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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69화 (69/130)

69화

“종종 호텔로 찾아갈게요.”

태서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눈은 강세헌을 봤다. 식사를 마치고 루이보스 차를 식혀서 가져온 그는 태서와 제 앞에 하나씩 내려 두고 핸드폰을 꺼냈다. 타이밍에 맞춰 울리는 진동에 누구에게 온 연락인지 확인한 강세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서는 전화하고 오겠다는 신호를 보낸 그가 일어나는 걸 봤다. 느긋하지만 느리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매사 여유롭고 나른한 그다운 걸음이었다. 그래서 언뜻 모든 것에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관찰력이 좋았다.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단 말이야.’

태서가 핸드폰을 들지 않은 빈손으로 컵을 쥐었다. 유리컵 바깥으로 물방울이 맺힌 게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아까는 따뜻한 김이 오르던 차를 차갑게 식혀 왔다. 임산부에게 좋은 차라는 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았다. 태서의 눈길이 옆으로 향하며 강세헌의 앞에 있던 컵을 봤다.

‘커피도 안 마시고.’

태서 자신이야 임신해서 커피를 안 마신다지만 강세헌은 얼마든지 커피를 마셔도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태서와 같은 것을 마시거나 아니면 다른 종류의 차로 대신했다.

‘관찰력도 좋고 배려도 잘하고…….’

가끔 제가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챙겨 주고 믿음직하니 단점이 없어 보였다.

태서가 소파에 기대 왼쪽으로 균형을 쏟은 채 아예 강세헌을 감상했다. 그가 낮아진 목소리로 통화하는 걸 보고 있자니 상대방이 누굴까 예상해 보려던 태서가 급히 입을 뗐다.

“아, 아니요. 잘해 줘요.”

나도 통화하는 중이었지.

제가 대답하지 않자 무슨 일이 있냐고 걱정하는 김미경은 당장이라도 한 비서를 부를 듯 굴었다. 급히 그녀를 진정시킨 태서는 통화하던 것도 잊은 채 강세헌을 감상하던 제 엉뚱함에 혼자 웃었다.

태서의 웃음을 들은 강세헌이 왜 그러냐는 듯 입술만 움직여 물어봤지만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대신 태서는 제 옆을 탁탁 두드렸다.

“그럼 또 연락드릴게요.”

[그래, 푹 쉬고 조만간 보자.]

통화를 종료한 태서는 제 옆에 앉은 강세헌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는 강세헌이 태서와 눈을 마주쳤다. 아까부터 태서가 보고 있던 걸 알고 있다는 듯 말리지 않았다. 태서가 더욱 상체를 기울여 강세헌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까맣게만 보이던 눈동자가 햇살을 받으니 다크 초콜릿색으로 바뀌었다.

“준비하겠습니다.”

통화 종료음과 함께 강세헌이 핸드폰을 내리며 태서의 턱을 붙잡았다. 그리고 바짝 거리를 좁히자 태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왜 자꾸 보는 건데.”

“그냥 보는 건데요.”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전혀 없는데요. 오히려 제 턱을 잡은 형이야말로 다른 의미가 있어 보이는데요?”

태서가 일단 발뺌하자 강세헌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각도가 기울어진 시선과 마주하자 얼마 전 강세헌과 입을 맞댔던 게 떠올랐다. 긴 속눈썹과 미간 사이에 잡힌 미세한 주름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아주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그와 입술이 닿을 정도의 거리라 태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누가 들어올지 모르는 병원에서 나와 집에 왔고 우리 둘만 있으니까…….”

강세헌의 목소리가 느릿느릿하게 흘러나왔다. 그의 야시시한 분위기에 태서는 입술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혀로 입술을 축이고 싶은데 그랬다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분위기를 즐겨 보자는 줄 알았는데.”

“보고 싶어서 본 거뿐인데요.”

태서가 머리를 젖히며 강세헌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숨통이 트일 만한 거리가 되자 태서는 입술을 말아 물며 코로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갑자기 다가오고 그러지 마세요. 이러다 둘째 생기겠어요.”

아직 첫째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아예 못 할 말도 아니었다. 그만큼 강세헌의 분위기가 너무 아슬아슬하고 야릇한 걸 어떡해.

태서가 그만하라는 듯 두 눈을 질끈 감는 사이 강세헌의 미소가 스쳤다 사라졌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게 귀여워서 장난친 것뿐인데 태서의 반응이 너무도 강하게 돌아오니 더 놀리고 싶었다.

강세헌이 태서의 뒤통수를 잡아 제게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입술까지 맞댔다. 태서가 놀라 입술을 벌리자 그 사이로 제 혀를 밀어 넣었다가 뺀 강세헌이 속삭였다.

“그런데 자기야, 우리 각방 써?”

태서의 눈이 한껏 떠졌다가 감으며 깜박거렸다. 깜박이는 사이로 시선을 돌린 태서는 깜박임만큼이나 크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몇 번이나 꼴깍꼴깍 침을 삼켰다.

강세헌에 대한 생각을 고쳤다. 자신을 당황스럽게 하는 게 단점이다. 그의 장점을 다 잊게 해 버리는 아주 큰 단점.

***

태서가 어색하게 제 넥타이를 매만졌다.

“이렇게 갑자기 자리가 마련될 줄은 몰랐어요.”

상견례라는 게 두 부모님에게 괜찮은 시간을 물어보고 적당한 장소를 찾고 그러는 게 아닌가. 무슨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갑자기 자리가 마련되냐고.

“이거 상견례 맞는 거죠?”

