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어색함을 잔뜩 담은 태서의 눈동자가 주변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생화 장식을 해 둬서 은은한 꽃향기가 느껴졌고 4중주의 은은한 선율이 들려왔다.
오감의 만족을 최고로 끌어 올려 주는 이곳은 강세헌과 윤태서의 결혼식장이었다.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했고 편안한 하루를 보낼 예정이었다. 그랬는데…….
“저 안 떨릴 줄 알았는데 엄청 떨려요.”
태서가 진정하라는 듯 제 가슴을 두드렸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결혼식에다가 피로연까지 몇 시간은 할 텐데 중간에 쓰러지지 않겠죠?”
“쓰러지지 않도록 내가 도와줄까?”
줄곧 옆에 있던 강세헌이 태서의 허리에 손을 댔다.
“잡아준다고요?”
그래서 제가 쓰러지지 않게 지탱해 주려고 하는 줄 알고 물었는데 강세헌에게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에게서 페로몬이 뿜어져 나와 태서의 몸을 감싸왔다.
‘아, 페로몬이 있었네.’
진하게 풍겨 오는 페로몬에 두근거리던 심장이 가라앉았다. 언제인지 모르게 온몸에 들어갔던 힘이 풀어지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이제 아까처럼 긴장하진 않을 거 같아요.”
“그거로는 부족해.”
“아예 긴장을 놓으라고요? 그게 가능할까요?”
“우리 이 결혼식을 어떤 마음으로 준비했는지 잊었어?”
강세헌의 속삭임에 결혼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게 떠올랐다. 어느새 평소대로 돌아온 태서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네요. 우리 이 결혼식을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으로 남기기로 했었죠.”
한 번 미룬 만큼 더욱 뜻깊은 자리로 만들고 싶었다. 자신들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온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었다.
결혼식이라고 하면 모두가 생각하는 그것에서 아주 조금 변형했다. 하나가 된 두 사람을 축하하는 마음은 같으니 전부를 버릴 필요가 없었다.
그 약간의 변형된 형식이 이번 결혼식에서 자신들이 바라는 모든 걸 담을 시간이 될 것이다.
***
하객을 향해 선 두 사람이 성혼 선언문을 읽는 것까지는 보통의 결혼식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편안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던 하객들은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질 못했다.
“다음 순서로 두 사람의 검은 머리 파 뿌리 이하 주례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대신 축사와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진행이 기존 결혼식과 궤를 달리하게 되면서 하객의 반응이 저마다 달랐다. 축사? 질문?
“참고로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여기 두 분의 의견에 따른 것입니다.”
사회자가 자신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는 말을 덧붙이곤 슬슬 하객을 돌아보았다.
“그럼 누구부터 할까요. 아! 가장 먼저 손드신…… 박한수 님.”
사회자가 명단을 확인해서 이름을 부르자 박한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축가보다는 질문으로 가겠습니다. 흠흠, 강세헌 형님은 태서가 만든 요리를 먹어 본 적 있습니까?”
대단한 말을 할 것처럼 굴더니 생각보다 사소한 질문이 나왔다. 박한수 네가 그럴 줄 알았어. ……잘했어.
태서가 남몰래 시선을 보내 칭찬하니 기민하게 알아챈 박한수가 마주 미소 지었다. 확실히 눈치가 빠르다. 지금 분위기는 아무리 친한 이들만 부른 소규모의 결혼식이라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태서와 강세헌이 누군가의 주례보다는 주변 사람에게 받는 축하가 더 좋다고 해서 이렇게 진행했지만, 지금껏 비슷한 형식의 결혼식을 많이 다녀오셨을 부모님들께는 어색할 수 있었으니까.
‘가벼운 질문으로 분위기를 띄운 건 잘했어.’
박한수의 질문에 웃음이 흘러나오더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 번 웃고 나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새롭게 흘러가는 진행에 호기심을 드러내기도 했고.
“글쎄, 먹어 본 적 없던 거 같은데…….”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기껏 띄워 놓은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태서가 배신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며 강세헌을 돌아보았다. 박한수가 분위기를 띄우고자 던지 가벼운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그런지 아니면 먹어 본 적 없다 솔직하게 말한 것 때문인지 몰랐다.
“그런데 앞으로도 먹을 기회는 없지 않을까? 내가 한 밥 먹이기도 바쁠 텐데.”
“…….”
강세헌을 바라보던 태서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부끄러운 얼굴을 숨겨 보려 하는데 강학중 회장과 눈이 딱 마주쳤다. 윤서를 무릎 위에 앉힌 강학중 회장이 좋냐는 시선을 보냈다.
“와, 형님. 태서 손에 가루 묻히는 게 싫다고 직접 먹여 주실 때부터 알았지만 놀랍긴 하네요. 한 수 배워 갑니다.”
자신도 꼭 그렇게 해 줄 거라고 말하자 옆에 있던 한미래가 박한수의 손을 잡아끌어 억지로 앉혔다. 그냥 축하만 해도 될 걸 왜 그런 말을 덧붙이냐는 잔소리가 나왔지만 그다음을 이어 갈 수 있는 충분한 힘이 되어 주었다.
