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인데 임신했다-89화 (89/130)

89화

“홍보 가이드 라인 바꾸겠습니다. 성 대리.”

강세헌이 제 노트북으로 어제 정리한 파일을 켜며 홍보팀 성 대리를 불렀다. 그가 업무용 수첩을 들고 가까이 다가오자 강세헌이 그를 향해 노트북 화면을 돌릴 때였다.

“전무님.”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비서가 먼저 들어왔고 뒤이어 두 사람이 따라 들어왔다. 그 둘의 얼굴을 차례로 본 강세헌의 한쪽 눈이 가늘어졌다.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남자가 강세헌을 향한 여유로운 미소를 보내왔다.

“이번 기획팀에서 빠진 박진후 대리를 대신해서 온 김현경 대리입니다. 그리고…….”

김현경 대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뒤따라온 사람을 앞으로 오게 눈짓했다. 성큼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TF팀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돌아갔다.

김현경 대리가 데려온 사람이랑 강세헌 전무랑 닮은 거 같은데?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확신이 들고 있을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강인혁 인턴입니다.”

강세헌의 앞에 서 있던 지라 가장 가까이 있던 성 대리의 표정이 달라졌다. 마지막에 들어온 남자가 보면 볼수록 눈에 익다 싶었는데 이름을 듣자마자 이유를 알았다.

KH그룹의 직계다. 어쩐지 TF팀에 웬 인턴이 들어온다 했더니. 이만한 연줄이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인턴의 합류가 말이 된다고 봅니까?”

강세헌의 나직한 질책에 기획팀 김현경 대리가 시선을 피했다. 그녀로서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 할 말이 없었다.

“전무님 이것 보십시오.”

비서가 그에게 태블릿을 내보였다. 기획 팀장으로부터 온 메일이었다. 김현경 대리의 사내 업무 이력을 비롯해 강인혁의 이력서까지 세세하게 챙겨서 보내왔다.

누가 시켰을지 빤히 보이는 가운데 강인혁이 상황을 마무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세헌 전무님.”

인턴의 의미심장한 인사에 강세헌은 말없이 노트북을 덮었다.

***

일을 벌인 사람은 한미순이었다. 대놓고 강인혁을 기획실 인턴으로 넣은 것도 모자라 곧장 TF팀에 합류할 수 있도록 손을 썼다.

강수학 대표가 원하전자와 손을 잡은 걸 알고 있는데 대놓고 그의 아들을 경쟁팀에 넣는다? 강세헌이 한미순과 강인혁의 검은 속내를 생각하고 있을 때, 태서는 세헌의 다리를 벤 상태로 뒹굴거렸다.

「이제 속이 시원하냐?」

박한수의 톡을 본 태서가 웃음을 삼켰다. 축복이의 성별을 알려 주면서 연락이 닿자 자연스럽게 이번 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박한수는 눈뜨자마자 핸드폰이 터질 것처럼 오는 톡은 물론 몇십 개의 링크에 박힌 태서의 이름에 기함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한수가 바로 연락하지 않은 건 아마 제게 부담이 될까 봐 그랬겠지.

그래서 연락하고 싶은 걸 꾹 참고 기다렸다가 태서가 먼저 연락을 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강학중 회장님한테 말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등의 박한수의 톡에 태서가 소리 없이 웃었다.

‘나도 이 정도까지는 생각 안 했거든?’

인터뷰까지 했다는 답장을 보낸 태서가 한 바퀴 굴렀다. 강세헌의 다리가 걸리긴 했지만 금세 편한 자세를 잡고 다시 핸드폰에 집중했다.

‘그래서 학교에 도는 소문이 가라앉았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계속 물어보는데도 제가 정말 놀랐다는 말을 반복하다가 어떤 기사에 담긴 사진은 산부인과에 다녀온 사진이냐며 질문해 댈 뿐 정작 원하는 답이 없었다.

대답해 주기 전까진 말하지 않겠다고 답한 태서는 핸드폰을 두고 눈을 위로 들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강세헌의 미간에 얕게 진 주름이 보였다.

분명 일의 진척이 빠르다고 들었는데 무슨 고민이 있는 걸까? 늘 바쁘다가 갑자기 하루 쉴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이상했다. 자신이야 강세헌과 함께 침대에서 낮잠도 자고 뒹굴거리는 여유를 즐길 수 있어 좋았지만 그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핸드폰의 진동에 강세헌을 바라보던 눈을 내렸다.

「학교야 뭐, 네가 오메가라는 게 더 놀랍다는 반응들이다.」

‘아, 그렇지.’

주변 사람들이야 제가 오메가인 걸 알고 있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태서를 베타로 아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소문은 어느 정도 가라앉긴 했어.」

‘어느 정도?’

어딘가 찝찝한 느낌이 드는 대답에 태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박한수의 성격으로 봐서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기보단 다른 살이 붙은 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었다.

‘그것도 인터뷰가 올라오면 좀 가라앉을까?’

지난번에 못 한 인터뷰는 메일과 전화로 마무리했다. 어느 정도 정리되면 적당한 때를 봐서 올리겠다고 했는데 그 전에 미리 제게 공유해서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었다.

‘이 정도에서 마무리되면 좋겠는데….’

강세헌에게 이상한 말이 붙지만 않으면 더 신경 쓸 것도 없었다.

