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태서씨도 그렇고 아기도 괜찮아. 네가 오면서 페로몬을 풀어 준 게 큰 도움이 된 거 같다.”
태서가 검사실에서 나온 지 반나절이 지났다. 그사이 진규민은 하나둘 나온 결과를 통해 태서의 상태를 정확히 확인하고 나서야 강세헌을 찾아왔다.
진규민이 팔짱을 낀 채 창문 너머 잠이 든 태서를 바라보았다. 강세헌이 그를 병원으로 데려온 후 많은 일이 있었지만 태서는 단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강세헌의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런데 왜 깨어나지 않지?”
“시간이 필요해. 마음 놓고 기다려. ……그게 쉽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기를 가진 오메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을 놓을 순 없을 것이다. 당장 자신이었어도 빨리 눈을 뜨게 해 달라고 다그쳤을지도 모른다. 진규민이 강세헌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 물러났다.
“아, 그 아기…….”
진규민이 깜박한 게 있다는 듯 돌아섰다.
“잘 크고 있던데 태명이 뭐야?”
“…….”
“아니… 그냥 아기라고만 하는 것보단 태명을 불러 주고 싶어서. 내가 삼촌이잖아.”
진규민이 나름 가벼운 말을 건넸다가 대답 없는 것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조용히 물러섰다. 아직 태명이 없구나, 하긴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아기가 생겼는데 모든 게 서투르겠지.
“정하면 알려 줘. 진짜 간다.”
진규민이 성큼 멀어지자 혼자 남은 강세헌이 다시 입원실로 들어가려고 몸을 틀었다 멈췄다. 다시 몸을 돌려 창문으로 태서를 바라보는 강세헌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을까.”
아침까지만 해도 연락이 되던 애인이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피가 차갑게 식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전화 하나로 제대로 경험했다. 강세헌은 태서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핸드폰을 들었다.
“태서에게 벌어진 일을 조사해 와요. 아주 작은 일이라도 샅샅이 모아 와야 합니다.”
비서의 대답을 듣기 전에 핸드폰을 내린 강세헌이 병실 문을 열었다. 병실 안으로 들어가는 강세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웠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태서의 앞에 다다른 강세헌이 가만히 서 있다 손을 뻗었다. 태서의 얼굴로 향하는 손은 금방 닿을 것처럼 거리를 좁혔지만 정작 얼굴에 닿기 직전 멈췄다. 태서의 눈 위를 머무는 손가락이 까딱하더니 다시 물러났다. 제 손가락이 만들어 내는 그늘에 태서의 표정이 달라지는 걸 확인한 강세헌이 고개를 들었다.
밖의 환한 빛이 태서의 얼굴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눈이 부시면 일어나야지.”
왜 그리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눈을 뜨지 못하는지. 강세헌이 침대를 돌아 창문으로 다가갔다. 블라인드를 내려 빛을 차단한 강세헌이 태서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빛이 사라지니 그의 얼굴이 미세하지만 편하게 바뀌었다. 잠을 자는 것만 같이 굴고 있으니 강세헌이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그래, 푹 자고 일어나라.”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어나라. 그거면 된다. 태서의 앞으로 돌아와서 앉은 강세헌이 손가락으로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보드라운 살결이 손끝을 간지럽혔다.
***
“이렇게 보니 진짜 어리네.”
평소엔 워낙 예상하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당황하게 되어서 그런지 태서의 얼굴을 이렇게 오래,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많지 않았다. 지금은 마음껏 들여다봐도 괜찮았다. 3일이 지나도록 잠만 자고 있으니 강세헌이 하는 일은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 거였다.
그가 턱을 괴고 태서의 얼굴을 감상했다. 곧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으니 내년 즈음엔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러면 자신보다 한창 어린 신입 사원이 되는 건데…….
“어린데 왜 날 어려워하지 않지?”
회사 사람들은 전부 강세헌만 만나면 몸이 굳어 버렸다. 하물며 사촌 동생도 자신에게 말 한 번 거는 걸 어려워했는데 태서는 아니었다. 제가 어떻게 방에 있는지 어떤 일이 있는지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전화번호를 달라고 할 때도 참 당당하고 뻔뻔했는데 제집에 잠시 얹혀살 때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집주인의 눈치도 보지 않고 참 편하게 지냈다. 그때 태서가 어떻게 굴었는지 떠올린 강세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명인 건가? 아니면… 네가 그랬을까?”
우연이 겹쳐서 운명이 된 건지 아니면 우리의 아기가 태서를 보살피라고 제게 보낸 건지 모르겠다. 어떤 것이든 강세헌은 태서를 제 사람으로 들이고 그와 함께하는 순간을 차츰 늘려 갔다.
태서와 있는 동안 단 1분도 쓸모없는 시간이 없었다. 태서와 있으면 무엇을 하더라도 지루하지 않았고 즐거웠다. 그리고 좋았다. 태서가 좋았다. 태서가 좋아서 모든 게 좋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네.”
마음에 든 상대로 태서가 처음이라고 했던 말. 그건 틀렸다. 마음에 든 정도 아니었다.
“내가 널 좋아하나 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걸 이제야 알고 형도 참 둔하네요.”
태서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병실이었다. 강세헌이 태서의 얼굴을 훑었다. 여전히 눈은 꾹 감겨 있지만,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윤태서.”
정신 차린 거라면 어서 눈을 떴으면 좋겠는데.
“정신 차린 거야? 응?”
