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무슨 일 있니?”
생각에 잠겨 있던 태서가 윤석훈의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제가 부모님과 함께라는 걸 깨달은 태서가 고개를 저었다.
“큰일은 아니고요.”
태서의 대답을 듣고도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윤석훈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가까이에 앉은 김미경은 아예 태서의 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다녀오더니 더 표정이 안 좋아졌어.”
태서가 멋쩍게 제 볼을 쓸었다. 형을 보고 오겠다고 나갔다 와 놓고 멍하니 있었더니 그게 이상하게 비쳤나 보다.
“형이 바빠 보여서 신경 쓰였어요.”
태서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거칠어진 피부와 때꾼한 눈가를 보며 얼마나 착잡했는지 몰랐다. 힘든 시기도 아니고 그저 바쁜 것뿐인데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그래서 태서는 밤새 강세헌이 자는 걸 보다가 나온 참이었다.
“이럴 땐 빨리 축복이가 나왔으면 해요. 그러면 마음 놓고 형을 신경 쓸 수 있잖아요.”
일 적으로 도와줄 순 없어도 그를 따라다니며 식사라도 챙겨 줄 순 있지 않을까. 그런데 지금은 제가 임신해서 강세헌의 걱정을 살까 따라다닐 수조차 없다.
아들의 상황이 그려지는지 태서의 한숨을 따라 김미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천히 나아질 거야.”
그녀의 잔잔한 목소리가 태서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게 된 이후로 이런 대화가 제법 많아졌다. 일이 많은 부모님을 위해 태서가 직접 그들을 찾아와 차를 마시거나 함께 식사하는 정도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안 그래도 강세헌이 자신의 식사를 엄청 신경 써서 나날이 살이 찌고 있는데 부모님의 사랑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제가 윤태서로 살기로 한 건 백번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사랑을 주는 부모님과 사랑하는 연인에 사랑스러운 축복이까지.’
“역시 부모님한테 말하길 잘했어요.”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지만 적어도 미소를 되찾을 정도는 되었다. 어느 정도 걱정을 덜어 낸 태서의 표정을 살핀 김미경이 은근히 화제를 바꿨다.
“엄마도 요즘 새로운 고민이 생겼는데 들어 볼래?”
“어머니가요?”
“그래.”
김미경이 바로 대답하는 대신 윤석훈을 보았고, 차를 마시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오가는 무언의 신호에 태서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러시는 걸까.
“원래는 네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말하려고 했던 거야.”
김미경이 태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우리는 네게 호텔을 물려줄 거야.”
갑작스러운 주제에 태서가 무의식적으로 사무실을 살폈다. 따로 본사가 있음에도 두 분은 호텔 내에 사무실을 만들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접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주기적으로 호텔을 돌며 직접 살펴보는 모습만 봐도 두 분이 얼마나 호텔을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호텔을 제게 물려준다니.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리한테는 네가 유일한 자식이잖아. 물론 네가 전문 경영인을 들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어.”
김미경은 태서에게 부담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그렇지만 나는 네가 이 호텔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맡아 줬으면 좋겠어.”
“……호텔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아요?”
호텔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그게 아니지 않나. 부루마불한다고 생각했던 그 호텔 전부? 그에 대한 대답은 윤석훈에게서 나왔다.
“아직 우리가 젊으니 네게 충분한 시간을 줄 거다. 조급할 거 없이 탄탄하게 준비하면 충분히 이 호텔을 이끌 수 있을 거야.”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태서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넌 우리의 아들인걸.”
김미경이 태서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애정을 드러내는 사이 윤석훈이 종이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투자 설명회 초대장이다. 투자자들이 모이는 자리니 나와서 지켜보면 좋겠다.”
“아…….”
천천히 준비하면 된다는 말과 달리 왜 지금부터 이야기를 꺼내나 의아했는데 이것 때문이구나.
해외에 사 들인 부지에 짓고 있던 호텔이 준공을 앞둔 상태라더니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는구나.
“네게는 따로 설명회 자료를 줄게. 대신 이 초대장은 네가 직접 전해 줬으면 하는데…….”
“누구에게요?”
태서가 시선만 내려 봉투 겉면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세헌이 형이요?”
“맞아.”
“형이 투자했어요?”
그래서 부르는 거냐는 물음에 김미경이 웃으며 고개 저었다.
“이 사업에 가장 처음 관심을 보였던 건 그 사람이 아니지. 그런데 참 인연이 신기하단 말이야.”
그녀가 윤석훈을 바라보자 그가 이어서 설명해 주었다.
“투자를 하고도 사업에 그 어떤 참견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공식적인 자리에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 실은… 그 사람이 투자자 중 한 명이라는 걸 다른 투자자들은 아무도 몰라.”
알 듯 모를 듯한 말에 태서가 물었다.
“그게 형 이야기가 아니에요?”
김미경이 웃으며 고개 저었다.
“아니. 나는 세헌 씨 이름만 들었어.”
