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태서가 손톱으로 유리잔을 톡톡 두드렸다. 손끝에서 울려 오는 진동과 맑은 울음이 어색한 분위기에 그나마 귀를 기울일 만한 소리였다.
“내가… 갑자기 불러서 놀랐어?”
앞에서 들려온 물음에 태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저와 마찬가지로 제 잔을 만지작거리는 서다래가 있었다. 어제 방으로 올라온 태서는 서다래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고 길게 끌 것도 없이 아침 일찍 카페로 와서 그와 마주 앉은 참이었다.
태서는 제 앞에 있는 에이드를 보았다. 예전에는 제법 상큼해서 먹을 만했던 거 같은데 오늘은 시기만 하고 맛이 없었다. 잠깐 에이드를 바라보던 태서가 서다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니, 나도 한 번은 너한테 연락하려고 했었어.”
“왜?”
“뭐?”
“…왜 나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분명 서다래가 불러서 만난 건데 태서가 만나고 싶었던 이유를 말해야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어차피 해야 할 말이니 굳이 피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그동안 너를 많이 괴롭혔어.”
이제 윤태서라는 인물의 과거를 모두 감당하기로 한 태서는 이전처럼 억울해하는 기색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는 서다래가 약을 먹기 직전에 윤태서가 된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내가 괴롭히는 입장이었으니까 다 기억하지 못해. 그래서 너한테 더 미안한데… 아예 잊지는 않았어. 네게 나쁜 말 했던 것도 기억하고 네게 하지 말아야 할 짓도 벌이려고 했어.”
“윤태서, 너…….”
“그래서 너한테 미안하다고 했는데 진심으로 사과하진 않았던 거 같아.”
태서가 서다래의 표정을 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과거의 윤태서는 제가 오메가가 되지 못한 열등감과 강인혁이 서다래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나쁜 짓을 벌였다. 서다래가 사과를 받아 주기 싫다고 하면 태서로서는 억지로 받아들이라고 할 수 없는 거였다.
서다래가 사과를 받아 주지 않는다고 제가 벌인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태서는 서다래가 몰랐던 파티의 일까지 순순히 털어놨다.
“그때 샴페인에 약을 탔었어. 내가 너 먹이려고 그랬고 뒤늦게 그러면 안된다는 거 알아서 가져갔던 거야. 미안해.”
“…너 진짜 변했구나.”
서다래가 놀란 듯 말했다. 면피성 발언이 아닌 진짜 마음이 담긴 사과였다. 절대 자신한테는 사과하지 않을 줄 알았다. 차라리 그의 돈 많은 부모님에게 기대거나 모른 척 발뺌할 줄 알았다.
“내가 너를 잘 못 봤던 걸까? 아니면 이게 네 본성인 걸까?”
서다래의 중얼거림에 태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본성이 달라진 거라 말하면 믿을까?
“그런데 나는 아직 널 못 믿겠어. 그리고 네 사과가 진짜라고 해도 용서가 안 돼. 너는…….”
서다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욱하다가 제 입술을 깨물었다. 억지로 말을 끊어 낸 것만 같은데 태서가 계속 바라보고 있어도 서다래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계속 말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라 태서가 더는 기다리지 않고 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바로 용서해 달라고 안 해. 지금 당장 어떻게 하라는 게 아니니까 부담스러워하지 마.”
“그런다고 내가…… 지금 너를…….”
서다래가 계속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태서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만큼 제가 한 말이 그의 말문을 막아 버린 건지 되새겨 보는데 서다래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네가, 네 존재가 자꾸…….”
“잘 안 들려. 뭐라고?”
“아니야.”
서다래가 고개 젓는 것을 본 태서는 더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빨대로 에이드를 휘저었다. 얼음이 녹아서 처음 나왔던 것과 다름없는 양이 되었다. 아까는 너무 시큼해서 싫었다면 지금은 밍밍할 게 뻔해 끌리지 않아서인지 태서는 빨대만 휘저을 뿐 더 입을 대지 않았다.
“혹시 할 말은 뭐야?”
이제 서다래 차례였다. 그가 무슨 일로 자신을 불렀는지 듣고 나면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고 싶었다.
“네 말을 듣고 나니 할 말이 없어졌어. 미안해.”
“……그래.”
박한수였다면 뭐냐고 다시 물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서다래라는 이유로 태서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제가 괴롭혔었던 입장이라지만 보고 있기에 불편한 사이. 아마 서다래도 어떤 생각이 있어 보자고 했지만 금방 후회했을 것이다. 아무리 미안하다고 해도 이전의 일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럼 일어나자.”
태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니 서다래 역시 잠깐 머뭇거리다 따라 일어났다. 아까 말이 계속 끊기던 시점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제껏 서다래는 제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한 건 부딪혀 왔었다. 그게 서다래가 버티는 방법이라는 걸 알기에 지금과 같은 행동은 의외로 여겨졌다.
