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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54화 (54/130)

54화

미팅을 마치고 나온 강세헌의 뒤로 비서가 한걸음 빠르게 다가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강세헌이 먼저 올라타고 비서가 뒤따랐다. 이내 문이 닫히고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비서가 핸드폰을 보더니 강세헌에게 방금 전달받은 내용을 공유했다.

“원하전자에서 KH유통망을 이용하려던 생각이 맞았습니다.”

“그래. 그게 아니었다면 원하가 순순히 손을 잡을 리 없지.”

왜 원하전자가 작은아버지의 손을 잡았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원하전자가 내건 조건이 뭔지 고민하던 강세헌은 제 생각이 맞는지 비서를 보내 알아 온 참이었다. 강세헌이 예상한 조건이 제대로 들어맞았다는 걸 안 비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비서의 물음에 강세헌은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걸 응시한 채 담담히 중얼거렸다.

“원하전자에는 없는데 KH마트에는 있는 것. 원하전자가 사업성이 없는 프로젝트를 받아 주면서까지 KH마트에 탐이 나는 것. 그렇게 치면 뻔하잖아.”

강세헌의 친절한 설명에 비서가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전자가 계속 우리한테 밀렸던 가장 부족한 부분, 이 나라에 깔린 거미줄이 필요했던 거야. 그걸로 생각해 둔 신제품을 깔 생각이겠지.”

“그렇다면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글쎄. 작은아버지가 그리 밀어붙이시는데 막을 수 있을까?”

강세헌이 불가능할 거라며 미리 포기했다. 호텔 로비로 나온 강세헌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밝히며 제게 온 연락을 확인하는 강세헌의 뒤로 비서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말했다.

“이번에 원하에서 나오는 신제품이 KH에서 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홍보를 하느냐에 따라 점유율이 달라질 수 있을 텐데 이대로 두고만 봐도 괜찮을까요?”

강세헌이 이번에 진행할 핸드폰에 하나의 신기술을 도입했지만 그건 원하도 마찬가지였다. KH가 유독 뛰어나게 기술적으로 앞서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서의 걱정은 당연했다.

비슷한 물건을 더 잘 팔기 위한 방법은 단순했다. 제 물건이 더 눈에 띌 수 있도록 비싼 돈을 들여 유명 연예인을 끌어들이거나 곳곳으로 물건을 보내 사람들의 눈에 띄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원하전자는 자신들이 깔아 두지 못한 유통망을 부러워했다.

“이번에 작정하고 날 누르고 싶은가 보네. 작은아버지도…… 원하도.”

뜻이 맞으니 둘이 손을 잡는 게 당연하지.

그들의 속셈을 들여다보는 강세헌은 언제나 그렇듯 태연하고 담담했다. 원하가 자신들의 유통망을 이용하든지 말든지.

“안 그래도 새로운 유통을 고민하던 참이었어. 언제까지 버스 노선도 아니고 정해진 길로만 다닐 거야.”

할아버지가 국내외 할 것 없이 평생을 걸쳐 깔아 놓은 망을 강세헌은 한물간 물건 취급했다.

“TF팀을 구성해.”

“알겠습니다.”

“각 부서마다 성과 좋았던 사원은 따로 추려서 올려놔.”

원하가 KH마트와 협력한다고 했을 때부터 구상한 게 있었는지 강세헌은 막힘없이 지시했다.

“시기는 3개월, 장소는…….”

로비의 한편에 자리한 카페.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강세헌의 말끝이 흐려졌다.

계속 작은아버지를 떠올려서 그런지 작은어머니가 떡하니 눈앞에 나타났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까 고민했지만 강세헌의 선택과 무관하게 상황은 정리되었다.

“이쪽이야.”

한미순이 강세헌을 향해 팔을 흔들더니 제 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원하전자가 강세헌을 눌러 보겠다고 작정하고 덤비는 건 담담하게 굴었으면서 정작 작은어머니를 마주하니 세상 피곤한 듯 한숨 쉬었다.

“아직도 나한테 바라는 게 남으셨나.”

강세헌의 혼잣말을 들은 비서는 모른 척 거리를 벌렸다. 강세헌이 내키지 않은 걸음을 옮겼다. 한미순의 앞에 앉은 이는 뒷모습만 보여 누군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

“일하는 중이었니? 미팅?”

“네, 작은어머니께선 여기 무슨 일입니까?”

“나야 반가운 얼굴을 만나서 대화하고 있었지. 아 참, 서로 아는 사인데 인사 나눠. 둘이 오랜만이지?”

한미순의 다소 높게 올라간 톤이 부자연스럽게 들리는 건 강세헌만이 아닐 것이다. 한미순의 맞은편에 자리한 이가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강세헌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다니, 참 단순한 분이다.

“오랜만이야, 오빠.”

정해진의 인사에 강세헌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간단한 인사만으로도 서로를 향한 관심의 농도가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자신을 부른 목적을 알았으니 일이 있다고 벗어나지도 못하겠다. 그런데 어디에 앉아야 할까. 강세헌은 한미순의 옆과 정해진의 옆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분위기상 정해진의 맞은편에 앉아야겠는데 그러면 작은어머님과 나란히 앉아야 한다.

