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달리는 차 안에서 태서는 앞을 바라보며 연신 제 목걸이를 매만졌다. 강세헌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를 매만지고 있으니 아까 나눈 키스가 떠올랐다. 저절로 얼굴이 달아올라 태서가 손부채질을 했다.
“에어컨 틀어 줄까? 더워?”
“아니,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그 자리에서 입을 맞춰요.”
“그러면 어디에서 했을 걸 그랬는데.”
“뭐…….”
뻔뻔한 태서조차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강세헌이 질문을 바꿨다.
“아니면 우연한 상황에서 나누는 키스는 어때?”
“우연하게요?”
빨간 불이 되어 차가 정차했을 때 강세헌이 길거리를 걸어가는 남녀를 가리켰다. 뒤를 돌아 마주 보며 걷는 두 남녀의 서로를 사랑하는 눈빛과 표정에 태서조차 미소가 지어졌다.
“저러다가 둘이 넘어지면서 입술이 맞닿을 수 있잖아.”
그러다 강세헌이 가장한 상황을 듣고는 코웃음 쳤다.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이빨 깨져요.”
이 사람이 임플란트 찾는 소리 하고 있네.
“혹시 말하는데 케이크 안에 반지 숨기지 마세요. 이빨 나가요. 초로 하트 만들지 마시고요. 그거 나중에 다 치우려면 골치 아파요. 장미꽃 다 떼서 뿌리지 마세요. 그거 빨아 들이다가 청소기 고장 나요.”
태서가 대표적인 프로포즈 방식을 손가락 집어 가며 하는 소리에 강세헌이 크게 웃었다. 강세헌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태서도 따라 웃다가 서서히 멈췄다. 방금까지 농담을 건네던 태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지웠다. 태서는 강세헌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흘리듯 말했다.
“저 인혁이 만나러 갔었어요.”
강세헌에게는 갈 데가 있다고만 했었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태서가 밖을 보던 시선을 돌렸다.
“인혁이랑 제 관계 안 물어보세요? 아주머니가 그렇게 난동, 아니 화를 내셨는데요.”
난동이라고 말했다가 그래도 강세헌에게는 작은 어머님이라는 생각이 들어 급히 말을 돌렸다. 한미순이 태서에게 너무한다는 듯 인혁과의 관계를 강조했으니 강세헌도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할 거 같았다.
“그냥 대학교 동기 아니고 단순한 친구 아니었어요. 제가 인혁이 오래 좋아했어요.”
태서는 괜히 목이 까끌한 느낌에 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아마 강세헌에게 지금 이 말을 하는 게 어렵고 내키지 않아 그런 듯했다.
“그래서 아주머니도 저 많이 좋아했어요.”
태서는 덤덤하게 제 과거를 풀어냈다. 그래야 아까 상견례에서 있었던 일을 강세헌에게 사과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아주머니가 그렇게 한 건 다 저 때문이에요. 미…….”
“태서야. 그만하자.”
이제껏 태서의 말을 듣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운전에만 집중하던 강세헌이 입을 열었다. 일부러 그런지 모르겠지만 제 사과가 중간에 끊겨 버리자 태서가 강세헌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높은 콧대가 도드라지는 옆얼굴은 강세헌의 표정이 전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얼굴로 제 말을 듣고 있는지 전부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그래서 태서가 그를 향해 상체를 숙이며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렸다. 운전에 집중하는 강세헌의 얼굴을 돌리는 대신 그의 얼굴에 손을 댔다.
매끈한 이마를 매만지다 손을 내려 입술을 만졌다. 운전에 방해가 될까 온 신경을 손에 쏟느라 정작 차가 멈춘 것도 몰랐다.
“화났어요?”
입술 끝도 내려가지 않았고 입매가 단단하게 다물리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 없어 태서가 물어보니 그게 신호라도 된 듯 강세헌의 입술이 벌어졌다. 아랫입술이 주름이 사라지도록 늘어진다 싶더니 웃음과 함께 흘러나오는 젖은 숨이 느껴졌다.
“혹시 어른이라서 과거의 일은 묻어 주겠다는 건가요?”
어른이니까, 그 정도는 너그럽게 이해해 준다는 건가. 태서는 아직 강세헌만큼 나이가 들어 보지 않아서 몰랐다. 그래서 물었다. 늘 어른스러웠으니까. 자신은 마냥 어린아이 같은데 강세헌은 늘 이해심이 많았으니까.
“내가 묻지 않은 건 그래서가 아니야.”
강세헌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
“어른도 질투해. 나이가 들어도 싫은 건 싫은 거야.”
“그럼 왜…….”
“네가 사과할 게 아니니까.”
강세헌이 제 입술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태서의 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
“그리고 모르는 것도 아니었어. 작은 어머니가 종종 이야기 꺼냈어서 알고 있었어. 그게 태서 너라는 건 관심을 가진 후에야 알았지만. 네가 인혁이를 만난 건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서겠지. 널 믿기에 가만히 있었던 거야.”
강세헌이 태서의 뒤통수에 손을 얹으며 제게 끌어당겼다. 태서를 품에 안은 강세헌이 그의 귀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뗐다.
“너는 나를 더 많이 사랑해야 할 거야. 내가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거든.”
그렇지만 오늘 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 탓하지 말자. 강세헌은 끝없이 속삭이며 태서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가만히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태서가 갑자기 든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형은 없어요?”
“없어. 알잖아.”
“누구한테 쉽게 마음 안 주는 거요? 알죠. 그래도 모태 솔로는 아닐 거 아니에요.”
