. 눈 감았다 뜨면 다음 날이야. 그렇게 몇 달 지나니까 금방 털어지더라.”

강인혁이 혀를 내두르며 가벼운 어투로 말했지만, 쉽게 털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다 감싸 안은 듯한 강인혁의 마음에 강세헌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제법 자신을 잘 추스르고 왔다. 이전엔 무언가에 쫓기는 느낌이 났다면 지금은 자유로워 보였다.

“나는 이제 괜찮아졌는데…….”

강인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세헌에게 다가갔다. 아예 의자를 끌고 와서 앉으니 책상 하나를 두고 둘이 가까이 마주했다.

“이번엔 형이 강도 높은 일을 해야 할 거 같은 표정이네?”

“……지금도 바쁘다.”

강세헌이 아닌 척 서류를 들췄다. 그러나 강인혁이 그것을 살포시 덮어 오는 바람에 ‘결재 서류’ 네 글자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말해 봐. 혹시 알아? 내가 대답해 줄 수 있을지…….”

강인혁의 은근한 목소리에 강세헌은 작게 혀를 차며 펜을 내려놓았다.

“태서 학교생활할 때 말해 봐.”

“학교생활? 아, 걔 복학했구나.”

강인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의자의 반동을 이용해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예전엔 박한수 말고 친구가 없었어. 성격이 엄청 예민했잖아.”

그땐 그랬지 싶은 듯 강인혁의 목소리가 추억에 잠겨 들었다. 자신을 좋아하던 윤태서는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언제든 오메가가 되길 기다리며 시간이 흘러가는 걸 초조해했고 그게 밖으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외면당하지도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사람, 윤태서가 딱 그랬다.

“전무님.”

박한수가 들어왔다. 그는 강인혁을 보는 그대로 쿠키가 담긴 그릇을 내려놓았다.

“커피에 곁들일 쿠키를 가져오는 걸 깜박해서요.”

깜박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커피와 함께 들고 오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박한수는 한 걸음 물러나면서 강인혁을 직시했다. 그 시선을 받으며 강인혁이 느긋하게 입을 뗐다.

“박한수 정도의 뻔뻔한 성격이 아니면 태서한테 붙지 못하지.”

박한수가 남몰래 눈을 부라리며 경고하다가 강인혁이 대놓고 말을 꺼내니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강세헌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건넨 박한수가 돌아서면서 강인혁을 향해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너 내가 지켜본다.’

등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한 강인혁이 쿠키를 들었다.

“잘 웃진 않아도 깔끔한 외모에 성적도 좋고 배경도 괜찮은 애. 그런데 이번에 복학하는 태서는 성격이 바뀌었네?”

강인혁이 반전을 맞은 듯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지금 그 성격으로 학교를 갔으니 어떻게 될지 뻔하지 않아? 예전에야 다가가지 못하고 지켜봤을 텐데 지금은 아닐 거 아냐.”

강세헌을 돌아본 강인혁의 눈이 커졌다가 웃음으로 작아졌다. 지금껏 무심하게 듣고 있다고 생각한 강세헌의 얼굴에 스친 감정을 읽은 것이다.

미세하지만 분명 마음에 안 들어 했다.

“지금의 윤태서가 학교를 다닌다…….”

어떨지 상상하던 강인혁이 아쉬운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복학할 걸 그랬나?”

재밌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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