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손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출장에서 급하게 돌아온 부모님은 줄곧 미안해하셨다.
“네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김미경이 태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타까워했고 윤석훈은 말없이 태서의 손을 잡아 왔다. 두 분의 반응에 태서가 고개를 저었다.
“저 때문에 일부러 당기셨던 거잖아요.”
태서의 예정일에 한국에 있기 위해 무리해서 출장 일정을 당겨 다녀온 분들이었다. 그냥 상황이 안 맞았을 뿐이었다.
“아유, 이 얼굴 상한 것 좀 봐.”
김미경이 태서의 볼을 쓰다듬었다. 잔뜩 갈라진 입술은 눈으로만 쓰다듬듯 바라보다 물이 묻은 거즈를 대 주었다. 물을 마셔도 되는데 싶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윤석훈과 김미경은 태서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미안해하고 안쓰러워하셨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물어보시기도 하고 스스로 찾아보려는 등 태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게 뭐라고 태서는 침을 삼킬 수 없을 만큼 목이 메어 오는 것만 같았다.
부모님의 사랑이라는 게 어떤 건지 느껴져 가슴이 따뜻해졌다.
“아기도 보고 오셔야죠. 윤서가 할머니, 할아버지 보고 싶어 할 거예요.”
태서가 아기를 언급하자 김미경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보고 싶었는데 태서가 우선되어 잠깐 밀어 둔 거였다.
“다녀오세요.”
태서가 맞잡은 윤석훈의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두 분을 보낸 태서가 한숨을 돌렸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다. 항상 일 때문에 아들을 챙겨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늘 미안해하시는 분들이었다. 그러니 이번 일에 얼마나 마음이 쓰였을지 생각하면 보자마자 울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울지 말아요.”
아닌가.
밖에서 들린 윤석훈의 말에 태서는 지레짐작하던 걸 멈추고 이불 안으로 꾸물거리며 들어갔다. 아직 불편한 곳은 많지만, 윤서를 품고 있을 때를 생각하면 한결 가벼운 기분이었다.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잠깐 눈만 감고 있을까.”
태서가 반쯤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홑몸인데도 이상하게 임신했을 때처럼 잠이 몰려왔다.
그렇게 점차 멀어졌던 소음이 어느 일순간 확 다가오는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몸이 무거워서 눈을 뜨지 않은 태서는 들리는 소음에 집중했다.
“아버님께서 윤서를 보신다니요. 아기 돌보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누군가 말리는 듯한 목소리의 주인은 서은희였다.
“내가 옆에 끼고 키우는 것도 아닌데 뭐가 걱정이냐.”
무거우면서도 어딘가 고집이 느껴지는 이 목소리는 강학중 회장의 것이었다.
“잠깐 본다고 하셔도 힘들어요. 그러니까 아버님께서는 지금처럼 회사 일을 우선으로 해 주시고 윤서는 가끔 보시는 게…….”
“그럴 거였으면 뭐 하러 장남을 부회장 자리에 앉혀 놓냐.”
“그건…….”
서은희의 목소리에 혼란스러움이 가득 찼다. 때마침 강수학이 없으니 그동안 미뤄 뒀던 부회장직에 강진한을 앉힌 줄 알았다. 그런데 증손주를 보려고 첫째 아들을 부회장 자리에 앉혀 뒀다는 이야기에 서은희는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말을 줄였다.
‘할아버지.’
지금껏 잠자코 듣고 있던 태서가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증손주를 향한 사랑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신에게 보였던 관심과 다르지 않았다.
아, 할아버지는 이렇게 사랑을 표현하시는구나. 자신의 시간을 내어서 보러 오는 게 할아버지가 드러내는 애정이시구나.
그걸 깨달으니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작은 소리를 들은 강학중 회장과 서은희가 태서를 돌아보았다.
“깼구나.”
“할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잘 수가 없었어요.”
태서가 눈을 비비며 능청스레 말했다. 그러니 강학중 회장이 방금까지 며느리와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언제 널 사랑한다고 했느냐?”
“저도 사랑해요.”
“갑자기 무슨 사랑 타령을…….”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반응하면서도 내심 싫지 않은지 강학중 회장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스쳐 갔다.
두 사람의 대화에 서은희는 끼어들 생각 없이 가만히 있었다. 며느리인 자신도 방금까지 아버님을 상대하기 벅찼었는데 태서가 살갑게 굴며 대화의 흐름을 바꿔 버리자, 그녀는 태서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아차, 인사를 잊었네요. 오셨어요. 어머님, 할아버님.”
뒤늦은 인사에 서은희는 웃음을 터트렸고 태서는 의아한 눈으로 병실을 둘러보았다.
“아버님은 같이 안 오셨어요?”
“세헌이랑 윤서 보러 갔어.”
“아아. 혹시 우리 부모님은…….”
“같이 계실걸? 윤서 보고 나서 카페 가서 이야기하신다고 하셨으니 같이 올 거야.”
서은희의 설명에 태서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갑자기 강학중 회장을 끌어안았다. 태서와 대화한다고 가까이에 다가왔던 강학중 회장이 난데없는 포옹에 당황스러워했다.
“할아버지는 저 보려고 여기 계셨던 거죠? 저도 사랑해요.”
