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인데 임신했다-103화 (103/130)

103화

조용히 묻혔으면 좋았을 일이 한미순의 외가 쪽에 의해 크게 터졌다. 그들의 요구는 한미순이 저지른 일을 덮어 달라는 거였는데 먹혀들지 않은 게 원인이었다. 그쪽에서 작정하고 한미순이 피해자라는 식의 보도를 퍼트려 여론전이 펼쳐진 바람에 일이 커졌다.

“이니셜을 쓰면 뭐 해. 하나도 가려지지 않는데.”

핸드폰으로 기사를 찾아보던 태서가 복잡한 눈으로 기사의 내용을 훑어 내려갔다. 사선 읽기로 봐도 충분했다. 지금껏 봐 온 기사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으니까.

언론이라는 건 먼저 이미지를 선점하는 자에게 승산이 있었다. 그 모든 걸 뒤집을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이상 같은 내용을 조금씩 바꾼 기사들이 계속해서 올라올 뿐이었다.

“그래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가라앉지 않네.”

이때다 싶었는지 그룹을 깎아내리는 기사와 댓글이 상당했다. 주가도 요동치고 있으니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힘드네.”

태서가 쿠션을 가져와 끌어안으며 다른 기사를 살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는데 연관 기사를 찾아 읽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도어 록 기계음에 고개를 들었다. 센서 등이 켜짐과 동시에 안으로 들어온 강세헌이 태서를 발견하고 멈췄다.

“여기에 있을 줄 몰랐네.”

“부모님이랑 있다가 왔어요. 오늘은 여기서 자려고요.”

태서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걱정 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 밥은 잘 챙겨 먹었어요?”

“그건 내가 하던 말인데.”

“형이 많이 바쁘니까 물어보는 거잖아요. 기사 계속 뜨고 있던데…….”

평소와 다름없지만 그의 눈밑이 거뭇해지고 피부가 거칠어진 것만 봐도 지금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겠다. 볼이 해쓱해진 거 같기도 하고.

태서가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입술이 까슬하게 올라온 걸 손으로 살살 건들고 있으니 그에게 손이 붙잡혔다.

“얼굴이 안 좋아요.”

“씻고 나면 괜찮아져.”

“제 생각엔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어야 좋아질 거 같은데요?”

어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태서가 손을 빼니 강세헌이 순순히 놔줬다.

“곧 가라앉을 거야.”

강세헌이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의 턱선이 도드라지는 것을 보며 태서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제가 해 줄게요.”

평소라면 여유롭게 넥타이를 풀어냈을 사람이 며칠을 고생했더니 잘 풀지 못했다. 그게 참 안타까운데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지금은 이것밖에 해 줄 게 없네요.”

태서는 강세헌의 손을 잡아 내리며 제가 직접 넥타이를 풀어 주었다. 매는 건 못해도 살살 풀어내는 건 잘했다.

“가라앉는 즉시 청첩장을 돌릴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아, 그렇죠.”

청첩장.

잊고 있었다.

태서가 잠시 말을 멈춘 사이 강세헌이 태서의 턱을 들어 눈을 마주쳤다. 일주일 만에 본 태서의 얼굴을 눈으로 훑던 그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보고 싶었어.”

강세헌의 고백에도 태서는 평소처럼 환하게 웃지 못했다.

“왜 그래.”

그 반응을 기민하게 알아챈 강세헌이 태서의 볼을 쓰다듬으며 걱정했다.

“형이 이렇게 바쁜데 결혼을 강행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별개야. 원래부터 정해진 일이었으니 신경 쓰지 마.”

“……형.”

태서가 낮은 목소리로 강세헌을 불렀다.

“아직 청첩장 돌리기 전이니까 우리 날을 뒤로 옮기면 어때요?”

태서가 조심스럽게 건넨 제안에 강세헌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굳게 다물린 입술에 태서는 눈을 굴리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 강세헌은 단순히 언론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그룹 전반적으로 손을 대고 있었다. 강수학을 받쳐 주던 임원들을 원래의 자리에 다시 배치하고 원하와 맺었던 계약을 책임지느라 바빴다.

태서는 강세헌이 신경 쓸까 본가에 돌아가 있는 것밖에 할 게 없는 상황인데 결혼이라니…….

“급한 거 아니잖아요. 이왕이면 축복이 낳고 하는 거 어때요?”

태서가 제 배를 살살 어루만지며 분위기를 끌어 올리려 노력했다. 여전히 날씬한 배지만 축복이가 있다는 걸 알려 주려는 거니까 상관없다.

“출산까지 얼마 안 남았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 조금 여유를 가져요.”

강세헌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결혼 관련한 모든 준비는 제가 직접 할 자신 있었다.

그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런데 강세헌이 태서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요?”

“예정된 결혼까지 미루고 싶지 않아.”

“바쁘잖아요.”

“태서야.”

가벼이 한쪽 볼을 어루만지던 손이 벌어지더니 이내 양 볼을 잡았다. 강세헌은 볼이 눌려 입술이 오리처럼 삐죽 나온 태서의 모습을 보곤 한결 나아진 표정을 지었다. 남의 얼굴을 한 손으로 휘어잡은 게 뭐가 좋다고.

