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잠시만 여기 있을래?”
식당 밖으로 나온 김미경이 핸드폰을 들고 전화 한 통 하고 오겠다 했다. 태서는 여기서 기다리겠다며 천천히 하라고 했는데 그녀가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인혁이 너는 이제 들어가야 되지 않아?”
“전화하고 오세요.”
강인혁에게 가도 좋다는 말을 돌려 표현했지만 마찬가지로 돌려서 거절당했다. 김미경은 어쩌나 싶은 고민도 잠시 시간이 촉박한지 결국 핸드폰을 들고 멀어졌다.
둘만 남게 되자 태서는 발끝으로 땅을 두드려댔다.
“너 내가 왜 인턴으로 들어왔는지 알지?”
“세헌이 형을 흔들어 댄다 뭐 그런 말을 했었던 거 같다.”
정확하게 기억하지만 굳이 티 내지 않았다.
“그거 얼마 안 걸릴 거야. 그 전에 네가 흔들리는 날 잡는 건 어때?”
“인혁아, 내가 널 왜 잡아. 네 스스로 중심을 찾아야지.”
태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네 소속을 분명히 해. 지금 너, 네 할아버지가 회장인 회사에서 일하는 거야.”
시기와 질투로 망쳐 버릴 회사가 아니란 뜻이었다. 더욱이 자신 때문에 그렇게 군다면 더더욱.
강인혁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태서는 도로 몸을 돌렸다. 강인혁이 어떤 일을 벌이든 그거야 강세헌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었다. 막말로 강인혁이 이곳의 정보를 넘긴다고 해도 제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나를 흔들어 보겠다는 것부터 글러 먹었어. 네가 세헌이 형을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네 할아버지의 회사니까 소중히 아껴라. 그러지 않으면 나중에 큰일 나.”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는 의미로 열심히 조언을 건넨 태서가 돌아서는데 팔이 잡히며 상체가 뒤로 쏠렸다.
“내가 할아버지의 회사를 흔들 정도라면 너도 잘 알겠네.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누구 때문에 하고 있는지.”
강인혁의 잇새로 흘러나오는 말이 귀에 콕콕 박혀 들었다.
“네가 원하면 나는 너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떼 줄 수 있어.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내가 원한다면 네 목숨도 주냐?”
“태서야. 간이랑 쓸개 떼고 나면 어떻게 살아남겠어.”
강인혁의 누그러진 목소리가 태서의 흔들리는 마음을 제 쪽으로 살살거리며 돌리려 하고 있었다.
“인혁아, 그게 네 최선을 다한 구애라는 거 알겠는데…….”
태서는 이제 이런 지겨운 대화는 끝내자고 할 셈이었다.
[나를 볼래?]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태서의 신경을 앗아가 버렸다. 강세헌의 목소리가 들려서 환청인 줄 알았다. 지금 강인혁과 유쾌하지 못한 대화를 하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그를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서가 고개를 들어 강인혁을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강인혁 역시 자신과 같은 목소리를 들었는지 한껏 눈썹을 구기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왜 이리 웃음이 나오려는지.
태서는 입술을 말아 물며 강인혁의 시선을 피했다. 지금은 한껏 끌어 올려진 기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다 강인혁도 제게서 고개를 돌린 걸 알아차린 태서는 그가 보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커다란 전광판에 뜬 영상을 보던 태서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전광판에 제가 나오고 있었다. 그동안 강세헌이 찍어 간 제 모습들이었다. 일상을 찍어서 흔들리기도 하고 어딘가 초점이 안 맞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만큼 생생하고 사실적이었다.
전광판에 뜬 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일전에 강세헌이 한 말이 떠올랐다.
-이걸로 찍은 사진이나 영상은 다 이용될 거야.
“인혁아.”
태서의 어딘가 홀린 듯한 목소리에 강인혁이 짜증스럽게 반응했다. 지금 태서는 놀랐지만 누가 봐도 감동한 얼굴이었다. TF팀의 정보를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그의 예상 밖이었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태서의 풀어진 눈빛에는 더 이상 강인혁을 향한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윤태서.”
“이 정도면 충분해. 그러니까 너는 네 삶을 살아. 나 간다.”
지금 태서는 강세헌이 보고 싶었다. 강인혁에게 인사한 태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사로 갔다. 태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인혁이 입을 열었다.
“윤태…….”
윤태서를 따라가려는 순간 손목이 붙잡힌 강인혁이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김미경이 강인혁을 보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여기까지야. 인혁아.”
***
서다래는 가만히 서서 핸드폰으로 윤태서를 찍은 광고 영상을 보았다.
[진짜 작다.]
선물 받았다는 아기 옷을 제 티셔츠 위에 대 보며 크기를 비교하고 신발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며 좋다고 웃어 댔다.
