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강세헌은 예전에 태서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들렀던 그 카페에 있었다. 그 역시 이번 신제품 홍보 겸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서.
준비되기 전까지 기다리는 동안 강세헌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태서에게 태동인지 모른다는 말을 할 때의 스스로가 떠올랐다. 확신하지 못했다. 제게 벌어진 일이 아니라 그렇다는 건 변명이었다. 산부인과 의사만 봐도 아기를 낳지 않았지만 어떤 질문이든 다 대답해 주지 않나. 그는 자신이 의사는 아니라 할지라도 태서의 불안을 해결해 주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육아 서적이 이제 임신 관련 의학 서적으로 바뀌었다.
한참 책에 빠져 있던 강세헌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가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일이 있어서 왔다, 설마 널 구경하러 오기라도 했을까.”
강학중 회장이었다.
안 그래도 그에게 할 말이 있었던 강세헌이 목소리를 낮췄다.
“작은아버지에 대한 일 들었습니다. 계속 끌어안을 것처럼 구셨으면서 왜 그러셨습니까?”
“나는 나대로 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강학중 회장은 중간에 생각이 바뀐 적이 없음을 못 박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강수학이 스스로 아버지의 손을 놓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걸 알자 강세헌이 졌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그럼 인터뷰를 시작해 볼까요? 회장님을 위한 차는 따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잘됐군.”
인터뷰를 맡기로 한 박수희 기자가 생동감 있는 목소리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다가왔다. 일전에 윤태서의 인터뷰가 어그러진 일이 그녀에게 또 다른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모두의 부러움을 사서인지 평소보다 들뜬 박수희 기자가 뒤늦게 강세헌의 의문에 찬 표정을 눈치챘다.
“미리 말씀드린다는 게 깜박했네요. 오늘 인터뷰는 회장님과 함께 합니다.”
깜박한 게 아니라 일부러 말 안 한 거겠지.
그리고 그렇게 지시한 이가 강학중 회장일 게 불 보듯 뻔했다.
이미 자리까지 다 만들어진 상황이라 강세헌은 책을 덮는 것으로 대신 답했다.
혹시나 그가 기분 나쁘다고 일어날까 돌발 상황에 대비하던 박수희 기자는 냉큼 자리에 앉았다.
“시작하겠습니다.”
박수희 기자의 수신호에 맞춰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녹음기까지 켠 그녀는 이곳에서 나눈 모든 이야기가 담길 수 있다는 간단한 안내와 함께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번 신제품의 콘셉트가 아주 인상 깊었는데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모두의 의견을 통합해 ‘일상’이라는 주제를 정했습니다.”
“그런가요?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모두의 아이디어라기보다 전무님의 주장이 강하게 들어갔다고 하던데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분과의 일상이 특별했던 거였군요.”
박수희 기자가 말한 그분이 윤태서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럼 ‘일상’이라는 주제에 맞춰 질문을 바꿔 보겠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요즘 무얼 하며 지내시나요?”
평범하디평범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답이 무엇이냐에 따라 평범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걸 강학중 회장이 알려 주었다.
“육아서를 보고 있네.”
회장의 답에 강세헌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육아서?
“어머나, 정말 생각 못 한 일상이시네요.”
“유난스러울 것도 없네. 일하는 와중에 틈틈이 보는 거라 내세울 만한 것도 아니야.”
내세울 게 아니라는데 왜 일상에 그걸 집어넣었을까. 강세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이러는지 모르는데 태서를 향한 제 애정이 할아버지에게 지는 것만 같다.
“그것도 다 윤태서 님을 위해선 거죠?”
“곧 아기가 나올 텐데 미리 준비하면 좋은 거지. 내가 자식을 키울 때와 시대가 달라졌으니 더욱 신경 쓸 게 많지 않나.”
강학중 회장은 정말 별거 아닌 듯 말하지만 그게 더 유난스럽게 비쳤다.
“그러고 보니 태서가 태동을 느꼈다는데…….”
태서와는 언제 또 연락했는지. 강세헌이 끼어들 틈 없이 강학중 회장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누구에게 느껴야 할지 모를 이 배신감을 떨치지 못한 채 강세헌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
아기용품 파는 곳이 이제는 익숙한 곳이 되어 버렸다. 공원을 산책하는 것만큼이나 제게 중요한 곳 중 하나였다. 공원과 달리 돌아갈 땐 꼭 두 손이 묵직해지는 차이가 있지만.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둘러보고 있던 태서의 신경이 자꾸만 흐트러지고 있었다.
‘뭐지.’
제 얼굴이 알려진 이후로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익숙해졌다. 그런데 구경 삼아 바라보거나 궁금증에 힐끗거리는 시선이 아니었다. 제게 눈을 떼지 않는 듯하면서도 누군지 알 수 없게 검은 장막 뒤로 숨은 듯한…… 찝찝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날 따라오고 있어.’
