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전무님 이것 좀 봐 주십시오.”
다급하게 들어온 비서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심각한 그의 목소리에 강세헌은 말없이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원하에서 진행하는 사전 예약 기간입니다. 저희쪽도 앞당기지 않아도 될까요?”
비서의 진지한 음성에 강세헌은 단조로이 입을 뗐다.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예정대로 광고부터 진행합니다. 몇 시쯤 시작하죠?”
“1시입니다.”
단조로운 대답에 비서는 정말 이대로 가도 괜찮을까 싶은데 상사의 태도는 무심하기만 했다.
어느새 비서의 핸드폰은 밀어 내고 제 것을 들여다보던 강세헌이 말했다.
“양식.”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박에 알아챈 비서의 시선이 오갈 데 없이 흔들렸다.
“이게 어디에서 나온 거라고 했습니까?”
“회장님 비서실입니다.”
“누구 생각일까요?”
강학중 회장일까? 아니면 태서일까?
강세헌이 잠깐 고민하다 금방 미소를 지었다.
“뭐가 되었든 타아밍이 좋네요. 지금 어떤 식으로 말이 나오고 있습니까?”
“친근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입니다.”
“하긴 태서가 그런 매력이 있지.”
그래서 문제란 말이야.
강세헌의 불만에 비서가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내 거라고 밝히는데도 아직 떨어지지 않은 게 있어서.”
그게 뭐라고 말하지 않았으나 강세헌의 사적인 부분까지 알고 있는 비서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로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태서는 소매를 길게 늘어뜨려 제 얼굴을 가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자라도 쓸걸.”
아니, 그런다고 몰라볼 것도 아니었다. 아까 비서가 사진과 같이 올리면 어떠냐고 해서 흔쾌히 허락한 게 문제였다.
로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태서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아니, 공개적으로 올린 것도 아닌데 다 본 거야?”
사적인 내용을 사내 인트라넷에 올리면 안 되지 않냐는 제 물음에 비서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었다.
그게 아니어도 어차피 다 통하게 되어 있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어디 숨어들고 싶은 걸 꾹 참던 태서가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자 팔을 들었다.
“어머니.”
막 안으로 들어오던 김미경이 돌아보기 전에 태서가 그녀를 안았다.
태서가 김미경을 안은 그대로 헤실거리며 웃고 있자 김미경에게서도 웃음이 들려오는 것 같은데 확신할 수 없었다.
“제가 간다니까 왜 오셨어요.”
“보고 싶은 사람이 먼저 와야지.”
김미경이 태서의 볼을 쓸어내렸다. 제가 바빠 챙겨 주지도 못했는데 잘 먹었는지 얼굴이 좋아 보였다.
“잘 지내고 있었니?”
“그럼요. 세헌이 형이 잘해 줘요. 볶음밥은 5분 안에 해 주고요, 국도 잘 끓여요. 특히나 형이 끓여 주는 미역국은 유독 맛이 다른데…….”
태서가 아예 그녀에게 강세헌이 해 준 음식들을 주룩 나열하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자연스럽게 앞을 막아서는 강인혁으로 인해 태서의 말이 끊겼다. 주변을 돌아보던 태서가 다시 강인혁을 바라보고는 황당함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나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너 로비에서 살아? 왜 여기만 오면 마주치지?”
“네 이야기 잘 봤다. 여전히 짜장 좋아하는구나.”
강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서가 비서와 나눈 질의응답을 재밌게 읽은 것처럼 굴어 왔다.
“안 그래도 어머니가 걱정하시던데……. 얼마 전에 인터뷰했는데 그거 못 올리게 되었다며. 이렇게라도 올라오니 다행이다.”
강인혁은 줄곧 웃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미소가 더 진해졌다.
“학교에서 보지 않는다고 좋아했더니…… 이렇게 자주 만나니까 반가워지려고 한다.”
보다 못한 태서가 대놓고 빈정거렸다. 학교에서는 그렇게 자신을 피해 다니고 또 완전 정색하면서 혐오할 때는 언제고……. 그 마음이 바뀐 원인을 모르니 강인혁과 마주할 때마다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나 강인혁은 하등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김미경에게 말을 걸었다.
“벌써 저 잊으신 거 아니죠?”
“음? 아니야. 오랜만이다. 인혁아.”
“저도요. 보고 싶었습니다.”
강인혁이 여유로운 눈빛을 하고 있으니 평소의 그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바로 가시는 거예요?”
“태서랑 밥 먹으려고 만났어.”
“그럼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김미경이 강인혁과 태서를 번갈아 보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인혁이야 어릴 때부터 봐 왔으니 반가운 마음이 크긴 했지만 지금은 태서와 인혁의 사이가 어색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다.
“지금 대화 나눈 거 들으셨잖아요. 아직 사이 좋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강인혁이 김미경의 생각을 읽은 듯 거침없이 다가왔다. 보고 있던 태서마저도 기가 차 말문이 막힐 정도로 뻔뻔하게 군 그가 옆으로 비켜섰다.
“가요.”
강인혁이 동행하고자 하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자 김미경은 말리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따라가는 태서는 한숨을 감추려 몇 번이나 침을 삼켜야만 했다.
