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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62화 (62/130)

62화

“다른 알파의 페로몬에 강하게 노출되면 보통의 경우엔 히트가 오거나 기절해요. 목숨에 영향은 없지만, 페로몬으로 공격을 받는 거죠.”

태서가 정신을 차린 후 간단한 처치가 이뤄졌다. 그 뒤로 진규민이 찾아왔다. 그는 태서가 별 탈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의 상태를 상세히 알려 주었다.

“그런데 태서 씨의 경우엔 알다시피 임신을 했어요. 그러니까 농축된 알파의 페로몬이 아주 위험할 수 있는 거죠. 임신한 오메가의 경우엔 다른 알파의 페로몬이 몸에 안 좋으니까요. 다행히 아기도 태서 씨도 무사합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나보단 세헌이에게 해야겠네요.”

진규민은 강세헌이 어떤 걸 했는지도 말해 줬다.

“세헌이는 쓰러진 태서 씨를 안아서 데려오기만 한 게 아니에요. 오는 내내 끊임없이 제 페로몬을 풀어 태서 씨에게 달라붙은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밀어 내 줬어요. 왜 태서 씨가 쓰러졌는지도 모르면서요. 참 웃기죠?”

다른 알파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게 싫었다나, 진규민이 제 친구의 행동을 비웃듯 중얼거렸다.

“결과적으론 그게 태서 씨가 위험해지지 않게 막아 준 거예요. 이런 말하기 뭐 하지만 세헌이 그놈이 이성보다 본능이 뛰어나요. 그러니까 사업할 때도 이건 되고 안 되고를 판단해서 될 만한 것만 선택하는 거죠. 짐승 같은 놈이라고 욕했는데 말입니다.”

의사로서 태서의 상태를 말해 주려는 건지 아니면 친구의 흉을 보는지 모르는 말이 나왔지만 결국 친구를 향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태서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지금은 조용히 있어야 진규민으로부터 강세헌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그리 귀신같이 잘되는 사업만 찾아낼 수 있는지.”

짐승, 귀신. 강세헌을 뜻하는 말을 들으면서 태서가 슬쩍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한 게 있었다. 제가 정신을 잃은 내내 누군가가 제 손을 잡아 주는 것만 같았는데 그게 착각이 아니었다.

“말이 길어졌네요. 어쨌든 태서 씨는 당분간 입원해서 몇 가지 검사를 통해 상황을 볼 거예요. 푹 쉬는 시간이라 생각하세요.”

“감사합니다.”

“겸사겸사 세헌이도 많이 부려 먹고요. 아주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데 얼마나 그럴지 볼 겁니다. 그리고 회장님한테 말해 줘야지.”

진규민과 대화하면서 최대한 진중한 분위기를 유지하려던 태서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한두 번은 참을 수 있다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웃으니 보기 좋네요. 참,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태서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니 진규민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렇게 작은 병 혹시 못 봤었나요?”

“…전혀요.”

“흠… 태서씨에게 묻어 있던 다른 알파의 페로몬은 한 명의 것이 아니었어요. 알파들의 페로몬을 압축해서 넣은 건데 보통 이런 병에 담겨 있거든요. 당연히 불법이구요.”

불법이라면서 진규민은 어디서 구했는지 병을 요리조리 돌리며 보여 줬다. 태서가 제 눈앞에 들이민 병을 봤지만 전혀 본 기억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에 진규민이 다시 병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럼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나요? 아니면 이상했던 점이라도요.”

경찰로 전향이라도 한 듯 진규민이 야무지게 팔짱까지 끼며 물어보니 태서가 그날 일을 떠올려 보았다.

서다래를 만난 건 다른 날과 달랐지만 그렇다고 그를 언급하긴 꺼려졌다. 왠지 서다래를 범인으로 몰고 가는 것만 같아서.

“이상한 건 없었어요. 적어도 제가 느낀 바로는요.”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요. 시간을 두고 원인을 찾아봐야겠네요. 아니면 그 이전에 당했는데 몰랐다든지…….”

진규민이 어떻게든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태서는 정말 어디서도 저런 병을 보지 못했다.

“그만해.”

그런 태서의 난처함을 막 들어온 이가 알아채곤 말했다. 태서가 반색하며 강세헌을 불렀다.

“형 왔어요?”

잠깐 자리를 비운 강세헌이 돌아오자 진규민이 팔짱을 풀고 손을 흔들었다.

“왔냐.”

“모른다고 대답했는데 왜 자꾸 물고 늘어져.”

“그래도 어디에서 당했는지 알아야 하잖아. 너는 알고 싶지 않아?”

진규민이 외려 강세헌에게 되물었다. 누가 태서 씨에게 나쁜 마음을 먹고 벌인 짓인 거 같은데 가만히 있겠냐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강세헌은 진규민의 물음을 못 들었는지 그를 지나쳐 태서의 앞에 다가섰다.

“죽 가져왔어.”

시간을 확인한 강세헌이 태서의 앞으로 병상 테이블을 세우며 식사를 할 수 있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릇을 꺼내 죽을 담고 간장 종지에 간장을 담은 후에 마실 물까지 마련하는 동안 진규민이 슬쩍 고개를 빼서 훔쳐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사 온 게 아니라 싸 왔네. 이 정성을 어떻게 하면 좋아.”

“네 건 없으니까 가서 사 먹어.”

“응, 바라지도 않아. 태서 씨한테만 다정한 네놈한테 뭘 바라.”

잠시 자리를 비웠나 싶더니 제가 직접 만들어 온 모양이었다. 진규민은 바라지도 않는다며 태서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이제 자신은 빠져 줄 차례였다.

