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서다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회사 내에 자리한 카페는 사원증을 단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제가 입은 청바지와 티셔츠가 유독 튀어 보였다.
“왜 불렀어?”
아니면 마주 본 이가 자신을 외부인 취급해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서로 눈만 봐도 설레던 때가 언제였더라?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서다래는 강인혁의 감정 없는 시선을 흘려 넘기며 입을 열었다.“비밀번호 바꿨더라.”
“요즘 본가에서 지내느라 말 못 했어.”
강인혁이 뒤늦게 생각난 듯 서둘러 말을 붙였다. 본가에 들어가면서 다른 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머니가 비밀번호를 바꾼 것 같은데 그렇다 할지라도 제가 먼저 서다래에게 들어와서 살자고 했기에 미안한 마음이었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려고 찾아온 게 아니야.”
서다래가 고개 저었다.
“네 집에서 나올 거야. 짐 챙겨야 하는데 언제 문 열어 줄 수 있어?”
“가서 연락해. 비밀번호 말할게.”
“그래.”
비밀번호를 가르쳐 준다는 대답이 아니었지만 서다래는 무심히 받아들였다. 제가 할 말은 끝났다. 입을 꾹 다물고 눈으론 손대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보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 버렸다. 마치 자신과 강인혁의 사이 같았다. 함께 있으면 은근히 열이 오르곤 했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다 식어 미지근해졌다. 집을 나간다는 말을 그 어떤 의문이나 망설임 없이 받아들이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서다래는 아메리카노를 바라보며 그대로 운을 뗐다.
“우리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서로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봤던 거 같은데…….
“너거나 나. 아니면 우리 둘 다에게 있겠지.”
강인혁의 메마른 음성에 서다래가 고개를 들었다. 너거나 나……. 그 대답에 눈에 열이 몰렸다. 이런 식으로 열이 오르는 건 원하지 않았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서다래는 울고 싶은 걸 꾹 누르고 물었다.
“그만하자. 이제 그런 거 따져 봐야 아무 의미 없잖아.”
“강인혁.”
“다래야. 나 지금도 너랑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그냥 문자 하나 남겨 놓지 그랬어.”
“……내가 연락하면 받을 거였어?”
강인혁의 태도에 서다래가 힘 빠진 물음을 던졌다.
“그건…….”
강인혁이 어떤 대답을 하려다 갑자기 멈춰 버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찔려서 그러는 거라 여겼다. 강인혁의 시선이 자신을 비껴 있지 않았다면.
“할 말 다 끝났으면 일어난다.”
강인혁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다래를 지나쳤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에도 서다래는 강인혁을 돌아보지 않았다.
실은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 혹시 제가 싫어하는 누군가를 발견하게 될까 봐.
“윤태서.”
강인혁이 서둘러 속도를 높여 걷는 태서의 팔을 잡아챘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빠르게 도망치던 태서를 잡느라 거의 뛰다시피 했다.
“언제부터 있었어?”
서다래와 나눈 대화를 들었을까?
강인혁의 물음에 태서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언제부터라고 할까?”
어디서부터 봤다고 하면 믿어 줄 거니?
***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
서다래의 억눌린 목소리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삐져나왔다.
제가 강세헌에게 마음이 흔들린 이유가 뭔데.
끝까지 미련스럽게 강인혁만 바라봤어야 당당하게 따질 수 있었다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니지.”
이제 강인혁으로부터 마음이 떠났는데 멍청하게 당하기만 할 순 없었다. 서다래의 표정이 가라앉으며 이전의 혼란스러움을 다 밀어 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다래는 카페를 나왔다. 강인혁과 윤태서가 마주 선 걸 보고도 무시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 아프다며 무너지기는 싫었으니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달라질 수 있구나.’
강인혁을 보면 설레던 마음이 사라진 것도, 어떻게든 윤태서를 끌어 내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도 한순간이었다.
서다래는 더없이 싸늘한 얼굴로 둘을 외면했다.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니야?”
서다래를 보던 태서가 조심스럽게 그를 가리켰다. 하지만 강인혁의 두 발은 태서의 앞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평소랑 스타일이 다르네.”
“아…… 뭐.”
태서가 제 옷을 보았다. 강세헌의 옷을 입고 오느라 톤 다운 된 티를 입었다. 집에서 입는 아주 평범한 티에 불과해서 입고 나가도 어색하지 않겠다 싶었는데 강인혁이 바로 언급해 왔다.
“이상해?”
“잘 어울려. 오히려…….”
부드러운 목선 아래 일자로 뻗은 쇄골의 일부가 드러나서인지 아니면 어깨선이 맞지 않는 느슨한 핏 때문인지 태서의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아니야. 그보다 다 봤다는 거지?”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어 고개를 가로저은 강인혁이 질문을 바꿨다.
“그냥 둘이 앉아 있는 것만 본 거야.”
태서도 그 둘이 카페에 있는 걸 우연히 본 거다. 대화를 들은 건 덤이었다.
“무시하고 가지 그랬어.”
“무시하고 가는 걸 네가 잡은 거야. 인혁아.”
