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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86화 (86/130)

86화

태서는 한 언론사와의 미팅을 위해 근처 카페로 나왔다.

“어떤 음료를 드릴까요? 커피는 안 되겠죠?”

임신한 걸 알고 있는 기자의 물음에 태서는 적당한 음료를 선택했다. 임신인 걸 몰랐을 때 커피를 마셨던 게 영향을 끼칠까 의사에게 물어봤었다. 의사도 적당한 양이라면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많이 마시지만 않는다면 꼭 피하지 않아도 된다고 들었지만 마시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끌리지 않아서였다.

“실물이 훨씬 잘생기셨네요. 아, 그렇다고 사진이 절대 못났다는 건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역시 실물이 더 낫다니까, 기자의 칭찬에 태서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강세헌에게 잊지 않고 말해 줘야지.

“이렇게 선뜻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박수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작은 수첩을 들고 옆에 녹음기도 살포시 내려놨다. 그녀의 뒤편엔 제 허락을 받자마자 카메라를 들이민 사람까지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강학중 회장이 준비해 준 카페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조용하고도 은은한 노래로 긴장을 눌러 주었다.

편하게 인터뷰하고 오라는 배려에 태서는 마음을 누른 채 박수희의 질문을 받을 준비를 했다.

“라이트하게 시작해 볼까요? 두 분이 가장 처음 만난 곳이 어디죠?”

“호텔이요.”

“어머, 제가 상상하고 싶은 대로 상상해도 될까요?”

“호텔 창립 파티에서 형을 만났어요. 정확하게는 파티장을 나오다가 만났고요.”

태서가 상상의 씨앗을 잘라 내자 박수희가 알겠다고 하면서도 어딘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둘이 계속 호텔에서만 만났나요? 참, 대학교에서는 이미 소문이 나 있었는데 그것도 자세히 설명해 주실래요?”

박수희가 준비해 온 질문을 하나둘 꺼내자 태서는 어려울 게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강세헌과 만났고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 또 대학교에서는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등등.

다른 사람에게 제 연애사를 이야기한다는 게 생각보다 기분 좋은지 태서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질 줄 몰랐다. 중간에 잠깐 대화가 끊기자 태서가 제 앞의 음료수를 들었다.

“좋아하시나 보네요.”

“세헌이 형이요? 네.”

“전 그 음료수 말한 건데…….”

박수희의 장난에 태서가 당했다는 표정으로 음료수를 마셨다.

“그럼 이것도 기사에 넣겠습니다.”

그녀가 능청스럽게 내용을 정리하는 걸 본 태서는 어이없는 웃음만 흘렸다. 하긴 지금껏 부담 주지 않는 한에서의 질문만 해 줬으니 이 정도는 괜찮았다.

“제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답니다. 그동안 인터뷰하고 싶은 걸 꾹 참았어요.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날을 잡아 준다 하신 말만 듣고요.”

오늘의 인터뷰가 올라간 뒤 벌어질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지 자꾸 미소가 새어 나왔다.

“남은 질문이 몇 개예요?”

“몇 개 안 남았네요. 30개 정도? 아, 이 중 하나는 10개 이상 답해 달라는 것도 있네요.”

“어떤 건데요?”

“그냥 강세헌이 좋은 열 가지 이유를 대라는 쉬운 질문이랍니다.”

“오늘 밤새는 거 아니겠죠?”

“절대 무리하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저만 믿으세요.”

박수희가 웃으며 제가 등을 대고 있던 쿠션을 빼서 태서의 옆구리 쪽으로 슬쩍 밀어 넣었다. 정말 신경을 많이 쓰겠다는 의지에 태서마저도 못 이기겠다는 듯 웃고 말았다.

화기애애한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던 도중, 문 쪽에서 자그마한 소란이 들려 태서가 의아해했다. 들어오면 안 된다는 카페 주인의 난처함이 담긴 말과 그것을 무시하는 낯익은 음성에 태서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말리는 카페 주인을 물리쳤는지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점점 커져 왔다. 멀리서부터 풍기는 독한 향수가 순식간에 카페의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가방을 팔에 낀 채 흔들림 없이 걸어오는 걸음걸이는 이제 눈감고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한미순이 강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덕분에 태서를 비롯한 세 사람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한 번쯤 만날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오랜만이구나.”

“……안녕하세요.”

태서가 반쯤 엉덩이를 떼고 인사하고 있으니 한미순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몰랐니? KH에서 하는 인터뷰는 대부분 여기에서 하는데.”

한미순이 카페를 둘러보다가 다시 태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인혁이랑 계속 어울렸다면 이런 정보도 알았을 텐데.”

한미순이 뻔뻔하게 자리에 앉으니 박수희가 눈치를 보다 끼어들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인터뷰 중입니다.”

“나 몰라요?”

“아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선이라는 게 있는데 싶어 박수희가 뭐라고 하려는 찰나 핸드폰이 울려왔다. 슬쩍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녀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여보세요. 네? 하지만 지금 인터뷰…… 아니, 그런 게 어딨어요. 왜 갑자기 중단하라고 그러는데요. 전화로 말해요. 뭘 들어가서…… 하아.”

박수희가 답답한지 제 머리카락을 연신 뒤로 쓸어 넘겼다. 그녀의 대답만으로도 얼추 상황을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녀는 통화를 끝낸 뒤 핸드폰을 꾹 쥐며 태서를 향해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연락 주세요.”

