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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59화 (59/130)

59화

서다래를 만나는 게 아닌 척해도 심리적 부담감이 있었나 보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나 힘이 빠져 주저앉을 뻔했다. 병원에서 진단받은 건 아니지만 지금 제게 필요한 건 다른 게 아닌 강세헌의 페로몬이라는 걸 알았다. 핸드폰을 들어 강세헌의 번호를 눌렀다가 한숨을 내쉬며 팔을 떨궜다.

그도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무작정 그에게 와 달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태서가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려 보려고 하는데 점점 어지러움이 심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어머나, 태서 학생. 괜찮으세요? 얼굴에 식은땀이…….”

“더운데 걸어왔더니 땀이 났네요. 올라가서 쉴게요.”

“진짜 괜찮은 거예요?”

“쉬면 괜찮아져요.”

도우미의 걱정에 태서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괜찮다고 말하고는 계단 난간을 짚었다. 평소엔 난간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게 아니면 혼자 계단을 오르기가 버거울 것만 같았다. 몸에 힘은 점점 빠져 가는데 머릿속엔 바늘 수천 개가 한 번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제 심장을 꼭 쥐고 있는 것만 같아 태서는 빨리 제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중간에 한 번 휘청거렸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방으로 돌아온 태서는 침대까지 걸어갈 힘이 없어 앞으로 엎어졌다. 서다래와 헤어졌을 때, 집까지 걸어올 때, 그리고 도우미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눌 때 점점 몸 상태가 달라졌다. 이젠 계단 하나 올랐을 뿐인데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온몸을 쥐어짜고 있었다.

“왜 이러지.”

숨을 쉬는데도 답답하고 바닥을 짚고 있는데도 몸이 붕 뜨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 보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정신이 멍해지고 있었다.

“몸이… 아파.”

이제 단순히 쉰다고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이 아픔이 사라질 거 같지 않았다. 임신하고 이런 적은 처음이라 태서는 덜컥 겁이 났다. 이전처럼 입맛이 없거나 그냥 힘이 없는 거라면 좋겠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버거워지고 있었다.

“…형.”

강세헌이 보고 싶었다. 지금 그가 필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강세헌, 그가. 형이.

태서가 제 옷을 더듬었다. 어디에 넣어 뒀는지 분명 기억했는데 지금은 떠오르지 않았다. 더듬더듬 손끝에 억지로 힘을 줘서 옷을 뒤지니 그제야 단단한 물체가 매만져졌다.

핸드폰을 찾자마자 주머니에 손가락을 넣는데 이젠 온몸이 다 아파 왔다. 피부나 뼈가 아픈 게 아니었다. 그냥 아팠다. 태서는 제 얼굴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훔칠 새도 없이 핸드폰을 들었지만… 한계에 부딪히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서다래가 뒤늦게 표정을 바꿔 보지만 이미 강인혁에게 감정을 들키고 말았다.

“너…… 표정이 왜 그래?”

“그냥 피곤해서.”

서다래가 손등으로 제 볼을 대충 훔쳤다. 그런다고 나아지는 것도 아닌데 괜히 멋쩍은 탓에 그랬다. 그리고 강인혁에게 제 표정을 숨기고 싶은 마음에 그랬는데 그럴수록 더욱 평소와 다르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

“아침부터 어딜 다녀왔어?”

“그냥… 돌아다녔어.”

“왜?”

“답답해서.”

서다래가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며 일어났다. 이제 더는 강인혁에게 제 혼란을 들키면 안 되는 거였다.

“나는 방에서 쉴게. 아침부터 무리했더니 피곤해.”

“그런데 다래야.”

강인혁의 부름에 돌아선 서다래가 얼음이라도 된 듯 굳어 버렸다. 평소엔 달콤하게만 들려 왔던 그의 목소리가 오늘은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서다래는 천천히 돌아섰다.

“오늘따라 이상하네.”

“뭐가 이상해.”

“왜 내 눈을 못 봐?”

허를 찔러 오는 그의 말에 서다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강인혁과 눈을 마주쳤을 때 제 성급한 행동에 후회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네가 내 눈을 피하는 거 처음이네. 마치 나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생긴 것처럼.”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너한테 무슨 비밀이 생겨.”

서다래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에게 들킬 순 없었다. 제가 태서에게 벌인 짓을 안다면….

“윤태서.”

그러나 강인혁의 입에서 윤태서가 언급되는 순간 서다래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져 버렸다. 이제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지을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태서 만나고 왔잖아.”

“그걸 어떻게 알았어?”

“오늘 아침에 네가 나가는 거 봤어. 그냥 볼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오는 거라 생각했는데 네 표정이 너무도 굳어져 있어서.”

“그래서?”

서다래가 설마, 하는 눈으로 강인혁을 응시했다. 제가 아침에 나가는 걸 보고 그다음이….

“따라갔어.”

“…날…… 날 따라왔다고?”

“그래. 네가 태서를 만났고 대화를 나누다가 나오는 걸 봤어. 네가 일부러 태서에게 몸을 부딪친 것까지.”

