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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15화 (115/130)

115화

강한 햇살이 내리쬐는 더운 여름, 태서는 시원한 카페에 앉아 맞은편에 앉은 남녀를 보았다.

“사귀니까 좋드냐.”

아니,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보았다는 게 정확했다.

“좋더라.”

민망한지 헛기침한 박한수는 은근슬쩍 옆에 있는 한미래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서 어쩜 이리 손이 예쁘냐, 손가락 하나하나 다 예쁘네, 섬섬옥수가 여기 있었네 등 들어주기 힘든 말을 계속해서 뱉었다.

어깨를 내준 박한수와 거기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한미래의 모습은 사이좋은 연인 그 자체였다. 그 모습에 태서는 고개를 저었다. 저거, 저거 내가 아니었으면 아직 고백 못 했을 거야. 아니면 그냥 냅 둘 걸 그랬나?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심술이 났다.

“나 친구 두 명 만나러 온 건데 그만하면 안 되는 거지?”

태서의 적당히 하라는 의미에 박한수가 코웃음 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않을까?”

“내가?”

“너 세헌이 형님이랑 어? 막 도너츠 먹여 주고 막 가루 어쩌고 그랬던 거 기억 안 나냐?”

“갑자기 도너츠는 왜 나오는 거야. 어?”

생뚱맞은 소리를 하냐고 말하려다가 문득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병원에서 강세헌이 먹여 주는 도너츠를 맛있게 받아먹었던 게 떠올라서 멈칫하니 박한수가 더욱 의기양양하게 굴었다.

“떠올랐지?”

“그래.”

“그럼 나 마음껏 애정 표현한다?”

박한수가 대놓고 한미래를 꼭 끌어안았다. 그걸 본 태서가 그냥 일어날까? 잠깐 고민했다.

“그런데 우리 잘 되는지 보려고 부른 거야?”

한미래가 박한수를 밀어 내며 물으니 태서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둘이 잘 됐는지야 전화로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었다.

태서가 품에서 꺼내 든 두 개의 종이봉투를 각자 앞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저번에 말한 청첩장.”

“진짜? 진짜 청첩장이야?”

결혼이 미뤄지면서 받지 못한 청첩장이라 그런지 박한수가 호들갑을 떨어 대며 종이봉투를 열었다. 한미래는 아예 박한수에게 기대 그가 꺼내는 청첩장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얼마 안 남았네?”

날짜를 가늠한 한미래가 한 달도 안 남은 걸 깨닫고 물었다.

“응. 이 주 후에 해. 윤서가 딱 6개월 됐을 때?”

“우리 언니는 결혼할 때 청첩장 일찍 돌리던데 넌 아니네. 결혼 준비하려면 시간이 빡빡하지 않아?”

“예전에 한 게 있어서 수월했어. 많은 사람을 초대하는 게 아니기도 해서 청첩장 많이 돌리지 않아도 되고.”

태서는 가족 외에 박한수와 한미래에게 청첩장을 주는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네가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그거 아냐? 어떤 사람들은 이미 너 결혼한 줄 안다?”

“나?”

“그래. 세헌이 형님이 네 동영상 올렸잖냐. 그때 얼마 안 있다가 바로 결혼했다고 생각하더라고.”

듣고 있던 한미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나도 몇 번 들었는데 그건 굳이 바꿀 필요가 없어서 놔뒀어.”

태서의 누명을 직접 벗겨 준 한미래가 이번 것은 굳이 손대지 않았다고 말을 해 왔다.

“다른 사람 말고 태서 넌 기분이 어때?”

한미래의 물음에 태서가 턱을 괴고 청찹장을 바라보았다. 청첩장을 보고 있으니 이전까지 제게 벌어진 일이 다 꿈만 같았다.

갑자기 윤태서가 되고 뒤늦게 악행을 멈추려 서다래가 마셨어야 할 약을 마시고. 그러다 오메가로 발현해서 강세헌과 관계를 맺고.

한 번의 관계를 해프닝으로, 지나갈 일로 여겨 놓고, 강세헌의 집에 얹혀 살았다. 그러다 건강검진을 통해 임신인 걸 알았다. 거기다 강인혁과 서다래와의 관계까지 엉켜 이런저런 난리를 겪고 나니 윤서가 태어나 또 다른 시작을 알려 왔다.

‘나 진짜 많은 일이 있었네.’

그 모든 걸 겪어 냈다는 게 스스로도 대견했다. 태서가 헤실거리며 웃었다. 윤서를 생각하니 보고 싶어졌다.

“윤서 사진 보여 줄까?”

“응.”

박한수보다 한미래가 더 먼저 반응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서 사진을 보여 달라는 말에 태서가 사진첩을 연 채로 내밀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작은 사진을 본 박한수가 끄악, 놀라서 물었다.

“이게 다 윤서 사진이야?”

“응.”

“종일 사진만 찍어?”

윤서 사진이 끝도 없이 있다며 기함하는 박한수와 다르게 한미래는 화면을 터치해 몇 개를 크게 띄워 봤다.

“이거 잘 나왔다. 어? 윤서 이제 혼자 앉네. 너무 귀여워.”

한미래가 발을 동동 구르며 검지로 화면을 쓰다듬었다.

“어쩜 이렇게 예뻐. 강세헌 그분도 아기 때 이렇게 귀여웠대?”

“어머님이 보여 주신 거 봤는데 조금 달라.”

“그래?”

“뭔가 아기인데 귀엽다기보다 예쁘다는 느낌?”