태서가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손을 건네자 박수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사했다. 내키지 않지만 한미순에게도 인사한 박수희가 돌아서는 동시에 카메라맨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카메라맨은 카메라를 정리하는 척 태서와 한미순을 담았다.

태서와 한미순 두 사람만 남자 아까까지만 해도 마음에 들었던 카페의 분위기가 한순간 달라졌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이럴 수 있구나 싶은 생각을 하며 태서는 가만히 기다렸다. 한미순이 어떤 말이든 할 때까지.

“인혁이와 이어 주려던 너를 다른 사람도 아닌 세헌이 그 아이에게 빼앗기다니.”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지 한미순이 중간중간 코웃음 쳤다.

“충분히 듣고 보신 거 같은데 아직도…… 믿기지 않으시나요?”

대체 얼마나 말해 드려야…. 태서의 아주 작은 목소리가 입 안에서 맴돌았다.

“인혁이와 함께 한 시간이 좀 길어? 네가 인혁이 좋아한다고 해서 발현하기만 기다렸더니 이게 뭐니. 아무리 인혁이한테 실망했대도 다른 알파를 만난 것도 모자라 어쩜 임신까지 할 수 있어.”

태서가 한숨을 삼켰다. 예전에 얼핏 지나가는 말로 일일드라마 속 대사가 많은 이유가 이전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정리해 주기 위해서라고 들었다. 뭐, 한 번쯤 되짚어 준다고 나쁠 것도 없고.

“축복입니다.”

태서는 제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계속 인혁이, 인혁이하며 말을 반복하시니 자신도 하나쯤은 들먹여야지.

“내 뒤통수를 때린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떠나 버린 배라고 생각하세요.”

태서가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원래 넌…….”

“인혁이와 인연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태서의 말을 냉정히 잘라 낸 한미순은 지금껏 흥분했던 감정을 내리눌렀다. 지금껏 부정적인 감정이 담겼던 얼굴이 마법처럼 바뀌었다.

“그동안 인혁이가 너를 많이 서운하게 했었지. 그때마다 나도 참 미안하게 생각했어.”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며 평소에 자신을 예뻐하던 한미순으로 돌아왔다. 태서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한미순이 제 두 손을 잡았다.

“인혁이가 너를 봐 주지 않은 시간이 얼마나 길었어. 그렇다고 그렇게 돌아서는 건 너무하지 않니?”

“음, 꼭 그래서는 아닌데…….”

강인혁을 좋아하지 않고 그에게 휘말리고 싶지 않아 거리를 벌렸다. 그러던 와중 운 좋게 강세헌이라는 멋진 사람을 만났을 뿐이다.

“네가 임신한 것도 다 이해해 줄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해해 주신다니요?”

“다시 인혁이한테 와. 차라리 잘 됐어. 인혁이 아이는 아니지만, 강씨 집안 핏줄이잖니. 뭐, 둘째는 인혁이 닮은 애로 낳으면 되고.”

한미순은 그간의 정으로 마지막 선심을 쓴다는 투로 굴었다. 정작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서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데.

“인혁이도 이제 너한테 마음을 줄 거니까 서로 엇갈렸던 만큼 더 단단한 사이가 되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운 태서가 고개를 숙였다. 제 앞에 다짜고짜 나타난 것도 모자라 이런 식의 회유라니.

“그런데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세요?”

“나중에 후회하기 전에 바로잡아 주는 거야. 너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그렇게 생각하시는구나.”

태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이야 세헌이가 더 대단해 보이는 것도 이해돼. 그런데 태서야, 인혁이가 계속 대학생으로 남을 줄 아니? 나중에 KH를 이끄는 회장은 누가 될지 모르는 거야.”

한미순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고개 숙인 태서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누가 될지 모른다? 인혁의 미래는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고 있는데. 원작에선 서다래와 결혼하고 KH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기는 하지만 회장은 글쎄.

‘하긴 이젠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

당장 제가 원작을 꽤 많이 흔들어 놨다. 강인혁이 서다래와의 사랑을 포기하고 회장직에 오르겠다고 눈이 돌 수도 있는 거다.

“인혁이만 한 알파가 어디 흔한 줄 아니? 내 아들이지만 잘생기고 키도 크고 우성 알파에다가 미래는 또 얼마나 창창해.”

“정말 대단하네요.”

태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설의 남주인공이니 잘난 것투성인 건 맞다. 태서의 반응에 한미순이 우쭐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입가를 파들거렸다. 지금 태서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건데 인혁이 자랑에 좋다고 웃으면 안 되지만 입가 근육이 그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저 그렇게 대단한 사람 필요 없어요.”

“……뭐?”

“저는요. 제 기분을 세심하게 살펴 주고 계속 걱정해 주고 제 배 불리는 것에만 신경 써 주는 그런 사람이 좋아요.”

태서가 고개를 들어 한미순과 눈을 마주쳤다.

“세헌이 형이 그래요. 절 걱정해 주고 위로해 주고 신경 써 주거든요. 자상하고 배려 넘쳐서 반한 거예요. 성격만 보고 좋아한 건데 얼굴도 잘생기고 집안도 좋고, 능력도 좋았을 뿐이에요.”

“너 지금 그게 다 무슨…….”

“잠시만요. 덜 말했어요. 세헌이 형은요. 키도 크고요. 옷맵시도 좋아요. 요리도 잘하는데 말도 참 잘해요.”

끝도 없이 칭찬을 늘어놓을수록 한미순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

“완벽한데 성격만 나쁘다는 드라마 주인공이랑은 다르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자랑에는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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