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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79화 (79/130)

79화

강세헌의 그윽한 눈빛에 태서는 괜히 제 눈을 비볐다. 강세헌의 시선을 받은 부위가 간지러웠다. 더불어 점점 더워지는 방 공기와 진하게 퍼지기 시작하는 페로몬까지 태서의 몸을 한껏 데우고 있었다.

손끝에서 튄 작은 전류가 점점 위로 올라와 곧 온몸을 지배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대로 못 이기는 척 눈을 감을까. 그런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태서가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제 방에 가서 더 생각해 볼게요.”

태서가 어색한 시선으로 헛기침하며 강세헌을 지나치려 했다.

“내 품으로 들어온 윤태서를 그냥 보내라고?”

강세헌의 진득한 미소와 함께 태서는 보이지 않은 그물에 걸린 듯 멈춰 섰다. 움직여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왜 그런가 싶어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돌아봤지만 이상할 게 없었다.

“내 페로몬에 갇혀서 움직이지 못하는 건데 그렇게 본다고 알까.”

“그런 게 있어요? 보이지 않는 족쇄라도 있나 봐요?”

“족쇄라는 건 널 억지로 잡아두는 거지. 움직일 수 없다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네 기분을 들여다봐. 어때?”

“내 기분은…….”

무거운 이불을 덮은 듯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내 페로몬에 네 페로몬이 반응하는 거야. 나한테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거지.”

“아, 그렇구나.”

분명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는데 왠지 강세헌에게 닿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손끝이 움찔거렸다. 태서가 강세헌을 향해 손을 들자 거짓말처럼 몸이 움직였다.

그의 얼굴에 손을 얹자 강세헌이 눈을 감으며 태서의 손을 잡았다. 손이 주는 온기를 느끼던 강세헌이 입술을 달싹였다.

“내 페로몬이 좋은 거지?”

“그건 부정할 수 없네요.”

강세헌의 얼굴을 만지고 그의 페로몬을 들이켜고 있으니 다시 몸이 달아올랐다.

“있잖아요. 제가 의사에게 물어본 게 있는데요.”

“아아, 그 말은 그만.”

“네?”

말이 중간에 끊긴 태서가 고개를 드는 순간 강세헌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태서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고 강세헌이 위로 올라왔다. 두 팔은 물론 다리까지 한번에 강세헌에게 잡혔다.

“이런 자세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요.”

태서가 일어나려고 힘을 줬지 강세헌에게 눌린 덕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태서가 몇 번 더 일어나려고 힘을 주다 잘 되지 않자 강세헌을 올려다보았다.

“연인이 한집에 사는데 다른 방을 쓰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어. 게다가 결혼까지 할 사이라면 더더욱.”

평소라면 태서가 뭐라 하든 다 귀엽다는 듯 받아 주던 이였지만 이번만큼은 가만 놔주지 않았다.

“오늘부터 여기서 자겠다고 말해. 그러면 놔줄게.”

“말 안 하면요?”

“그럼 나도 놔주지 않겠지.”

알아서 선택하라는 강세헌의 미소에 태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기도 작은 키나 몸집이 아니건만 강세헌을 밀어 내기엔 턱도 없었다.

“일단 이 손부터 놔주세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대답할 테니까 놔 달라고요.”

만만치 않은 태서의 반격에 강세헌이 흥미로운 눈빛을 보였다. 그가 태서에게서 상체를 세우는 순간 그의 뒤통수에 손이 닿았다. 태서가 강세헌을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입술을 맞댔다.

처음엔 그저 서로의 입술이 가볍게 맞닿은 정도였지만 곧 태서가 입술을 살짝 열어 강세헌의 페로몬을 빨아들이며 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기울이자 이제껏 가만히 있던 강세헌이 움직였다.

페로몬이 서로를 감싸는 진득한 키스를 나누자 몸의 온도가 점점 올라갔다.

입술과 입술이 교차로 겹치고 숨이 얽혀 왔다. 강세헌의 숨이 입천장을 간지럽히고 내려와 혀에 닿았을 때 태서에게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키스가 농염해질수록 호흡이 점점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태서가 강세헌의 어깨를 손으로 탁탁 때려 댔다.

결국 강세헌이 고개를 들어 왜 멈추려 하냐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태서가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의사한테 물어본 게 있다고 했잖아요.”

“축복이가 있어서 이 이상은 안 된다고 하려고? 나도 그렇게 널 무리하게 만들지 않을…….”

“해도 된다는데요.”

태서가 강세헌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래서 아까도 그거 말하려고 했는데.

“해도…… 된다고?”

“대신 아주 조심히요. 그래서 제 방에 둔 물건을 가져오려고 했는데.”

강세헌이 놔주질 않아서 결국 이렇게 실토해야만 했다. 태서가 강세헌의 어깨를 살살 어루만졌다.

“가져온 다음에 이어서 할까요?”

태서의 눈웃음에 강세헌이 졌다는 듯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

잠에서 깬 태서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한쪽 눈만 떠 방을 둘러보니 제가 있는 곳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 어제 본 강세헌의 방이었다. 강세헌의 침대에서 그와 함께 잠들었다는 걸 깨달은 태서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지난밤 강세헌과 함께하는 내내 이제 각방은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듣다 못한 태서가 제 입으로 강세헌의 입을 막아 버릴 정도였다. 알겠다고 했는데 강세헌은 그래도 확실하게 해 두겠다던데…….