아니면 제가 이전과 다르게 그를 괴롭히지 않아서 그런 걸까?
소설을 읽을 땐 그의 심리가 적혀 있어 파악하기 쉬웠는데 지금은 어떤 생각인지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뿌연 안개 속에서 길을 찾는 것만 같은 기분에 태서는 그의 생각을 짐작하기를 포기했다.
“참, 인혁이…….”
헤어지기 전에 말해야 할 것 같아 강인혁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서다래의 몸이 흠칫 튀어 올랐다. 그게 태서가 당황할 정도로 너무 적나라해서 운을 떼고도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서다래가 복잡한 눈빛으로 땅을 헤집다가 태서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정작 인혁이라고 말해 놓고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니 서다래의 인내심이 먼저 닳아 버렸다.
“……인혁이가 왜? 둘이 또 만났어?”
“인혁이가 찾아와서 만나긴 했는데…….”
일단 물어봐서 대답했지만 그건 태서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 전에 우리 과제 끝난 날 걔한테도 사과했어.”
서다래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둘이 잘 만나. 나 이제 못나게 굴지 않아.”
이제 둘은 둘만의 로맨스를 써내려 가면 될 일이었다.
“인혁이가 널 많이 좋아하니까 잘해 봐.”
쓸데없는 소리였나 싶지만 그냥 한 번쯤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강인혁이 너 따위를 좋아한다고? 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응원이었다. 악역이었던 윤태서가 처음으로 강인혁과 서다래의 사이를 축복해 주는 말이었다.
물론 서다래가 웃으며 받아 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길게 말이 없으니 외려 태서가 더 민망해지고 있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뭐? 아, 응. 인혁이가 널 좋아하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잖아.”
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다래가 제 말을 믿을 거라 여기진 않았다. 그래서 상관없었다.
“안 믿어도 돼. 어차피 이제 학교에서도 날 볼 일이 없을 테니까…….”
“너 혹시…….”
서다래의 물음에 태서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서다래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서다래가 헷갈린다는 듯 태서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예전이랑 달라졌어?”
“같은 말을 계속하네. 나 예전의 윤태서가 아니라니까.”
“정말 달라진 거지?”
서다래의 혼잣말과 같은 물음에 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달라진 거야? 아니면….”
대화가 쳇바퀴처럼 처음으로 돌아온 듯한데 어딘가 느낌이 달랐다.
“그만 물어봐도 될 텐데…….”
제 속을 까뒤집을 수도 없으니 태서는 서다래를 설득하는 것을 그만두고 핸드폰을 들었다.
강세헌에게 메시지가 온 것을 힐끗 확인한 태서는 그만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들 때였다.
순간 서다래와 부딪힐 뻔한 태서가 뒤로 물러났다. 서다래가 무작정 입구로 나가려던 탓에 통로에 선 태서가 걸림돌이 되어 버렸다.
온전히 서다래를 피하지 못하면서 둘의 몸이 부딪혔다. 서다래의 몸이 기울어지며 어깨에 가슴이 찍힌 태서는 순간 심장을 조여 오는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 통증은 금방 사라져 버렸다. 태서가 숨을 한 번 들이켜며 가슴이 뻐근한지 확인하고는 서다래를 돌아보았다.
자기가 휘청거렸으니 자기보다 작은 서다래가 더 충격받았을까 걱정해서 그랬다. 서다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제 옷을 부여잡고 있는 걸 본 태서가 그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
“……갈게.”
서다래가 태서의 팔을 쳐 내며 숙였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먼저 카페를 걸어 나가는 서다래는 위태롭게 휘청거리면서도 용케 쓰러지지 않고 나갔다.
자신과의 대화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태서는 서다래를 부축해 주고 싶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지만 이내 모든 걸 포기했다. 서다래를 잡아 주는 건 제 역할이 아니었다.
***
쓰러지려는 걸 억지로 버티며 돌아온 서다래가 문고리를 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정리되도 힘이 돌아오지 않아 서다래가 문에 기대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다리를 끌어모아 제 얼굴을 묻은 서다래는 더욱 몸을 웅크리고자 머리를 부여잡았다. 마치 제 잘못을 알고 있는 누군가로부터 숨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는 그냥 알고 싶어서…… 그래. 그것뿐이야. 그것뿐이니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없는 거야.”
서다래는 쉬지 않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군가 자신을 경멸할 것만 같았다.
“지금껏 계속 당해 왔잖아. 사과 한 번 받았다고 다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지금 인혁인 내가 아니라…….”
서다래의 죄책감 가득하던 표정이 사라지고 누군가를 향한 원망이 서서히 차올랐다.
“윤태서를 좋아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다래의 질끈 감겼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제 앞에 있는 두 다리를 보다가 부들거리는 손을 내렸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서다래는 악마를 본 것만 같은 공포에 벌벌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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