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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68화 (68/130)

68화

“아니 같이 살자는 말이 그렇게 어려워요? 왜 갑자기 애인이었다가 학부모가 되냐고…….”

태서의 불만에 강세헌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눈뜨면 얼마든지 고백할 거라 해 놓고 은근슬쩍 집에 들이기만 한 거 봐. 아주 사람이 음흉해.”

태서가 강세헌을 경계하며 학교 홈페이지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키보드에 댄 손가락은 움직임을 최소로 하는데 누가 봐도 강세헌을 의식해서 그랬다.

“제 손보고 비밀번호 따지 마세요.”

“그럴 생각 없으니까 확인이나 해.”

“내 성적을 왜 형이…….”

신경 쓰냐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자기도 언제 성적이 나오는지 듣고 흘려 버렸는데 강세헌이 어떻게 알았을까. 태서의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지 강세헌은 머그잔을 들었다. 커피 대신 차를 타 왔는데 루이보스 차라고 했다.

“마시면서 해.”

강세헌은 전혀 급할 거 없다는 듯 여유롭게 굴었지만 듣는 태서는 전혀 그럴 수 없었다. 천천히 하란다고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태서가 차가워진 손끝을 비벼 가며 열을 올리다 머그잔을 핫팩 삼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중간고사는 제가 치르지 않았다. 그러나 기말은 순전히 제 노력이 들어갔다. 졸업반이고 배경지식이 남아 있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공부하는데 막힘이 없었으니 약간의 기대도 있었다.

손이 따뜻해지는 만큼 긴장이 조금 잦아들어 갈 때 제 성적표를 클릭했다. 이윽고 성적표가 화면 가득 떠오르며 태서는 숨 쉬는 것도 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아.”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 성적을 확인하던 태서가 힘이 빠진 듯 숨을 내쉬었다. 일단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제가 치른 기말은 물론 중간고사도 잘 본 덕인지 전체적으로 성적이 준수했다.

‘박한수가 조를 짤 때 언뜻 성적 이야기했었지.’

강인혁과 서다래, 자기까지 모은 이유가 그거였다. 그러니 원래의 윤태서도 어느 정도 성적이 좋았다는 거다.

‘다행이네.’

태서는 온전히 허물어진 긴장을 내던지고 미소 지으려다 앞의 강세헌을 의식했다. 장난치고 싶어졌다. 태서가 강세헌을 따라하듯 저도 머그잔을 들었다.

“보고 싶어요?”

“보여 주고 싶어?”

“아니, 형이 성적 이야기를 먼저 꺼냈으니까 보고 싶나 해서요.”

“보여 주고 싶으면 특별히 봐 주고.”

강세헌은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했으면서 태서가 보여 주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말했다. 아예 눈까지 내리깔고 말하고 있으니 예전의 본인밖에 모르던 그로 돌아간 듯했다. 하긴 다정하게 굴긴 해도 강세헌은 강세헌이다. 까칠한 성격의 강세헌.

태서는 여기서 한 번 더 장난칠까 하다가 말았다. 노트북을 돌려 강세헌의 앞에 화면에 띄운 성적표를 보여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지개까지 켜며 주방으로 걸어가는 태서가 강세헌 들으란 듯이 크게 말했다.

“성적이 잘 나와서 그런가 이상하게 배가 고프네.”

실은 아무 관계가 없지만 뭐 어떤가. 자랑 좀 하겠다는데.

태서가 힐끗 돌아보니 제 성적을 보고 제법이라는 듯 코웃음 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다음엔 1등 하려면 견과류를 많이 먹어야겠다.”

강세헌이 태서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 깊숙하게 들어갔다. 냉장고를 열어 안을 살피는 강세헌의 옆으로 태서가 입술을 삐죽였다. 1등만 알아준다는 듯 구니 괜히 심술이 올랐다.

“이렇게 칭찬 하나 듣기 힘들어서야. 나중에 축복이한테도 1등만 강요하는 건 아닌가 몰라.”