김미경이 맞춰 볼 수 있도록 실마리를 주자 태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게 초대장 전달을 부탁하는 것을 보면 제 주변 인물일 테지만 강세헌은 아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강학중…… 회장님이요?”
“그래.”
김미경이 직접 초대장을 들어 태서의 손에 쥐어 주었다.
“회장님에게 드려도 오실 거 같지 않아서 세헌 씨에게 주는 게 어떨까 싶어.”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걸 말하는 자리니까 당연히 괜찮지. 세헌 씨가 말을 전해 주려면 와서 봐야 하잖아.”
태서가 초대장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바쁜데 초대해도 괜찮을까.’
제게 호텔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형에게도 직접 말해 주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피곤한 사람을 더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망설여졌다. 그런 고민을 읽었는지 김미경이 은근하게 말했다.
“발표하는 사람은 아주 목소리가 좋고 조곤조곤한 말솜씨를 가졌어. 또, 주위를 어둡게 할 거야. 그 정도면 잠깐 졸기 충분하지 않아?”
그제야 태서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걸렸다. 좋은 기회를 잡았다.
***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건 나만이 아니었네.’
주변을 돌아본 태서가 제게 향하는 시선에 딱히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생각했다. 초대장은 한 비서를 통해 강세헌에게 보냈고 따로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그가 올 거란 연락을 받고 먼저 왔는데 다른 이에게도 오늘이 기회였나 보다. 자신을 향한 끈덕진 눈길이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가볍게 어딘가를 돌아다닐 뿐 공식적인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으니 태서를 향한 사람들의 궁금증은 나날이 더해 갔다.
“세헌이 형의 오메가라서 바라보는 걸까, 아니면 내가 호텔 아들이라서?”
……둘 다인가?
시선으로 제 얼굴에 구멍이 뚫릴 지경이라 손끝으로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세헌이 형은 언제 오려나.”
혼자서는 저 시선을 다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것치고 뻔뻔하게 잘 앉아 있긴 했지만.
“근데 저 사이사이에 끼어든 묘한 시선은 뭘까.”
관심으로 치기엔 적대적이고, 호기심이라 치기엔 자신을 아는 듯한 그런?
“어디서 나를 봤더라.”
얼굴이 젊은 것으로 봐서 부모님 대신 온 거 같기도 한데. 주변을 훑어보는 척하며 슬쩍 바라보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 무리가 일어나 다가왔다.
제 또래의 젊은 남자 세 명이었다.
눈이 올라간 남자, 입술이 얇은 남자 그리고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남자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다?”
나를 알아? 라고 물어보면 안 될 거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윤태서의 관심의 문제였다.
“네가 갑자기 휴학해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눈이 올라간 남자가 자연스럽게 태서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른 남자들도 하나둘 근처에 자리하니 태서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KH 후계자랑 결혼한다며. 나 그 영상 보고 깜짝 놀랐잖아.”
함께 온 다른 이가 눈이 올라간 남자를 현성이라고 불렀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현성이 다른 이의 표정을 살피곤 다시 말을 이어 갔다.
“KH가 신제품 광고로 청혼을 할 줄 꿈에도 몰랐지. 그런데 내가 그거 보고 무슨 생각부터 들었는지 알아?”
태서가 가만히 듣고만 있자 현성이 입술을 휘며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네가 왜 강인혁을 버리고 강세헌을 택했는지 알겠더라고……. 확실히 KH를 가져갈 사람으로 갈아타면 좋지.”
그냥 미소가 아니라 비웃음이구나.
현성이 말을 하는 내내 태서가 입을 떼지 않자 다른 두 남자가 눈치를 줬다. 그에 현성이 어떻게든 태서의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서둘러 입을 뗐다.
“너 강인혁 좋아한다고 그렇게 쫓아다닐 때는 언제고 강세헌으로 갈아탄 거냐?”
일단 이 현성이라는 놈이 다른 놈들과 어떤 사이인지는 알겠고, 그가 자신을 자극하겠다고 해 오는 말에 태서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느라 입술을 깨물어 댔다.
“그거 말하려고 온 거야?”
“그럴 리가.”
태서가 받아치자 눈에 띄게 표정이 나아진 현성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리가 부모님을 대신해서 여기 왜 왔겠어. 다 네가 온다고 해서 온 거지. 좋은 사이를 만들어 보려고.”
그와 닿은 곳에서부터 불쾌함이 올라오는 걸 보니 알파인가 보다. 현성의 팔을 치우고 싶은 마음에 태서는 어느새 미소를 지운 채였다.
“KH 후계자와 결혼하고 앞으로 호텔을 물려받을 후계자와 인연을 만든다.”
달갑지 않은 상황에서 현성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중얼거렸다.
“어때? 우린 네 본모습을 보고도 절대 떨어지지 않을 사이가 될 수 있는데. ”
거짓된 친근함 뒤에 은근한 협박이 웅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