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강학중 회장과 함께하는 저녁 시간에 태서는 바닷가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파도 소리가 잘 들렸어요.”
만삭이 다 된 몸으로 여행을 다녀온 것이 걱정될 듯하여 무사히 다녀왔다는 걸 보여 주려 만났다. 태서의 부모님은 해외로 출장을 갔고 강세헌의 부모님은 내일 있을 일로 바쁘다고 하셨다.
“다음에는 할아버지도 같이 가요.”
“그래, 그러자꾸나.”
강학중 회장이 태서의 밥 위에 반찬을 올려 주었다.
“축복이를 만날 준비는 다 했느냐?”
“방은 이미 다 꾸며 놨고 병원은 꾸준히 다니고 있어요.”
다 잘해 놓았다. 방은 제가 백화점이나 근처 다른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모은 육아용품으로 채워 놓았고 부족한 건 강세헌이 직접 찾아 사 주었다.
아기 침대, 역류 방지 쿠션, 손수건, 기저귀, 딸랑이, 속싸개, 유모차까지 당장 아기가 일어나 아장아장 걸어도 부족함 없을 정도로.
태서가 고개를 주억이며 방을 떠올리고 있는데 강세헌이 말했다.
강세헌의 시선이 저를 찬찬히 훑는 게 느껴졌다. 그 눈빛에 태서가 간지러운 듯 눈을 감았다. 저렇게 바라보면 웃음밖에 안 나오는데.
“설마 저를 축복이라 생각하는 거 아니겠죠? 저 윤태서입니다. 강세헌 씨.”
“윤태서라서 더 걱정되는 마음을 너는 모르겠지.”
강세헌은 정말 제가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 걱정되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병원에 같이 못 가는 것 때문에 그랬다. 태서의 부모님은 한국에 안 계시고 강세헌은 내일 잡힌 일정을 뺄 수 없기에. 그래서 태서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할아버지와 갈까요?”
가만히 있던 강학중 회장은 태서의 말에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다. 내일 이사회가 끝나면 연락하마. 아마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그거라면 제가 와도 됩니다.”
애초에 이사회 때문에 태서와 함께 산부인과에 못 가는 거였다. 자신은 안 되고 회장은 된다?
“나는 중간에 나와도 된다. 너는 끝까지 자리 지키고 있어라. 진한이가 부회장이 되는 건데 네가 지켜봐야 하지 않겠느냐.”
강학중 회장의 입에서 맞는 말만 나오자 강세헌은 대꾸하고 싶은 걸 참기 위해 입술이 얇아지도록 힘을 줬다.
이게 내일 바쁜 이유였다. 지금껏 공석으로 두었던 KH 그룹의 부회장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이전에 몇 번이나 거론되었다고 하지만 그땐 둘째 아들인 강수학과 한미순이 있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둘이 없는 지금이 적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내일 이사회는 미룰 수 없고 자신 역시 병원 진료를 미룰 생각이 없었다. 어제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기에 축복이가 괜찮은지 보고 싶었다.
“혼자 다녀올 수 있어요.”
태서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
할아버지의 비서로부터 이사회가 늦어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받은 태서는 혼자 병원에 왔다. 익숙한 길이라 이젠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아직 진료까지 시간이 남은 터라 대기실에 앉아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다는 답장을 보내고 있는데 누군가 자신을 불러 왔다.
“태서 씨.”
태서가 돌아서자 반가운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산부인과에만 드나드느라 잘 만나지 못한 진규민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진규민의 반가워하는 인사에 태서가 마주 미소 지었다. 그는 진규민에게 입은 은혜가 많았다. 건강검진에서 임신한 것을 알게 해 준 것도 그였고 제가 쓰러졌을 때도 도와주었다.
“잘 지냈어요?”
“네.”
“이거 마셔요. 이제 곧 예정일이죠?”
진규민이 들고 있던 일회용 잔을 내밀며 말했다. 일단 받아 들긴 했지만 뭔지 몰라 태서가 작은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나를 만날 줄 알고 미리 산 건가?
“네. 이 주 남았어요.”
“진짜 얼마 안 남았네.”
진규민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태서의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어린 사람이 아빠가 된다니 신기하네요.”
당연히 진규민에 비하면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성인이었다. 임신하지 않았다면 대학 졸업 후 어디든 진로를 결정해서 이력서를 넣고 있을 나이였다.
“억울해하지 말아요. 부럽다는 뜻이니까……. 나는 언제 나 닮은 아기를 안아 보나.”
“축복이가 태어나면 그런 마음이 더 들 수도 있어요.”
“와, 그렇게 대답할 줄이야. 보통 이럴 때 위로해 주지 않나? 좋은 사람 만나서 아기 낳으라는 뭐 그런?”
그거야 막연한 말이기도 하고 또 잘되면 그때 축하해 줘도 늦지 않으니 그랬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결국 보이지 않아 맛으로 판단하기로 했다. 입에 컵을 대고 기울이자 달콤한 액체가 흘러들어 왔다.
“이거 유자차네요.”
“겨울에 이만한 게 없죠.”
진규민의 어떠냐는 물음에 태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유자차를 마셨다. 새콤하고도 단 음료를 마시니 축복이도 좋아했다.
“세헌이 형이 저 부탁했어요?”
태서의 넘겨짚는 말에 진규민이 살짝 움찔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 시간까지 알려 주던데요.”