강세헌은 입을 다문 채 태서를 꼭 끌어안았다. 태서가 강세헌에게서 멀어지려고 바르작거리는데도 팔에 힘을 주며 놔주지 않았다. 아니, 없었냐고요. 태서가 억눌린 목소리를 쥐어짜 물어보는데도 못 들은 척 강세헌은 묵묵히 안아 주기만 했다.
“평소엔 그렇게 말 많던 아저씨가 갑자기 인어공주가 됐네.”
마녀한테 목소리를 갖다 판 거야 뭐야.
심각했던 대화는 10분도 되지 않아 끝났다.
***
벤치에 앉아 있는 서다래는 강인혁이 다가온 걸 알면서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때는 선선한 저녁때마다 둘이 함께 산책을 하던 장소였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효과가 좋지 못했다. 서다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윤태서 임신했대.”
“…….”
“알고 있었어?”
“그래서 뭐?”
“뭐?”
강인혁의 무심한 대답에 서다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옆모습에 불과하지만 조금도 놀라지 않은 얼굴을 서다래가 기막힌 듯 바라보다 지그시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거기다 잔뜩 동요하기까지 했으면서 제 앞에선 아닌 척하고 있었다. 다른 이는 모르지만 서다래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임신했다는데도 태서에게 흔들리는 인혁의 마음을 잡고 싶었다. 서다래가 벤치에서 일어나 강인혁과 마주 섰다. 언젠가부터 그와 만나면 주변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페로몬과 어색한 분위기에 침도 제대로 삼키기 힘들었다.
“윤태서는 이제 널 좋아하지 않아. 인혁아.”
“그래서 태서에게 그런 짓을 한 거야? 임신해서 큰일 날 뻔했던 거 알아?”
“뭐?”
서다래가 놀란 마음을 수습하기 전에 강인혁이 말했다.
“저번에 겪은 히트. 태서한테 무슨 짓 벌이다가 너까지 휘말린 거잖아. 우연 아니고 네가 만들어낸 결과였지.”
강인혁의 질책이 담긴 눈빛, 애초 서다래가 벌인 일로 태서에게 달려갔으니 우연이라는 걸 믿지 않고 있었다.
“알고…… 있었어?”
강인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다래를 향한 실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날 윤태서를 보고도 강세헌에게 빼앗긴 게 지금 생각해도 분하고 화가 났다. 제가 먼저 윤태서를 데리고 나왔어야 했는데.
태서가 잘못될 뻔했다는 걸 떠올리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했다. 강인혁이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다래를 타박했다.
“대체 태서한테 왜 그런 거야.”
“적어도 너한테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서다래가 제 마음을 알아 달라는 듯 말해 봤지만 강인혁은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서다래는 주먹을 쥐고 입 안의 살을 아프게 깨물었다. 아릿한 고통 덕분에 눈물을 참을 수 있었다. 서다래는 목이 메는 걸 억지로 참아 가며 목소리를 냈다.
“나 지금까지 윤태서한테 괴롭힘 당해 오면서도 다 참아 왔어.”
그걸 옆에서 지켜봤으니 누구보다 잘 아는 게 강인혁이었다. 아까 만난 강세헌조차 제 말만 듣고도 안쓰러워해 줬는데 강인혁이라면 더욱 그런 마음이 드는 게 당연했다. 이전에도 직접 윤태서에게서 서다래를 지켜 주기도 했고.
“그러니까 뭐라고만 하지 말고 날 좀 이해해 주면 안 돼?”
서다래는 자신을 봐 달라는 듯 제 가슴을 쳐 대며 강인혁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의 모두가 자신을 외면한대도 유일하게 제 편이 되어 줄 거라 여기는 그를 향해.
“지겹다, 그만하자.”
돌아오는 건 차가운 배신이었다.
“너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야. 뭐가 지겹고 뭘 그만하자는 건데?”
서다래가 충격이 가시지 못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여태껏 조용히 몰아세웠던 강인혁이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솔직히 지금껏 네가 가만히 있는 걸 보고 답답해했었어. 태서한테 말로만 하지 말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굴길 원했어. 그런데 그때는 안 하다가 지금 이러는 이유가 뭐야. 그저 네가 걜 싫어해서 벌인 일이잖아.”
서다래의 입술이 하염없이 벌어졌다. 아까 겨우 살을 깨물며 버텨 왔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눈물에 강인혁의 고개를 돌렸다. 그것도 모자라 머리가 아픈지 제 이마를 짚던 강인혁이 서다래를 지나쳤다.
“미안해, 우리 잠시 생각할 시간 갖자.”
강인혁은 서다래의 대답도 듣기 전에 돌아섰다. 줄곧 서다래를 위로하고자 하는 태도는 단 한 번도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강인혁이 멀어지는데도 서다래는 그를 잡지 않았다. 잡아 봐야 돌아오는 건 가시가 돋친 말들뿐이라.
서다래가 고개를 숙였다. 볼을 타고 흘러내렸던 눈물이 곧장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 싫어. 이젠 다 싫어졌어.”
자신을 안아 주지 않는 강인혁도 자신을 괴롭혀 놓고 지금은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고 있을 윤태서도 싫었다. 그 둘의 사이에 끼어 버린 탓에 제 심장에 잔뜩 상처가 생겨났다.
“흐윽. 흑.”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에 휩싸인 서다래는 목 놓아 울었다. 어린아이처럼 울어도 누구 하나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기에 끝이 없는 것처럼 울었다.
그때 문득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변명을 내뱉을 땐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제 억울한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자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해 준 말이었다.
-고생했다.
별로 길지도 않은 위로였다. 그러나 그 말을 떠올린 순간 거짓말처럼 눈물이 잦아들고 아득한 절망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