태서가 지갑 속에 넣어 둔 강세헌의 아기 때 사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동영상을 재생해서 보던 한미래가 핸드폰을 들어 태서의 얼굴 옆에 댔다.

“애가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건 널 닮았네. 얼굴은 그분을 닮았는데 웃으면 네 느낌이 나.”

태서가 화면 속에서 까르르 웃어 대는 윤서를 보고는 똑같이 웃었다. 이 말은 한미래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많이 듣긴 했다.

“그런데 왜 윤서랑 같이 안 나왔어.”

사진으로는 윤서를 직접 보는 것만 못했는지 박한수가 아쉬운 듯 물었다.

“나중에 집에 와서 봐라.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들고나오는 거랑 같거든.”

박한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한미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카가 있어 봐서 잘 알지. 눈 마주쳐 오면서 방긋 웃어 주면 좋겠는데 현실은 언제 울음을 터트릴지 모르잖아. 조마조마하긴 해.”

한미래가 조카의 이야기를 예시 삼아 말해 주니 박한수가 그제야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윤서는 어딨는데?”

“윤서? 윤서를 아주 많이 사랑해 주시는 분이 봐주고 있지.”

태서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마셨다. 아기 낳고 나니 다시 커피가 맛있어졌다.

***

KH그룹 회장이 사는 한옥은 원래 고즈넉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가진 곳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다 같이 모이는 가족 모임을 제외하면 큰 소란이 날 것도 없었다. 그랬던 집이 요즘 들어 완전히 달라졌다.

일단 집 안에서 나던 풀 향이 베이비파우더 향으로 바뀌었고, 회장의 방 바로 옆에 위치한 커다란 방은 개조해서 아기방으로 바뀌었다.

그 방의 주인인 강윤서는 익숙하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그게 마음에 드느냐?”

아기 의자에 앉아 있는 윤서의 맞은편엔 강학중 회장이 있었다. 윤서의 눈높이에 맞춰 바닥에 앉은 그는 팔을 뻗어 딸랑이를 가져왔다.

“저번엔 이걸 가지고 놀더니 오늘은 관심 없니?”

눈앞에 대고 흔들어 주니 윤서가 방긋 웃곤 장난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작은 손이 딸랑이를 야무지게 쥐어 가지고 갔다.

위아래로 흔들다가 빤히 바라보다가 곧장 입에 대고 빨아대는 윤서를 보던 강학중 회장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진동이 울려 대는 핸드폰의 화면을 본 그가 윤서에게 말했다.

“밥 먹을 시간이구나.”

알람을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강학중 회장은 한쪽에 마련된 분유 포트를 능숙하게 만졌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아버님.”

강학중 회장을 찾아온 서은희였다. 그녀는 윤서를 먼저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고는 강학중 회장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서둘러 다가갔다.

“제가 탈게요.”

“내가 할 수 있다.”

“그래도요. 분유 포트가 생각보다 무거워요.”

“안에 물이 반밖에 안 남아서 별로 안 무겁다.”

강학중 회장이 자기가 계속 하겠다는데도 서은희가 빠르게 손을 놀렸다.

“아버님께서 잘하시는 거 알죠. 그래도 제가 봤는데 어떻게 그냥 두겠어요. 여기 있어요.”

눈금으로 물 양을 정확하게 맞춘 서은희가 내밀었다. 그나마도 제가 먹이겠다고 하려다가 아버님이 싫어할까 봐 내밀기만 했다. 그러나 강학중 회장은 그것을 보기만 할 뿐 받아 들지 않는 게 어딘가 불만이 있어 보였다.

“아버님 힘드실까 봐 제가 한 건데 혹시 불편하세요?”

“윤서 분유 양 늘었다.”

“네? 어머.”

생각지도 못한 지적에 서은희가 당황해하는 것도 잠시 웃어 버렸다.

“아버님께서 윤서를 보겠다고 하실 때 솔직히 믿지 못했는데 지금은 저보다 더 나으시네요.”

“내가 한다면 한다.”

“그렇게 윤서가 예쁘세요? 힘들진 않으시고요?”

“내가 얼마나 본다고 힘들겠냐. 그보다 날 찾아온 이유가 따로 있을 텐데.”

강학중 회장이 분유병을 가져가며 하는 말에 서은희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 동서 말인데요.”

한미순의 이야기였다. 윤서를 바라보느라 강학중 회장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속을 짐작한 듯 서은희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인혁이한테 간대요.”

한동안 집에서 나오지 않던 한미순이 처음으로 무언가를 한 게 비행기 표를 끊은 일이었다.

“그동안 인혁이랑 제대로 된 시간을 보내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인혁이랑 며칠 보내고 나서 봉사하러 간대요.”

“정신 차렸나 보구만.”

“뒤를 돌아보지 못할 정도로 조급하게 살아왔잖아요. 자식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은 어느 부모나 있으니까 그 욕심을 이해하면서도 하면 안 될 일을 저지르려고 했던 건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인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걸 보니 잘됐어요.”

그렇게 만든 사람이 강인혁이었다. 구치소에 들어가고도 전혀 제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미순이 강인혁과 만나고 난 후 완전히 바뀌었다.

“자식이 잘됐으면 하는 바람만큼이나 부모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그런 결과를 만들어 냈네요.”

이 말을 전하는 게 제가 찾아온 이유인 듯 서은희가 입을 다물고 강학중 회장의 옆에 가서 앉았다. 꼴깍꼴깍 잘도 밥을 먹는 윤서를 보는 강학중 회장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평화로웠다. 그렇게 만든 게 윤서인 거 같아 서은희가 미소 지었다.

“윤서야. 너도 네 아빠가 행복하길 바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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