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이거…….”
태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면을 내려보았다.
한 영화배우가 기업의 대표와 연애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의 인터뷰 기사였다. 열애설이라고 할 것도 없이 먼저 사귄다는 사실을 밝히더니 곧장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어디에서 처음 만났냐…….”
인사만큼이나 특별할 게 없는 내용이었다.
“그가 좋은 이유 10가지를 대 본다면?”
이것도 뭐…… 유난스러울 건 없었다. 그런데 계속 이어지는 질문이 전부 제가 받아 본 것과 같은 거라면 말이 달라졌다.
태서가 인터뷰했던 그 질문을 고스란히 다른 사람에게 썼다. 딱히 질문이라는 것에 저작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 그럴 만한 특이한 것도 없으니 이걸 문제 삼아 걸고넘어질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타이밍 좋게 울려오는 진동에 태서가 곧장 통화를 연결했다.
“안녕하세요.”
박수희 기자였다.
[잘 지내셨나요?]
활달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그녀는 예의 그 분위기 좋았던 인터뷰를 떠올리게 했다. 적당한 인사를 나누고 나자 그녀가 전화를 건 이유를 말했다.
[실은 인터뷰 때문에 연락드렸어요.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올리지 못하게 되었어요.]
박수희 기자는 조심스럽게 인터뷰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태서가 방금 본 인터뷰 때문이 맞았다.
“저는 괜찮아요. 네, 또 하면 되죠. 언제든 연락 주세요.”
왜 이렇게 되었냐면서 따질 수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 때문에 그녀가 괜한 시간 낭비를 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할아버지한테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강학중 회장님께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녀에게 제가 하겠다는 말을 전하는 것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태서는 손가락으로 세면대를 톡톡 두드렸다.
“인터뷰가 취소되는 거야 별거 아닌데…….”
그냥 넘어가기가 왠지 꺼림칙하다. 아마 우연히 겹친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런 듯했다.
“어쩌지.”
***
“회장님께서는 회의 중이십니다. 오시면 잠시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다려도 되나요?”
“편하신 대로 있으시면 됩니다.”
비서의 깍듯한 말투에 태서가 감사하다며 인사하고는 슬쩍 다가왔다. 박수희 기자의 말을 직접 전하기 위해 회사로 왔는데 비서의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항상 할아버지의 뒤에 있던 분이었는데 제대로 인사 한번을 못했다.
“저 병원에 있을 때 맛있는 도시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걸요.”
“그래도 정말 맛있었습니다.”
태서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비서가 잠깐 당황해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어 왔다.
다시 대화가 끊기며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데도 태서는 회장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없는 곳에 먼저 들어가 있는 것이 예의가 아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단 아닌 척 자신을 향한 시선을 계속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지만 마시고 그냥 물어보세요.”
“네?”
“이미 진행했던 인터뷰도 흐지부지되어 버려 다음 게 언제 나올지 모르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또 우리 전무님 연애는 궁금하실 수 있으니까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된다고요.”
홀린 듯 태서의 말을 듣던 비서가 침을 삼켰다. 정말 물어도 되나 싶은 눈빛으로 태서를 살펴보았다.
“정말이신가요?”
“답할 수 있는 건 전부 말할게요.”
태서가 아예 팔짱을 끼고 고개를 약간 치켜들었다. 어떤 대답이든 다 속 시원하게 말해 주겠다는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그럼…….”
비서는 계속 망설이더니 결국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짜장면 짬뽕.”
스스로 꽤 순발력 좋다 생각했던 태서도 대답을 못 했다.
“한식과 양식, 아메리카노 대 라떼?”
비서의 말이 이어질수록 태서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그러니까 선호도를 물어보는 거 같은데 이게 은근히 대답이 어려웠다.
“저는 짜장면인데 세헌이 형은 잘 모르겠고 형이 손맛이 좋아서인지 집에서 주로 먹는 건 한식이고 또…….”
질문이 뭐였더라.
“형은 아메리카노고 저는 라떼를 조금 더 선호해요.”
“MBTI에서 I와 E?”
“저는 E같긴 한데…… 세헌이 형을 모르겠어요.”
“아는 대로만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다음 질문 이어 가도 되나요? 이건 선호도는 아닙니다.”
비서가 질문의 유형을 바꿀 테니 잘 들으란 식으로 말을 해 오자 태서가 긴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길을 가다가 돈을 주웠어요. 그중 얼마를 전무님께 드릴 건가요?”
“얼만지도 모르는데 거기서 얼마나 줄 거냐고요?”
비서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태서는 고민하다 대답했다.
“얼마가 되든 뭐, 다 주죠. 그런데 그 질문은 왜 하신 거예요?”
강세헌은 제게 카드도 줬는데 그거 하나 못 줄까.
“애정 테스트였습니다.”
“제가 또 줄 거면 확실하게 주긴 해요. 또 물어봐 주세요.”
이제 비서가 질문하기도 전에 태서가 먼저 더 물어봐 달라며 신나 했다. 박수희 기자의 인터뷰도 재밌긴 했지만 지금이 더 제 입맛에 가까웠다.