박한수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말을 건네왔다.
“앞으로 서로를 위해 주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그러겠습니다.”
“주고받는 사랑을 하세요.”
“형이 자꾸 주려고만 해서 걱정이지만, 전부 형의 마음이니 소중히 받고 저도 많은 사랑을 주겠습니다.”
“결혼은 현실입니다.”
“…….”
살짝 다른 의미가 섞이긴 했지만, 축사를 들었다.
어느새 남은 사람이 몇 남지 않게 되었고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맞추던 그들 중 한 사람이 일어났다.
“강세헌의 아버지가 아닌 먼저 결혼한 선배로 말하려 합니다. 평화로운 가정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압니까? 바로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걸 어떻게 드러내느냐가 관건인데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세상을 외딴섬에 두 사람 남은 것처럼 살면 됩니다.”
평소가 말수가 많지 않다고 여겼던 강진한 부회장님의 연설에 태서의 입이 점점 벌어졌고 강세헌은 아예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섬에 단둘이 남았다고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내겐 당신뿐이라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겠지요? 그렇게 제 마음을 표현하다 보면 어느새 예쁜 아기도 태어나 있고 또…….”
“여보.”
듣다 못 한 서은희가 남편의 팔을 붙잡았다.
“왜 당신이 주례를 해요. 그리고 예쁜 아기는 이미 태어났어요.”
그녀는 다른 사람이 들을까 잔뜩 목소리를 낮췄지만, 강진한의 대답하는 목소리가 너무 컸다.
“주례라기보다 앞으로를 위한 인생 선배의 조언을 말한 거지.”
그 인생 선배로 하는 말이 주례다.
서은희가 그만하라는 듯 눈을 마주친 채로 고개를 살짝 저어 대는데 강진한은 모른 척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예쁜 아기가 태어나면 섬에 세 사람이 남는 거겠네요. 그렇게 세 사람의 사랑과 표현이 넘쳐난다면 또 다른 예쁜 아기가 태어나겠죠. 네 사람이 섬에 남는 것입니다. 네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다 보면 또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고…….”
이러다가 외딴섬에 바글바글 사람이 늘어나지 않을까?
“거기까지 해라.”
“아버지.”
아내, 서은희도 막지 못한 걸 강학중 회장이 나서서 잠재웠다.
“진짜 외딴섬에 가서 한번 살아 보고 싶으냐?”
“……잘 사세요.”
강진한의 빠른 마무리로 더는 아이의 수가 늘어나지 않았다.
“내 차례가 된 것 같으니…….”
강학중 회장은 윤서를 안고 있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대신 태서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태서가 처음으로 제자리에서 벗어나 다가가니 강학중 회장이 대뜸 윤서를 들이밀었다. 윤서가 반가운 듯 짧은 팔을 뻗으며 태서를 끌어안았고 그의 볼을 먹겠다고 입을 벌렸다.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하는 윤서의 귀여운 행동에 태서가 눈만 깜박이고 있으니 강학중 회장이 말했다.
“네가 만들어 낸 결실이다.”
“…….”
“네가 열심히 고민하고 선택하고 모든 걸 감당하겠단 다짐으로 낳은 아이지. 그리고 저기 저놈은 네가 선택한 반려다. 어떠냐?”
강학중 회장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틀자 제가 선택한 남자가 보였다.
잘생긴 거 말고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던 남자가 이젠 보는 것만으로도 제 마음을 가득 채워 주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평생 사랑해 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구나.”
강학중 회장의 할 말은 그게 다인 듯 윤서를 돌려받아 제 품에 안았다.
태서는 다시 강세헌에게 돌아갔고 모두를 향해 섰다. 어떻게 보면 특별할 게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나란히 서서 앞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강세헌을 제 알파라고 말하는 듯한 소유욕이 느껴졌다.
미소를 지으며 기뻐하던 강세헌이 돌연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아래를 보았다. 제 손가락 사이로 태서의 손이 단단히 얽혀 들어왔다.
“제가 많이 사랑해 줄게요.”
시선은 하객을 향한 상태 그대로 태서가 중얼거렸다.
“외딴섬 아니어도 형만 바라보고 현실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행복하게 해 줄게요.”
갑작스러운 고백을 받은 강세헌이 한 손으로 제 두 눈을 가렸다.
“태서야.”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상대에게 보기 좋게 한 대 맞았다.
강세헌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더니 손을 들었다.
“저도 질문하고 싶은데 해도 됩니까?”
강세헌이 목소리를 높여 묻자 사회자가 당황한 듯 식순을 살폈다. 그 어디에도 강세헌이 질문할 거라는 말이 없었다. 사회자, 아니 강세헌의 비서는 왜 돌발 행동을 하는 거냐는 눈빛을 보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강세헌이 태서를 돌아보았다. 오늘 이 순간이 지나면 온전히 제 오메가가 되는 태서를 향한 감정이 다분히 묻어나는 눈빛으로 그가 물었다.
“둘째는 언제 낳고 싶어?”
가족 계획이라니, 태서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빨리요.”
그리고 강세헌만 들으라는 듯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오늘 만들면 더 좋고요.”
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세헌이 진한 입맞춤을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