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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66화 (66/130)

66화

병원 지하 주차장에서 강세헌은 비서가 내민 것들을 차례로 받아 훑어보았다.

“참 투명하네요.”

강세헌의 의미심장한 말을 알아들은 건 그에게 서류를 내민 비서뿐이었다. 운전사는 백미러로 강세헌을 힐끔 바라볼 뿐 다시 앞을 응시했다. 강세헌이 보고 있는 건 태서가 쓰러지기 며칠 전 서다래가 물건을 구입한 흔적이었다. 어떻게 그 물건을 구했는지 비밀의 경로는 물론 물건을 판 곳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학교에서는 얌전하고 성실한 학생이라고 합니다. 선행도 많이 하고 교수들로부터 신뢰도 높은 편입니다.”

“얌전하고 성실한 학생이 왜 그랬을까요.”

“더 조사해 볼까요?”

본래 강세헌이 알아 오라고 했던 건 태서가 쓰러지게 된 원인이었다. 그러니 비서는 이번 일에 국한되지 않고 더 범위를 늘려 보겠다고 말해 왔다.

어떤 원한이 있어서 이제 막 오메가가 된 태서에게 이런 짓을 벌였는지, 그리고 서다래와 강인혁, 태서까지 세 사람 사이에 복잡하게 꼬인 사정이 무엇인지. 비서가 자세히 조사해 올 것을 물어보니 강세헌이 고민에 빠졌다.

태서가 제 사촌 동생과 같은 학교를 다니는 걸 알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집에서 태서가 있던 걸 알게 된 강인혁의 태도나 이후로 태서를 언급하던 걸 생각하면 이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조사해 오세요. 박한수란 친구까지 같이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친구라고 하니 어떻게든 관계가 있지 않을까.

“알겠습니다.”

비서가 지시받은 일을 따로 적는 사이 운전사가 강세헌에게 물었다.

“다시 태서 학생에게 가십니까?”

운전사는 강세헌이 비서의 보고를 받고자 내려온 것이기에 도로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세헌은 핸드폰을 두 번 두드리는 것으로 병원이 아니란 뜻을 내비쳤다.

“본사로 갑니다.”

최근 비서를 통해 업무를 보는 강세헌이 굳이 본사로 갈 필요가 있을까? 비서가 다급히 스케줄을 확인하자 강세헌이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직접 설명해 줬다.

“높으신 분이 들어왔다 가라네요.”

높으신 분이 누군지 바로 알아들은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의 지시라니 군말 없이 일정을 변경시켰다.

강세헌이 다시 보고서를 훑어보는 사이 운전사가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움직이는 진동과 함께 강세헌은 핸드폰으로 전송받은 서다래의 사진을 보았다.

“어딘가 낯이 익은 듯한데…….”

강세헌이 서다래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을 헤집는 사이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가 유유히 도로에 들어섰다. 차가 병원의 입구를 빠져나가며 무심코 고개를 든 강세헌의 시선에 한 사람이 걸려들었다. 흰 피부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다. 강세헌이 그를 살피던 것도 잠시 차가 우회전으로 빠지며 남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

“그런데 생각보다 손주를 더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이렇게 직접 보러 오실 정도면요.”

“내가 안 오면 그놈이 너를 언제 보여 주겠어.”

“그건 그렇네요.”

손주를 사랑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궁금해서 직접 오신 걸 거다. 강세헌은 제 부모에게도 태서를 잠깐 보여 주고 말았으니 강학중 회장과는 언제 자리를 잡을지도 모르고.

“아쉬운 놈이 우물을 파는 법이지. 그래서 너는 내가 병원에 잡아 둬 불만이냐?”

“이렇게 좋은 병실로 옮겨 주셨는데 어떻게 불만이 있겠어요. 덕분에 잘 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태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이자 강학중 회장이 헛기침을 하며 기분 좋은 걸 숨겨 보려 했다.

“됐으니 앉아라.”

“네.”

