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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85화 (85/130)

85화

하루아침에 유명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태서는 부스스하게 뜬 머리카락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저와 강세헌이 함께 찍힌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 여기저기에 돌아다녔다. 온갖 곳에 다 제 얼굴이 올라가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허락 없이 돌아다니는 건데 적어도 얼굴은 가려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칫솔을 물고 있느라 뭉개지는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모자이크가 되어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았다. 강세헌과 나란히 반지 낀 손을 내밀고 있는 사진, 골똘히 바라보느라 미간에 주름진 사진, 강세헌을 향해 웃는 모습까지 저도 모르는 제 감정이 담긴 사진들이었다.

태서는 기사 속 사진과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번갈아 보며 비교했다. 아직 세수도 안 해서 그런지 사진 속 말끔한 윤태서는 없었다.

“실물이 더 낫네. 차라리 허락을 구하지. 몰래 찍었더니 이상하게 나왔잖아.”

태서는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를 내렸다. 어느 정도 기사를 확인하고 나니 슬슬 화장실에서 나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는 편하게 앉아서 하는 것도 좋겠지.

태서는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고 양치를 마저 했다. 세수까지 하고 거실로 나오자 핸드폰을 보던 강세헌이 고개를 들었다.

“이리 와.”

“뭐 보고 있었어요?”

“기사.”

“어떤 기산지는 내가 맞출 수 있을 거 같은데.”

태서가 강세헌의 옆에 앉으며 대놓고 그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제가 보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예물을 맞추러 갔었을 때 이상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거 때문이었어요.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이었거든요.”

강세헌이 태서의 뒷머리를 쓰다듬곤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마저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멀리서 찍어서 그런지 우리 태서 엄청 잘 나왔네.”

실물보다 못하다는 태서의 주관적 평가는 강세헌의 한마디로 정리되었다.

“이거 실물보다 못한데…….”

제가 봤을 땐 거울에 비친 얼굴이 더 잘생겼는데 말이다. 태서가 괜히 멋쩍은 헛기침을 하는 동안 강세헌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돌아앉았다. 서로를 마주 본 자세에서 강세헌은 태서의 얼굴을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장난기가 사라진 걸 본 태서도 웃음을 지우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강세헌은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과 실물이 똑같았다. 그래,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내 연인인 걸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

“갑자기 열애설이 나 버렸네.”

강세헌이 태서의 물에 젖어 뭉친 앞머리를 손으로 살살 풀어 줬다.

“누가 가장 먼저 기사를 냈는지 확인할 거야. 혹시 그들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조금 놀라긴 했지만 괜찮아요. 공개적으로 밝힐 생각이었잖아요. 오히려 대신 떠들어 줘서 고마울 뿐이죠.”

한미순과 강인혁으로부터 제 마음이 굳건하다는 걸 알리려 했었다. 그룹 사내 라인을 이용하려던 게 전국적으로 퍼지게 된 것 빼고는 괜찮았다.

“그런데 누가 가장 처음 기사를 냈는지는 궁금하긴 하네요. 대체 언제부터 사진을 찍고 있었던 건지 물어보고 싶어요.”

태서가 직접 핸드폰을 가져오더니 화면을 두드렸다.

“이거요.”

강세헌이 핸드폰 화면을 제 쪽으로 틀어 기사를 확인하자 태서가 그의 어깨에 기댔다.

“우리가 같이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걸 누가 찍은 걸까요? 아니, 애초 이 사진을 가지고 있었으면 왜 이제껏 조용했었을까요?”

아주 예전에 찍은 사진을 가지고도 이제껏 가만히 있었다?

태서가 알고 싶다는 듯 굴고 있으니 강세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곧 의심스러운 상대가 떠올랐는지 그가 핸드폰의 통화 목록으로 들어갔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 강세헌이 태서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마저 빗어 주며 입을 뗐다.

“다시 본사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비서에게 도로 돌아오라 말한 강세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서가 그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금방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지금의 상황을 알아보고자 하는 건 태서도 동감이었다. 손을 살랑거리며 어서 나가도 좋다고 하니 강세헌이 의자에 걸쳐 둔 외투를 들었다. 그리고 나가기 직전 다시 태서를 돌아보았다.

“기분은 괜찮아?”

강세헌의 물음에 태서는 입을 다물었다. 제 기분이 어떠냐고? 평생 연예인과 정치인의 기사만 볼 줄 알았는데 제 기사가 뜨니 놀랍고 신기했다. 사진 속 제 얼굴이 어떤지 쓸데없는 생각을 할 정도의 여유도 있으니 우울한 것 같지도 않다.

“홀가분해요.”

“그래, 그럼 다녀올게.”

강세헌이 손을 흔들며 나가자 현관문이 닫히는 묵직한 소리가 남았다. 태서는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천장을 바라보다가 우웅, 울려 대는 제 핸드폰을 들었다.

누군지 확인한 태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할아버지. 전화하실 줄 알았어요.”

[기사 보고 놀라진 않았느냐?]

“방금도 세헌이 형이 계속 괜찮은지 확인하고 나갔는데 이번엔 할아버지네요.”

