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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87화 (87/130)

87화

태서의 단호한 눈빛에 한미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미 태서의 표정에서 대답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저는 세헌이 형이 좋아요. 인혁이와는 친구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원하지 않아요.”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나중에 후회할 거야.”

“아니요. 오히려 지금까지 제 행동을 정확하게 전하지 못한 게 더 후회됩니다. 아주머니께 죄송한 마음에 회피한 게 잘못이었어요.”

아예 한미순을 찾아가 강인혁과 약혼하지 않을 거라 말했다면, 아니 그 전에 자리가 마련되어 만났을 때 미리 말했다면 좋았을걸.

“저는요, 강인혁이 아니라 강세헌을 선택했어요. 그 선택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만하세요.”

그간 잘해 준 건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절대 제게 잘해 주지 마시고 인혁이의 새로운 인연을 예쁘게 봐 주세요. 제게 미련을 버리시고 그 욕심을 조금만 접어 주신다면 나중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속에 담긴 말을 전부 감춘 채 태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이것으로 인혁이와 완전히 정리할 수 있다면 오늘의 만남이 나쁘지 않겠다.

“아주 맹랑하구나. 세상에, 지금껏 그 뻔뻔한 얼굴을 잘도 숨기고 살았어. 인혁이가 네 거짓된 얼굴에 속았던 거야.”

“아…….”

지금껏 잘만 받아치던 태서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에 죄책감이 들어서 그렇다기보단…….

“인혁이는 제 모습 다 알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와 눈만 마주치면 얼마나 노려봤는데요. 걔가 절 왜 싫어했겠어요.”

이걸 모르고 계셨나? 하는 생각에 그랬다.

태서의 아무렇지 않은 대답에 한미순의 입술이 부들거려 왔다. 아마 제가 일부러 그녀의 속을 헤집는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아주 날 가지고 놀아?”

한미순이 거친 숨과 함께 눈으로 테이블을 훑는 것을 보고 태서가 당황해서 손을 휘저었다.

“여기 물 없습니다.”

아까 인터뷰한다고 기자는 아무것도 안 시키고 제 것은 밑에만 조금 남은 게 전부였다. 그러니까 뿌릴 게 없다고 말하면서도 말려 보고자 한미순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힘이 손을 뿌리치자 태서가 붉어진 제 손등을 어루만졌다.

“어딜 잡아. 다음에 네가 날 찾아와 받아 달라고 할 땐 무릎을 꿇어야 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받아 주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

한미순은 불쾌한 눈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인터뷰지를 가져갔다. 한미순이 일어나자 태서가 엉거주춤 함께 일어났다. 멀리 나가지 않고 적당한 자리에서 인사하고 있으니 한미순이 태서를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또각또각 다시 한번 그녀의 구두 소리가 카페를 울리며 사라지자 태서는 예의상의 미소만을 지은 채 배웅했다.

“물 끼얹으려는 게 아니었구나.”

한미순이 나가자마자 잔뜩 지친 태서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푹신해서 안락했던 의자가 지금은 몸이 배겨 오도록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한 번쯤 겪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한미순을 만나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마음에 돌덩이 하나를 얹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아프네.”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탓인지 힘이 풀리고 나니 결리지 않은 데가 없었다.

“배가…….”

그리고 배에서 아릿한 통증 느껴지자 태서의 숨도 점점 거칠어졌다.

“집에 가서 쉬어야겠어.”

지금 생각나는 건 강세헌의 페로몬이 가득 차 있는 집뿐이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강세헌의 이불을 덮고 눕고 싶었다. 그의 페로몬을 가득 머금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태서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카페를 나왔다.

***

강세헌은 태서의 인터뷰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동안 할아버지와 사업 이야기도 할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비서가 강학중 회장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회장이 그것을 바라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짓곤 강세헌에게도 보여 주었다.

비서가 가져온 건 인터뷰를 맡은 기자가 보낸 한 장의 사진이었다.

“하.”

보자마자 강세헌의 입에서 불쾌한 감탄이 나왔다. 태서와 한미순이 마주 보고 앉은 사진이었다. 영상도 아니건만 둘 사이에 흐르는 불편한 분위기까지 아주 제대로 찍혔다.

“아주 이를 갈았구나, 갈았어.”

강학중 회장이 탄식을 뱉었다.

“어찌 사람이 이리 일관되는지 모르겠어.”

모자란 수학이를 제법 잘 내조해 주고 똘똘한 인혁이까지 낳아 준 부족함 없는 며느리였지만, 가끔 이렇게 욕심을 부릴 땐 한숨이 나왔다. 수학이에게 전자를 쥐어줬으면 하는 마음에 아직 학생인 인혁이를 세헌이 위로 올리려고 갖은 수를 썼다.

아마 태서에게 집착하는 것도 배경이 탐나서겠지.

“가 보겠습니다.”

강세헌이 일어났고 강학중 회장이 그를 불러 세웠다.

“진정해라. 이번 일은 내가 정리하마. 작은 며느리를 불러 잘 이야기해 본다면 해결될 것이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작은어머님께 무언가를 쥐여 주고 달랠 겁니까?”

