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옆에 붙은 박한수의 시선이 태서의 배를 향한 걸 알고 그의 턱을 들었다.
“아직 배 안 나왔다.”
“언제 나오지.”
“나온대도 잘 티가 안 날거야. 오메가는 배가 많이 안 나오거든.”
그러니 그렇게 보지 말라고 태서가 박한수의 머리를 톡 쳤다.
“그래, 그럼 가서 밥 먹을까?”
“밥?”
복도를 걸어가던 태서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응. 배고프지 않아?”
“너, 나랑 밥 먹으려고 만났어?”
박한수가 뭐 먹을까, 물어보자 태서가 걸음을 멈춘 채 그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보자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엉뚱한 소리만 하냐.”
행정실에 들러 휴학 신청을 하고 교수님까지 만나고 나올 때까지도 옆에 딱 달라붙은 박한수는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오늘 날씨가 좋지 않냐, 배고프지 않냐 등등.
그게 더 신경 쓰여서 태서가 박한수의 앞에 서서 팔짱을 꼈다. 말해 주기 전까진 비켜 주지 않을 심산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박한수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일단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래. 그러니까 밖으로 나가서 하면 안 되냐?”
“여기는 왜 안 되는데?”
태서가 박한수를 따라 주변을 둘러보니 계절 학기라도 듣는 것인지 낯이 익은 이들 몇몇이 지나갔다. 다만 지나가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사람은 저마다 고개를 돌려 대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으니까 그렇지.”
“예전엔 안 그랬냐. 나 원래 인기 많았어.”
“그건…… 그렇지.”
평소라면 무슨 인기냐고 태서를 몰아세울 박한수가 이번엔 말을 아꼈다.
“정말 저 시선들을 내가 모를까 봐 그러는 거야?”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태서가 뭐 그리 어려운 것이냐는 듯 말을 덧붙였다.
“윤태서 쟤 또 강인혁을 좋아한다는 핑계로 서다래를 괴롭히는 거 아냐? 거기다 요즘엔 강세헌을 만나던데 서다래를 괴롭힐 땐 언제고. 윤태서 쟤는 성질머리가 별론데 참 눈도 높아, 뭐 그런 소리겠지.”
박한수의 표정이 뭐라 형용할 수 없다는 듯 변해 가고 있지만 태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도 다 한때지. 나 휴학하고 나면 다 가라앉을 거야.”
애초에 소문에 크게 관심도 없었다. 강세헌이 얽힌 소문은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넘어갔다. 그런데 지금껏 태서의 말을 듣기만 하던 박한수가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난 또 진짜 아는 줄 알았네.”
“음? 또 있어? 나 또 사고 쳤냐?”
“네가 친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한 말이 돌고 있긴 해.”
태서가 뭐냐는 듯 바라보니 박한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제 주머니를 매만졌다. 곧 핸드폰을 꺼내서 몇 번 화면을 두드리더니 태서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너무 가까이 들이민 탓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이거 하나 제대로 못 하나 싶은 마음에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태서가 박한수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제가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리를 조절했다.
“이거 뭐냐.”
박한수가 보여 준 건 단체 톡방이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톡을 올리고 있는지 하단에 뜬 알림창 속 말이 계속 바뀌어 갔다. 그것을 볼 여유도 없이 예전에 나눈 대화를 보고 있으니 자신을 주제로 한 이상한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어디서 이런 개소문을 주워 왔는지.”
한수의 중얼거림을 뒤로 하고 화면을 손으로 톡방을 밀어 내리며 가장 최근 대화까지 읽었다. 시작은 서다래를 만나고 왔다는 누군가였다. 윤태서가 강세헌을 만나는 게 서다래 때문이라는 말에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말을 붙여 댔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조합해 보더니 결국 윤태서가 강인혁이 아닌 강세헌에게 관심을 돌렸고 그로 인해 다시 서다래를 괴롭힌다는 아주 그럴싸한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그들은 강인혁에서 강세헌으로 대상을 바꾼 자신을 욕하는 것도 모자라 강세헌을 윤태서에게 놀아나는 아주 모자란 인간 취급하고 있었다.
태서가 흥분해서 어깨를 들썩였다.
“야야, 진정해.”
“놔. 당장 이것들을 가만 안 두겠어.”
빙의 전의 제가 강인혁을 좋아해서 서다래를 괴롭히는 건 맞지만 강세헌을 좋아해서 서다래를 괴롭히진 않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강세헌은 알면서 놔둔 거라나 뭐라나.
제 소문이 도는 건 괜찮았다. 어차피 윤태서란 인물이 원래 악역이니까 상관없었는데 강세헌은 아니었다.
“다 가만 안 두겠어. 특히 맨 처음 말 옮긴 이 새끼부터.”
“잠깐만 태서야. 흥분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봐. 그러다…….”
박한수가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추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축복이한테 안 좋아. 좀 진정해 봐.”
축복이라는 한마디에 태서의 반응이 즉각 가라앉았다. 일단 배를 만지고 있자니 특별히 이상한 느낌은 없었다. 박한수의 말대로 진정하려고 애쓴 태서는 마지막 한숨을 뱉어 내면서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헝클었다.
“어차피 소문이잖아. 알다시피 그거 다 시간 지나면 가라앉아.”
“그게 문제가 아니라 형한테…….”
“세헌이 형님?”