“꼭 너만 보려고 온 게 아니다. 윤서도 보고 왔고 카페에서 쓸데없이 남들 구경시키기 싫어 왔다. 내가 아주 많이 유명하잖냐.”
그룹의 회장님이니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태서는 그냥 의뭉스러운 미소로 때웠다. 처음 강학중 회장과 만난 곳이 카페였다. 남들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분인 걸 아는데 저 말을 믿을 리가.
태서가 할아버지 몰래 장난스러운 눈빛을 빛냈다. 할아버지의 애정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어졌다.
“윤서 보니까 어때요? 윤서가 저 닮아서 예쁘다고 생각하셨죠?”
“그렇긴 하더구나.”
“저 많이 닮았죠?”
“그래.”
누가 봐도 강세헌 판박이로 나온 아인데 강학중 회장은 태서를 닮았다는 걸 부정하지 않았다. 거기다 윤서가 자기 닮아서 예쁘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했으니 더 말할 게 없었다.
태서가 할아버지를 더욱 힘줘서 끌어안았다.
“세상에서 세헌이 형 다음으로 사랑해요.”
“……그거 고맙구나. 그런데 내가 그놈보다 더 부자니 사랑을 줘도 더 줘야 하지 않으냐?”
“돈이 사랑이라면…….”
형보다 더 사랑할 수도?
“그건 안 되겠는데.”
태서가 행복한 고민을 시작하고 있을 무렵 병실 문이 열리며 강세헌이 들어왔다. 그는 방금 나눈 대화를 들었는지 곧장 태서의 앞으로 다가와서 눈을 마주쳤다.
“미래를 생각해 봐.”
강세헌이 팔짱을 꼈다.
“내가 더 많이 벌 거야.”
원래 돈에 큰 욕심 없이 살았는데 태서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더 열심히 일할 요량이라는 듯 굴었다.
“마음가짐부터 글렀구만.”
강학중 회장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그런 손주가 든든한지 따스한 눈빛을 보내왔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태서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늘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 하나 없이 편안했다. 과거의 자신을 돌이키는 시간 대신 앞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작이네요.”
윤서와 함께 하는 나날은 어떨지 벌써 기대가 차오르고 있었다.
***
“으아앙!”
윤서의 울음이 20분을 넘어가자 강세헌과 태서의 손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이상하다. 왜 울지? 기저귀는 5분 전에 갈았고 분유 먹을 시간도 아니고 졸려서 그런가?”
“……자고 일어나서 우는 건데.”
태서의 중얼거림을 듣던 강세헌이 힘없이 대답했다. 한 손으로 들어도 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침대에 눕히기만 하면 우는 바람에 3시간을 넘게 안고 있게 되자 윤서의 무게가 가볍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윤서를 안고 있느라고 다른 걸 못 하는 강세헌을 대신해 기저귀며 분유, 체온계와 온습도계까지 들고 온 태서도 잔뜩 지쳤다.
‘내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닌데…….’
제가 공부하기론 신생아는 하루에 20시간 정도 잔다고 했다. 말 그대로 먹고 싸고 자고를 반복한다고 해서 한 달 정도는 윤서의 자는 얼굴만 보며 집이 조용할 줄 알았다.
그럼 윤서가 자는 얼굴을 보다가 강세헌과 붙어서 못다 한 데이트를 즐길 줄 알았다. 와인을 곁들여 영화도 보고 나란히 누워 함께 낮잠도 자고 그런 생각에 부풀었었다.
그런데…….
“20시간 자는 게 아니라 20시간 우는 건가 봐요.”
태서가 우는 윤서를 향해 말했다.
“윤서야, 뭐가 불만인지 말해 봐. 아빠가 다 들어줄게. 응?”
알아들을 리 없는 윤서의 울음이 더욱 커지니 태서마저 울고 싶은 듯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네가 자꾸 아빠 품에 있으면 난 언제 형을 안아 보니. 나한테도 양보해 주면 안 되니?”
어떻게 그렇게 딱 붙어 있냐고 불만을 중얼거리는 태서의 엉뚱함에 강세헌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형은 웃음이 나와요?”
“누구든 네가 한 말을 들었으면 웃었을걸?”
“답답한 걸 어떡해요. 형한테 안겨서 울기만 하잖아요.”
강세헌도 같은 생각인지 윤서를 내려다보았다. 잠이 오는지 아까보다 울음이 잦아들어 갔다. 이제 조금만 더 안고 달래면 잘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강세헌이 어떻게든 재워서 아기 침대에 눕히겠다는 일념으로 재우고 있는데 태서가 그를 불렀다.
“형.”
강세헌이 눈으로 왜 그러냐고 물으니 태서가 부들 떨리는 손으로 시계를 가리켰다.
“곧 분유 먹을 시간이에요.”
“…….”
자는 걸 억지로 깨워서 분유를 먹이겠다는 게 아니다. 윤서가 배고파서 자다가 일어날 테니까.
“하아.”
인내심 좋던 강세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어머님이 오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집에 가는 첫날이라고 서은희가 걱정되니 보러 오겠다고 했었다. 잘해 보고 있을 테니 천천히 오라고 대답했던 태서는 아까 한 말은 다 잊은 듯 재촉했다.
“어머님은 언제 온대요?”
강세헌이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서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육아 전쟁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