주변을 살피는 척 뒤에 계속 신경 쓰니 느껴졌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태서는 태연함을 유지하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많아 안심이 되는 한편 불안감도 들었다. 정체 모를 이가 지나가는 척 제 옆을 스칠 수도 있는 거였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건 얼마죠?”
줄지어 늘어진 아기 신발을 가리키며 의미 없는 물음을 던졌다. 제 앞으로 다가온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줬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신발을 핑계 삼아 핸드폰을 들었다. 사진을 찍듯이 카메라를 켰다. 신발이 아닌 제 얼굴이 나오게 한 뒤 각도를 살짝 틀어 뒤편을 살펴보았지만 워낙 사람이 많아 의심스러운 이를 찾기 힘들었다.
아쉽지만 금방 포기했다. 대신 연락처에서 익숙한 이름을 찾아 들어가 메시지를 남겼다.
몇 번 화면을 두드리는 동안 직원이 잠시 기다려 주는가 싶더니 태서가 핸드폰을 내리자 곧장 말을 걸어왔다.
“죄송하지만…….”
태서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제가 가고 나서 의심스러운 사람이 나타나면 신호를 주시겠어요? 부담스럽다면 안 해 주셔도 좋아요.”
지금 믿을 건 앞의 여자뿐이었다. 태서의 간절한 부탁에 직원은 놀란 것도 잠시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서가 여자에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건네고 걸어갔다. 주변의 물건을 관찰하면서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방향을 틀었을 때 직원을 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아기 신발을 들었다 내리고는 안쪽으로 사라졌다.
‘파란색.’
직원이 들었던 신발의 색이었다. 태서는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며 파란색을 찾아보았다. 단번에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단 한 사람.
모자를 깊숙이 눌러써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검은 티에 들어간 파란색 줄이 눈에 걸려들었다. 태서는 다시 돌아섰다. 이제 구경을 핑계 삼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걷는 속도를 올린 태서는 핸드폰을 들어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전화를 받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태서의 빠른 걸음에 뒤따라오던 이가 속도를 올렸다. 아예 앞을 막는 다른 사람을 밀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뒤에서 울리는 작은 비명 소리에 태서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사람 사이에 숨으려는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 때문에 다른 이가 피해를 볼까 아예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엘리베이터를 탈 듯이 굴다가 곧장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이리저리 사람들을 피해 내려가고 있으니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대체 누구지.’
상대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누가 보냈는지조차.
태서의 숨이 거칠어질수록 배도 단단히 뭉쳐 오기 시작했다. 격하게 몸을 움직인 것보다 긴장한 게 원인이 컸다.
두 번째 에스컬레이터에선 잠깐 배에 손을 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축복이가 힘들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무작정 달릴 수 없었다.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따라오던 자도 숨을 고르는지 더 가까이 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주차장은 안 돼. 차라리 택시를 타는 게 나을 거야.’
주차장이야말로 대놓고 자신을 잡아가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대충 넘긴 태서는 손이 핸드폰으로 향하려는 걸 참으려 주먹을 쥐었다 펴기만 반복했다.
핸드폰은 제가 잡힐 때를 대비한 마지막 안배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온 태서는 자연스럽지만 빠르게 옆으로 빠졌다. 이벤트홀에 꽉꽉 들어찬 옷들 사이로 숨어 상체를 숙였다.
“뭐야, 왜 밀쳐요.”
사람의 불만이 가까운 곳에서 터져 나오는 걸 들으며 숨을 멈추다시피 한 후 급히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몸을 숙인 태서의 앞으로 커다란 손이 나타나더니 순간 시야를 가려 버렸다.
그것에 반응하기 전에 손이 입을 막아 왔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벌어진 일이라 당황함에 손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분명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일을 벌일 줄 알았다.
행거에 터질 듯이 걸려 있는 옷 사이에서 태서는 제 뒤를 점한 상대를 떼어 내려 몸부림쳤다.
그러나 커다란 손이 코와 입을 한 번에 막아 금방 힘이 빠졌다. 동시에 다른 손이 배를 움켜쥐었고 그에 태서의 움직임이 뚝 멈춰 버렸다.
반항해야 하는데 아킬레스건을 잡힌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건 통화 중인 핸드폰이었다.
‘내가 위험에 빠졌다는 걸 알려야만…….’
주머니를 스친 손끝이 떨렸다.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느껴져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잔뜩 당황해서 주변을 돌아보던 태서의 눈매가 파르르 떨려 왔다.
행거 밑으로 들어간 제 핸드폰의 밝은 화면이 손톱만큼 보였다. 아까 몸부림을 치는 사이 빠져 버린 걸 깨닫자 절망감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