“그래, 형한테 안 좋은 소문이 붙는 거잖아. 세헌이 형이 얼마나 멋지고 잘난 인간인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으로 까내리는 거야. 이건 제대로 다잡아야겠어.”
윤태서가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동안 박한수가 말했다.
“그럼 세헌이 형님한테 부탁해 봐.”
“안 돼. 형 바빠.”
“그럼 톡방에 말하자. 이거 다 헛소문이라고.”
“그런다고 믿겠냐?”
“그거야…….”
박한수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실은 그도 윤태서가 나서 봐야 이 소문을 얼마나 바로잡을 수 있을까 싶긴 했다. 그동안 윤태서가 서다래를 괴롭혔던 건 사실이니까 아니라고 해 봐야 소용없었다. 차라리 강세헌이 직접 나서서 말한다면 모를까.
“그러지 말고 그냥 형님한테 말해 보는 게 어때?”
“형 바쁘다고 말했잖아”
“그러지 말고 들어 봐.”
박한수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우리야 강인혁을 아니까 걔가 잘나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세헌이 형님은 말로만 들었을 뿐이잖아. 그러니까 형님이 직접 나서면 얘네들도 형님이 모자라서 그렇다느니 하는 말은 입에도 올리지 못할걸?”
박한수의 말대로였다. 원래도 윤태서가 욕먹을 때 강인혁을 함께 욕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강인혁이 잘났으니까, 그래서 윤태서가 그를 좋아하는데 받아 주지 않으니 질투심에 서다래를 괴롭히는 걸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 와중에 강세헌과 제 사이에 서다래는 또 왜 낀 것인지. 태서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혀를 찼다.
“서다래가 여기서 왜 나와. 걔랑 세헌이 형이 무슨 사이라고.”
“뭐 나처럼 지나가다 만났으려나?”
박한수가 대충 받아쳤다.
“아무튼 세헌이 형은 안 돼. 애들이 흘리는 헛소문에 바쁜 형을 부를 순 없어.”
“그럼 그냥 모른 척 있자.”
“그것도 싫어.”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으면 어쩌자고.”
박한수가 답답하다며 제 가슴을 두드려 대자 마침 지나가던 동기가 그런 그를 보며 이상한 놈 취급했다. 그에게 그냥 가던 길 가라며 박한수가 손을 휘저어 댔다.
“이걸 해결해 줄 사람이 있지.”
태서가 당당히 핸드폰을 들어 하나의 번호를 찾았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있으니 몇 번 신호음이 울린 후 상대방이 받았다. 태서가 환하게 웃으며 목소리를 키웠다. 심지어 목소리 톤도 올라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갑자기 무슨 할아버지…….”
박한수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태서가 핸드폰을 가리키며 입을 벙긋거렸다.
“누구? 강…… 강학…… 크억. 강학중 회장님?”
아니, 그 회장님을 지금 학교에 도는 소문 가라앉히는데 끌어들인다고? 애들이 흘리는 헛소문일 뿐이라며!
“저 먹고 싶은 게 생각났어요. 그런데 할아버지랑 같이 만나서 먹고 싶은데 시간 되세요?”
“야야, 할아버님, 아니 회장님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박한수가 어떻게든 말려 보려고 중얼거리는데 태서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 바로요? 당연히 되죠. 아, 차는 안 보내 주셔도 돼요. 그것보단 저 할아버지 뵙고 부탁할 게 있어요.”
전화로 먼저 운을 띄운 태서가 아까보다 더 크게 웃었다.
“가지고 싶은 건물 같은 건 없어요. 나머지는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야 임마, 주시면 받아야지.”
말도 안 되는 스케일에 박한수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며 은근슬쩍 태서의 옷자락을 잡았다.
건물주 친구라도 되어 보자.
***
형은 바쁘니 곧장 할아버지에게 간다고 하자 강학중 회장은 심부름을 시켰다. 강세헌에게 서류를 받아 회장실로 올라오라고 말이다.
“이거 참, 바쁜 형을 찾아가도 될까 싶은데 할아버지가 시키시니 어쩔 수 없지.”
태서는 난감하다는 양 중얼거렸지만, 곧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거야.”
자긴 아무 힘이 없다고 말하는 것치고 태서의 표정은 산뜻하기만 했다. 아침에도 봤지만, 회사에서 보면 더 반가울 거 같다. 혹시나 미리 연락하면 신경 쓰일까 봐 말도 안 했다.
KH 본사의 크기에 놀란 것도 잠시 전무실까지 막힘없이 올라온 태서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부터는 속도를 줄였다. 운이 좋으면 강세헌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태서는 천천히 걸어갔다. 전무실이라 그런지 긴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다른 사람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다 몇 번 본 비서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윤태서 군이 온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만…….”
“회장님 지시로 세헌이 형을 만나러 왔는데 안에 있나요?”
“전무님께선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아, 어디 가셨어요?”
만약 미팅 등으로 나갔다면 비서도 함께 갔을 테니 그건 아닐 거다.
“잠깐 자리를 비우셨으니 곧 돌아올 겁니다.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겠습니까?”
“아니요. 다시 올게요.”
제가 안에 들어가 있으면 비서가 먼저 말할 테니 강세헌이 놀라지도 않을 거다. 잠깐 자리를 비운 거라니 태서는 1층의 카페에 있다가 다시 올라와 강세헌을 깜짝 놀라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