역시 강세헌이었다.
이렇게라도 준비해 놓은 세심한 배려 때문인지 유자차가 더욱 달갑게 느껴졌다.
“이제 아기 낳으면 육아의 시작이겠네요. 그때 세헌이 많이 부려 먹어요.”
“세헌이 형이요?”
원래도 육아에 신경 쓰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진규민도 언급해 오니 궁금해서 되물었다.
“나한테 얼마나 전화를 거는지 모릅니다. 그냥 잘하는 아빠가 아니라 육아 전문가가 되고 싶은 건가 봐요. 아니, 왜 의학적인 질문을 하지? 싶더라니까요.”
이제야 진규민에게 왜 그리 전화했는지 알았다.
“그런데 강세헌이라면 이럴 줄 알았어요. 이거 세헌이가 말했는지 모르는데 태서 씨가 임신했다고 했을 때 고민 하나 없이 낳는다면 키울 생각이라고 했었어요. 그 무섭게 생긴 얼굴로 벌써 아기 띠 맬 각오까지 했을 걸 생각하면…… 어?”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는 동시에 내용을 확인한 진규민이 일어났다. 급한 일인 듯 그의 얼굴에 다급함이 서렸다.
“그럼 축복이 태어나고 또 봐요.”
진규민이 인사하고 빠르게 걸어갔다. 태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유자차를 마셨다.
“세헌이 형 만나면 칭찬해 줘야겠네.”
언제 이리 기특한 생각을 했는지.
생각난 김에 강세헌에게 병원에 도착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적고 있는데 누군가가 태서의 옆을 지나갔다.
순간 태서의 손이 멈췄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라기엔 그에게서 풍기는 느낌이 너무 익숙했다. 엄지를 움직여 화면을 끈 태서는 핸드폰에 비친 얼굴을 보곤 몸을 굳혔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이가 비상계단 쪽으로 나가니 태서가 표정을 굳힌 채 그를 따라갔다.
“태서 씨. 저 다시 시간 되는데…….”
한발 늦게 나타난 진규민이 방금까지 태서가 앉아 있던 자리로 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가 준 유자차는 테이블 위에 그대로 있는데 정작 사람은 없었다.
비상계단으로 들어온 태서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팔짱을 낀 채 계단 중간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깊게 눌러쓴 모자 아래로 그의 하관이 보였다.
어딘가 거칠어진 듯 보이는 건 제 착각이 아니겠지.
“서다래.”
태서의 부름에 모자를 벗은 그의 얼굴이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초췌했다.
“너…….”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 태서가 놀라서 입을 열었다.
“윤태서.”
잔뜩 갈라진 입술이 열리며 소름 끼치게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행복해?”
“뭐?”
“나를 괴롭히고 상처 줘 놓고 너는 지금 행복하냐고.”
장소 때문인지 서다래의 음울한 목소리가 웅웅 울려 퍼졌다.
“설마 그것 때문에 날 찾아온 거냐?”
“왜? 네가 사과했으니 나는 받아들이고 찌그러져 있어야 해?”
서다래의 빈정거림에 태서는 한숨을 집어삼켰다.
“네가 괴로워한 나날을 생각하면 백 번 천 번 미안하다고 해도 부족할 거야.”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니 우습네.”
“그런데 그건 내가 너한테 빌고 용서를 구할 일이지 너 스스로를 망가뜨려도 된다는 건 아니야.”
태서의 눈이 서다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언제 잘랐는지 모를 머리가 엉망으로 자라서 얼굴을 가렸고 피부는 거칠었다. 갈라진 입술 사이로 피가 맺혀 있는데 얼마나 짓씹었는지 잇자국과 핏자국이 함께 있었다.
“너에게 그렇게 잘못해 놓고 나는 이렇게 행복해해서 미안하다.”
이게 태서가 가끔씩 느꼈던 불안함의 정체였다. 강인혁과는 매듭을 지었지만 서다래와는 그렇지 못했다. 특히나 강인혁의 감정이 서다래가 아닌 자신에게 향한 뒤로 더더욱.
“그래…… 넌 행복하구나.”
태서의 말에서 제가 듣고 싶은 것만 들은 서다래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그와 대화를 하는 내내 주변의 차가운 공기가 몸에 달라붙는 듯 소름이 일었다.
“나도 너처럼 행복할 수 있었을까?”
서다래의 한숨 섞인 말에 태서는 원래 그랬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원래 서다래는 강인혁과 연인이 되어 행복을 얻는 게 원작의 결말이었다. 그게 중간부터 틀어지면서 서다래를 이전과 다르게 만들어 놨다.
제가 윤태서가 되면서 둘의 운명이 달라졌다.
“너처럼 알파의 아이를 임신해서 하루하루 날짜를 꼽아 보고…….”
서다래가 천천히 계단을 올라왔다.
“세상을 다 가진 듯 웃고…….”
그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의 벽에 부딪혀 울려왔다.
“알파의 사랑을 받는 그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어느덧 태서의 바로 아래까지 올라온 서다래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보다 작은 덩치 때문에 서로의 눈높이는 계단 하나 이상으로 컸지만, 이상하게 서다래의 존재가 크게 다가왔다.
“아니면 너에게 내 행복을 빼앗긴 건 아닐까?”
태서가 놀라 눈을 크게 뜬 순간 서다래가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