태서가 친근하게 이름까지 부르며 그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줬다.
“그럼 내 눈에 띄지 않게 가지 그랬어. 그러면 안 잡았잖아.”
“있잖아.”
태서는 이제 강인혁에게서 억지로 멀어질 생각을 버렸다. 자신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는 강인혁의 시선은 그냥 무시했다.
“나도 너한테 되게 질척거렸던 기억이 있어서 네가 그러는 이유 알겠는데 그만해.”
솔직히 강인혁의 고백을 거절했다고 해서 관계를 무 자르듯 잘라내지는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데 강인혁 너…….”
태서가 답답한 마음을 억지로 삼키고 또 삼켰다. 강인혁의 모든 일에 아무 상관없다는 듯 굴어야 하는 게 맞는데 알면서도 달래지지 않았다.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너 때문이잖아.”
강인혁은 서다래로 인해 굳어졌던 표정을 풀며 미소를 지었다. 태서가 저와 서다래가 있는 걸 봤고 무시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아예 얼굴을 구겨 대며 인상 쓰고 있으니 서다래를 향한 자신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 거다. 서다래에게 그렇게 굴어도 되냐는 말을 할 게 뻔했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미움을 사서라도 태서와 얽히고 싶었다.
“네가 날 흔들어서 서다래를…….”
“왜 인턴이냐고.”
“…….”
“…….”
서로의 생각이 달랐다는 걸 알게 되자 대화가 사라져 버렸다.
“무슨 소리야. 서다래가 왜 나와.”
태서가 인상을 구겼다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너랑 서다래 일에 내가 관여할 거라 생각한 거냐?”
강인혁이 입을 다문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그 원인 나니까 내가 신경 쓸 줄 알았어?”
태서가 귀찮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나 신경 쓰기도 바빠.”
이건 정말이었다. 자신은 이미 강인혁과 서다래 사이에서 나왔다. 더는 그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오히려 제 일만으로도 신경 쓸 게 많았다. 서다래에게 따질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건 강인혁이 아닌 강세헌 때문이었다.
“윤태서.”
줄곧 입 다물고 있던 강인혁이 한층 무거워진 눈으로 태서를 바라보았다. 서다래 때문이 아니라는 게 잠깐 당황스러웠지만 다른 것도 나쁘진 않았다.
“내가 인턴인 거 어떻게 알았어?”
“너 인턴으로 들어왔다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더라.”
이건 정말이었다. 회사에 들어온 순간부터 강인혁의 이름이 줄기차게 들려올 정도였다.
“내가 그렇게 인기가 많을 줄 몰랐네.”
“네가 얌전히 일만 했으면 안 그랬겠지.”
태서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강인혁이 어떤 선택을 한다고 제가 이리 반응할 필요가 없는데 성급했다. 그걸 생각하니 기분이 안 좋아지려고 해 태서는 팔로 코를 막으며 숨을 들이켰다. 가만히 있어도 은은하게 풍겨 오는 강세헌의 페로몬을 대놓고 마시니 마음이 진정되는 효과가 있었다.
“나 간다.”
“내가 세헌이 형의 앞길을 막을까 봐 걱정돼?”
강인혁으로부터 돌아섰던 태서는 앞으로 한 걸음도 못 걸어갔다. 강인혁의 말에 너무 빨리 잡혔다.
“그래서 내가 신경 쓰여?”
참, 사람 돌게 하는 말만 한다.
태서가 제 머리를 헝클었다.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강세헌의 페로몬이 풍겨 나와 흥분하지 않게 잡아 줬지만 강인혁의 눈엔 태서가 동요하는 것으로 비쳤다.
“인혁아.”
“네가 서다래를 괴롭힐 때 왜 그랬는지 조금 알 거 같아. 이런 거였구나.”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태서의 얼굴이 달아올라 갔다. 강인혁이 제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거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밀고 들어오다니.
“네가 지금 하나 놓치고 있는 거 같은데…….”
태서는 왜 이런 설명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아껴 봐야 뭐 하나 싶어 말했다.
“네가 건들겠다는 상대가…… 강세헌이야.”
강인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디선가 강세헌의 페로몬이 맡아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
한미순이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이거는 인터뷰지네요.”
쭉 내용을 훑어 내려가던 한영수 편집장의 얼굴에 점점 미소가 차올랐다.
“이거 KH 강세헌 전무님을 노린 인터뷰 맞죠?”
“그래.”
“연애 위주로 적어 놔서인지 질문이 하나같이 설레고 좋네요. 강세헌 전무님이 좋은 10가지 이유라니…….”
한영수 편집장의 껄껄거리는 웃음에도 한미순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날 태서가 강세헌의 좋은 점을 10개 정도 늘어 놓던 거 같은데 제 착각일지.
“그런데 이걸 보여 준 이유가 뭡니까. 고모 설마…….”
“너도 내야지. 기사.”
한미순이 조카를 찾아온 이유였다.
“그러니까 이 인터뷰지를 가지고요? 누구랑 인터뷰해서요?”
한영수 편집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굴자 한미순이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낼 생각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