강세헌이 강학중 회장의 속을 들여다보듯 말했다.

“작은어머니에게 적당히 만족할 만한 계열사 하나 주고 정리하려고요?”

“그게 가장 평화로운 방법이지.”

“평화로운 게 맞습니까?”

강세헌이 픽 비웃었다.

“작은아버지를 위해 전자에서 사람을 얼마나 데려가셨습니까. 그런데 이번엔 또 얼마나 인사 이동시키려고요. 이미 작은아버지를 위해 충분히 해 주고 계십니다.”

“네 사람을 데려가지 않으마.”

“그럼 계열사가 망가지겠죠.”

강세헌이 마땅치 않은 숨을 뱉었다.

“아들은 외면하기 싫고 계열사 그 무엇도 무너뜨리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 그렇게 유지해 온 균형이 얼마나 갈 거 같습니까?”

지금까지야 잘 버텨 왔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과연 적당한 계열사라는 게 있을까? 그룹 자체를 넘겨 주지 않고서야 마음에 찰 리가 없다.

“제가 하겠습니다.”

“방법이 있느냐?”

강세헌은 대답 대신 눈인사를 보내고 나가 버렸다.

“이제 물러날 때가 된 건가.”

이미 나가 버리고 없는 강세헌의 빈자리를 보던 강학중 회장이 중얼거렸다.

***

운전석에 탄 강세헌이 단추를 풀어 내리려 손가락을 집어넣다 멈칫했다. 태서에게 어떤 일인지 알아 오겠다고 급하게 나온 바람에 양복 차림이 아니었다. 목을 죄는 넥타이도 없는 넉넉한 라운드넥인데 뭐가 이리 답답한지.

태서와 한미순을 찍은 사진을 본 순간부터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던 거 같다. 분명 한미순이 찾아올 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하필 자신이 없을 때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태서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건데.

신호에 걸릴 때마다 끓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며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정신으로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는지 모르겠다. 그저 태서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손이 미끄러져 몇 번 실수한 끝에 문을 열 수 있었던 강세헌은 곧장 안으로 들어와 태서부터 찾았다.

“태서야, 윤태서.”

혹시 그 카페에 아직 남아 있으면 어쩌나 작은 후회가 되었다. 여유가 사라지니 생각도 짧아졌다. 급히 거실을 돌아보던 강세헌이 막 몸을 틀었을 때였다.

“왔어요?”

방문을 열고 나온 태서가 한껏 늘어진 하품을 해 왔다. 걱정되서 찾아온 강세헌은 단숨에 태서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아?”

“저는 괜찮긴 한데…… 형이야말로 왜 그래요? 얼굴이 안 좋아요.”

“나도 괜찮아. 오늘 작은어머니 만났다며.”

“그것 때문에 표정이 안 좋았구나.”

태서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딱히 놀란 것 같지 않은 표정에 외려 강세헌이 이상하다는 듯 보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안 물어봐?”

“할아버지께서 보낸 기자분이 몰래 사진 찍어 가시는 거 봤어요.”

당장 미운 말 정도는 듣겠지만 무슨 일이 벌어져도 도와줄 사람이 있다 여겼다. 태서가 무구한 얼굴을 한 채 강세헌을 바라보고 있자 강세헌 또한 곤두섰던 기분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태서를 볼 때만 해도 반가웠는데 평소와 다른 게 그의 눈에 띄었다. 강세헌의 시선이 얼굴에서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갔다. 라운드의 목이 제법 넉넉하고 어깨선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크다. 팔에 어깨선이 있는 것도 모자라 붕하게 뜬 허리로 보아 태서의 옷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세헌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아챈 태서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형의 페로몬이 필요한데 이불 속에만 있을 수 없어서요.”

그렇다고 이불을 두르고 다니기엔 무겁고, 태서가 제 손을 흔들었다. 강세헌의 등치가 큰 거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옷을 입으며 새삼 느꼈다. 제 손을 다 가려 버리고도 튀어나온 소매가 그를 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오버핏으로 입고 있으니 조이지도 않고 좋네요.”

“잘 어울리네.”

“그렇죠?”

태서가 소매를 걷으려다 미끄러져 내려오는 걸 반복하며 어설픈 행동을 보이더니 배시시 미소 지었다. 강세헌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그런 게 빤히 보이는 미소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태서가 강세헌을 꼭 끌어안았다.

“형도 제 페로몬 맡아요. 그러면 안정될 수 있어요.”

강세헌이 진정될 수 있도록 제 페로몬까지 풀어 주었다. 태서도 이렇게 강세헌의 페로몬으로 아렸던 배의 통증을 없앴다.

어느새 강세헌도 태서를 끌어안고 있으니 오늘 아침과 다름없는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왔다.

“내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거릴까?”

“그러고 싶지만, 산부인과 진료 있어요.”

태서가 잠깐 시간을 끌었다가 말했다.

“축복이 성별 알 수 있다네요?”

평화로움 사이로 아주 작은 사건이 끼어들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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