다음에 보자고 마무리한 태서가 핸드폰을 쥔 손을 툭 내렸다. 양팔을 벌리고 천장을 향해 누워 버리자 몸 위로 이불이 덮였다. 강세헌이 태서의 가슴까지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며 가슴을 토닥거렸다. 잠이라도 재울 셈인지 규칙적으로 두드려 오는 토닥임이 기분 좋았다.

“박한수랑 연락 다 했어?”

“네.”

“그럼 다시 자. 먹고 놀았으니 자야지.”

이 정도면 진짜 아기처럼 여기는 건 아닐까?

태서가 눈을 치켜뜨자 강세헌의 커다란 손이 다가와 문어처럼 얼굴에 달라붙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내 호의에 반응하는 네 눈빛이 거슬려서.”

“제 눈빛이 뭐요.”

“불손해.”

농구공 잡듯 머리통 잡는 주인공은 봤어도 손으로 얼굴을 덮어 버리는 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태서가 가만히 있으니 강세헌의 손이 알아서 떨어지더니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왔다.

“어서 자.”

태서가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의 말대로 아까 배부르게 밥 먹었고 놀기도 했으니 자는 게 맞긴 한데…….

“먹고 싶은 게 생각났어요.”

도로 눈을 뜬 태서가 급히 이불 위를 더듬거리더니 제가 원하는 걸 찾았는지 움직임을 멈췄다. 반색하며 이불을 제치곤 핸드폰을 잡은 태서가 그것을 들고 다시 누웠다.

말로는 먹고 싶은 게 생각났다는데 행동은 영 이상했다. 강세헌이 그의 앞에 앉았다. 태서에게 뭐 하려는지 물으려는데 금방 답이 나왔다.

“할아버지, 저 먹고 싶은 게 생각났어요.”

“……윤태서.”

강세헌이 고개를 푹 숙이며 제 얼굴을 가렸다.

“나도 잘 번다니까.”

네가 먹고 싶어 하는 거 다 사 줄 수 있는데 정말 할아버지한테 전화하는 거야?

강세헌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젓고 태서를 보자 그의 눈이 웃음으로 가늘어졌다.

“오늘도 좋아요. 참, 세헌이 형도 간다는데 괜찮아요?”

태서가 입 모양으로 강학중 회장의 대답을 말해 줬다.

형은 돈 내래요.

***

“솥밥이 먹고 싶었어요.”

뚜껑을 열기 전부터 은근하게 풍겨 오는 밥 냄새에 태서의 입매가 한없이 풀어졌다. 헤실거리며 보고 있으니 강세헌이 솥에서 밥을 푸고 일정량의 물을 따른 후 한쪽에 두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연락하거라. 내 얼마든지 사 주마.”

“감사합니다.”

태서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숟가락을 들어 밥을 떴다. 봉긋하게 올라온 하얀 밥 위로 강세헌이 생선을 올려 주자 태서가 당연하다는 듯 받아먹었다. 강세헌이 다른 반찬도 하나씩 올려 준 덕에 태서는 젓가락을 쓰지 않은 채 식사를 이어 갔다. 보다 못한 강학중 회장이 혀를 찼다.

“제짝 챙겨 주는 손길 하나는 야무지구나.”

“하다 보니 익숙해졌습니다.”

강세헌은 강학중 회장의 앞인 것도 상관하지 않고 태서가 잘 먹는지에만 신경 썼다.

“나 혼자 보기 아깝구나.”

무뚝뚝한 손자놈이 제 애인 챙기는 걸 진한이와 며느리도 봐야 하는데…….

“나중에 많이 볼 테니 괜찮습니다.”

계속 이렇게 챙겨 줄 거란 강세헌의 담담한 말투에 강학중 회장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말로는 보기 아깝다고 하지만 강학중 회장은 중간중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사진 봤다. 아주 다정하더구나.”

“결혼할 사인데 당연하지요.”

“태서와 축복이를 말한 거다.”

얄미운 손주를 한 방에 보내 버린 강학중 회장이 한결 나아진 얼굴로 젓가락을 들었다.

“네 못생긴 얼굴도 아주 잘 봤다.”

“…….”

강세헌이 할 말을 잊은 것으로 승리를 거머쥔 강학중 회장이 태서를 돌아보았다.

둘이 대화하는 동안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태서가 아까보다 먹는 속도를 늦추며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직접 만나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네가 좋아하는 것으로 되었다. 어차피 계속 숨길 것도 아니었으니 적당한 때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강학중 회장이 눈으로 강세헌을 가리켰다.

“저 아이한테 붙은 눈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

“그렇죠. 세헌이 형이 워낙 유명하니까.”

그건 태서도 인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헌이 형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요.”

막 윤태서의 몸에 빙의되어 정신이 반쯤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할 때였다. 그때 자신을 도와준 남자를 보며 ‘얘는 누구지.’ 싶었는데 엄청난 유명인이었다.

강세헌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오던지 그때의 놀란 기억이 콕 박혀서 잊히지 않았다. 오죽하면 주인공인 강인혁보다 잘나서 조연으로밖에 쓰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랑 만나는데 언젠가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죠.”

어쩌면 강세헌이라는 알파와 만날 때부터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나 보다.

“소문은 가라앉았니?”

“소문?”

태서를 향한 강학중 회장의 물음을 강세헌이 가로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