“첫 만남에서 했던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핏덩이에게 휘둘리고 싶은 생각 없다.”
“눈, 코, 입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얼굴.”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곳은?”
“눈썹.”
얼굴이 좋다면서 눈썹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게 연결이 안 되었는지 잠시 질문이 끊기자 태서가 제 눈썹을 검지로 콕 찔렀다.
“마음에 안 들면 씰룩이거든요.”
눈썹을 삐죽여 산 모양을 만들거나 눈썹 사이를 좁히거나 아무튼 작은 반응으로 그의 기분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아…….”
바로 이해한 비서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아기는 누구를 닮았으면 하나요?”
이건 정말 생각할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저죠.”
“자신을 많이 사랑하시는구나.”
“누굴 닮아야 더 사랑스러울 거 같아요?”
태서가 비서를 향해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 것도 모자라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제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라는 어필이 먹혔다.
“윤태서 님이요.”
“거봐요.”
비서는 슬쩍 눈을 피했다. 실은 누굴 닮든 다 잘생길 거 같은데 애교라면 한쪽이 과하긴 하다.
“만약 회사에 들어온다면 전무님보다 위, 아래 어떤 쪽을 원하시나요?”
“당연히 아래.”
“이유는 무엇인가요?”
“반말 섞인 존댓말이 듣기 좋아서. 약간 기분 안 좋다고 틱틱댈 때의 말투가 좋기도 하고…….”
이 정도면 그냥 변……. 비서가 말끝을 흐렸다. 태서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려 상체를 기울이다 못해 아예 엎어져 버렸다. 동시에 두 사람이 움찔했다.
‘축복이가 있지.’
태서는 배가 눌릴 뻔한 것 때문이었고 비서는 그에게 제가 벌인 짓을 들켰기 때문이었다. 가슴 위로만 보일 뿐 키패드를 두드리는 손은 안 보여서 괜찮을 줄 알았던 비서가 순순히 제 잘못을 빌었다.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많은 분은 아니고 그저 저희 비서실 사람만입니다.”
비서의 변명에 태서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고개를 끄덕여댔다.
“그러네요.”
“그러…… 네?”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태서의 눈이 크게 떠졌다가 이내 웃음으로 반쯤 사라졌다.
“더 질문해 주세요. 아예 그분들이 궁금해하는 거 다 물어봐 주세요.”
“아, 네.”
당황해서 늦게 반응하긴 했지만 대놓고 물어봐 달라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비서는 아예 핸드폰을 태서의 앞으로 내밀었다. 태서가 정신없이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며 재밌다는 듯 웃곤 하나하나 답해 주기 시작했다.
“세헌이 형 성격을 잘 아냐고요? 당연히 모르죠. 처음에만 절 꼬맹이 보듯이 했지 지금은 다정하기만 해서 다른 성격 모르겠어요.”
절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사람이고 엄청 잘 비꼬는 그런 성격 모른다. 아니, 다 잊었다.
“세헌이 형이 얼마나 완벽주의자 성향인지 아냐고요? 다들 형한테 벽을 느끼셨나 보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벽보다는 감?”
비서의 손이 중간에 한 번씩 멈추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서는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해 댔다.
“완벽보다는 다정다감이지.”
“……마지막 질문입니다.”
태서는 더 하고 싶은데 비서가 질문을 끊었다. 키패드를 두드리는 그녀의 손이 자꾸 오므렸다 펴는 게 타자 치는 게 힘들어서 그런다고 여긴 태서가 고개를 끄덕여 왔다.
“오메가 윤태서 님에게 알파 강세헌이란?”
태서가 처음으로 가장 길게 고민한 질문이었다. 단순히 짜장면 짬뽕을 고르는 질문이 아니기에 기다리고 있으니 태서가 더듬거리며 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말했다.
“다정하고 상냥한 알파죠. 부드럽고 달콤한 말을 해 오는 알파이기도 하고 든든하고 배려심 많은 알파……. 아,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되지? 깔끔하게 정리할 말이 없나?”
비서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그냥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며 인사하는데 태서가 아까보다 더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왜, 왜 그러시는…….”
“지금껏 제가 대답한 거 정리해 주실 수 있나요?”
부탁하는 태서의 환한 웃음엔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담겨 있었다.
***
“이게 뭐야. 하.”
한미순이 연신 기막힌 숨을 내뱉었다.
태서의 인터뷰를 못 쓰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눈 똑바로 뜨고 바락거리며 대드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다. 작은 복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중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강세헌과 열애한다는 기사가 나긴 했지만, 대놓고 인터뷰하는 건 다른 이야기니까.
인혁이와 이어질 때를 생각해서라도 인터뷰가 나오면 안 된다고 판단해 벌인 일이었는데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회사 내부에 태서의 사진과 함께 태서가 직접 질의응답한 내용이 돌아다니고 있단다. 그것을 구해 온 비서의 눈앞에서 한미순이 짜증스럽게 종이를 구겼다.
「Q. 오메가 윤태서 님에게 알파 강세헌이란?
A. 알파 중의 상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