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강세헌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니 태서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숟가락을 내밀었다. 그리고 강세헌이 올려 준 메추리알 조림을 먹으며 시간을 끌었다.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긴 했지만 따로 말한다는 걸 까먹은 제 잘못이 컸다.
“대학교에 난 형이랑 제 소문이요.”
“저번에 말한 그 소문?”
‘윤태서가 강세헌을 만나고 있다.’ 정도로만 돌아다니던 소문을 언급하기에 태서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라면 당연히 가만히 있었죠. 그런데 형한테 조금 안 좋을 수 있는 소문이 나서 할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 때문에 아예 대놓고 기사를 통해 관계를 공론화 시켰다? 제 생각이 맞냐는 듯한 강세헌의 시선을 강학중 회장은 태연히 흘려 넘겼다.
왜 언론에 말을 냈는지, 왜 지금이었는지 물었을 땐 답하지 않으시더니. 이유를 이제 알았다. 하나둘씩 퍼즐을 맞추자 마지막 하나의 퍼즐만 남았다.
“네가 걱정할 만한 게 뭐였을까.”
강세헌의 낮은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 태서는 밥을 꼭꼭 씹어 댔다.
***
마지막에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던 것만 빼면 괜찮은 시간이었다. 강학중 회장과 헤어지고 강세헌과 나란히 차에 올라탄 뒤로 줄곧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말하기 전까지 출발하지 않으려는지 핸들을 쥔 강세헌의 손가락이 톡톡 일정한 박자로 움직였다.
“그 소문이 뭔지 자세히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우리 태서가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번엔 빠져나갈 수 없다는 듯 강세헌이 태서를 구석으로 몰아가자 창밖을 보던 태서가 한숨을 감췄다.
“제가 서다래한테서 형을 빼앗으려 한다는 말이 돌았어요.”
“서다래?”
난데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강세헌이 미간을 찡그리니 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세헌을 빼앗기 위해 서다래를 괴롭힌다 뭐 그런? 공교롭게도 제가 예전에 강인혁 때문에 서다래를 괴롭힌 적이 있어서 소문을 믿는 사람이 많아요.”
이미 한번 전적이 있어서 다들 쉽게 믿었다.
“직접 나서서 아니라고 해 봐야 순순히 믿을 사람도 별로 없을 거 같고 또 신경 쓰기엔 걸리는 것도 많아서요. 억울하달까?”
한번 말문을 트기 시작하니 그 뒤로는 저도 모르게 알아서 말을 주절거렸다. 그러면서 강세헌의 표정을 살폈다. ‘태서가 그런 걸 다 신경 쓰는구나.’라고 대답해 주길 바라면서.
그러나 강세헌의 굳게 닫힌 입은 열릴 기미가 없었다. 그의 분위기까지 가라앉자 태서는 아까보다 더 어색한 듯 눈동자만 굴렸다.
“형과 서다래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렇죠?”
이제야 강세헌은 강학중 회장이 조심하라던 그 조언의 정체를 이제야 알았다. 지금 태서가 가진 불안은 손톱보다 작은 불씨에 불과하지만, 이게 얼마나 몸집을 부풀릴지 몰랐다.
***
다음 날 아침, 강세헌은 출근하자마자 회장실에 들려 차를 마셨다. 어제 마주 보고 앉아 저녁 식사할 때만 해도 다정했던 강세헌은 사라지고 잔뜩 각 잡힌 회사의 전무가 자리했다.
“네가 직접 보고 하러 왔냐?”
“그건 다른 사람이 하고 있을 텐데요.”
이번에 내놓는 신제품에 관한 TF팀의 업무 관련 보고서는 일주일 단위로 올라왔다. 그 외에 중요한 일이 있다면 실시간으로 알리고 있을 정도로 강학중 회장이 관심 있게 지켜보는 일 중 하나였다.
짧게 대답한 강세헌이 태블릿을 들여다보자 강학중 회장의 얼굴에 못마땅한 감정이 더욱 진해지고 있었다.
평소엔 불러야 회장실에 오던 놈이 오늘은 아침부터 당연하게 와서 앉아 있다. 제가 직접 차를 가져오고 비서는 밖으로 보냈다. 어릴 때도 안 하던 생떼를 부리다니.
“언제까지 이럴 거냐?”
“제가 원하는 답을 얻으면 일어나겠죠.”
“다 말해 봐라.”
“그러겠습니다.”
강세헌은 전혀 아쉬울 것 없다는 듯 여유롭게 굴었다. 그러나 그의 속은 아니었다. 어제 태서가 한 말을 밤새 곱씹었다.
서다래를 언급하며 제 불안을 드러내긴 했는데 어딘가 느낌이 달랐다. 서다래를 의식하는 것이라면 저번처럼 풀어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윤태서는 서다래를 핑계로 자신을 숨겼다.
왜 그랬을지 생각하니 금방 윤곽이 그려졌다.
태서라면, 제가 아는 그 윤태서라면 제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자신을 욕하는 것에 크게 흔들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에 그렇게 굴었는데 아무 말도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냐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윤태서가 억울한 마음에 공개적으로 관계를 드러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태서의 걱정이 저였습니까?”
태서가 신경 쓰는 것을 알기 위해 초점을 제게 맞춰 보니 전부 들어맞았다.