아기방이라는 곳에 선물 받은 것과 제가 사들인 물건을 하나둘 넣으며 날짜를 세는 태서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손가락을 꼽으며 생각하던 태서가 돌연 배가 고프다고 말해 오는 것으로 짧은 영상이 끝나더니 사진이 하나씩 떠올랐다. 케이크를 먹는 모습. 한입에 만두 하나를 전부 넣겠다고 입을 크게 벌려대는 표정이 우스꽝스럽기보다 사랑스럽다.
책을 보다가 잠이 든 모습에서는 평화로움까지 묻어나 있으니 찍는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강세헌이겠지.
“처음부터 잘못되었어.”
강세헌이라는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패착이었다. 그를 흔들어 보겠다고 벌인 짓이 다 소용없던 이유가 이거였다.
“윤태서 대단하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서다래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뭐, 강인혁과 만났던 날 마음을 굳힌 보람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었다.
“약속되었나요?”
“서다래라고 전해 주시면 됩니다.”
서다래는 지금껏 보던 광고를 전부 끄고 핸드폰을 가방 안에 넣었다.
***
다시 회사로 돌아온 태서는 아까보다 확연히 늘어난 시선을 느끼지도 못한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오는 사이에 전화를 걸었더니 회의에 들어갔다며 비서가 대신 받았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갈 거라고 말해 준 덕분에 태서는 곧장 안내 데스크로 갔다.
“전무님 나갔나요?”
“아직입니다.”
안내원의 친절한 설명에 태서가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은 태서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막 회사를 나가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급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거리를 좁힐수록 제가 찾던 그 사람이 맞았다. 넓은 어깨만큼이나 쭉 뻗은 등은 태서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잊지 못했던 강세헌의 등이었다.
자신을 데려와 간호해 주고 그러다가 관계까지 가지게 되면서 인연이 맺어진 상대. 제게 관심 없다는 듯 굴면서도 많은 것을 내어 주고 달래 주었던 사람이었다.
강세헌은 윤태서라는 인물에 빙의한 뒤 혼란스러워하던 자신을 진정시켜 준 이였다. 그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 죽을 운명일 거라 생각하며 구덩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을 끌어 올리고, 약을 먹고 쓰러졌을 때도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었다.
언젠가부터 그를 제 마음에 담고 있었고 또 언제부터인가 그가 제 세상의 전부였다. 그가 있어 제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무너지지 않고 균형을 이루었다.
약을 먹고 눈을 떴을 때는 온전히 윤태서가 되었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이곳이 제 세상이 되었다.
태서는 소리 높여 강세헌을 부르는 대신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막 차에 타려는 그의 팔을 잡자 돌아보는 강세헌과 눈을 마주쳤다.
“바빠요?”
“널 만나러 가려고 했어.”
그런데 왜 여기에 있을까.
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아는 듯한 말투였다. 태서는 목까지 올라오는 거친 숨을 가라앉히지도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디든 좋아요. 형이랑 있고 싶어요.”
강세헌이 태서의 손을 잡아끌어 함께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누군가가 앉는 듯했는데 강세헌에게 온 신경이 다 쏠려서 다른 건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강세헌의 얼굴에 진 그늘로 보아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고 어두운 곳에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껴졌다.
차의 진동이 사라지고 둘만 남게 되면서 태서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긴 숨을 내쉬고 있으니 강세헌이 태서의 턱을 들어 자신과 눈이 마주치도록 했다.
“어땠어?”
“놀랐어요.”
“그게 다야?”
강세헌의 물음에 태서는 가만히 고민하다가 놀람 다음으로 찾아온 감정을 솔직히 밝혔다.
“좋았어요.”
제가 윤태서가 된 게 너무 감사하다고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다행이네.”
원하는 답을 얻은 강세헌이 태서를 끌어안았다.
“오늘 하루만 올라오는 거라 이왕이면 크게 보여 주고 싶었어.”
태서가 말없이 올려다보니 강세헌이 그를 위해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내일은 다른 팀원의 영상이 올라갈 거야. 널 찍은 영상은 이벤트성으로 한 번 쓴 것에 불과해. 다른 곳에 올리지도 않을 거고 남겨 두지도 않을 거야.”
“왜요?”
“인터넷에 돌게 두고 싶지는 않거든.”
강학중 회장은 둘의 사이를 공표하며 사진을 내어 줬지만 강세헌은 제가 내보낸 영상을 도로 회수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강세헌이 대답 없이 태서를 더욱 힘줘서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품에 안겨 있자 든든하다는 느낌에 태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강세헌을 만나겠다고 달려와 긴장해서인지 호흡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래서 내쉰 양만큼이나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제 몸속으로 들어오는 공기와 강세헌의 향이 태서의 몸을 느슨하게 풀어 주었다. 태서는 한동안 강세헌의 품에서 그의 페로몬을 담뿍 들이마셨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향, 세상에 하나뿐인 강세헌의 페로몬이었다.
자신의 알파. 자신만의 알파. 제가 가장 사랑하는 알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