태서가 배를 동그랗게 쓰다듬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강세헌의 등에 대고 말했다.

“축복아, 너 큰일 났다. 네 아빠는 1등이 좋대. 너 공부 열심히 해야 돼.”

네 아빠는 학교 다닐 때 공부 엄청 잘했나 봐, 태서가 끊임없이 종알대는 말을 들으며 강세헌은 태연히 돌아섰다. 이것저것 조리 도구를 꺼내는 그는 태서의 말을 하나도 부정하지 않았다.

“백 점짜리 시험지를 가져와야 아빠가 웃으며 칭찬해 주겠어. 이를 어쩌냐.”

태서는 아예 턱을 괴고 강세헌이 하는 걸 지켜봤다. 중간에 살짝 소음 비슷하게 시끄러운 걸 제외하고는 조리 도구가 부딪치는 소리는 자장가로 삼아도 좋을 만큼 듣기 좋았다. 더불어 강세헌의 넓은 등도 괜찮아 보이고.

강세헌의 등을 타고 올라가 넓은 어깨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가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이유를 알겠다. 단순히 나이만 어려서 그런 게 아니었다. 태서의 키가 작은 축이 아닌데도 강세헌의 앞에선 크다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강세헌의 등을 감상하던 태서는 아예 두 손으로 얼굴을 받쳤다.

“99점 맞을 땐 뭐라고 하려나. 잘했다고 할까? 아니면 1점이 모자라다고 아쉬워할까? 아, 너무 궁금하다. 우리 축복이 공부 잘하려나.”

혼자서 떠들어 대다 보니 급기야 축복이의 미래까지 궁금해진 태서가 두 발을 동동 굴렀다. 그사이 요리를 끝낸 강세헌이 돌아섰다. 믹서기 소리가 난다 싶더니 견과류를 갈아 넣었을 게 분명한 음료와 견과류를 올려서 함께 구운 또띠아 칩을 내왔다.

“축복아.”

강세헌이 아기의 태명을 부르는 한편 태서의 앞에 음료를 내려 주고 또띠아 칩까지 입에 들이밀었다. 태서가 그것을 받아먹고 있으니 강세헌이 잘했다는 듯 음료도 마시라고 눈짓했다.

“걱정 마.”

설마 옆에서 잘 가르쳐 주겠다고 하려나?

“공부 못한다고 굶기진 않으마. 99점을 맞아도 배 터지게 먹여 주고 100점을 맞아도 먹여 주마. 뭐, 0점 맞아도 먹여 줄 테니 걱정 마.”

“아니… 무슨 배부르게 먹여 준다고…….”

의외의 대답에 태서가 황당한 듯 읊조리다가 아예 식탁에 엎드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주먹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웃는 태서가 혹시 컵이나 접시를 칠까 강세헌이 한쪽으로 밀어 줬다.

제가 웃고 싶은 만큼 웃은 태서가 고개를 들었다.

“직접 가르치겠다고 말할 줄 알았더니.”

태서가 크게 웃느라 몸을 부들거리며 말하고 있으니 강세헌은 혹시나 사레라도 걸릴까 따로 물도 따라 줬다.

“잘 먹이면 잘 하겠지. …일단 너부터 잘 먹여 보면서 지켜 보면 알겠지.”

“아, 진짜!”

나를 얼마나 배부르게 먹이려고!

***

“으음…….”

잠에서 깬 태서가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한 번 쓰러지고 나서는 잠에서 깨면 눈부터 떴다. 정신이 먼저 깨어난 상태로는 제가 여전히 윤태서가 맞는지 싶은 불안만 들어서 그랬다.

익숙한 천장을 보니 강세헌의 집 그중에서도 태서가 머무는 방이었다. 아침에 퇴원했고 곧장 집으로 와서 간식을 먹고, 점심 먹기 전까지 잠깐의 시간이 떠서 잠시 쉰다는 게 잠이 들었나 보다.