강세헌이 강학중 회장을 돌아보며 진실을 요구했다. 그 표정을 바라보던 강학중 회장이 혀를 찼다.
“궁금해서 온 게 아니라 확인하러 온 것이구나.”
강학중 회장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그 아이는 대범하면서 섬세한 부분이 있어. 자신은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웃으면서 정작 제 소중한 구슬은 흙 하나 묻지 않았으면 하지.”
지금껏 보았던 태서를 떠올리며 강학중 회장이 낮은 목울음을 흘렸다. 정작 구슬은 흘러가는 물에도 금방 진흙이 씻기는데.
“그게 그 아이가 너를 좋아하는 방식이더구나.”
태서의 애정이 그랬다.
“그래서 인터뷰를 시켰다. 태서에게 씌워진 이미지를 바꿀 참이었어. 그 아이야 학교의 소문만 가라앉히면 된다 여겼지만 나는 그 정도로는 성에 안 찼거든.”
태서가 제 손주 놈을 챙겨 주니 강학중 회장은 그런 태서를 보듬어 주고 싶었다.
“됐냐? 다 물었으면 내려가라.”
강학중 회장의 축객령에도 강세헌은 일어나지 않았다. 태서에 대한 건 다시 생각할 수 있으니 밀어 두고서라도 아직 질문이 남았다.
“회사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계속 방관하실 겁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어떤 상황인지 다 아실 텐데요.”
“인혁이를 인턴으로 넣은 그 일 말이냐?”
강학중 회장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지만, 강세헌은 절대 그럴 마음이 없었다.
“현장에서 일을 배우고 싶다는데 안 될 게 뭐가 있느냐.”
“그렇다면 정식 채용을 거쳤어야 했습니다.”
“수시 채용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런 경영이 문제가 될 것을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너는 네 생각대로 진행해라. 나는 나대로 하마.”
아예 강세헌과 다른 길을 가려 하는지 강학중 회장은 속내를 감추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네가 말한 대로 그간 내가 너무 내 아들을 끌어안고 있었어. 그걸 잘 아는데 놓기가 쉽지 않아.”
강학중 회장답지 않은 대답에 강세헌이 눈썹을 구겼다. 지금껏 회사를 운영해 오면서 이렇게 무르게 군 적이 없는데 갑자기 제 아들이라며 두둔하는 속내가 궁금했다.
“작은아버지가 원하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신제품이 우리의 프로젝트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이기든 나야 손해 볼 게 없다. 네가 잘되면 회사의 주가가 올라갈 것이고 원하가 잘되면 수학이가 이득을 얻는 거 아니냐.”
“시험대로 삼으실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올라오고 싶다는데 어쩌겠느냐. 너는 인혁이나 잘 챙겨 줘라.”
“제 선에서 잘라 내도 상관없습니까?”
“그거야 책임자 마음이지.”
강학중 회장의 자신은 뒤로 물러나겠다는 뜻에 강세헌은 더 말할 게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실을 나온 강세헌의 옆으로 비서가 따라붙었다.
“강인혁 인턴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두죠.”
“말이 나올 것입니다.”
“나올 것이 아니라 나왔을 거 아닙니까. 인혁이가 인턴으로 들어온 순간부터요.”
그렇지 않냐는 강세헌의 시선에 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회장님의 손주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사내에 자자하게 퍼졌다. 전무가 직접 뽑은 TF팀에 소문 하나 얹는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알아낼 수 있는 건 전부 알아 오세요.”
“굳이 비서를 통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나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나왔다. 강인혁인 것을 확인한 순간 비서가 눈치껏 물러나자 두 사람만 남았다.
“회사에 관심 많은 줄 몰랐네. 그랬으면 방학 때마다 와서 배우지 그랬어.”
“한창 놀기 바쁜 대학생이 무슨 관심이 있다고 배워.”
강인혁의 반항 섞인 웃음에 강세헌이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 말은 지금도 관심 없다고 들리는데.”
“맞아. 그보단 다른데 눈이 팔려 있지.”
“그런 정신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강세헌의 고압적인 시선에 줄곧 비틀린 미소를 짓던 강인혁이 제 얼굴을 드러냈다. 강세헌을 향한 적대적인 눈빛이 당장이라도 그를 부러뜨리고 싶다는 듯 노려보았다.
“못 할 거 같아?”
강인혁이 한 걸음 다가간 순간 둘 사이의 거리가 확 좁혀졌다.
“아버지가 형 잡겠다고 이를 갈고 있어. 내 아버지지만 참 욕심도 많아, 그렇지?”
상대방의 동조를 바란 건 아니었는지 강인혁은 제멋대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 바닥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아버지가 잘되기만 하면 경영 후계 구도가 바뀔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형이 있는 쪽에 내가 있잖아. 두 곳에 다 발을 걸치고 있는데 질 수 있겠어? 우리는 대놓고 공격하기로 했으니 어디 한번 잘 막아 봐.”
강인혁이 먼저 강세헌에게 거리를 벌렸다. 그동안 강세헌에게 당한 것으로 막혔던 가슴이 아주 조금 뚫린 기분이었다. 상쾌한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것만 같아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인혁아.”
강세헌의 낮은 부름에 강인혁이 걸음을 멈췄다.
“그렇게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건 좋은데 너무 무모하지 않았을까?”
강인혁의 미소가 다시 안으로 감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