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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08화 (108/130)

108화

“있잖아. 미래야.”

한미래의 관심을 제게 집중시킨 태서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소개팅할래?”

태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팔이 잡혔다. 강세헌의 눈이 가늘어지며 태서를 붙잡은 박한수의 손을 마땅찮게 바라봤지만 정작 박한수는 다른 걸 느낄 새가 없었다.

“소개팅이라니 너 방금…….”

말하던 박한수가 한미래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대신 눈으로 배신이라고 외쳐 대는 걸 무시했다.

그러게 누가 고백 못하고 있으래?

태서가 박한수의 손을 매정하게 떼어 냈다. 애초 박한수가 고백하면 될 일인데 그가 답답하게 굴고 제게 조언을 구하니 이렇게 된 것이다.

‘이게 다 계획이란 말이지.’

예전에 강인혁의 앞에서 박한수에게 전화를 걸어 소개팅하겠다고 말한 걸 살짝 응용했다.

“네가 누군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애래. 네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데 생각 있으면 내가 주선해 볼게.”

“소개팅? 글쎄.”

한미래가 끌리지 않는다는 듯 구니 박한수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걔 꽤 괜찮거든. 좋아하는 애를 위해서라면 제 인맥 다 동원해서 막 이벤트도 하고 그럴걸?”

“그런 애가 있어?”

“응. 아주 푹 빠지면 제 간이랑 쓸개도 다 줄 거 같다니까? 어디 간다고 그러면 차 빌려서 담요, 커피는 물론이고 심심하지 말라고 태블릿 PC까지 챙길걸?”

태서의 말을 듣던 한미래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박한수를 스쳐봤다.

“그렇게 세심하게 챙겨 주는 거 쉽지 않은데… 애가 성격도 좋겠네.”

“가끔 여기저기 막 끼어들 땐 귀찮은데 애 자체만 보면 나쁘지 않아.”

“그런 건 좀 별로다.”

한미래가 싫어하는 티를 내자 박한수의 얼굴이 대놓고 시무룩해졌다.

“입도 싸. 막 우리 부모님한테 내 이야기도 엄청 한다니까?”

“태서야.”

보다 못한 박한수가 그만하라며 태서를 말렸다. 소개팅은 무슨 소개팅. 심지어 여기저기 끼어들고 입도 싼 놈을 왜 한미래에게 소개시켜 주려 하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게 애인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 애인이 생기면 다른 데 돌아볼 여유가 있겠어? 제 여자친구 챙기느라 바쁘지.”

태서가 자연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틀어 버리자 박한수와 한미래의 표정이 달라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박한수와 웃음이 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한미래를 본 태서가 돌아섰다. 여기까지 했으니 나머지는 저 둘이 알아서 할 일이지.

태서가 제 옆으로 온 강세헌을 올려다보았다.

“저 잘했어요?”

강세헌이 대답 대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우리 내기에 대해서 일단 보류하는 게 어때요.”

아직 저 둘이 휴게소에 머물고 있으니 나중에 듣고 누가 이겼는지 판단하기.

***

축복이를 품고 나서부터 급격히 늘어난 잠은 낮잠과 밤잠을 가리지 않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자고 싶어도 자지 못할 테니 미리 자 두라는 아이의 배려라고도 하는데 그래서인지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몰랐다. 잠에서 깬 태서가 눈도 뜨지 않은 채 굳은 몸을 풀기 위해 조금씩 움직이니 강세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어?”

태서가 고개만 끄덕이고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눈꺼풀이 무겁긴 하지만 조금만 깜박이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며 초점을 맞춰 가던 그때 무언가가 태서의 시야를 확 사로잡았다.

끝없이 펼쳐져 하늘과 맞닿은 경계선이 흐려질 정도로 파란 바다였다.

태서가 등을 세우자 강세헌이 버튼을 눌러 의자를 세워 주었다. 편하게 기대서 보라는 의미였는데 태서는 바다를 보느라 다른 건 알아채지 못했다.

“진짜 예쁘네.”

겨울 바다가 예쁘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직접 볼 때의 감동은 달랐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파랗고 파도치는 게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나가자.”

강세헌이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자 태서가 그의 손을 잡고 내렸다. 방금까지는 바다만 보였다면 이젠 파도치는 소리도 크게 들려왔다.

바다를 향해 걸어가니 강세헌이 태서의 머리 위로 두툼한 담요를 덮어 줬다. 귀가 시릴까 머리부터 덮어 준 것인데 태서의 옆으로 똑같이 담요를 머리에 걸친 아이가 걸어가고 있었다.

“혹시 몸에 무리 가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오길 잘했어요.”

태서가 담요를 한 손으로 모아 잡으며 바다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걸어갔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파도는 태서의 신경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오길 잘했네.”

태서가 좋아하는 모습을 본 강세헌도 만족스러운 듯 바다를 감상했다.

그 후엔 대화 없이 바다만 바라봤다. 굳이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아도 어깨가 닿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축복이가 태어나면 또 와야겠어요.”

너무 어릴 땐 안 되니 한 일 년 정도 지나면 괜찮을까?