태서가 도로 자리에 앉아 회장의 비서가 놓고 간 것을 보았다.

“세헌이 형이 있을 때 오셨으면 같이 볼 수 있었을 텐데.”

“그건 내가 원하지 않네.”

“어째서요?”

태서가 화려한 도시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병원식을 보더니 마침 자신도 식사할 시간이라며 회장님을 모시는 사람이 3단으로 쌓은 도시락 두 개를 들고 왔다.

각자 하나씩 도시락을 펼쳐 두니 태서가 도시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레스토랑에서 풀 코스로 즐길 만한 게 도시락에 전부 담겼다. 알아서 순서에 맞춰 먹으라는 듯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다채로운 도시락이었다. 거기다 양식으로는 아쉬울 것 같은지 불고기가 들어간 한식까지 겸비하니 군침이 돌 정도로 맛있어 보이는 도시락이었다.

태서가 젓가락을 매만지며 병원에 감도는 강세헌의 페로몬을 들이마셨다. 잠깐 있다가 가서 그런지 페로몬의 양이 너무도 아쉬웠다. 이왕이면 할아버지도 왔으니 같이 있지, 회사 일이 바쁜 게 아쉬웠다. 그런데 강학중 회장은 태서와 생각이 달랐다.

“손주가 귀여운 맛이 없거든.”

“어릴 땐 귀여웠어요?”

뭐부터 먹을까 고민하던 태서가 입술에 젓가락을 대고 있던 그대로 물었다.

“엉금엉금 기어 다닐 때나 귀여웠지. 그다음부터는 근엄했어.”

“어릴 땐데 근엄했어요?”

“머리가 빨리 트이더구나. 제법 배우는 것도 빠르고 영특하다 싶었는데 그게 문제였어. 나가서 놀 생각은 안 하고 배우는 것에만 빠져서.”

강세헌의 어릴 적이라니, 태서가 흥미로운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거기다 도시락에 든 요리가 전부 태서의 입맛에 딱 맞았다.

“이것저것 배우는 사이에 나이가 들더니 무뚝뚝한 손주만 남았지.”

“그건 아쉽겠네요. 그런데 다른 손주 있으시잖아요.”

강세헌이 귀엽지 않았다면 강인혁이 있지 않나.

“별 차이 없더구나.”

“아…… 혹시 손주 더 없으신가요?”

“없다.”

왠지 숙연해지는 느낌에 태서가 고개를 숙였다.

하긴 뭐 강인혁이라고 어릴 때 애교가 얼마나 넘쳤겠는가. 괜히 남자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것도 서다래를 향한 집착이 강한 놈이었는데 귀여움과 거리가 멀었겠지.

‘그게 이런 식으로 영향을 줄 줄이야.’

손주들이 하나같이 무뚝뚝하다니 숙연했던 것도 잠시 웃음이 나오려 하고 있었다. 이 이중적인 감정에 태서가 입술을 씰룩이고 있으니 강학중 회장이 국을 후루룩 마시며 말했다.

“웃어도 된다.”

“아하하. 그런데 무뚝뚝한 손자라도 좋으시죠?”

손주가 무뚝뚝하든 아니면 덩치가 크든 할아버지의 눈엔 마냥 예쁜 존재이지 않을까? 태서가 좋은 점은 없냐는 듯 물어보니 강학중 회장이 어려울 게 없다는 듯 한 가지를 들먹였다.

“아주 든든하지.”

“그렇네요.”

누구보다 공감하는 태서는 이젠 희미해진 페로몬을 마시며 속으로 강세헌을 찾았다.

“그런데…….”

강학중 회장이 무언가 할 말 있다는 듯 운을 뗐다.

“아들 내외의 앞에서는 그리 긴장했다더니 내 앞에는 제법 편하게 있는 구나.”

며느리에게 태서를 소개받았다고 들은 강학중 회장이 물었다. 긴장하는 모습이 그렇게 귀엽다던데 지금의 태서는 조금도 그런 낌새가 없었다.