“왜 그렇게 서 있어. 어서 와서 앉지.”

한미순이 강세헌의 고민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정해진을 보고 연신 반가운 티를 냈다.

“우리 세헌이랑 몇 년 만에 만나는 거지? 2년? 3년?”

“6년이요.”

“그래? 벌써 그렇게 됐구나. 시간이 참 빠르네. 그때도 해진이 참 예뻤는데 지금은 더 예뻐졌어.”

“감사합니다.”

한미순이 예전을 떠올리며 그래, 그랬지. 중얼거리는 사이 강세헌이 자리에 앉았다. 한미순의 옆자리이면서 동시에 정해진과 마주하는 자리였다.

보기 싫은 사람과 나란히 앉는 건 싫은데.

“세헌이도 해진이가 보고 싶었다더라. 하긴 너희 사이 좋았었으니 더 말해 뭐 해.”

제가 정해진을 보고 싶었다고 했던가? 강세헌은 제 대변인을 자청하는 한미순을 말려야 하나 싶었지만 그냥 놔두었다.

“옛날 일인 걸요.”

“그래서 더 반가운 거지. 요즘 세상에 이런 사이가 얼마나 귀한 건데.”

한미순이 자처해서 주선자 역할을 톡톡히 하는 동안 강세헌은 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마저 연락을 정리했다. 정해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있으니 한미순이 깜박 잊은 게 있다는 듯 운을 뗐다.

“어머나, 내가 약속이 있다는 걸 깜박했네.”

한미순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부랴부랴 제 물건을 챙겼다.

“나는 그럼 일어날 테니 둘이 대화 나눠.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도 묻고. 알겠지?”

한미순이 의도적으로 자리를 만들려 한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굳이 그녀를 상대할 마음이 없는 강세헌은 가만히 있었다. 그만이 아니었다. 우연을 가장한 선 자리인 걸 알면서도 정해진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말리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봐.”

한미순이 정해진에게 눈으로 인사한 후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제가 어서 사라져야 둘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진다고 여기는 듯한 발걸음이었다.

한미순이 금방 로비에서 사라지니 수줍은 미소만 짓던 정해진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제껏 보였던 모든 표정은 거짓인 듯 당당하고 활기찬 기운이 가득했다.

강세헌은 한미순의 앞에서 얌전하게 굴던 정해진의 달라진 태도에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원래부터 그런 애라는 걸 알고 있었던 듯.

그녀는 아까보다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얼굴 보기 힘든 거 알아?”

“내 얼굴 봐서 뭐 하게?”

“사람 서운할 소리 잘하는 건 여전하네.”

정해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하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야속하네 정말.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오빠를 만나야겠어? 내가 오빠 만나려고 몇 시간을 날아왔는지 알아?”

“도로 날아가.”

“오빠!”

정해진이 너무한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주변에서 무슨 일인가 바라보는 시선에 강세헌은 귀찮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너 이 자리가 왜 만들어졌는지 알아?”

“알지 왜 몰라. 한 여사님이 나보고 오빠랑 잘 어울릴 거 같다는 말만 몇 번 했는데. 우리 둘 이어 주려는 거잖아.”

“그러면서 이 자리에 나왔어?”

“어.”

정해진이 허리에 힘을 풀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다리까지 꼬고 고개를 돌린 그녀는 호텔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남자는 많은데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상대는 소수거든.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소수가 마음에 들지 않다는 거야. 얘는 나한테 바라는 게 많아서 싫고 쟤는 내가 무섭다고 떠니까 싫고.”

“그래서 외국으로 나갔잖아.”

강세헌이 핸드폰을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애초 정해진이 외국으로 나간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한미순이 그녀를 끌어들일 때도 별반 반응하지 않았다.

“외국에 나가면 뭐 해. 밖에 있어도 계속 결혼할 상대에 대한 정보가 날아오는데 차라리 적당한 상대 잡아서 결혼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들어왔어. 그 상대로 강세헌이면 최고인 거고.”

“나를 방패막이로 삼겠다?”

강세헌의 비릿한 미소에 정해진이 재밌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이미 성격도 알고 있겠다, 배경 좋아서 나한테 바라는 것도 없겠다. 거기다 오빠가 누구를 좋아할 사람도 아니니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거 같아서 넌지시 마음이 있다고 표현했지.”

“뻔뻔하네.”

“그래서 오빠는 어떤데?”

정해진이 강세헌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아예 꼰 다리에 올려놨던 손을 들어 턱까지 괴니 영락없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있는데 강세헌에게 어떤 말이 들려오지 않으니 정해진은 다시 한번 직접적으로 질문해 왔다.

“오빠 상대로 나 어떠냐고,”

그제야 강세헌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막 대답하려는 찰나, 그의 앞으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태서는 강세헌의 앞에 나타난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정해진의 옆에 앉았다. 갑작스럽게 난입한 태서의 뻔뻔한 태도에 정해진이 당황해서 그를 밀어 낼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온 태서는 강세헌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미래랑 있을 때 이런 기분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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