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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01화 (101/130)

101화

조카의 당황한 얼굴이 얼마나 지켜볼 맛이 있을지 생각하며 한미순은 휘어지는 입매를 다잡지 못했다. 이렇게 기분이 붕 떠서는 협상이 제대로 될지 모르겠지만 뭐 어떠랴. 지금껏 당해 온 것을 생각하면 강세헌을 앞에 둔 채 배가 찢어져라 웃고만 싶었다.

“보고 나면 거절하기 힘들 텐데 괜찮겠니?”

“보고 나서 결정하겠습니다. 대신 제가 받아들이지 않을 시 작은어머니가 짊어질 책임이 무겁다는 걸 알아야 할 것입니다.”

“네가 내 걱정을 다 해 주고 눈물이 다 나는구나.”

한미순은 정말 눈물이 나오는지 제 눈가를 훔쳤다. 물론 어디까지나 희열에 차올라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그녀는 이 자리가 진심으로 즐거웠다.

“어쩔 수 없지.”

한미순이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게 신호였는지 누군가 문손잡이를 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세헌이 그쪽을 돌아보는 동시에 문이 열렸다.

낯선 두 남자가 들어온 후 뒤따라온 이는 강인혁이었다. 입술이 터진 강인혁은 강세헌의 시선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듬직한 제 아들을 바라보던 한미순이 웃으며 남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증거를 보여 주세요.”

그녀는 제 계획이 제대로 흘러갔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들은 머뭇거리며 아무것도 꺼내 들지 않았다.

“뭐 해요?”

“어머니.”

한미순이 남자들에게 어서 태서를 찍은 사진을 가져오라고 할 찰나에 강인혁이 나섰다.

“잠시만요.”

말할 때마다 아픈지 강인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전 강인혁은 태서를 잡기 위해 몰래 그들을 따라갔고 뒤에서 덮쳤다. 반항하는 태서를 움직이지 못하게 압박하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태서의 가쁜 호흡이 손바닥에 닿았다. 다시 생각해도 긴박한 순간이었다.

“인혁아, 할 말은 나중에 해.”

한미순은 지금 강세헌에게 태서를 데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강인혁의 말도 막았다.

그러나 강인혁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물어볼 게 있어.”

강인혁의 잔잔한 목소리에 한미순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끼어들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은 윤태서를 데리고 있음을 알려야 할 때니까.

“윤태서…… 태서가 위험하다면 다 포기할 수 있어?”

한미순의 찌푸린 미간이 조금 펴졌다. 시간을 끈다 싶었는데 일부러 강세헌을 떠보는 거였구나. 그런데 이게 강세헌을 바로 압박하는 것보다 더 괜찮아 보였다.

강인혁의 물음에 강세헌은 입을 다물었다. ‘태서가 위험하다면’. 상상하기조차 싫은 전제 조건이었다.

“세상이 무너진대도 태서만 괜찮으면 돼.”

“형이 성공시킨 사업들을 다 빼앗긴대도 아무렇지 않아?”

잃는다고 해서 아쉬운가? 그런 건 강세헌에게 성취감을 주지만 행복을 주는 게 아니었다.

“그런 게 가지고 싶어? 그럼 가져.”

강세헌은 마치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그 다정한 말투에 강인혁이 놀란 듯 굴다가 피식 웃었다.

“내 거 빼앗기지 않게 알짱거리지 말라고 할 땐 언제고.”

정확하게는 유학 등으로 강세헌의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는 다 주겠다고 말하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강인혁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시 터진 입가가 아파 왔다. 강인혁이 손등으로 상처 난 곳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형은 진짜 별로야.”

강인혁이 강세헌을 친근하게 부르자 가만히 있던 한미순이 나섰다.

“인혁아.”

“엄마.”

강인혁이 한미순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한미순이 멈칫할 때 강인혁이 말했다.

“이제 그만해요.”

한미순이 눈을 부릅떴다.

“어차피 지금 우리가 벌이는 짓 발악밖에 안 돼요. 알고 계시잖아요. 더 해 봐야 비참해질 뿐이에요.”

강인혁이 씁쓸한 말로 자신들의 상황을 말했다.

“우리한테 협상 카드는 없어요.”

“강인혁!”

어렵게 잡은 자리를 다른 누구도 아닌 아들이 망치려 하니 한미순이 짜증스러운 고함을 외쳤다.

“카드가 없다니, 너, 이 기회를 놓치면 어떻게 되는 줄 몰라? 당신들 뭐 해. 어서 증거 내놓으라니까?”

어느새 강세헌은 뒷전이 되어 버렸다. 한미순은 강인혁에게 화를 내다가 멀뚱히 선 자들에게 소리쳤다.

“소리 소문 없이 납치할 수 있다며. 그 큰돈을 가져가 놓고 왜 가만히 있는 거야.”

“그건 아드님이랑 이야기하셔야겠습니다. 저희보다 먼저 잡아챘으니까요.”

“잡아……채?”

한미순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하자 강인혁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제가 먼저 움직였어요. 태서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려고요.”

“너…… 미쳤니?”

“아니요.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또렷해요. 그래서 우리가 얻어 내려는 게 아무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요.”

