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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98화 (98/130)

98화

강세헌이 안으로 들어오며 미소 지었던 것도 잠시,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보느라 태서가 가만히 있는 사이 강세헌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강세헌이 제 앞으로 다가와 얼굴을 어루만질 때까지 태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를 본 순간부터 온통 그에게로 신경이 쏠렸다. 그의 눈썹이 움직이는 것부터 입술이 치아에 터질 듯 씹히는 것까지 하나하나 보고 있느라 멍해진 것도 같았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물꼬가 트인 것처럼 떠올랐다. 강세헌에게 고백받았구나. 은은한 열기가 얼굴로 타고 올라왔다.

“태서야?”

강세헌을 바라보느라 그의 말이 뒤늦게 이해되었다. 아프냐고 물었었지?

“아픈 것보단…….”

강세헌이 들어오기 전에 했던 생각을 떠올리다 어정쩡하게 멈춰 있던 손을 배에 올렸다.

“꼬르륵인가? 아니 보글보글? 물거품이 터진 거 같은데 이런 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평소처럼 배가 고픈 건가 싶었는데 묘하게 달랐다. 그런데 또 어떻게 다르냐고 명확하게 표현하기도 어려웠다. 태서가 배를 어루만지며 고민하는 사이 강세헌의 눈이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손을 내밀어 왔다.

자신의 손으로 태서의 손을 덮듯이 대며 느껴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짧게 스쳐 가서 지금은 아무 느낌 없어요.”

배 속 사정이 평소와 다름없어진 대신 아까 강세헌을 보자마자 느낀 갈증이 올라왔다. 태서는 나직이 숨을 돌리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페로몬 풀어 줘요.”

강세헌이 곧장 페로몬을 풀자 태서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몸에 힘이 빠지고 있지만 상관없었다. 강세헌이 제 몸을 지탱해 주고 있으니까.

“태동이 아닐까 싶은데…….”

태서가 페로몬에 빠진 사이 그의 옷 속으로 손을 넣은 강세헌이 중얼거렸다. 제가 겪은 일이 아니라 확신하지 못하는 말투였는데 그 말을 들은 태서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제 배를 바라보았다.

“이게 태동이라고요?”

태동이라는 걸 검색해 본 적이 있었다. 누군가는 물고기가 지나가는 느낌이라고도 하고 톡, 하며 건들여 오는 느낌이라고도 하던데……. 제가 느낀 게 남들과 같은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니라 확실하지 못했다.

“태동이 아니면 그냥 배고픈 거로 하자.”

강세헌이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밥 먹을 시간이 지났어.”

“……형만큼 제 밥 챙겨 주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이게 진짜 태동인가? 아니면 그냥 별거 아닌 건가 고민하던 태서가 피식 웃었다. 하긴 태동이 아니면 어떤가. 축복이는 여전히 배 속에 있고 나중엔 태동이 강해져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고 하던데.

“그런데 어디 다녀왔어요?”

뒤늦게 건넨 물음에 그가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있었다. 평소와 다른 침묵에 외려 태서가 더 민망해지려고 할 때 강세헌이 품에서 빳빳한 종이봉투를 꺼내 들었다.

“청첩장 샘플 받아 왔어.”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은 듯 태서가 멍하니 손을 들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요즘 틈틈이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 하나하나가 그냥 흘려보낼 수 없이 신기했다.

태서가 청첩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봉투를 열어 안에 있던 카드를 꺼내 보았다.

“분명 디자인을 보고 선택했는데 왜 처음 보는 것처럼, 읏!”

청첩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태서가 외마디 비명을 터트렸다.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아릿함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강세헌에게 붙잡혔다.

검지손가락에 그어진 얇은 실선이 점점 붉어지더니 핏방울이 맺혀 오기 시작했다. 무게가 찬 방울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자 태서의 난처함이 커져 갔다. 혼자 있을 때 베였다면 그나마 낫겠는데 강세헌의 시선에 손가락이 뚫어질 것만 같았다.

“이제 막 나온 종이라 그런지 모서리가 날카롭네요.”

아무리 그래도 두꺼운 종이에 손가락이 베이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청첩장 바꾸자.”

“어…… 꼭 그래야 할까요?”

제 실수로 베인 건데 그냥 하면 안 되냐는 의문이 들었지만 강세헌은 청첩장을 가져가 버렸다.

방금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왜 이렇게 된 건지. 태서는 강세헌이 피를 닦아 주는 동안 가만히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한 감정을 애써 외면하며.

***

강인혁은 착잡한 마음을 정리하기도 전에 한미순을 마주쳤다. 그녀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확인한 강인혁은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강세헌에게 당한 일을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

“인혁아…….”

한미순이 강인혁을 보자마자 애써 눌러놓았던 감정을 드러냈다. 표정이 무너지며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어요?”

“그게…….”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올라오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울먹거리니 강인혁이 아까보다 더 강하게 물어 왔다.

“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강인혁이 답답한 마음에 제 팔을 잡은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버지.”

그러다 뒤따라 나온 강수학을 발견하고 그를 불렀지만, 침통한 표정의 그는 강인혁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나가 버렸다.