“널 공식적으로 내 사람으로 만드는 걸 미루라고? 차라리 내 뼈를 깎아 시간을 맞추지.”

“이미 전국민이 알잖아요. 그러니까 결혼은 좀 늦어도…….”

우물거리는 발음으로 말하자 강세헌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왜 이렇게 웃지?

“안 돼.”

칼 같은 대답에 태서의 입술이 더 나왔다. 강세헌이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도장 찍듯 꾹 누르고 멀어졌다.

“배고프다.”

겉옷을 벗는 강세헌의 느긋한 움직임에 태서가 불만을 드러내다가 포기했다.

“저 인간이 자기 몸은 돌볼 줄 모르네.”

지켜보는 사람의 걱정하는 마음도 몰라 주고.

***

서다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남의 장소가 구치소라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딘지 황량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제 마음과 닮아 있었다. 서다래가 눈을 내려 손목 시계를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맡겨 둔 터라 텅 빈 손으로 매만질 만한 게 손목시계 뿐이었다. 손목에 감긴 가죽끈을 만져 대며 서다래는 강인혁과 한미순을 다룬 기사를 떠올렸다.

강인혁에 벌어진 일은 기사로 접했다. 전체적으로 강인혁의 부모에 대한 동정 여론이 큰 상황이었지만 서다래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윤태서가 탐나서 일을 벌였겠지.’

어쩌면 쫓겨날 지경이라 윤태서를 이용해 발악했을 수도 있고.

그런데 아무리 여론이 한쪽으로 쏠린다 해도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강학중 회장을 비롯해 강세헌은 견고하게 자리를 지켜냈고 강인혁과 한미순은 쫓겨났다.

서다래가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중, 문이 열리며 기다리던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접견 시간은 10분입니다.”

딱딱한 음성을 끝으로 둘만 남게 되자 서다래는 앞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소박해진 차림의 그녀였지만 특유의 오만한 표정만은 그대로였다.

“오랜만입니다.”

“이 꼴이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니?”

한미순의 매몰찬 음성에도 서다래는 담담하게 반응했다.

“인혁이한테 당하셨다면서요.”

참 이상한 게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게 다름 아닌 아들이라는 거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날 비웃는 것도 이 순간뿐이라는 걸 알아 둬.”

한미순이 차가운 목소리로 서다래의 말을 부정했다.

“그래요. 어떻게 생각하든 제가 참견할 자격은 없겠죠.”

서다래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녀에게 제대로 된 말을 듣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날 찾아온 이유가 고작 그거니?”

“아니요.”

서다래가 고개를 저었다.

“물어보고 싶어서요.”

한미순을 찾은 건 제가 미워하는 사람을 그녀 역시 미워하지 않을까 해서.

“저 혼자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게 많이 힘들어서요.”

자신은 아직도 그에게 당한 과거가 떠올라 고통스러운데 그는 웃으며 지내고 있다. 하물며 제가 그를 쓰러지게 한 것도 잊은 듯 굴었다. 복수를 해 오지 않고 오히려 얽히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다는 식으로 구는 그 모습이 거슬렸다.

자신은 아직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 혼자만 올곧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있었다.

“윤태서.”

자신만큼이나 윤태서를 미워하는 게 한미순이니 그녀를 찾아왔다.

“아무 상관도 없는 절 단지 인혁이가 호감을 비춘다는 이유로 미워했어요. 집이 대단하지 못하다고 비웃고 일부러 인혁이를 노리고 접근한 것처럼 몰아세우고.”

서다래는 과거 윤태서가 제게 한 행동을 들먹이며 비웃었다. 그건 앞의 한미순도 마찬가지였다. 아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자신을 몰아세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서다래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상관일까. 이제 한미순은 아들의 상대를 고를 처지가 되지 못할 텐데.

“그게 참 억울해요. 아기를 잃을 뻔했다는데 조금도 날 미워하지 않는 게 무시당하는 거 같아 기분 나쁘고요.”

잠자코 서다래의 말을 듣던 한미순은 처음으로 즐겁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내가 널 제대로 봤구나.”

마음이 여리고 순진하기 짝이 없 척하는 모습은 거짓일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한미순의 눈빛으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서다래가 코웃음 쳤다.

“날 그렇게 만든 거겠죠.”

“널 그렇게 만든 건 돈이 아니라 질투였어.”

그러니까 온전한 사랑을 받았다면 절대로 바뀌지 않았을 이가 질투라는 감정으로 조금씩 검은 물이 들었다.

“미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증오스러워요. 그래서 더욱 윤태서를 향한 복수를 하고 싶어요.”

서다래의 본론이 나왔다. 그가 한미순의 가늘어진 눈을 보았다.

“제 복수에 힘을 실어 주세요.”

모두가 좋아하는 윤태서를 자신 혼자서만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걸 한미순에게 듣고 싶었다.

“그래, 내 아들을 그렇게 뒤흔든 윤태서가 아주 밉지. 지금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당장 그 아이를 찾아가고 싶을 정도야.”

한미순은 구치소에서도 조금도 반성하지 않았다.

“내가 좋은 정보를 하나 줄게.”

어디 원 없이 네 복수를 해 보렴. 한미순의 솔깃한 제안에 서다래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