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인데 임신했다-67화 (67/130)

67화

강학중 회장과의 대화는 꽤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태서가 저녁까지 같이 먹자고 매달리니 강학중 회장도 못이기는 척 받아 줬고 덕분에 비서들만 바쁘게 일정을 조정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늦어 강학중 회장이 일어난다고 하니 태서는 아쉬웠는지 간다고 준비하는 회장의 뒤에 바싹 붙어 따라다녔다.

“내 손주들은 말수도 적고 재미없는 놈들뿐인데 너는…….”

어떤 뒷말이 나올지 태서가 기대에 차서 눈을 반짝였다. 오늘 할아버지를 붙잡고 오래 말하긴 했는데 그래도 중간에 말 한 번 끊지 않고 잘 들으셨었다.

“지루할 틈이 없구나.”

“그거 저랑 있으면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저도 좋았어요. 실은 제가 원래 말이 많은 애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편해서 그런지 자꾸 말하게 되더라니깐요?”

태서가 숨 쉴 틈 없이 밀어붙이는 말에 강학중 회장은 못 말린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몇 시간 같이 있었다고 제법 강세헌보다 더 손주처럼 살갑게 굴어 대니 태서가 싫을 리가 없었다.

“내일도 오마.”

“내일이요?”

그런데 강학중 회장이 다시 오겠다는 말에 태서가 되물으니 또 오냐는 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러자 태서가 급히 두 손을 휘저으며 오해가 생길 일을 방지했다.

“그게 아니라 저 내일 퇴원해요. 그래서 다음엔 제가 갈게요. 오히려 먼저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네 몸이나 생각해라.”

강학중 회장이 혀를 차며 태서의 몸을 훑어 내렸다. 그에 태서가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당장 제 부주의로 병원에 오게 되었으니 혼나도 할 말이 없다는 듯.

“애까지 밴 놈이 어딜 돌아다니겠다고.”

강학중 회장의 정 깊은 타박에 태서가 웃음을 삼켰다.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임을 알기에 괜찮다고 대답하기보단 그러겠다고 했다.

“내일 퇴원하면 어디로 가느냐?”

태서는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일단 이게 답인가 싶은 대답을 꺼냈다.

“집으로 가겠죠?”

그게 답이 맞았는지 강학중 회장이 다른 질문을 건네는 대신 손가락을 휘둘러 제 주변에 서 있는 비서들을 가리켰다. 태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니 눈이 마주친 비서들이 하나같이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 왔다. 태서는 그중 도시락을 내어 준 비서와는 오래 눈을 마주치고 미소까지 나눴다.

“비서실에 일러둘 테니 날 볼 일이 있으면 연락해라. 차를 보내마.”

“그럼 저 기다리지 않고 바로 할아버지 볼 수 있어요?”

“그거야 당연하지 않냐.”

강학중 회장이 그게 뭐 대단한 거냐는 듯 중얼거렸다. 제가 바쁠까 눈치 보지 말고 언제든 오라는 소리에 태서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렇게 절 이뻐해도 되나요? 몇 번 만나지 않았는데 벌써 그렇게 애정을 주시면 저는 좋죠.”

“유난 떨지 마라. 손주 놈들에게는 다 그렇게 해 준다.”

손주 강세헌의 오메가이니 태서도 그렇게 해 준다는 투지만 정작 태서는 대놓고 좋아했다.

“뭐가 그렇게 좋으냐. 정작 손주들은 그걸 알고도 오질 않는데…….”

“아하, 세헌이 형과 같이 오라는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같이 갈게요.”

“같이 오라고 안 했다.”

“그럼 형이랑 같이 가다가 축복이 태어나면 셋이 갈게요.”

“…그래라.”

저 능청스러움은 이길 수 없는 모양인지 강학중 회장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뭐가 되었든 자기를 만나러 온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지금 만났으니까 건네는 빈말이래도 말이다. 그러다 뭐가 떠올랐는지 회장이 대뜸 운을 뗐다.

“음…… 네가 오지 않아도 우리가 볼 날이 또 있겠구나.”

태서가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바라보는데 강학중 회장은 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외려 비서에게 일정 조정할 수 있을 거란 말만 건넸다.

“언제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날이 언제가 될지 봐야겠다. 또 보자.”

태서가 물어봤지만 강학중 회장은 속 시원한 대답도 안 해 줬다. 그보단 깔끔한 인사만 건네고 가 버리니 강학중 회장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던 태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대로 돌아왔다.

‘대체 뭐지. 그날이 언제라는 걸까.’

태서가 강세헌과 찾아가면 찾아갔지 언제 만난다고.

결국 속 시원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어영부영 잠이 들었고 아침이 되었다. 태서가 잠이 깨지 못한 멍한 얼굴로 어제 회장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는 사이 강세헌이 찾아왔다.

“집에 가자.”

***

태서는 움직이는 차에서 창문을 반쯤 열고 들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눈을 뜨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병원에서도 창문을 열면 하늘과 날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비가 오면 습한 냄새가 흘러 들어왔고 맑은 날이면 햇살이 병실 안까지 들어와 태서의 자는 얼굴을 비춰 주곤 했다.