조손이 똑같이 걱정하면 어쩌라는 건지. 괜히 가슴이 뭉클해지고 감동받게 되지 않나. 태서는 무릎을 끌어안으며 누가 보기라도 할까 제 발긋한 볼을 숨겼다.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왜 이제야 기사가 났나 싶어요. 세헌이 형이 워낙 유명해야죠.”

연예인만큼이나 유명한 사람이었다. 알파 중에서도 손꼽히는 사람이니 연예란부터 경제란과 사회란까지 안 나오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과 사귀면서 제 존재를 꽁꽁 감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산부인과는 조금 걱정이긴 했지만…….’

태서가 산부인과에 간다고 했을 때 강세헌이 같이 따라오는 게 걸렸는데 역시나 사진이 찍혔다. 태서는 강세헌이 손으로 빗어 주고 간 앞머리를 매만졌다.

“그런데 저는 왜 할아버지가 미리 알고 계셨을 거 같단 생각이 들까요?”

태서가 말하자 핸드폰 너머에선 강학중 회장의 웃음소리만 들렸다.

“혹시 기사 나간 거 저희 부모님도 알고 있어요?”

[내가 일러뒀다.]

적어도 부모님이 놀라시진 않았겠네, 싶은 생각 말고 다른 건 떠오르지 않았다.

[이 기회에 아예 인터뷰를 하는 게 어떠냐. 그럼 네 학교에 퍼진 소문도 가라앉을 거다.]

잘됐다는 듯 다음을 이야기하는 강학중 회장의 말에 듣고만 있던 태서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고 보니 기사가 뜬 시기가 교묘했다. 휴학 서류를 내면서 학교에 도는 자신과 강세헌의 소문을 듣고 강학중 회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제 고민을 말하고 난 뒤 보란 듯이 기사가 올라왔다.

“……할아버지께서 미리 알고 계신 게 아니라 직접 움직이신 거예요?”

[내가 아니면 누가 이리하겠냐.]

태서의 입이 떡 벌어졌다.

“대학교에서 난 소문이 걱정된다고 했더니 전국적으로 판을 키워 주셨네요.”

[이 기회에 누구도 세헌이를 탐내지 못하게 도장 찍어라.]

“감사합니다.”

태서는 핸드폰을 귀에 댄 그대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래, 이 할아버지가 준 사탕이 어떠냐.]

“아주…… 달고 좋네요.”

태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달렸다.

***

강세헌이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인터뷰 요청이 왔다는 것과 해도 되겠냐는 내용의 메시지가 연이어 올라왔다. 인터뷰라니, 강세헌의 시선은 계속 태서가 보낸 메시지에 머물렀다.

“어떤 인터뷰가 나올지 궁금하지 않으냐?”

“궁금하네요.”

그리고 이 일을 벌인 강학중 회장의 속도 궁금했다. 본사에 들어와서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한 강세헌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렸다.

“그러니까 저와 태서가 함께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을 차곡차곡 모아 오셨단 겁니까?”

“그저 받아 둔 것뿐이지. 알아서 내미는데 거절할 이유가 뭐가 있나.”

강학중 회장은 제가 벌인 일을 능청스럽게 인정했다. 지금껏 제 손주에 관해 흘러들어 오는 소문과 사진을 잘 모아 두었다가 적당한 시기에 언론사에 넘겨주었다.

“네게 아이가 생겼냐고 물어보면서도 기다려 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의리가 좋냐. 그게 다 내가 착하게 사업해서 그런 거다.”

“적당한 순간에 터트리려고 준비한 거겠죠.”

그리고 그 시기를 제 할아버지가 보고 있다가 터트려 준 거고.

“아무렴 어떠냐. 이제 이것을 태서가 어떻게 요리할지 봐야지.”

그래서 미리 들어왔던 인터뷰 요청을 태서에게 넘겼다. KH그룹에 호의적인 기사만을 실어 주는 언론사이니 공격적인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다. 넌지시 제가 예뻐하는 아이라는 것까지 일러뒀으니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괜히 가서 훼방 놓지 말고 여기 있어라.”

말 한마디로 강세헌의 어깨를 누른 강학중 회장이 찻잔을 들었다. 손주 놈이 요즘 차를 마신다기에 같이 마셔 보았는데 구수한 향이 나쁘지 않았다. 이게 임산부에게 좋은 차라는 거지? 보리차 같기도 한 차를 마시던 강학중 회장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보니 네가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같이 마셔 줄 생각은 한 적이 없었거든.”

강학중 회장은 부인이 아들 둘을 임신했을 때 이렇게 해 주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같이 나눌 수 있는 추억 하나를 놓친 것만 같아 씁쓸해하기도 잠시 제 손주를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옆에서 잘 챙겨 줘라.”

“그러고 있습니다.”

“불안하지 않게 해 주고.”

“충분히 그러고 있습니다.”

“네 혼자만의 생각인 건 아니고?”

강세헌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강학중 회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아주 작은 것도 놓치지 마라. 너보다 오래 산 할아비가 건네는 조언이다.”

그 작은 게 뭔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강학중 회장은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아둔한 손주가 알아서 알아채길 바라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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