태서가 입에 든 걸 삼키고 말하려니 덕분에 생각할 시간이 생겼다. 정말로 강세헌의 부모님을 만날 때와 지금 달랐다. 왜 그럴까?

“그러게요. 처음에 세헌이 형의 할아버지인 줄 모르고 만나서 그런가 봐요. 할아버지가 편해요.”

생각해 보다가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아무래도 처음 시작이 강세헌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더욱이 그때 제 속내를 드러내며 고민 상담까지 하지 않았나. 그런 게 합해져서 어렵다기보단 친근함이 더 먼저 들었다.

게다가 지금도 별 이야기를 다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돼요? 회장님보다는 할아버지가 더 좋아서요.”

“크흠, 마음대로 해라.”

“네, 할아버지.”

이제껏 회장님을 따로 부른 적이 없어서 몰랐다가 뒤늦게 물었는데 강학중 회장은 헛기침을 한 번 할 뿐 거절하지 않았다.

태서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시 도시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우에 면 비슷한 것을 돌돌 만 건 무슨 맛인가 싶어 먹었다가 놀라서 강학중 회장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할아버지, 이거 진짜 맛있네요. 한번 드셔 보세요.”

태서가 눈으로 가리키는 것도 모자라 아예 새 젓가락을 꺼내 그것을 집어 입에 대 줬다. 어서 먹어 보고 자기와 같은 반응을 해 달란 듯이.

“어서요.”

태서가 입술 가까이 대고 조르니 강학중 회장이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받아먹었다. 입을 벌리는 게 조금 어색하지만 정작 태서는 이 상황이 어색하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어때요?”

“맛있구나.”

“그렇죠? 어쩐지 세헌이 형이 자주 먹여 준다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어요. 먹어 보라고만 하고 기다리기 힘드네요. 바로 감상을 들을 수 있으니 좋아요.”

태서가 어째서 먹여 줬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제 손주가 그런 자상함이 있는 것도 놀랄 지경이라 강학중 회장이 잠시 말이 못 하고 있는 사이 태서는 재잘재잘 떠들었다.

“다른 것도 먹어 보고 맛있으면 말씀드릴게요.”

“그래라.”

“잘 먹겠습니다. 진짜 맛있어요.”

태서가 본격적으로 도시락에 손을 대기 시작하니 강학중 회장이 묘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제 손주와 완전히 다른 생명체인 것만 같았다. 어디서 이런 놈이 떨어졌나 싶을 정도였다.

“……먹고 커피도 마시자.”

“저는 커피 못 마시니까 음료수 마실게요.”

“그래.”

태서가 한입 가득 고기를 넣으며 잠깐 대화가 사라졌다. 아까부터 오물오물 뭔가를 계속 먹으면서도 말을 잘 하더니 이젠 먹는데 집중하려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참, 저 임신한 거 알고 계시죠? 허락도 없이 먼저 아기를 가져서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사고가 있었어요. 저도 제가 평생 베타로 살 줄 알았거든요.”

그냥 고기가 커서 잠시 입을 다문 것에 불과했다. 태서는 제가 임신하게 된 원인부터 종알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오메가가 되어 있었어요. 그때 세헌이 형을 만났죠. 근데 저보고 핏덩이라면서 다음에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아는 척하지 않으려고 하니 더 자주 만나는 거 있죠? 세헌이 형이랑은 호텔에서 자주 만났어요. 아, 그런데 만나기만 했어요. 대화하고 밥 먹기만 했고요. 제가 먼저 세헌이 형한테 전화번호를 물어보긴 했는데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저 막 한눈에 반해서 쫓아다니고 그러는 애 아니거든요?

끝없이 말하는 태서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강학중 회장은 어느새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냥 태서를 바라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언제 미소를 짓기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아기 이름도 정했어요. 배 속에 있을 땐 태명이라고 하던데 알고 계셨어요? 아무튼 아기 이름이 뭐냐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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