***
“태서랑 나란히 찍은 사진이 있어요. 액자에 넣어 뒀는데 보고 있으면 되게 어려 보여요.”
“그래?”
강인혁이 말하고 김미경이 받아 주는 식의 대화가 흘렀다.
태서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다른 손은 포크로 애꿎은 빵을 툭툭 건드렸다. 가끔 어머니의 시선이 제게 올 때만 아무것도 안 한 척 딴청을 피워 대며.
“너도 내 사진 많잖아.”
강인혁이 자연스럽게 태서를 대화에 끌고 들어왔다.
“내 사진에 네가 걸린 게 많긴 해.”
제 비공개 SNS을 떠올린 태서가 고개를 끄덕여 왔다. 딱히 부정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다.
“말 그대로 걸린 거라 나란히 찍은 건 거의 없기도 하고.”
태서의 애정이 강인혁에게 향할 때를 말하는 거다. 짝사랑이었으니까.
“지금부터 찍으면 되지.”
강인혁이 잠깐 머뭇거렸다가 금방 웃음을 되찾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식사한 지가 얼마 만이죠? 저번에 호텔에서 저희 부모님이랑 함께 한 이후로 처음인가요?”
“생각해 보니 그렇구나. 그때…….”
말하던 김미경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어떤 생각인지 알 것만 같아 태서는 말없이 물을 마셨다.
‘내가 임신했을 때지.’
정확하게 말하면 임신인 건 몰랐고 그저 강인혁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는 걸 강조할 시기이긴 했다. 그러니 김미경으로서는 자신과 강인혁이 이어졌으면 하던 때고.
김미경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태서와 강인혁 사이의 불편한 시선이 끊임없이 부딪혔다.
왜 끼어들어서 사람 불편하게 하냐는 태서의 불만과 빙글거리는 미소로 넘겨 대는 강인혁은 창과 방패였다.
그러다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 되어서야 태서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이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다고…….’
어떻게 보면 강인혁과 밀고 당기는 기 싸움이 그를 더 오기 부리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분명 제가 좋아할 때의 강인혁은 이러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그를 돌아보지 않고 모든 것을 놓은 순간 강인혁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이 마주 잡을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맛이 없니?”
태서의 반응을 기민하게 알아챈 김미경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어 왔다.
“아직도 세헌 군의 페로몬이 아니면 식사를 잘 못하는 거야?”
“잘 모르겠어요. 따로 먹은 적이 손에 꼽거든요,”
집에서 먹을 땐 강세헌의 페로몬이 맡아져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를 어째. 이럴 줄 알았다면 식사를 미룰 걸 그랬어.”
태서가 고개를 내려 제 앞의 음식을 보았다. 처음과 다름없는 상태. 강인혁을 신경 쓰느라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어느 순간 정말 입맛이 없어서 놔두었더니 그대로 식어 버렸다.
“그냥 입맛이 자꾸 바뀌어서 그래요. 먹고 싶다가도 막상 앞에 있으면 먹고 싶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하긴 엄마도 그랬어. 네 아빠가 몇 시간을 걸려 포장해 온 걸 보자마자 화장실로 뛰어 갔었지.”
“그때 아버지 표정이 상상 가요.”
“그렇지. 어떻게 구해 온 건데 싶어 하며 허탈해하더라.”
김미경이 금방 웃음을 되찾고 말하니 태서도 다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어느새 대화의 주제가 임신 쪽으로 흘러가면서 강인혁이 끼어들 틈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을 의식하고 굳이 그를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김미경은 강세헌의 아이이기에 강인혁에게 물어볼 생각을 안 했고 태서는…….
‘왜 그렇게 아득바득 너를 밀어 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제가 벌인 짓을 떠올리며 강인혁을 밀어 내겠다는 생각을 지웠다.
김미경이 따로 시켜 준 음료수로 입 안에 남은 음식 냄새를 없애고 있는 사이 대화의 흐름이 바뀌었다.
“인혁아.”
김미경이 강인혁을 향해 몸을 돌린 후부터 태서는 이방인처럼 밀려 버렸다.
“그동안 우리 태서랑 잘 지내 줘서 고마워.”
김미경의 인사를 강인혁은 웃으며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게 앞으로도 잘 지내 달라는 말로 이어지지 않을 걸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지금은 태서가 임신했으니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어. 미안하지만 너도 도와줄 수 있겠니? 그러니까…… 태서의 오랜 친구로서.”
김미경은 강인혁의 굳은 얼굴을 보고도 제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너에게 이런 부탁해서 미안해.”
태서는 발로 말없이 바닥을 쓸었다. 운동화라 그런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발이 움직이는 반동에 상체가 조금씩 흔들렸다.
의미 없이 바닥을 쓰는 것만큼이나 태서의 머릿속엔 의미 없는 고민이 오갔다.
지금까지는 강인혁과 다신 안 볼 사이가 되리라고만 여겼는데 오랜 친구라는 단어가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짜장면 짬뽕처럼 둘 중에 하나만을 택해야 하는 선택지를 받은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처음과 같은 선택을 하면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