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이거구나.’
제가 강인혁을 좋아했던 과거를 강세헌에게 들키면 안 될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 약간의 협박을 들먹이면 제가 그들이 내민 손을 잡아 줄 줄 알았겠지. 보통은 과거를 숨기고 싶어 하니까.
이미 강세헌이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세헌이라서 좋아?”
“뭐? 아, 당연히 강인혁보다 강세헌이 낫지.”
그의 솔직한 대답에 태서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계속 후계자를 들먹이더니 강세헌이랑 잘되는 걸 더 좋아하는구나.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렇게 서로 응원도 해 주고 도움도 주면서 같이 나아가는 게 친구지. 안 그래?”
얼추 어떤 사인지 알겠고 어떤 속셈으로 다가왔는지도 알겠으니 더 어울릴 필요가 없어졌다.
“너희들이 내 친구라는 거지?”
“학교에서는 수업이 달라서 어울리기 힘들었지만 꼭 수업을 같이 들어야 친구는 아니지.”
“교우 관계를 오래 유지하고 싶다고?”
“뭐 새삼스럽게 말할 것까지는 없고 이런 자리에서 만난 만큼 돈독해지자는 거지.”
자신들이 원하는 상황으로 흘러가니 기분이 좋은가 보다. 그들에게 질문하며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한 태서가 툭 내뱉었다.
“그런데 내 친구는 박한순데.”
먼저 다가와 말 걸어대고, 주제넘게 나서서 욕도 먹고, 귀찮다는데 굳이 찾아와서 들러붙는 그런 놈을 친구라고 인정하기 싫지만.
“누가 박한수랑 친구 아니라고 했냐?”
현성이 잠시 당황했다가 웃으며 말해 왔다.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우리 사이가 좋아지면 부모님들한테도 좋은 일이다? 밝은 미래를 위해서 지금부터 사이좋게…… 왜 이래?”
태서를 끌어들이려 쉴 새 없이 말하던 현성은 다른 이가 자신을 말리듯 팔을 툭툭 쳐 오니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올 수 있다고 여겼는지 다른 이의 방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뭐 때문에 그러는…….”
무엇을 본 건지 현성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떨리는 걸 본 태서가 의자에 기댔던 등을 뗐다.
익숙하면서도 따뜻한 온기가 현성의 팔을 밀어 내고 태서의 어깨를 차지하자 남아 있던 불쾌한 감정이 물밀듯 사라졌다. 시선을 내려 손을 본 태서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 돌아보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다. 강세헌일 거라고 확신했으니까.
“내가 앉을 자리가 없는데…….”
자리를 훑어본 강세헌의 말에 남자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강세헌의 말대로 태서의 주변 좌석이 다 찬 상태였고 그렇다고 한 사람이 일어나자니 강세헌과 태서에게 멀어지는 거라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눈치 싸움의 패배자는 방금까지 떠들어대던 현성이었다. 애초 평등한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니 가장 밑에 있는 놈이 일어나야지.
현성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일어날 때였다. 태서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서로 눈이 마주치자 현성이 어벙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내가 옮길 테니까 여기 있어. 설명회 와 줘서 고맙다.”
태서가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인사했다. 그의 살가운 태도에 남자들이 뒤늦게 반응했다.
“가려고? 여기 있어도 되는데…….”
“아니야. 나는 형이랑 둘이 있으려고.”
태서가 돌아서자 강세헌도 그들에게 몸을 돌렸다.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남자들은 뒤늦게깨달았다. 바로 강세헌에게 인사할 틈을 놓쳤다는 것.
“누구야?”
“대학교 동기인데 부모님 대신 왔대요.”
“이름은 모르고?”
“누구냐면…….”
멀어지면서 태서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되니 남자들이 엉덩이를 슬쩍 뗐다가 이내 의자에 다시 붙였다. 이거… 윤태서에게 당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구석진 곳으로 강세헌을 데리고 간 태서가 그와 나란히 앉았다.
“친하지도 않으면서 왜 같이 있었어?”
강세헌이 이름을 물었을 때 태서가 목소리를 낮춰서 건넨 대답은 ‘모른다.’였다.
“제 과거를 들먹이더라고요.”
“과거?”
“윤태서가 강인혁을 따라다녔던 과거.”
태서가 무알콜 샴페인을 마시며 대답했다. 그걸 핑계로 다가오다니… 솔직히 그냥 인사만 건네 오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씁쓸한 얼굴로 샴페인을 마시고 있으니 강세헌이 화제를 바꿨다.
“들어오기 전에 대표님께 이야기 들었어. 호텔 후계자로 나서는 첫 자리라고?”
마침 직원이 다가와 강세헌의 빈 잔에 샴페인을 따라 줬다. 강세헌이 그것을 들어 태서의 잔 가까이로 내밀었다.
“축하해 줘야겠지?”
“아직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도 이건 부딪치고…….”
태서가 능청스럽게 축하 인사만 받아 갔다.
“부모님께 생각해 본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잘 생각해 두세요.”
“나한테 넘기는 거 아니지?”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듯 태서가 샴페인을 마셨다. 어쨌든 강세헌과 상의할 일이었으니까.
“이 자리에 부른 걸 보면 관심이 없는 건 아닌 듯한데…….”
강세헌이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걸 듣고도 태서는 못 들은 척했다. 왜냐면 굳이 말로 알려 줄 필요가 없을 테니까.