“허무하다고 했잖아. 다 끝났다는 듯이 구는 널 내가 정신 차리게 해 준 거야. 알아?”

“엄마.”

강인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추악하다는 거예요. 임신한 애를 납치할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바닥이잖아요.”

“그게 뭐가 어때서. 애를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었잖아.”

그저 강세헌과 협상할 용도로 잠깐 쓰겠다는데 그게 잘못인가?

“범죄입니다. 작은어머니.”

강세헌이 끼어들자 한미순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뻔뻔하리만치 태연한 강세헌을 노려봤다.

상황이 제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자 한미순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닥쳐.”

한미순이 강인혁에게 소리쳤다.

“평생 강세헌한테 끌려다닐 거야? KH 눈 뜨고 뺏길 거냐고.”

“애초에 우리 게 아니었어요.”

강인혁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음을 깨달은 한미순이 강인혁을 잡은 손을 놓았다.

“인혁이 너…….”

강인혁에게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한미순의 눈이 동요하고 있었다. 아들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저수지에서 본 그 허탈함은 여전히 느껴졌지만 그때는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질 걸 알고 다 포기한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겸허히 받아들이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한미순이 충격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조용해진 사무실에 누군가 들이닥치며 새로운 소란이 일었다.

강학중 회장을 선두로 들어선 사람들이 순식간에 주변을 감쌌다. 한미순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이 그녀가 고용한 남자들이 밖으로 나가려다가 막는 이들과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비켜. 우리는 상관없다고.”

“그건 따로 가서 밝혀야겠습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갑자기 벌어진 정신 없는 싸움에 한미순이 사람들을 노려보다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당신…….”

남편 강수학이었다. 그는 한미순의 서슬 퍼런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강학중 회장의 옆에 서 있는 강수학이 그렇게 못나 보일 수 없었다. 한미순이 기가 차 연신 숨을 들이켰다.

“그간 네가 고생한 거 다 안다.”

강수학을 대신해 강학중 회장이 한미순의 말을 받아쳤다.

“그런데 그 정도를 넘어섰어.”

강학중 회장의 말에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보자 유일하게 가벼운 옷차림을 한 두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함께 서에 가 주셔야겠습니다.”

한미순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주변을 돌아보며 뒷걸음질 쳤다.

“내, 내가 왜.”

“윤태서 납치 사주하셨으니까요.”

“아니야. 난 그런 적 없어.”

한미순이 고개를 저었지만 형사들은 그녀를 잡으려는 걸 멈추지 않았다. 순순히 따라오지 않자 억지로라도 끌고 갈 생각에 수갑을 꺼내는 순간 강인혁이 나섰다.

“제가 어머니랑 같이 갈 겁니다.”

“인혁아, 네가 말해 봐. 응? 내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해.”

“제가 신고했어요.”

강인혁이 배신에 가까운 말을 뱉었다. 그녀는 충격으로 얼어 버렸다.

“같이 가요.”

강인혁이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빼지 못하게 단단히 붙든 강인혁이 양쪽에 형사를 두고 걸음을 옮겼다. 지금 그만이 한미순을 잡아 둘 수 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한미순도 강인혁에게 잡힌 순간 힘이 빠진 듯 끌려갔다.

빠르게 상황이 마무리되려는지 한미순이 조용히 강세헌을 지나칠 때였다. 돌연 강인혁에게 잡힌 손을 뺀 한미순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절대 그냥 못 넘어가.”

상대가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는 건 미치기 직전인 한미순에게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그녀가 강세헌의 얼굴을 향해 손톱을 세우며 달려들었고 볼을 긁어 버렸다. 그의 볼에 가는 선이 생김과 동시에 한미순이 강세헌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어댔다.

“내 아들이 KH를 받아야 하는데 너 때문에…… 다 너 때문이야.”

“여보, 그만해.”

“뭘 그만해. 하, 한 핏줄이라 이거야. 그래, 처음부터 당신이 잘못이었네. 무능하기 짝이 없는 등신으로 태어난 당신 때문에 다 망쳤어. 망쳤다고.”

한미순의 발악에도 강인혁은 그녀를 꿋꿋이 끌고 나갔다.

강인혁과 한미순이 나간 뒤 강수학이 눈치를 보다 따라나섰다. 경호원들까지 빠지면서 사무실엔 강학중 회장과 강세헌만 남았다.

강세헌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강학중 회장을 향해 말했다.

“작은아버지를 찾아간 겁니까?”

“수학이가 아는 게 없어서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강학중 회장은 뒷짐을 지며 사무실 창밖을 보았다. 고층과 맞닿은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며느리의 욕심이 해서는 안 될 짓까지 저질러 버렸구나.”

강학중 회장이 안타까운 음성을 흘렸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너는 천천히 따라오너라.”

회장이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 나갔다. 강세헌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한미순과는 말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다. 누군가와 치고받고 싸운 것도 아닌데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차갑게 느껴지는 공기 속에서 누군가 뒤에서 강세헌을 끌어안았다. 그의 온기를 받아서인지 두 사람의 주변 온도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잘했어요.”

태서가 잘 참아 준 그를 토닥거려 주었다. 강세헌의 등에 얼굴을 묻은 태서는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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