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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82화 (82/130)

82화

“저번 일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왔어요.”

“내가 그런 인사 받을 말을 했던가?”

강세헌은 지난번 서다래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태서를 위험하게 만들었으니 다신 그러지 못하게 경고하려고 갔었는데 서다래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강세헌의 태도에 서다래의 눈동자가 당황한 듯 흔들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말이 어떤 이에게는 아주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더니 그게 제 이야기였네요.”

서다래가 알겠다는 듯 중얼거리는 동안 강세헌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훑고 있었다. 딱히 거짓말하는 거 같지 않은데 대체 무슨 말에서 위로를 얻었다고 저러는 걸까.

“기억하지 못한대도 괜찮아요. 제가…… 기억하니까요.”

서다래가 실망한 기색을 지우고 웃었다.

“할 말 끝났으면 가려고 하는데…….”

강세헌은 아까부터 울려 대는 핸드폰 때문에 서다래한테 집중할 수 없었다. 제가 오질 않아 비서가 전화한 거 같은데 핸드폰을 꺼내야 할지 아니면 서다래를 먼저 보낼지 고민이 들었다.

“바쁘신데 불러서 죄송해요. 오래 붙잡지는 않을게요.”

“말해 봐.”

서다래의 말에 핸드폰은 잠시 뒤로 미뤄 두기로 결정했다. 강세헌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의 진동을 껐다. 강세헌이 말을 들을 준비가 됐다는 듯 굴자 서다래가 제 두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만지작거렸다.

“갑작스러운 말인 거 아는데 바쁜 분을 오래 붙잡으면 안 되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저 그동안 되게 열심히 살았어요. 그리고 그런 저를 칭찬해 주는 알파가 없진 않았어요.”

서다래가 제 손을 꼭 누르며 그동안 답답했던 제 마음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원래 혼자서도 잘 버텼던 자신이었지만 강인혁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자 누군가의 위로가 받고 싶었다. 그게 상대에게는 동정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지금 자신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그 알파들은 제 얼굴이나 페로몬을 마음에 들어 했어요. 그들의 칭찬이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버거웠어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제게 그 알파를 꾀어냈다며 엄한 사람의 미움까지 받았어요.”

서다래의 표정에 스쳐 가는 누군가를 향한 원망. 그것은 찰나에 불과할 정도로 짧게 스쳐 갔지만, 줄곧 서다래를 바라보던 강세헌의 눈에 걸려들었다. 감정을 정리해서 전부 한숨으로 내보낸 서다래가 한결 후련한 얼굴로 강세헌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전무님은 전혀 그러지 않았어요. 그게 너무 고마워서 인사하고 싶었어요.”

“그런 거라면 인사받을 이유가 없는 거 같은데.”

강세헌은 어쩌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된 건지 생각하면서도 일단 말을 꺼냈다.

“네 외모에 끌리지 않았고 네 페로몬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야. 그런데 나도 다른 알파와 다르지 않아. 마음에 드는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 칭찬하고 또 칭찬하지.”

태서에게 어떤 칭찬을 많이 했더라. 잘 먹는다고 했던 거랑 잘 잔다고 했던 거, 또 혼자서도 잘 논다고도 했었나?

“그 상대가 그저 잘 먹어 주기만 해도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서 칭찬하게 돼.”

강세헌의 머릿속에는 이미 포동포동 살찐 태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귀여워서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네 외모든 페로몬이든 좋은 부분이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 그걸 네가 좋고 싫고는 네 마음이지만, 나도 그 알파들과 다를 게 없다고.”

“아…….”

강세헌은 누구보다도 잘나서 자신은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줄 알았다. 서다래는 예상을 벗어난 강세헌의 대답에 머릿속이 희게 비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어버렸다.

“알파 이전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대수롭게 생각할 필요 없어. 할 말 다 했어?”

강세헌의 말을 듣던 서다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아무 감정 없이 말했을 뿐인데 그걸 들은 제 얼굴은 터질 듯 열이 올랐다.

마음이 힘들어서 그를 찾아왔다. 조금이라도 치유받았으면 했는데 그 이상을 얻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제 마음에 불을 지핀 꼴이 되었다.

‘이 알파의 오메가가 되고 싶어.’

무심히 흘리는 말 한마디로도 자신을 위로해 주는 강세헌이 탐났다.

‘윤태서가 이런 기분이었나?’

강인혁이 제게 관심을 보일 때 윤태서가 자신을 괴롭혔던 것도 가지지 못한 결핍에서 온 거였을까. 윤태서를 향한 질투가 슬금슬금 흘러나와 제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는 강세헌에게 어떤 말을 할지 몰라 돌아서려던 서다래의 눈에 누군가 걸려들었다.

‘윤……태서?’