“다음 회진 때 볼게요. 혹시나 몸이 아프면 언제든 호출하고요.”

“네, 감사합니다.”

“죽 맛있게 먹어요.”

진규민이 세헌의 어깨를 툭 치고는 병실을 나갔다. 그리고 태서에게 기억해 보라는 듯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진규민이 나가고 태서는 강세헌을 바라보는 대신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세헌이 이상하게 생각하기 전에 고개를 들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부모님은 오전에 왔다 가셨어요.”

“그래? 걱정 많이 하셨는데 금방 가셨네.”

“제가 가라고 했어요. 바쁘신데 다 미루려고 하시더라고요.”

태서가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바쁘신 분들이라는 것도 알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알았다. 그렇기에 굳이 부모님을 붙잡고 자신을 봐 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고.

태서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앞에 앉은 이를 보았다. 부모님에겐 죄송하지만 강세헌과 있을 때가 훨씬 마음이 안정되고 좋았다. 오죽하면 강세헌이 자리를 비운다고 할 때마다 얼마나 서운한지 모를 정도로 그의 존재가 더 크게 와닿았다.

“내일은 정상식 먹어도 된다고 하니 조금만 참아.”

“내일도 죽만 먹어도 되는데요.”

고소한 향부터 맛있을 게 분명한 죽을 이리저리 헤집어 대며 태서가 헤실 웃었다. 매일 다른 죽을 가져다준 덕분에 밥이 아니어도 술술 넘어갔다. 그가 계속 제 옆에 있으면서 이렇게 챙겨 주는 게 너무도 좋았다.

“그래,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만들어 줄게. 대신 죽은 간식으로 먹어.”

강세헌이 태서를 향해 팔을 뻗었다. 병실 침대를 세운 것도 모자라 태서의 등에 베개를 잘 대 줘서 불편하지 않게 해 줬다. 태서가 살짝 등을 뗐다가 대 보니 아까보다 더 편한 자세가 나왔다.

“형은 얼굴도 잘생기고 일도 잘하는데 간병까지 잘하네요. 못하는 게 뭐예요?”

“몰라, 그래서 이제부터 찾아보려고.”

못하는 게 뭔지 모른다는 걸 능청스럽게 받아넘기니 태서가 크게 웃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는지 숟가락을 위로 세웠다. 그 탓에 숟가락에 묻어 있던 죽이 흘러내려 태서의 손가락에 떨어졌다. 그것마저 아무렇지 않은 태서에 비해 강세헌은 직접 물티슈를 가져와 손가락 사이에 묻은 죽을 닦아 줬다.

“못하는 게 있었어요.”

“내가 모르는 걸 네가 안다고?”

“아기.”

강세헌의 손이 멈춘 사이 태서가 말을 이었다.

“아기에 대한 건 아직 모르죠. 그건 초보나 마찬가지니까…….”

“그건 그러네.”

“그래서 그런데 우리 아기 불러 줄 이름 생각해 봤는데요.”

태서가 숟가락을 다시 죽그릇에 담았다.

“부모님이 축하한다고 할 때 떠올랐어요.”

“그래?”

태서는 강세헌이 궁금해하라고 시간을 끌지도 못하고 바로 입을 열었다.

“축복이요.”

이전부터 생각했는데 막상 일이 생겨 말한다는 걸 깜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김에 바로 생각해 둔 태명까지 말했다. 그래 놓고 오히려 태서가 강세헌의 대답을 기다렸다. 좋은지 아닌지 반응을 기다리는 태서의 애타는 마음을 모르는지 강세헌은 목을 울릴 뿐 어떻다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참지 못한 태서가 그를 재촉하려는 찰나 강세헌이 고개를 끄덕여 왔다.

“좋네.”

“정말이요?”

“응. 우리한테 축복인 거잖아. 의미도 좋고 부르기도 좋아. 복이라고 부르면 적당히 촌스러운 것도 마음에 들어.”

“촌스러운 걸 좋아하시는구나, 센스가 남다른 덕분에 신제품도 잘 뽑아낸다던데 다 거짓말이었어.”

“모두가 세련된 걸 좋아하지만 촌스러운 건 정이 가. 그러니까 제품 디자인에서도 세련된 것보다 정감가는 걸 택해야 해. 그래야 그 시리즈의 새 모델이 나올 때마다 핸드폰을 바꾸는 거야.”

강세헌이 제 사업 비밀을 태서의 앞에서 가감 없이 알려 주었다.

“나중에 그거 그대로 써먹어도 되는 거죠?”

“마음대로 해.”

그런다고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강세헌의 눈빛은 무시하고 태서가 다시 숟가락을 휘둘렀다.

“그런 의미로 내일은 유자 드레싱을 한 샐러드랑 사과가 들어간 샌드위치, 수박 주스 만들어 주세요.”

“그 정도면 아기를 과일이라고 불렀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건 아니죠. 지금 생각나는 게 그런 거지만 평소엔 다 잘 먹잖아요. 그럼 ‘과일고기밥’ 이렇게 다 이어 붙일까요?”

“…죽 다 식겠다.”

말로는 못 당하겠는지 강세헌이 죽을 가리켰다. 태서가 의기양양하게 죽을 떠서 입에 넣었다가 뜨거워 그대로 뱉어 버렸다.

강세헌의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이면서도 열심히 죽을 먹는 태서가 눈을 내려 제 감정을 숨겼다.

‘정말 서다래가 그런 걸까?’

목숨은 위험하지 않지만 페로몬으로 공격을 받은 거라던 진규민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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