“시간이 된 거 같은데 곧 시작하겠어요.”
태서가 주변을 바라보는 듯싶더니 곧 밝은 조명이 하나둘 꺼졌다. 조명을 최소한으로 남겨 두자 빔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강세헌의 얼굴을 어슴푸레하게 밝혔다.
“아직도 밝네.”
우리 형 자야 하는데.
태서가 강세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두 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가 제 품에 올 수 있도록 끌어안았다.
“눈 감아요. 그동안 피곤했을 텐데 잠깐이라도 자 두면 나을 거예요.”
가까이 자리 잡은 몇몇이 돌아보니 태서가 더욱 그를 끌어안았다. 아까 제게도 친구하자고 다가온 놈들처럼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지 몰랐다.
그러면 강세헌이 쉴 수 없을 테니 제 품에 안아 가려 주고 토닥여 줬다.
“자장자장 우리 형아, 잘도 잔다 우리 형아.”
품에 안긴 강세헌의 몸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웃음 짓고 있다는 걸 알겠다.
태서가 고개를 숙여 그에게 귓속말했다.
“관심이 있어서 참석한 게 아니라 형 재우려고 왔어요.”
그러니까 어서 자요.
태서가 강세헌의 등을 토닥거렸다. 지금만큼은 KH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자신들의 결혼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설명회를 맡게 된…….”
앞서 나온 진행자는 어머니의 말대로 목소리가 좋고 조곤조곤한 말솜씨를 가졌다.
***
“청첩장은 어딨어?”
“그거…….”
박한수가 손을 내밀어 달라는 듯 굴자 태서가 음료수를 마시며 잠깐 대답을 끌었다.
“미뤘어.”
“그게 무슨 말이냐.”
“결혼…… 미뤘다고.”
“뭐?”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몸을 일으켰던 박한수가 카페라는 걸 깨닫고 몸을 낮췄다. 그리고는 목소리까지 착 가라앉히는데 그 과장된 움직임이 더 눈에 띈다는 걸 혼자 모르는 듯했다.
“왜 미뤄.”
“형 바쁘잖아. 우리 아직 웨딩 사진도 안 찍었다.”
단순히 청첩장을 돌리고 식만 올리는 거라면 태서도 강세헌에게 딱 하루만 시간을 내어 달라고 했을지 모른다.
“나는 결혼이 그렇게 준비할 게 많을 줄 몰랐다.”
태서가 제 손가락을 쫙 폈다. 그리고 제 약지를 살살 만져댔다.
“여기다 반지 끼고 우리 결혼해요, 라고 말하면 끝나는 게 아니더라고.”
간단하게나마 웨딩 사진을 미리 찍어 놔야 식장에 둘 수 있고 또 피로연은 어떻게 진행할지, 하객 리스트는 어떻게 뽑을지, 정할 것이 많았고 하나하나가 다 일이었다.
“부모님이 많이 도와주시잖아.”
“그렇지, 그런데 온전히 맡길 수 없는 거잖아.”
“뭐 아직 청첩장 돌리기 전이니 상관없다만…….”
박한수의 시선 내려가더니 태서의 배를 봤다. 그 시선을 눈치챈 태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축복이 낳고 하기로 했어. 대신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진행할 거야. 그때 청첩장 줄게.”
태서가 헤실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게 이상했는지 박한수가 이상한 놈 보듯 툴툴거렸다.
“결혼 미뤄 놓고 뭐가 좋다고 웃냐.”
“축복이 앞에서 결혼할 거 생각하니까 좋아서.”
지금 하면 축복이를 품고 식장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미루면 세상에 나와 꼬물거리는 축복이의 앞에서 세헌이 형과 결혼할 수 있게 된다.
“거기까지 생각했구나.”
박한수가 그게 뭐라고, 싶은 말을 중얼거리더니 슬그머니 운을 뗐다.
“내가 축복이 안고 있어도 되냐?”
“……내 생각에 네 차례까진 못 갈 거 같다.”
이미 양가에 결혼을 미루겠다고 말을 전할 때부터 축복이를 데리고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이게 뭐라고 결혼 날짜를 미룬 것보다 더 큰 관심을 보여서 외려 태서가 당황할 정도였다.
“아니 부모님들이야 혼주석에 있으시잖냐.”
“응. 근데 가장 막강한 분이 있다.”
가장 큰 소리로 난 혼주석에 안 앉으니 축복이는 제가 데리고 있겠다고 주장하신 분이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놈 뭐가 그리 귀엽다고 벌써부터…….”
박한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도 데리고 있고 싶다 말한 건 잊은 듯이.
“배고프다.”
음료수를 다 마신 태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박한수가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너 카페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케이크랑 스콘 먹었잖아.”
“요즘 식욕 폭발이야. 밥 먹으러 가자.”
“뭐 먹게.”
“피자.”
“……우리 방금까지 빵 먹었는데 균형 있게 한식은 안 되냐?”
“먹고 갈 거야.”
“뭐?”
박한수가 테이블에 올려놨던 제 핸드폰을 들며 급히 태서를 따라 나갔다.
한수와 태서를 주시하고 있었던 듯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남자가 일어났다. 그는 방금까지 태서가 앉아 있던 자리로 다가왔다, 검은 모자 아래 드러난 입술이 천천히 비틀렸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서다래의 낮은 목소리가 금방 매장에 틀어 놓은 노래에 묻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