서다래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왔다. 윤태서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할 때가 아니었다. 이곳은 강세헌의 회사니까 오히려 제가 있는 게 더 이상한 거지.

어쨌든 윤태서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고 다가오는 중이었다.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다면 강세헌을 제 알파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저…… 한 번만 페로몬을 맡아 봐도 될까요?”

“아니.”

자신의 부탁을 단칼에 잘라 오는 거절에 서다래가 당황해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려 댔다.

“내 페로몬 비싸. 누구는 향수인 줄 알고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는데 남들 맡으라고 뿜어낼 게 어디 있다고. 돈 주고 사겠다고도 하지 마.”

강세헌은 심드렁히 말했지만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밀어 내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거절당한 서다래는 외려 웃음이 나올 거 같았다. 그의 거절이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럼 남은 향을 제가 찾아 맡아 볼게요.”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강세헌은 내키지 않다는 듯 말했다.

“가만히 있어만 주세요.”

강세헌의 짙게 뻗은 눈썹이 움직이는 것으로 대답을 들은 서다래가 그에게 두 손을 뻗었다. 목 언저리 맴돌 잔향을 맡기 위한 거였다. 키가 큰 그가 고개를 숙여 주지 않으니 제가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실은 페로몬은 핑계였다. 그가 저에게 다정하게 구는 듯한 모습을 윤태서가 보길 바라는 것뿐이니까.

그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나올 거 같아 서다래는 아랫입술을 깨물어 참아 냈다. 그리고 막 그의 몸에 손을 대려고 하는 순간,

“안 돼.”

서다래가 멈칫한 그 순간 강세헌이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그것만으로도 더 키가 커진 것 같아 서다래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의미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어떤 의미든 안 돼.”

강세헌이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적나라한 거절이 담겨 있어 서다래는 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얼마 전에 전무님에 관한 영상을 봤어요. 일할 때 융통성이 있는 분이라는 칭찬이 많았는데 이렇게 고지식하실 줄은 몰랐네요.”

“원래 사랑엔 융통성이 없는 거야. 태서 아닌 다른 사람이 만지는 건 안 되겠는데.”

이렇게 단단히 철벽을 치다니. 서다래가 어정쩡하게 팔을 뻗은 그대로 멈춰 버렸다. 윤태서의 앞에서 다정한 모습을 연출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젠 어떻게 물러나야 될까 싶을 때였다.

“안 돼.”

난데없이 끼어든 목소리에 서다래는 화들짝 놀랐고 강세헌은 미소부터 나왔다. 태서가 잔뜩 흥분해서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걸 보곤 서다래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정작 강세헌의 목에 손을 두르지 못했는데 오해 살 만하게 느껴지긴 했나 보다.

태서가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오더니 강세헌과 서다래 사이에 끼어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태서를 바라보는 강세헌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꽉꽉 들어찼다. 지난번 정해진과 선을 볼 때도 갑작스레 나타나서 능청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했는데 오늘은 어떨지 궁금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태서는 가만히 있었다. 언제 흥분했냐는 듯 숨을 가라앉히곤 어떠한 말도 없었다. 평소의 그 팔팔하던 태서가 조용하기만 하니 강세헌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졌다.

“왜 말이 없어. 혹시 몸이 안 좋은 거야?”

강세헌은 태서를 마주보기 위해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태서의 심각한 표정에 강세헌의 얼굴 또한 굳어졌다.

한편 막상 끼어든 태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일단 서다래와 떨어뜨려 놓긴 했는데 그다음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냥 성격대로 내지를까 싶은데 이곳은 강세헌이 일하는 곳이고 능청스럽게 굴자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필 서다래랑.’

과거의 인연은 딱 거기에서 끝났으면 했다. 강인혁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서다래는 강세헌을 향해 손을 뻗고. 왜 이렇게 얽혀 버렸는지 알 수 없었고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끝도 없이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제 몸이 허공으로 쑥 들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태서는 강세헌이 자신을 안아 들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본능적으로 발버둥을 쳐 댔다.

“병원부터 가자.”

“네? 아니 병원을 왜…….”

“조금이라도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야지.”

강세헌이 돌아서면서 태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놀란 서다래와 눈이 마주쳤다. 둘 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스케줄 전부 취소해요.”

그사이 강세헌은 자신을 찾으러 내려온 비서에게 일정 조율을 지시한 후 태서를 데리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자 그제까지 멍하니 있던 태서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나 안 아파요.”

“알고 있어.”

“그런데 왜 병원에 가자고…….”

“그래야 할 거 같아서.”

강세헌이 태서의 얼굴을 쓸었다. 놀란 표정이긴 했지만 땀도 나지 않았고 피부가 차지도 않았다. 손으로 직접 만져 보고 나서야 태서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강세헌이 물었다.

“이제 말해 봐. 왜 그런 거야?”

“……서다래를 보고 웃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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