아기가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을 그대로 아이에게도 보여 주고 싶었다. 아니, 지금 배를 발로 차고 있으니 좋아할지도?

“바람이 차니 들어가자. 호텔에서도 바다가 보이니 거기서 마음껏 봐.”

“가까이에서 조금만 더 보고요.”

태서가 담요를 꼭 쥐고 다시 한 걸음 옮겼다. 발이 모래 안으로 푹푹 빠지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파도가 쳐서 물이 올라온 경계선 앞에 섰다.

넘실거리는 물결과 하얀 포말을 바라보고 있으니 기분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거 선물 같아요.”

윤태서가 되어서 죽을까 아등바등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향한 칭찬과 함께 주는 선물 같았다. 그래서 떠오른 대로 말했다가 뒤늦게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 방금 너무 느끼한 말을 한 거 같아서 그랬다. 그러나 강세헌은 조용히 태서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같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강세헌의 대답을 들은 것만 같아 태서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저 요즘 너무 행복해서 불안해요.”

불안, 이라는 단어에서 강세헌이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하루하루가 너무 평탄하게 흘러가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행복해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한 번씩 치밀어 오르는 불안을 무시하기엔 요즘 그 빈도가 점점 잦았다.

이유는 몰랐다. 그래서 강세헌에게 처음으로 제 심정을 내뱉었다.

“이상한 게 아니야.”

강세헌이 고개 저었다. 그는 태서의 팔을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었다.

“사람은 가장 행복해할 때 온전히 그것을 누리지 못하기도 한다고 해. 이 행복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불안이 되는 거야.”

“형도 그럴 때 있어요?”

“없어.”

“…….”

다 이해한다는 듯 말해 놓고 정작 자신은 없다니 태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자신감이 가끔 부럽네요.”

“대신 너와 관련된 것에는 기분이 크게 흔들려. 불안하기도 하고 다급해질 때도 있지.”

강세헌의 감정이 움직이는 게 자신이라고 하니 태서의 입에 다물렸다. 이런 식으로 전해 오는 고백이 처음도 아닌데 들을 때마다 심장이 떨렸다.

“형은 진짜 대단한 거 같아요.”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는 것도 신기하고 저렇게 자연스럽게 고백하는 능력도 최고다.

“그래서 일을 잘하나?”

기회를 잘 보니까?

태서의 타당한 의심에 강세헌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제 들어가자.”

이 정도면 바람을 많이 쐬었다. 여기서 더 고집부리고 버텨 봐야 제 손해라는 걸 알기에 태서도 말없이 돌아섰다. 한번 나와서 오래 있기보다 틈틈이 나오기를 택한 것이다.

그러면 감기 걸리지 않겠지?

태서가 강세헌을 따라 순순히 걸음을 옮기면서 아쉬움에 바다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어?”

그때였다. 자신들처럼 바다를 구경하는 사람들 중 한 무리가 바다에 꽤 가까이 있었다. 내용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소리를 치는 것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즐거운 상황은 아닌 듯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 사람은 바다로 뛰어들었고 다른 이는 말리는 거 같다.

“보지 마.”

강세헌이 태서의 눈을 가리며 제 품에 안았다.

“하지만…….”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강세헌의 말대로 제가 본다고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미 다른 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고 바다에 뛰어든 이는 더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니 축복이까지 품은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쉽게 돌아서지 못하는 건 울부짖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귀에 익어서 그랬다.

“가요.”

왜 서다래를 떠올린 건지. 태서가 강세헌의 품에서 나와 말했다.

***

따뜻한 물로 씻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바다를 감상할 때였다. 머리맡에 둔 핸드폰의 진동에 태서가 손을 뻗어 그것을 집었다. 상단에 뜬 박한수의 이름에 휴게소의 일이 궁금해 바로 대화 창을 열었다.

「나 미래한테 고백했다.」

「미래가 아직은 친구 같은 느낌이라고 했는데…….」

“미래가 거절했나?”

「고백은 받아주겠대.」

태서의 혼잣말을 듣기라도 한 듯 곧바로 톡이 날라왔다.

“오.”

드디어 박한수에게도 애인이 생기는구나.

“그럼 나를 귀찮게 안 하겠네.”

오늘 아침에만 해도 한미래를 위해 이것저것 챙긴다고 자기는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잘됐네.”

태서가 대충 축하한다는 톡을 보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그런데…….」

뒷내용을 궁금하게 하는 내용에 태서가 눈만 위로 떠서 다시 대화 창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아무 일도 없었냐?」

“아무 일?”

얘가 뭘 알고 물어본 말인가 싶어 태서가 인상 쓰며 생각해 봤다. 자기야 여기까지 잘 와서 바다를 보고 들어온 것밖에 없다.

“……바다에서?”

누군가 빠지려는 소란이 있긴 하지만 제 일이 아니긴 한데.

“모르겠네.”

태서가 대충 머리를 긁적이다가 자판을 두드렸다.

「무슨 일?」

「없으면 됐다.」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대답이 뭐 이래.”

태서는 찝찝한 얼굴로 핸드폰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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