강세헌이 윤태서의 이마를 만지고 볼을 만져 댔다. 태서의 체온은 여전히 따뜻해서 정신을 차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강세헌은 계속 만지고 또 만져 댔다.
“태서야.”
분명 자신을 향해 말을 걸었으니까 깨어난 건 맞는데 다시 말이 없었다. 몇 번이고 깨어난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강세헌은 계속 태서를 불러 댔다.
“눈 좀 떠 봐. 태서야.”
다시 정신을 잃었나 싶어 강세헌이 태서의 볼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아까 태서가 무슨 말에 반응했더라.
“좋아해, 좋아해. 태서야.”
이내 긴 속눈썹이 천천히 올라가며 그토록 보고 싶었던 눈동자가 드러났다.
“하아.”
태서가 눈을 가물거리며 흐릿한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몇 번 더 눈을 깜박이자 일렁거리던 천장이 점차 제 모습을 찾아갔다.
천장을 보니 제 방이 아닌 건 알겠는데 그 외에 아는 게 없었다. 정신을 차렸는데 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목이 타 버릴 것처럼 같은 괴로운 와중에 태서는 아까처럼 다시 미소를 지었다.
“누워서 고백받고 나 진짜 특이한 경험했어요.”
힘없이 색색거리면서도 말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태서가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한 강세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규민이 괜찮다고 했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태서가 눈을 떴다.
“걱정하지 마. 일어나면 또 할 거야.”
강세헌이 태서의 머리를 넘겨 주었다. 훤한 이마가 드러나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오니 강세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서가 정신을 차렸다. 호출 벨을 누르면서도 강세헌은 몇 번이나 태서가 정신이 든 걸 확인했다.
“계속 눈 감고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진작 좋아한다고 할 걸 그랬네. 주문을 너무 늦게 외웠어.”
태서가 목이 말라 하는 걸 알아챈 강세헌이 그의 입가를 젖은 수건으로 톡톡 두드렸다.
“목말라?”
“네, 그런데…….”
태서가 제 입술을 핥아 물기라도 가져가겠다는 듯하면서도 눈동자를 굴리는 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아기는 괜찮아.”
“어떻게 알았어요?”
“너에 대한 건 다 알아.”
태서의 손이 배를 어루만지고 있는데 어떻게 모를까. 그러나 강세헌은 굳이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럼 저 여기 어떻게 왔어요?”
“내가 데려왔어.”
태서가 어떤 걸 궁금해하는지 알기에 강세헌이 나직이 설명해 줬다. 태서의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는 도우미의 전화를 받자마자 병원으로 데려왔다고.
“윤 대표님이 처음부터 대비해 두신 거야. 너한테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생기면 나한테 연락하도록 말이야. 한 비서도 알고 미리 차를 준비해 놓은 덕분에 내가 너를 안고 직접 운전할 필요도 없었어.”
도우미가 강세헌에게 연락했고 태서의 운전을 해 주는 한 비서는 미리 차를 대기시켰다. 모두 태서에게 유난스럽도록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연락할 테니까 너는 편히 쉬어.”
간호사가 들어오는 걸 확인한 강세헌이 돌아섰다. 당장 걱정하고 있을 태서의 부모님에게 전화하려고 핸드폰을 꺼내 들려다 손을 잡아 오는 손길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제 손끝을 잡아 오는 손을 따라 올라가니 태서가 강세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지 말아요.”
태서의 애원하는 눈빛에 강세헌이 그의 손을 빼내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아까 고백이 제대로 태서의 마음에 박힌 모양이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걸 보면. 아니면 쓰러지면서 제가 보고 싶었던 건지.
“……물 좀 주고 가요.”
그러나 뒤이어 나온 태서의 한마디에 강세헌은 기막힌 듯 웃고 말았다.
***
“곧 의사 선생님 오실 거예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괜찮아요.”
태서가 고개를 젓자 간호사는 필요하면 호출 벨을 누르라고 말하고 나갔다. 강세헌 역시 통화를 위해 밖으로 나가 태서는 눈을 뜨고 처음으로 혼자 남았다.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던 태서가 이불 안에 둔 손을 들었다. 육안으로 보이는 손의 떨림은 제가 이번 일에 숨겨 왔던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무서웠다. 다신 눈을 뜰 수 없을까 봐 무서웠다. 자신은 진짜 윤태서가 아니니까 혹시나 쓰러지면서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게 아니면 윤태서의 몸에서 튕겨 나오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한 혼자만의 비밀이 그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눈을 뜨지 못했던 거 같았다. 눈을 떴을 때 윤태서가 아닌 본래의 자신이 되어 있을까 봐.
-내가 널 좋아하나 보다.
그런 태서의 의식을 이끈 건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원래의 자신에겐 없는 연인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이제 마음 편히 눈을 떠도 된다고. 너는 돌아가지 않았고 여전히 윤태서라고 의식이 말해 줬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태서가 제 손끝을 오므렸다. 강세헌의 손을 잡았을 때 느낀 그 온기가 진짜였다. 자신은 여전히 윤태서이고 이젠 이 몸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갈 수 있을 거란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너도 그렇지?”
태서가 제 배를 어루만졌다. 제가 이 세상에 자리 잡을 수 있게 해 준 강세헌과 아기가 있어 든든했다.
“나 진짜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 거겠지?”
“나만 믿어.”
태서의 혼잣말에 병실에 들어선 강세헌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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