여전히 자신은 태서가 맞았다. 뱃속엔 축복이가 자리하고 곧 결혼할 상대까지 있는 그 윤태서였다. 하나둘 제 상황을 나열하고 나니 아까의 긴장이 많이 누그러진 태서가 길게 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침대에서 발을 내리고 천천히 일어선 태서는 방을 한 바퀴 빙 돌았다. 굳은 몸을 풀고 나자 떠오르는 건 지난 며칠 동안 제 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일이었다. 바로 제가 쓰러진 일.

알파의 농축된 페로몬에 노출되어 쓰러진 게 정말 서다래와 연관이 있을까?

박한수와 그 일을 가지고 대화한 적은 있지만 그 외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의사인 진규민에게도 그리고 강세헌에게도.

태서는 제 배를 어루만지다 발길이 닿는 그대로 멈췄다. 거울에 비친 윤태서는 담담한 눈을 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냐.”

거울 속 자신에게 말을 건 태서는 금방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비소를 띄웠다. 정말 서다래가 의심된다면 가서 물어보면 될 걸 그러지도 못하고 계속 의심만 하는 제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서다래가 그랬다는 대답이라도 할까 봐? 그래. 실은 그것 때문이지.”

정말로 서다래가 그랬다고 대답하면 그때는 자기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서다래에게 왜 그랬냐고 물을 순 있지만. 책임…… 제게 약을 먹인 책임까진 묻지 못할 거 같았다. 태서도 서다래에게 약을 먹이려 했으니까. 뒤늦게 그것을 제가 먹으면서 모든 게 달라졌지만 어쨌든 서다래가 위험할 뻔했다.

태서가 답답한 마음에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 대고 있는 사이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일어났는데 안 나오고 뭐 해?”

강세헌이 문을 닫을 생각이 없는지 아예 문틀에 기대고 바라보고 있자 태서가 거울에 대고 제 몸을 이리저리 돌아봤다.

“거울 보고 있었어요. 축복이가 있다는데 아직 배가 많이 안 나오네요.”

“남성 오메가는 배가 많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럼 먹는 건 다 어디로 갈까요? 역시 여기?”

태서가 제 볼을 손으로 밀어 올렸다. 귀엽지만 다소 우스꽝스럽게 얼굴이 뭉개지는데 태서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아까 서다래를 떠올리던 생각을 강세헌에게 들키지 않고 잘 넘어갔다. 평소라면 강세헌의 날카로운 시선에 제 가라앉은 분위기를 들켰을지도 모르는데 다행이었다.

태서는 제 볼을 떡 주무르듯 매만지며 강세헌에게 물었다.

“살찐 거 같지 않아요? 병원에 입원하기 전만 해도 이 정도로 찌진 않았던 거 같은데.”

태서의 물음에 아예 그를 자세히 관찰하려는 듯 강세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태서를 원점 삼아 한 바퀴 돌며 하나하나 신중히 살펴봤다.

“아직 눈에 띌 정도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살찌긴 쪘죠?”

“벗겨 보지 않아서 모르겠어.”

강세헌이 자세히 관찰한 결과를 말해 줬다. 솔직히 드러난 곳이라고 해 봐야 얼굴과 팔꿈치 아래, 종아리 정도였다. 그래서 확실히 말해 줄 수 없다고 말하는데 태서가 양팔을 교차해서 제 몸을 끌어안았다.

“벗겨서 보려는 건 아니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우리가 손만 잡았는데 축복이가 생겼어?”

“그건 아니지만…… 아니, 살쪘냐고 물어봤는데 왜 이런 방향으로 흐르죠?”

강세헌을 변태처럼 바라보던 태서가 한 걸음 물러 거리를 벌렸다.

“어쨌든 살찐 거 같아요.”

“벌써 걱정하면 안 되는데. 앞으로 더 찌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포기하면 편하다는 듯 강세헌은 태서의 걱정을 태연히 넘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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