그래서 병실에만 있어도 갑갑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회장님께서 챙겨 주신 덕분에 감사하게도 특실에 있었으니 좁다고 여길 틈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나오니 또 느낌이 달랐다.

“이래서 가끔씩 밖에 나오고 그래야 하나 봐요.”

태서가 바람을 들이마시며 하는 말에 강세헌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돌아봤다. 태서의 말 한마디에 바로 반응하는 모습이 룸미러를 통해 운전하는 한 비서에게 그대로 보였다. 한 비서는 태서에게 신경을 집중하는 강세헌의 표정을 운전하는 동안 간간이 지켜봤다.

“그러면 잠깐 멈춰서 걸을래? 한 비서님, 여기 근처에 공원 있습니까?”

“찾아보겠습니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강세헌과 한 비서의 대화에 태서가 급히 손을 흔들며 부정했다.

“언제든 나갈 수 있잖아요. 굳이 안 그래도 괜찮아요. 그대로 가 주세요.”

한 비서가 룸미러로 태서를 살폈다. 빈말로 하는 게 아니라 진짜 공원에 가지 않아도 좋다는 뜻인 걸 알자 한 비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방향을 틀지 않는 걸 확인한 태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강세헌을 돌아봤다.

“그런데 이 길은 우리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데요?”

“우리 집으로 가는 거 맞아.”

강세헌이 맞는 방향이라고 하니 태서가 다시 거리를 살펴봤다. 그러나 다시 본다고 길이 달라지진 않았다.

“여기 진짜 우리 집 가는 방향이 아닌데… 돌아서 가려고요? 형 집에 들렀다 갈 일이 있어요?”

태서의 순수한 물음에 강세헌이 핸드폰을 아예 주머니에 넣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태서가 바깥 구경하는 동안 핸드폰으로 받던 보고를 끊은 것이다. 그걸 본 태서가 괜히 말을 걸었나 싶었다. 이래서 공원도 안 가지고 했던 건데.

“어제 회장님이랑 무슨 이야기 나눴어?”

하지만 강세헌은 차가 멈출 때까지 핸드폰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태서에게 집중하려는 듯 어제의 일을 물어봤다.

태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제게 주는 관심이 싫을 리가 없었다.

***

강세헌의 집엔 잠깐 들리는 거라고 생각했던 태서가 의아한 듯 한 비서를 돌아봤다. 제가 병원에서 들고나온 짐 가방을 강세헌에게 주고 가 버린 것이다.

“한 비서님 지금 퇴근한 거 맞죠?”

강세헌에게 태서를 데려다주라고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게 강세헌의 손에 들린 짐 가방이 걸렸다.

“네가 말한 우리 집은 여기야.”

강세헌이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누르자 작동음과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게 어떤 뜻인지 단박에 알아챈 태서가 일단 강세헌의 집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다짜고짜 그의 집에 쳐들어갔던 때가 떠올랐다.

낯설진 않지만, 왜 여기가 우리 집이라 말하는지 궁금했다.

“여기서 지내라고요? 혹시 형이 나를 데려가겠다고 했어요? 나랑 살고 싶어서?”

말을 꺼내다 보니 저절로 피어오르는 의심에 태서가 강세헌을 흘겨봤다.

“너희 부모님은 바빠서 널 챙겨 줄 수 없다고 하셨어.”

태서의 부모님은 태서가 잘 먹고 잘 쉴 수 있도록 잘 챙겨 주려 했지만 이번처럼 쓰러질 때가 걱정이었던 듯 강세헌에게 연락했다. 이미 그가 태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태서가 강세헌과 같이 지내는 게 오히려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나도 다 큰 성인인데…….”

태서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지만 더 따지진 못했다. 이번에 제가 쓰러지면서 부모님이 놀랄 걸 생각하면 다 컸으니 알아서 하겠다고 우길 처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강세헌이 태서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았다.

“다시 나랑 살 수 있게 되었잖아.”

마치 같이 살고 싶었다는 것만 같아 태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 부모님이 떠밀었다지만 강세헌도 내심 좋았던 거 같은데 직접적으로 듣고 싶었다.

‘같이 살자, 태서야.’라든가.

‘너랑 같이 있고 싶어.’도 나쁘지 않고.

‘윤태서, 전화로는 부족해. 그냥 같이 있는 게 좋겠어.’면 더 좋고.

등등 강세헌에게 귀가 녹을 정도로 달콤한 말을 듣고 싶었다.

“좋아요. 그런데 나한테 할 말 없어요?”

말해야 안다는 식으로 태서가 제 귀를 살살 긁었다. 지금이 기회라는 듯 어서 말해 보라는 재촉이었다.

“할 말이 있긴 한데…… 듣고 싶어?”

태서가 대답 대신 그에게 귀를 가까이 댔다. 강세헌이 상체를 기울여 태서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갔다.

강세헌의 숨이 제 귀를 간지럽히자 태서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고도 기어코 물러나지 않았다. 그만큼 강세헌이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싶었다.

“성적 나오지 않았어?”

“…….”

같이 살 사람 심장 좀 두근거리게 해 달라니까 섬뜩하게 찢어 놓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