강인혁은 평온하게 말을 내뱉었는데 서다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을 부르르 떨어 댔다. 그는 아예 강인혁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려 발을 뒤로 밀었다. 그러나 문에 닿아 물러날 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네가 태서를 만나고 왔다고 하면 나도 더 물을 생각이 없었어. 태서도 너한테 할 말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래서 둘이…….”

“윤태서.”

서다래가 강인혁의 말을 끊었다. 어느새 서다래는 침착하게 제 모든 표정을 다 거둬 내고 아무 감정 없이 강인혁을 바라보았다.

“늘 윤태서라고 불렀잖아. 그런데 계속 태서라고 하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거 같은데. 대체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윤태서가 나한테 할 말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 사과하려고 했다는 거?”

강인혁에게 모든 걸 숨기려고 했던 서다래가 허탈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동안 벌였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너한테 사과했다더라. 나한테도 사과해 왔어.”

서다래가 솔직히 인정했다. 이건 굳이 숨길 것도 없었다. 다만 강인혁과 말하면서 마음속에 울분이 점점 더 차오르는 건 아직 혼자만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태서를 만난 걸 왜 감추려는지 모르겠네.”

“그냥… 내가 윤태서를 만난 것 자체를 언급하기 싫었어. 인혁아, 나는 네가 윤태서의 이름조차 꺼내는 게 싫어.”

서다래가 고개를 저으며 칭얼거렸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제 슬픈 감정은 충분히 강인혁에게 닿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되돌아온 말은 서다래를 배신했다.

“말 돌리지 말고 어서 말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아니면 무슨 짓을 벌였어?”

“지금은 윤태서가 아니라 나를 봐 주면 안 돼? 그러면 내가…….”

“다래야.”

“나부터야. 인혁아. 너는 나부터 챙겨야지.”

답답하리만치 빙빙 돌고 도는 대화에 결국 강인혁의 인내심이 끊겨 버렸다.

“서다래!”

“확인하려고 했던 것뿐이야.”

강인혁의 높은 언성에 서다래가 똑같이 소리 높였다.

“진짜 오메가인지 확인하려는 것뿐이었어.”

“서다래, 너…….”

“오메가라며. 그런데 너 걔 페로몬 맡아봤어? 정말 걔가 오메가가 맞대?”

서다래가 보란 듯이 제 페로몬을 방출했다. 순식간에 공간을 가득 채우는 페로몬에 강인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서다래를 바라보았다.

“오메가라면 이렇게 페로몬이 나와야지. 그리고 그 페로몬이 맡아져야지. 그런데 어떻게 윤태서가 오메가야? 정말 오메가가 된 거 맞냐고.”

“페로몬 걷어.”

“왜? 네가 좋아하는 페로몬인데 왜 없애야 해?”

서다래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강인혁의 주변에 제 페로몬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으니 만족감이 올라왔다. 그래, 강인혁은 늘 제 페로몬을 좋아했고 제 페로몬을 몸에 두르고 다녔다. 그러니까 그에게 묻은 오메가의 페로몬은 제 것 하나였다.

그런데 왜 맡지도 못한 태서의 페로몬이 강인혁의 몸을 두르고 있는 것만 같은지…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진 서다래가 미소를 지우고 강인혁을 노려봤다. 왜 윤태서를 태서라 부르고 자신을 서다래라고 하는 거지?

“오메가라면 알파의 페로몬에 어떻게든 반응하니까 그래서 그랬어.”

“그걸 왜 네가 확인하려는 건데.”

“그럼 네가 할 거야? 네가 가서 태서야, 너 오메가니? 그럼 나랑 약혼하자. 이럴래?”

서다래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더니 급기야 비명처럼 날카롭게 울려 댔다. 그게 서다래의 절규처럼 느껴졌지만 강인혁은 아무것도 못 느끼는 듯 무심히 서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서다래를 다그치듯 몰아세웠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한 건데?”

“알파의 페로몬을 느끼게 해 줬을 뿐이야. 그런데 한두 사람의 페로몬으로는 부족할 거 같아서 특별히 많이 모아 왔어. 세상에……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만 했는데 나 같은 사람이 많나 봐. 그런 물건이 있더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알파의 페로몬을 오메가에게 노출시킨다는 것. 특히나 많은 양의 페로몬에 노출시키는 건 그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을 억지로 끌어 올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즉 서다래는 나라에서 금지되고 있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강인혁이 서다래를 노려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갔다. 지금은 서다래를 다그치는 것보다 위험에 빠진 태서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강인혁이 나가고 혼자 남은 서다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메마른 듯 눈물 하나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은 너무도 서러워서 눈물이 볼을 적실 정도로 흘러내렸다.

“걔는 되고 나는 왜 안 돼? 걔도 나한테 약 먹이려고 했잖아. 그런데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서다래는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흐느낌과 함께 중얼거리는 소리는 안타깝게도 강인혁에게 닿지 않았다.

“윤태서는 다른 사람한테 가 보라고 해도 되는 거잖아. 너는 나를 위로해 줘야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내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줘야지.”

그렇게 가 버리면 우리의 사이는 어떻게 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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