“그러면 옆에 잘 붙어서 감시해야지 왜 없는 거야.”

강세헌의 방에서 눈을 떴는데 정작 옆에 그가 없는 게 아쉬워 태서가 불만을 내뱉었다. 몇 번 더 뒤척이기를 반복하던 태서는 잠이 온전히 깨자 그냥 일어났다. 잠시 방을 둘러본 태서가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나왔다.

“일어났네. 기분은 어때?”

프라이팬을 들고 재료를 섞던 강세헌이 돌아봤다. 그는 불을 끄고 태서의 앞으로 걸어왔는데 조리 도구는 여전히 들고 있는 채였다. 그것을 통해 오늘 아침이 뭘까 가늠해 보며 태서가 말했다.

“일어나자마자 보이던 제 물건들 때문에 심란했어요.”

눈을 떴을 때 보이던 제 물건이 얼마나 많던지. 노트북부터 시작해서 어제까지 보던 책과 갈아입으려고 꺼내 놓은 옷까지 다 예쁘게 놓여 있더라.

“대체 언제 다 옮겨 놨어요?”

“네가 자고 있을 때.”

강세헌이 태서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혹시 내 침대도 없앴어요?”

“응. 그거 내놨어.”

“아침부터 바쁘셨겠네.”

아예 제가 돌아갈 곳을 없애 버린 강세헌의 치밀함에 태서가 혀를 내둘렀다. 그러고 돌아서서 하품하고 있으니 강세헌이 태서의 붕 뜬 머리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잘 잔 거 같은데 웬 하품이야.”

“꿈을 꿔서요.”

“무슨 꿈?”

태서가 꿈을 떠올리는지 잠깐 제 머리를 비벼 댔다. 덕분에 그의 머리가 더욱 붕 뜨는 것도 모르고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꿈을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하던 태서가 툭 내뱉었다.

“잡아먹히는 꿈이요.”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말 그대로요. 커다란 구렁이의 입속에 빨려 들어갔어요.”

“이상한 꿈이네. 밥 먹게 가서 씻어.”

강세헌이 태서의 등을 살짝 밀었다.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가려던 태서가 반쯤 몸을 틀었다.

“저 오늘 휴학계 내러 학교 가요.”

“온라인으로 하면 되잖아.”

“한수가 보자고 해서요. 한수 보는 김에 다녀오게요.”

어제 낮에 박한수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그러고는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다짜고짜 만나자고 했다. 그게 괘씸해서 안 만난다고 하려다 못 이기는 척 약속을 잡았다.

“병문안 온 친구 말하는 거지?”

태서의 친구라고 하자 강세헌이 떠오르는 기억을 들먹였다. 그게 태서가 박한수의 약속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였다. 그래도 친구는 친구라고 병문안을 와 준 것 때문에 매정하게 밀어 낼 수 없던 것이다.

“자꾸 할 말이 있다고 만나자는데 무슨 말인지 들어 보려고요.”

쓸모없는 말로 보자고 했다면 응징하리라.

“형은 오늘 바쁘죠?”

“음…… 오늘만 아니고 당분간 바쁠 거야. 신제품이 나올 거거든.”

“아.”

휴학계를 내고 강세헌에게 연락하려고 했었는데 그러지 말아야겠다. 태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지 강세헌이 그를 불렀다. 그걸로도 모자라 방금까지 들고 있던 조리 도구를 내려놨다.

“친구 잘 만나고 저번에 병문안 와 줘서 고맙다고 커피 사 줘. 카드는 내가 줄게.”

강세헌이 한쪽에 두었던 제 지갑을 들었다. 그리고 카드를 내미니 태서가 그것을 바라보다 받았다. 태서의 지갑엔 이미 부모님에게 받은 카드가 두 장이나 있었다. 평소에 쓰던 카드와 축복이를 위해 쓰라고 주신 것.

그러나 태서는 강세헌의 카드를 받아 들고 그의 이름을 검지로 살살 쓸어 봤다. 계산할 때 이걸 내밀면 보나 마나 박한수가 바로 알아채겠지.

“형이 사 주는 거라고 말할게요.”

“마음대로.”

태서는 카드를 옆에 있는 선반에 잠시 내려 두고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까지 걸어가며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찌뿌둥해서 몇 번 좌우로 상체를 돌리다 자세를 바로 한 태서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강세헌이 제 머리를 보고 웃었던 게 이것 때문이구나. 뜬 머리를 눌러 대고 있자니 무언가가 불편했다. 태서가 손을 내리며 거울에 비친 제 잠옷을 보았다. 아깐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단추가 하나씩 밀려 잠겨 있었다.

거기다 목깃을 살짝 잡아당겨 보니 피부가 얼룩덜룩했다. 제 목을 이렇게 물고 빨았었나? 생각해 봤지만 간밤의 강세헌은 그러지 않은 거 같다. 그러면 이건 제가 잠든 새에 생겨났다는 말인데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구렁이에게 잡아먹히는 꿈이 다 이유가 있었다.

“각방 써야 하는 거 아니야?”

태서가 다 떠지지 않는 눈으로 강세헌이 있을 방향을 흘겨봤다. 변태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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