제가 없는 사이 무언가 일이 일어난 거 같은데 누구도 쉽게 말해 주지 않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강세헌과의 대화 이후 기분이 바닥으로 치달아 괜히 더 짜증이 올라왔다. 강인혁이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다가 멈칫했다.

“이번 사업 때문이에요?”

제가 강세헌을 만난 것처럼 부모님이 할아버지를 만났나 싶어 물어보니 한미순의 울음이 더욱 커져 버렸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제 눈가를 찍으며 아들의 팔을 놓지 않았다.

“가요. 어디든 여기를 벗어나고 나서 말해요.”

강인혁이 이를 악물며 한미순을 부축했다. 더는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아졌다.

직접 차를 몰아 저수지 근처로 간 강인혁은 시동을 끄고도 한동안 앞을 보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미 차는 멈췄건만 핸들을 쥔 손에는 힘줄이 툭툭 튀어나올 정도로 힘이 들어갔고 이를 악물어 교근이 불룩 나왔다.

“아버지 일이 잘 안된 거죠?”

“그래.”

어느 정도 눈물을 쏟아 내서인지 한결 진정된 한미순이 손수건을 꼭 쥐었다. 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녀는 눈가에 검게 화장이 번졌는데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잖아요. 그런데 왜 벌써 그렇게 졌다는 듯 구시는데요.”

“원하가 모든 손해를 네 아버지 앞으로 해 놨어.”

“그걸 알고도 하셨다고요?”

“때론 알면서도 받아들일 때가 있는 거지.”

강인혁이 힘없이 핸들을 놓으며 뒤로 몸을 눕혔다. 의자에 기댄 그가 말없이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런 강인혁에게 한미순은 지금껏 있었던 모든 일을 말해 주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강인혁의 얼굴에는 비소가 진해졌다. 이 세상이 모두 강세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저물어 가는 해가 꼭 제 처지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해가 산 너머로 숨어들면 저수지도 자취를 감추지 않을까? 그럼 저수지에 숨어든 제 모습을 찾지 못할 것도 같은데.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휩쓸렸다. 지금껏 제가 살아왔던 그 모든 게 다 우스워졌다. 아닌 척해도 자신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단단한 배경이 있어 당당할 수 있었다. 서다래를 향한 호감을 품을 때도 얼마든지 마음을 표현해도 괜찮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그랬다.

그 모든 건 제가 얻어 낸 게 아니다. 그걸 강세헌이 알려 주었다. 처음부터 그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회사에 대한 것도 윤태서에 대한 것도.

시작이 달랐다. 태서를 향해서도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자신과 다르게 강세헌은 신중했고 확신이 드는 순간 거침없이 움직였다.

태서를 생각하니 강인혁의 마음이 아프게 울렸다. 이젠 장난으로라도 태서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지 못할 처지가 되자 무력감이 찾아왔다.

“뭐가 이렇게 허무하죠?”

회사도 윤태서도 다 강세헌이 가져갔다. 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할 때였다. 제 손을 강하게 움켜쥐는 힘에 강인혁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한미순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뭐가 남았는데요?”

자신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외로 가라고? 흥. 절대 그럴 순 없지.”

한미순이 본래의 모습을 찾은 듯 거울을 보며 제 번진 눈가를 정리했다.

“이대로는 절대 못 물러나.”

“어쩌시려고요.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누구를 끌어내릴 수 있을 거 같아요?”

당장은 강세헌이 직접 전면에 나섰기에 그를 상대하는 것이라 생각될 뿐이지 뒤로는 큰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 누구도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끌어내리는 거로는 성에 안 차는구나. 아예 망가뜨리고 모든 것을 빼앗아 오는 정도면 모를까.”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미순의 눈빛이 매섭게 바뀌었다.

“그 아이를 이용해야겠어.”

“그 아이가 누군……, 설마 태서 말하는 거 아니겠죠?”

엄한 이름이 언급되자 강인혁은 그건 아니었으면 하는 듯한 표정으로 한미순을 바라보았다.

“맞아. 윤태서.”

“걔를 왜요.”

“협상 카드로 이용해야지.”

상상 속에선 벌써 협상 테이블에 앉기라도 했는지 한미순의 얼굴엔 드문드문 미소도 걸렸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아니, 할 수 있어.”

한미순이 강인혁을 돌아보았다.

“태서가 위험에 처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 거다.”

놀란 강인혁이 숨을 멈춘 사이 한미순이 말을 이어 갔다.

“얼굴이 알려졌어도 워낙 혼자 다니는 애니까 손쓰기 쉬울 거야. 너는 끼어들지 말고 지켜보기나 해.”

“그러다 무슨 일이 나면요?”

한미순이 코웃음 쳤다.

“설마 태서 걱정하는 거야? 윤태서, 너 버리고 강세헌한테 간 애야.”

그녀의 말이 맞았다. 방금까지 강인혁을 채운 감정은 배신과 허무였다. 그 감정이 되살아나자 강인혁의 표정이 달라졌다.

“자세히 말해 주세요. 태서를 어떻게 하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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