“우리 둘이 결혼하겠다는 뜻을 내비쳤고 그에 따라 어른들이 만났으니 상견례 맞겠지?”

강세헌이 다가와 태서의 손을 내리고 직접 그의 넥타이를 잡았다. 아직 넥타이 매는 게 익숙하지 않은 태서를 대신해 매 주며 말했다.

“이번에도 형이 나선 거예요? 빨리 만나자고 했어요?”

태서는 강세헌이 그랬을 거라 의심했다. 태서가 퇴원하고 강세헌의 집에 들어가 살기 시작한 그 주 주말에 곧장 만날 것을 말해 왔다. 그가 알아서 한다고 하더니 이렇게 되었다. 그냥 바라보는 것 같지만 실은 강세헌을 추궁하는 거였다. 이전에 강세헌의 부모님을 만날 때도 이렇듯 갑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나름 타당한 의심을 가지고 바라보자 강세헌이 태서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

“이번엔 내가 아니야.”

“그럼요?”

“부모님들끼리 연락할 수 있도록 연결해 드렸더니 그분들이 정하신 거야. 굳이 미룰 필요가 있냐면서.”

강세헌은 그저 시간이 정해졌으니 그때 맞춰 적당한 장소를 준비하겠다고 대답한 게 전부였다. 넥타이도 잘 매어졌고 머리도 단정해진 걸 확인한 강세헌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강세헌이 자리에 앉는 걸 본 태서가 제 물잔을 들어 마른 목을 축였다. 아직 둘만 자리한 룸은 조용하고 깔끔했다. 더불어 몇 번이나 와 본 태서의 눈엔 익숙했다. 상견례 장소를 호텔로 잡은 덕분에 낯선 곳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본 상견례가 어땠지?

“생각해 보니까 우리 미리 입을 맞출 필요가 있어요.”

“나는 언제든 상관없지. 그런데 언제 사람이 들어올지 모르는데 대담하네?”

“…지금 입을 맞추겠다는 게 아니고 말을 맞추잔 거죠. 상견례가 그렇잖아요. 막 자기 자식들이 더 잘났다고 그러고 각자 뭘 혼수품으로 가져올 거냐고 기 싸움하고요. 또 자기 부모님 눈치 본다고 말도 못 하고 그러잖아요.”

그렇게 불편한 시간을 겪고 싶지 않은 태서가 물을 마신 후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제 칭찬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적절하게 끼어들어요.”

“네 칭찬?”

“태서의 어디가 좋아서 결혼하고 싶었니, 라든가 태서에게 반한 요인이 뭐냐고 물어볼 때요. 적당한 기름칠로 부드러운 분위기 만들어 주는 거 잊지 마시고요.”

“그럼 대답은 내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야?”

태서가 제 볼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되지 않아요? 잘생겨서 눈이 갔고 사랑스러워서 자꾸 말을 걸고 싶었다. 귀엽고 야무지니 눈을 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좋아하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특별한 존재를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해도 좋겠네요.”

태서가 말하는 내내 강세헌의 표정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이제 태서의 뻔뻔함은 익숙해서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솔직히 형 집에 갔을 때도 나한테 응? 같이 살자, 말 한마디 안 했잖아요. 지금이 기회예요. 얼마든지 하세요.”

중독이었다. 강세헌의 고백을 들으니 또 듣고 싶었다. 그런데 눈뜨면 해 준다던 강세헌은 이후로 아무 말이 없으니 어쩔 수 있나. 앵무새처럼 하는 말이라도 듣길 바라는 수밖에.

“어디 꽃다발 숨겨 놨다가 꺼내 오는 건 어때요?”

태서가 테이블 아래를 기웃거리자 강세헌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잘 기억했다가 그대로 말할게.”

강세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는 말에 태서가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본 태서가 반색하며 다가갔다.

“어머니.”

김미경과 윤석훈이었다.

“얼굴이 좋아 보이네. 잘 지내고 있구나.”

“형이 잘 챙겨 줘요.”

태서의 대답에 김미경이 아들의 볼을 쓰다듬으며 강세헌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만나지 않아도 되는데…….”

“그저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해서 골랐을 뿐입니다.”

그게 태서의 호텔일 뿐이고요. 윤석훈과 김미경이 멀리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둘이 태서의 옆으로 자리하고 나니 이제 빈자리는 강세헌의 옆만 남았다.

“어디쯤이신지 전화해 보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아직 약속 시간까지 시간도 남았고 또 바쁜 분들이 시간을 빼는 거니까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김미경이 괜찮으니 전화하지 말라고 하니 강세헌은 제 핸드폰을 들었다가 도로 내려놨다. 아예 전화를 안 하겠다는 건 아니고 약속된 시간까지는 기다려 볼 셈이었다.

대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문이 열리며 호텔 직원이 들어왔다.

“오셨습니다.”

직원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문을 열어 다른 이가 들어올 수 있도록 기다렸다. 덕분에 방 안의 모두가 곧 나타날 강세헌의 부모를 기다렸다.

곧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문에서 가장 멀리 앉아 있던 태서가 고개를 쏙 내밀어 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상견례가 시작되겠다.’

강세헌의 부모님이 오면 어색하지 않게 인사부터 건네야겠다. 혹시나 제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걸 아시면 지금은 괜찮다고도 해야겠네, 등등의 생각을 하는 사이 발걸음 소리가 멈추며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

태서의 놀란 음성이 곧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소리였다. 강진한과 서은희가 나타날 줄 알았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할아버지?”

바로 강학중 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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